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29화 (129/384)

EP.129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1

무저갱의 밑바닥에는 물이 있다.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조금 끈적한 질감의 물이다.

내가 직접 겪어서 아는 거다. 반박하려면 무저갱 밑바닥 밟아 보든가.

그렇게 세기의 대발견을 했지만, 그래도 사실보다는 사람이 중요한 법. 일단 인원부터 파악하기로 했다.

새카만 어둠을 향해 외쳤다.

“다들 무사하십니까! 번호! 하나!”

“둘!”

바짝 긴장한 칼리스가 가장 먼저 대답했다. 역시 군인. 아직 군대 물이 덜 빠졌구만.

“셋이오!”

다음은 상황을 잘 받아주는 불사자였다. 그걸 끝으로 고요가 찾아왔다.

조금 늦게 회귀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멀쩡해. 아지도, 나비도, 티르도.”

아니, 진짜.

“와, 여기서 번호를 안 불러? 눈치 더럽게 없네, 진짜! 분위기 안 맞춰요?”

“굳이 숫자를 말할 필요 없잖아! 다 멀쩡한 것만 알면 되는 거 아니냐구!”

그렇게 따지만 나도 독심술로 사람 다 읽고 있으니까 굳이 확인할 필요 없지!

짐승들이야 뭐.

“머, 멍….”

“냐하아….”

살아있으니까 됐네. 그렇지. 짐승의 왕이 그리 쉽게 떨어질 리 없지.

나는 회귀자를 윽박질렀다.

“우리가 안 보이니까 안심하기 위해서 확인하는 거 아니냐고요. 참나, 진짜. 우리가 바보라서 번호를 매기는 줄 알아.”

“기다려 봐. 내가 확인해볼 테니까…. 칠색안 오색, 청안 개안.”

순간적으로 푸른 빛이 회귀자의 눈동자에 맴돌았다. 나는 혼자 사기 기술로 시야를 확보한 회귀자를 마뜩잖게 보았다.

“칠색안 개안 같은 거 꼭 입으로 말해야 해요? 너무 유치하지 않아요?”

“정신을 집중하기 위함이야! 좀 말로 하면 어때서!”

“아니, 넷도 말 못 하는 주제에 칠색안 오색이라는 낯부끄러운 말은 잘만 하네. 중등학교 2학년이 걸린다는 그 병인가? 근데 중등학교도 안갔는데.”

“야! 주위를 살펴야 하니까 좀 조용히 해!”

발끈한 회귀자가 한껏 쏘아붙이고는 깊이를 보는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자, 어디. 이번에도 시점을 좀 훔쳐서 볼까. 네가 보는 것을 나에게도 보여봐라.

나는 그렇게 회귀자가 지금 보는 광경을 읽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뒤집힌 탄탈로스. 감옥 건물은 비탈 아래 처박혀 있고, 밧줄에 매달린 우리는 용케도 거꾸로 매달려 축축한 땅을 디디고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발을 디디고 있던 땅이 천장으로 바뀐, 말 그대로 천지가 뒤집힌 모습은 현실감이 없어서 꼭 우리가 추상화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만 보면 탄탈로스가 기울어지다가 밑바닥에 부딪혔나 싶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조금 전까지 저 아래 보였던 아득한 공허를 설명할 수가 없다.

애초에 밑바닥이 있었다면 거꾸로 뒤집히지 않고 기울어지는 선에서 멈추었겠지. 분명, 땅이 뒤집힌 순간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게 틀림없었다. 어쩌면, 무저갱에 밑바닥이 없는 것은 뒤집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일지도.

그렇게 알아보기 쉬운 천장을 다 살핀 회귀자가 밑바닥으로 시선을 던질 때.

“…어?”

무언가가 있었다.

먼발치에서 보기에, 그건 커다란 산처럼 보였다. 기울어진 탄탈로스보다 조금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으나 분명 정상과 능선이 존재하는 산이었다.

이 무저갱 아래 존재하는 완만한 산. 찰박거리는 물.

…그리고 발에 닿는 기이한 질감.

깊이를 보는 눈, 청안은 사소한 질감을 잘 구분하지는 못했으나…. 저 산을 이루는 구성요소는, 그런 청안으로 봐도 무언가 이질적이었다.

왜 보이는 바위에 하나같이… 손가락과 발가락처럼 보이는 다섯 개의 돌기가 달려있는가.

아, 아니다. 저건 바위가 아니다. 손가락처럼 보이는 돌기도 아니다.

이건.

“아우우우우우!”

아지가 울었다. 땅에서 펄쩍 뛰며 박쥐처럼 뒤집힌 탄탈로스에 발톱을 박고 달라붙었다. 땅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도 않다는 듯 맹렬히 짖으며 급하게 사람들이 묶인 지지대를 붙잡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 울음에 대답해주지 못했다.

그러기엔, 이 땅을 가득 메운 것에 압도되었으므로.

“…피, 구나. 이게 전부….”

굳이 전문가의 평가가 없어도 깨달았다. 지금 내 코는, 어느샌가 풍겨 온 혈향이 가득 차 있었으니까.

이걸 피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칼리스. 가만히 있으시오. 무언가 이상하오.”

불사자조차도 불길함을 느끼고 중얼거리던 때.

사라진 주간등 대신 야간등이 켜졌다.

저 멀리 땅을 파고든 채 처박힌 감옥이 희미하게 빛났다. 건물 곳곳에서 켜진 야간등의 흐린 빛이었다. 동시에 탈주자를 색출하기 위해 감옥 벽면에 붙어있던 탐조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샛노란 탐조등은 대지가 뒤집힌 것도 모르는 채, 충실하게 감옥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 형체를 쫓아 이리저리 흔들렸다….

동그란 빛이 미친 듯이 떨렸다.

미친 듯이.

“아아….”

누군가 탄성을 내질렀다.

어둠을 동그랗게 비추는 샛노란 빛, 그건 공포에 빠진 사람의 동공이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빛은 산 전체를 조망하고 싶은 것처럼 지그재그로 흔들렸다. 동그란 빛이 정처없이 방황했다.

그렇게 빛이 비치는 영역 전부. 하나도 빠짐 없이.

사람 형체가 있었다.

“30만의 학살, 패왕의 업…. 시산과 혈해로구나.”

오로지 큰 수로만 도달할 수 있는 참극이었다.

30만, 30만에 달하는 인간을 산 채로 구덩이에 내던졌다. 처음에 땅에 부딪힌 사람은 즉사했을 것이다. 아마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그만한 낙하를 겪었으면 죽었겠지. 어쩌면 1만까지는 그렇게 죽었을 수도.

사람이 충분히 쌓인 뒤, 고저 차는 줄어들고 아래가 살더미로 푹신해질 무렵.

그게 언제인지는 모른다. 아마 그 누구도 모를 거다. 그때 사람들을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었던 패왕조차도 관심을 갖지 않았겠지. 떨어뜨린 순간 생사여부를 신경 쓸 필요 없는 목숨이었을 테니까.

어쨌건. 그때.

누군가는 산 채로 시체의 산 위를 굴렀을 거고, 누군가는 미처 벗어나기 전에 위에서 쏟아지는 시체에 깔렸을 거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꺾였을지 모른다. 머리가 깨지고 비틀어진 팔다리에 고통스러워했을 테지. 30만을 던지는 도중 몇몇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 끔찍한 몰골이 되었을지도.

아우성과 비명, 절망과 공포. 떨어지는, 혹은 떨어뜨리는 사람을 향한 적의와 분노, 저주와 애원.

그렇게 하나, 하나, 하나, 하나. 죽은 사람 혹은 죽을 사람이 쌓였다.

그렇게, 30만이 쌓이며. 시체들의 산은 단순히 쌓인 시체 이상이 되었다.

겉으로는 시체의 산이나, 그건 어디까지나 바깥에서 보이는 광경.

쌓이고 쌓인 시체는 그 높이만큼의 압력을 만든다. 겉과는 달리 안쪽에 파묻힌 시체들은 형태도 알아보지 못하게 뭉개졌다. 그 피부와 옷 틈으로 걸러진 핏물이 쥐어짜이며 새로운 수원을 만들어냈다. 짓이겨진 육신에서 피보다는 체액에 가까운 액체가 흘러 얕은 바다를 이루었다.

왠지, 피치고는 소리가 맑더라니.

30만이라는 죽음만이, 그만한 규모의 학살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에 대한 모독이었다.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때, 방황하며 지그재그로 달려나가던 탐조등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직후 모든 탐조등이 가장 ‘사람다운’ 형체를 발견하고는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 끔찍한 시체들의 산 정상. 그 극점을 다섯 개의 빛이 조명했다.

벌레도 없으며, 곰팡이도 피지 않는 무저갱.

세상 모두와 격리된 공간에서 썩지도, 부스러지지도 않은 채.

1300년 동안 이어진 시산혈해의 꼭대기에.

한 여인이, 그 정상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 끔찍한 죄악을 참회하듯, 죽어간 모든 시체를 애도하듯. 손바닥을 펼쳐 무릎 위에 얹은 채로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지모신의 매장자가 취할 법한 자세에, 지선의 옷과 닮은 펑퍼짐한 사제복. 그녀의 오른손 손목에는 여섯 개의 고리가 차 있었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길게 풀어 헤쳐져 있었는데, 바람이 없어서인지 부스스하지 않고 옅은 윤기마저 나고 있었다.

그 시체의 손바닥 위에는 새까만 지팡이가 가로로 뉘어있었는데, 누가 보더라도 지모신의 도사 같은 모습이었다-

-배를 관통하고 있는, 십자가 쐐기를 제외하고는.

“십자가? 성황청의 상징이 왜 저기에…?”

숙적의 상징을 발견한 티르가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지모신의 지옥인 무저갱에 어째서 십자가가 있는지. 그 십자가가 왜 무덤의 극점에, 한 여인의 배를 꿰뚫고 박혀 있는 건지.

그 대답은 지선에게서 나왔다.

“오래전, 우리 지모신교에는 대종사가 있었소이다. 처음으로 대지술을 사용했다던, 모든 지모신도의 대종사.”

찰박, 찰박.

새카만 어둠 속 모두가 멈춘 곳에서, 지선은 홀로 걸어갔다. 피 찰박이는 소리가 발자국으로 남았다.

“패왕이 30만의 시체를 묻을 매장자를 불러모았을 때, 그곳으로 향한 매장자 대부분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지모신의 이름을 더럽히려는 떨거지였소이다. 시체를 노리고 맴도는 시체매 같은 비겁하고 비열한 놈들이었소이다…. 일부 제외하면 말이외다. 가짜 매장자들이 지모신을 모욕하는 일을 막기 위해, 대종사께서는 동료들과 함께 직접 그곳에 임하셨소이다.”

몇몇 헌신적인 지모신도 덕분에, 자격 없는 다수의 행패가 가려졌다. 그건 지금뿐만 아니라 그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승왕과 패왕이 서로 싸우던 시기는 지모신도의 성세가 가장 흥하던 시절이었다. 떨거지도 많았으나 참된 매장자도 많았고, 그들은 자격 없는 이들보다 부지런히 움직여서 전란을 겪은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게 그 시절 지모신앙이 유지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패왕은 시체를 위한 예식을 요구하는 지모신앙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지모신앙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싶어했을 정도로.

“소인은 지모신의 사원인, 가장 높은 산 중턱의 동굴을 방문하여 그 사실을 알아냈소이다. 대종사의 흔적은 그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말이외다.”

만일 자격 없는 이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려고 했다면, 패왕은 그 매장자들을 죽이면 안 되었다.

부장품을 몸에 걸치고 타인의 죽음으로 배를 불리는 모습을 온 천하에 보여야, 학살에 대한 분노를 지모신교에 떠넘길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패왕은 그러지 않고 매장자를 전부 죽였다. 그가 제 성질을 주체하지 못하는 폭군이어서, 도 틀리지는 않겠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포로를 묻은 누군가가 부장품을 마다했다든지. 누구도 비난하기 힘들 정도로 숭고한 모습을 보였다든지.

“다만, 얼뜨기 시체매들 따위가 사흘 만에 30만이 묻힐 거대한 구덩이를 파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소인이 가장 잘 알고 있소이다.”

공사의 규모에 비해 모인 매장자의 수는 적었고 기한은 너무 촉박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패왕이 그의 장병을 썼겠느니, 그렇게 추측했을 뿐.

하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종사께서 방해하였기에. 시체 냄새를 맡고 온 시체매들보다 먼저, 그녀의 권능으로 죽을 이들을 위한 무덤을 만들었기에. 대종사께서 모든 시체를 홀로 매장하였기에. 패왕은 자기 업보를 그대로 받게 되었소이다.

그리하여 목표를 이루지 못하게 된 패왕은…. 대종사를 비롯한 다른 매장자를 무참하게 살해하였소이다. 책임을 떠넘기지 못하게 된 그에게 있어, 세상을 떠돌아다닐 매장자들은 그의 추악함을 노래할 전령이나 다름없었으니.”

그게 지선이 찾아낸 무저갱의 비사였다.

지금껏 지선은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그녀만큼 지모신앙에 깊숙이 관련된 사람은 흔치 않았으므로.

“하지만, 아니었구려. 패왕은 대종사를 죽이지 않았소이다.”

그러나 이 순간, 무저갱 속에서 나타난 대종사. 그것도 십자가에 등을 찔린 채로.

그 시절 당시 천신교는 이간질할 가치도 없는 잡스러운 신앙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눈앞에 나타난 광경이 의미하는 건 하나뿐이었다.

“그녀를 죽이고, 모든 역사를 잊히게 만든 건 천신의 앞잡이들. 미래를 엿보는 비겁한 예언자들이었소이다. 승왕의 편에 서서, 패왕의 몰락을 부추긴 이들. 그들이었구려…. 우리를 몰락시키고, 대종사를 죽이며, 욕보인 곳이.”

저 시체의 산은 패왕의 작품일지 모르나.

이 무저갱과 더불어, 시체들의 산 위에 대종사가 십자가에 박혀 죽은 것은 다름 아닌 성황청의 작품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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