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0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2
간단한 결론이었다. 무저갱에 이른 건 그들이 처음이며, 이 광경은 누군가 조작할 수 없는 흔적이다.
즉, 지모신의 도사이자, 대종사라 불리던 이를 성황청이 살해했다는 것.
군국의 역사도, 불사자의 민간 설화도 틀렸다.
티르의 이야기가 가장 진실에 가까웠다는 뜻이다.
역시, 시간이 가장 역사를 크게 왜곡시키는 요소였던 건가.
아니면 군국이 역사책을 만들 때 참고한 자료 그 모두에 성황청의 입김이 들어갔을 수도 있고.
허탈한 듯, 분노한 듯, 대지 깊숙이 잠든 화산처럼 모든 울분을 안에 담은 지선은 터벅터벅 걷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럴 줄 알고 있었소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껴지는 덧없는 존재감…. 발에 땅을 붙이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의 냄새. 미래를 본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죄악을 정당화하려는 끔찍한 족속들만이 풍기는 것이지.”
지선의 앞을 막은 사람은 당연하게도 회귀자였다.
회귀자는 푸르고 붉은 눈을 빛내며 지선을 마주하고 섰다. 지선의 잔잔한 미소가 한층 인자하게 바뀌었다.
“이러한 비사를 들었음에도 나를 막을 셈이오까, 소년?”
비장한 각오를 두르고 지선을 마주하고 선 회귀자는, 그녀답지 않게 긴장한 듯 침을 삼키고는 물었다.
“…하나만 물어볼게.”
“무엇이오?”
“만일 이곳에서 그녀의 ‘유품’을 챙기고 지상으로 올라간다면.”
시체들의 산 정상, 여인이 손에 고이 들고 있는 새까만 지팡이.
그것을 가리킨 회귀자는 다시금 지선에게 물었다.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거야?”
지선은 묻지 않았다. 그 지팡이가 무엇이며, 회귀자가 그것을 어떻게 알아차렸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러려니 하며, 고개만 끄덕였을 뿐.
“당연한 것 아니겠소이까.”
새삼 당연한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지선은 미소를 한층 키우며 대답했다.
“성황청에 그 죄를 묻고자 하외다.”
담담한 선언. 종교라는 개념에 한하여, 명실상부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단체. 온갖 비사와 신비를 손에 넣은 집단, 성황청.
그들을 향한 지선의 선전포고에, 회귀자는 다시 되물었다.
“과거의 일이잖아.”
“현재의 성사이외다.”
“여럿이 죽을 거야.”
“그들이 죽인 만큼 죽지는 않을 것이외다.”
“너도 결국 죽을 거고.”
“두렵지 않소이다.”
이정도로는 설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회귀자도 알고 있었다. 대신, 회귀자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만일 그 일이, 더 커다란 비극으로 이어져도?”
지선은 코웃음을 쳤다. 회귀자의 질문은 지선에게 고뇌를 던지는 대신 결심만 단단히 하게 만들 뿐인 것처럼 보였다.
“…또 그 잘난 미래. 마치 직접 보고 온 것처럼 말하는구려. 기이한 일이외다. 남자는 성녀가 될 수 없을 터인데.”
누구한테 들었나 보군, 그리 중얼거린 지선은 별달리 묻지 않았다. 더 커다란 비극이라는 말에 일고의 가치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회귀자가 절박하게 말했다.
“불과 몇 년 뒤에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가 나타나.”
“그렇소이까.”
“성황청이 무너져도, 지모신교와 흡혈귀의 시대가 와도. 그는 나타나. 아니, 오히려 더 강력해진 채로 더욱 빠르게 세상에 임하지.”
“그런가 보오.”
무심한 대꾸. 다급해진 회귀자는 사람들이 불안해할까 봐 꼭꼭 숨겨두었던 사실을 고백했다.
“죄악의 왕. 마신의 힘을 사역하며 인간의 죄악을 심판하는 심판자. 성황청의 성녀도, 마도연방의 마왕도, 제국을 수호하는 검성도. 그의 앞에서는 일초지적도 안 돼. 전 인류가 힘을 합쳐도 이기지 못할 강대한 존재야.”
“마신이라. 성황청이 좋아하는 이름이로구려.”
“그건 세상의 모든 악덕으로부터 태어나. 명성이 드높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지선이 성황청과 전쟁을 벌인다면. 홀로 성황청에게 타격을 입히고 장렬하게 전사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전쟁의 불씨가 돼. 세상은 전란에 휩싸이고, 그 속에서 죄악이 피어나고. 혼란 속에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놈들이 나타나. 그리고 그 가운데….”
죄악의 왕이 태어난다.
인간이 저지른 모든 절망과 악덕을 머금고서.
회귀자는, 미래에 있을 끔찍한 재앙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지만.
“어쩌라고.”
“…어?”
지선의 말 한마디에 멍청하게 반문한 할 따름이었다. 의아한 듯 되묻는 회귀자를 향해, 지선은 아주 맑고 결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어쩌라고, 라고 되물었소이다.”
찰박.
그녀의 발이 시체를 디뎠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응고와 퇴적 비슷한 현상을 거친 시체는 다져진 흙처럼 단단하여 그녀의 몸을 흔들림 없이 지탱했다.
“비극을 막기 위해서 박해를 저질렀다면, 그 저항마저도 견뎌낼 자신이 있다는 뜻일 것이외다. 살아남고자 하는 발버둥조차 억누른 채 다음으로 나아가, 다가오는 재앙마저 무찌를 힘이 없다면. 애초에 저질러서는 안 되었을 것이외다. 그들이 그린 미래에는 우리가 없었으니.”
그렇지 않았더라도, 지선은 넘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녀는 불도자. 넘어지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 자.
누군가 가로막는다고 하여, 그녀를 멈출 수는 없을 터이니.
“그런 뜻이 아니야! 서로 싸우기보단, 협력해서 위기를 이겨내야 한다고…!”
“나를 막기 위해 대전사를 보냈다면, 그럴 자신이 있다는 소리일 터.”
“아냐! 나는 굳이 너를 막을 생각은 없어! 네가 땅의 검, 지잔(地潺)을 가지되 힘을 쓰지 않겠다고 하면, 나는 저걸 양보할 용의가…!”
그 말을 들은 직후. 지선은 흉신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양-보-라-고-!”
목에 핏대가 솟아났다. 꽉 쥔 주먹에서 바위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휙, 손을 흩뿌리자, 다섯 개의 고리가 찰랑거리며 거친 쇳소리를 냈다.
그렇게, 지선은 토해내는 심정으로 외쳤다.
“저건 우리의 것이매! 우리의 땅이며, 우리의 무덤일지니! 성황청의 대전사 따위가! 무슨 권리로 대종사의 유품을 양보하는가--!”
구르르릉.
그녀의 고함이 시체의 산과 비스듬히 기울어진 탄탈로스에 부딪혀 퍼졌다. 어찌나 우렁찼는지, 발밑의 시체가 들썩일 정도였다.
“미래가 너희 것이라고 오만하게 굴지 마라! 혹여나 내가 없는 미래에서 저것을 너희가 차지했다고 한들! 그것이, 너희에게 자격을 주지 않을 것이니-!”
콰득.
지선이 주먹을 움켜쥐어 팔을 당겼다.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다섯 개의 고리는 하나가 되어 오른팔을 빈틈없이 감쌌다.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진 지선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회귀자를 노려보며 외쳤다.
“검을 들어라, 대전사! 나는 나아갈 것이다! 옛 무덤에 묻힌 그녀의 유품을 들고, 성황청의 죄를 묻겠다! 나는 지모신의 사도이자, 지모신의 이름과 함께 죽어가는 이들의 절규다! 이 물음을 땅에 묻고자 한다면, 나를 죽이고 무저갱에 묻어라--!”
설득에 실패했다. 이번 회차의 회귀자 역시 그녀를 막지 못했다.
이제는 익숙한 열패감. 회귀자는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떨궜다. 그러다 마침 비탈 아래에 있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설득하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래. 저 녀석이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그럴 리가.
나는 어디까지나 바람을 들어주는 자. 불도자의 맹풍을 막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심지어 나도 몰랐다고. 저 안에 얼마만큼의 울분이 있는지, 열망이 있는지는 알았지만. 저토록 격렬한 증오가 나타날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단 말이야.
나는 독심술사이지, 예언자가 아니니까.
한숨을 내쉰 회귀자가 힘 빠진 듯 느릿하게 말했다.
“미래는, 한 번도 내 것이었던 적 없어. 언제나 내 적이었지. 아주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나를 조지려고 드는.”
회귀자는 손을 위로 뻗어서 검을 쥐었다. 언제나 그녀와 함께 했던 하늘의 검, 천앵.
이날만을 위해 아끼고 아꼈던 압축된 공간. 그 빗장을 풀며, 회귀자는 요동치는 힘을 손에 휘어잡았다.
“정정 하나만 할게. 나는 성황청의 대전사 따위가 아니야. 살면서 신에게 기도해본 적도 없고, 신이 뭔가를 들어준 적도 없어. 서로 싸우고 저주했으면 몰라도.”
‘처음에는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두 번째는 신기한 능력을 얻게 되어 기뻐했고, 세 번째에는 들떴지. 나는 내가 특별한 사람이 된 줄 알았어. 하지만, 이 특별함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짧게 자조한 회귀자는 다시 검을 치켜들었다.
아득한 무저갱이 요동쳤다.
기울어진 천장과 시체들의 산. 그 사이로 바람이 휘몰아쳤다. 무저갱이 하늘을 되찾고 바람을 다시 불러온 듯했다.
고오오오.
바람의 울음소리가 시체를 타고 흐르며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그 울음은 이윽고 한 점으로 수렴하여 회귀자의 검으로 빨려들어갔다.
회귀자는 어마어마한 힘을 검에 두르며 외쳤다.
“씨발! 그래도! 세상이 멸망하는 건 막아야 하잖아!”
회귀자가 시체로 된 바닥을 박찼고, 지선은 천천히 오른발을 뒤로 뺐다. 그녀의 발 뒤편으로 땅이 단단히 다져지며 지선의 몸을 단단히 받쳤고.
보이지 않는 검과 다섯 개의 고리가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