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1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3
“…혹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성황청과 연관이 있었나.”
회귀자를 바라보는 티르의 눈에 짧게 적의가 스친다. 반사적인 적의다.
그야말로 피에 사무치고 뼈에 새겨진, 본능과도 같은 혐오감과 적대감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만일 티르가 아직까지 심장이 멈춘 상태였다면 지선과 합세하여 회귀자를 공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순수하였다. 무얼까.”
지내왔던 시간이 길다. 보여줬던 모습이 많다.
그동안 회귀자로부터 적의나 경멸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어설픈 친근감에 헛웃음을 지었을 뿐.
3개월. 티르에게 있어서는 찰나와 같은 시간이나, 심장이 새로이 뛰게 된 그녀에게는 충분히 감명 깊은 경험이었다.
그래서 티르는 저 싸움에 관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거 봐, 회귀자.
네가 뭘 걱정했는지는 알겠는데, 안 끼어든다니까.
마침 칼리스와 함께 피바다에 착지한 불사자는 휘몰아치는 바람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흠! 뭔가 바람과 구름 같은 하늘의 힘을 쓰기에 천신과 관련이 있는 줄 알았거늘!”
“성황청이 가진 권능은 천신의 것이 아니다. 천신은 인간에게 그 어떤 힘도 내려주지 않았으니.”
살면서 그 누구보다도 성황청과 많이 부딪힌 티르의 말에는 그만한 확신이 담겨있었다. 티르는 핏빛 눈동자로 보이지 않는 검을 좇으며 말했다.
“그들은 천신의 신도라 자칭하면서도, 신보다 처음의 성녀를 더욱 떠받드는 이들. 그 이후 성녀라 불린 것들은 하나같이 예언자나 선지자의 이명으로 불리었지.”
“어라? 생각해보니 그렇군! 그렇다면 도리어 대단한 것 아니오? 신의 권능 없이 이만한 성세를 만들었다는 뜻이니!”
“시간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시계상(時界相)의 권능이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이지. 흥, 비겁한 족속들….”
심장이 뛰고 나서도 앙금은 여전한지, 티르는 명백한 경멸을 담은 채로 중얼거렸다.
“어쨌건, 셰이가 예지자일 리는 없다. 처음의 성녀가 십자가 쐐기에 박힌 뒤, 성녀는 오직 여자만이 될 수 있으니. 만일 성별을 속이고 있던 게 아니라면…. 아니라면……?”
문득 든 생각에 티르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으르르르르!”
박쥐처럼 지지대를 붙잡고 매달린 아지가 맹렬히 짖었다. 인간의 시체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있는 아지에겐, 이 땅 전체가 지뢰밭이나 다를 바 없이 보이겠지.
이미 시체이니 밟거나 깨부숴도 별로 문제는 없겠지만 싫어하는데 구태여 내려오게 할 필요도 없을 거다.
“그래. 너는 거기 있어라. 싫으면 내려오지 말고….”
“으르르르르르르!”
그러나 아지가 짖는 건 단순히 시체가 싫어서만은 아니었다.
시체들 가운데에서 무언가가 들썩거렸다. 움직임을 감지한 탐조등 중 하나가 재빨리 움직여 그것을 비추었다.
덕분에 나는 펑퍼짐한 옷을 입은 시체가 무릎을 짚고 일어나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물론 그다지 고맙진 않았다.
죽음은 생의 정지이며 세상과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비자발적인 행위.
따라서 죽어 세상으로 돌아간 시체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어야 한다. 그렇게 피부부터 갉아먹히며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즉, 지금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저 시체는, 절대로 시체로서 권장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거다.
“염병하네, 정말.”
무덤에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행동 1순위, '다시 일어나기'를 해버린 시체를 보고 나는 얼굴을 구겼다.
“원혼인가. 하긴, 30만이나 된다면 원혼이 한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티르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지모신앙과 매장자가 필요한 이유이자, 한때 성세를 누렸던 까닭이 이것이다.
가끔 한 맺힌 시체에는 잔류 사념이 깃들고, 그건 죽은 몸을 움직이거나 변형시키고는 했다. 죽기 직전에 발휘되는 원시적인 신체 매개 마법이라고나 할까.
물론 잔류 사념 따위가 살아있는 인간보다는 강할 수 없기에 대다수는 그대로 퇴치되었다. 그래도 어쨌든 다시 움직이는 시체를 또 치우는 건 대단히 불쾌하고 불편하였기에, 사람들은 매장자에게 대가를 지불하며 매장을 부탁하곤 했다.
살아있는 사람도 나오지 못하는 땅속에서, 잔류사념은 잠깐 들썩이다가 사라질 뿐이었으므로.
“하찮은 것이다. 잠시 기다려라.”
물론, 죽지 않은 채 묻혔다가 시체와 가장 가까운 몸으로 세상에 나타난 세계 최악의 원혼 시조 티르칸쟈카에겐 하찮을 뿐이었다.
“내 직접 힘을 쓸 필요도 없겠구나.”
티르가 손을 휘저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한 형체가 번뜩였다. 그 순간 푹, 하고 원혼 서린 시체의 배를 찢고 새카만 검이 나타났다.
흑기사였다.
흑기사가 칼을 빼낸 뒤 오금을 걷어차자, 시체는 풀썩 무릎을 꿇었다. 흑기사는 그대로 시체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서걱, 날아간 머리가 탐조등의 빛이 닿는 범위에서 사라졌다.
나는 흑기사의 활약에 손뼉을 쳤다.
“와! 흑기사! 시즌 1호 활약이네요! 전투력 측정기에 월급도둑이라는 오명은 벗을 수 있겠어요!”
“…아무렴, 흑기사가 고작 원혼 따위에게 지겠느냐.”
생각해보니 흑기사도 일종의 원혼이네. 티르에게 죽은 기사들의 념. 그러니 일개 병사보다는 기사가 강하겠지….
라고 생각할 때. 턱, 하고 무언가가 흑기사의 발목을 붙잡았다. 흑기사는 새까만 투구를 아래로 향하다가, 발을 낚아채는 손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 위로 나타난 건 수많은 손. 개미떼처럼 흑기사의 몸 위를 기어가는 손가락이 그 어둠을 뜯고 꼬집고 긁었다. 전신이 구속당한 채 몸부림치던 흑기사는 그대로 가닥가닥 끊어져 가루가 되었다.
탐조등의 불빛 아래, 오직 손만이 가득했다.
모두가 잠시 말을 잃은 그때. 나는 차가운 얼굴로 아까 했던 말을 번복했다.
“취소. 1구 처리 후 소멸은 기사 치곤 상당히 초라한 전적이네요. 앞으로는 흑기사 말고 흑잡졸 어때요? 아니, ‘흑’자는 너무 강해 보이니 대신 흙잡졸이라고 하죠.”
“지금 말장난할 때느냐? 일단 내 곁에 붙어라. 위험하지는 않으나, 무언가 심상치 않다.”
티르의 말에 보태듯, 탄탈로스 전역에서 경고음이 울려퍼졌다.
왜앵-.
인위적으로 조합해낸 날카로운 소음이 귓가를 찔렀다.
탐조등은 더 이상의 추적을 포기했다. 그러기에는 사람의 형체가 너무 많았으며, 움직이는 대상도 한둘이 아니었다.
대신, 탐조등은 매섭게 울면서 점점 크기를 키워갔다. 화살처럼 날카로웠던 빛이 퍼지며, 동시에 탄탈로스의 테두리에서 빛이 솟아났다.
제대로 된 조명은 주간등 하나뿐인 줄 알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탄탈로스의 테두리에 숨겨져 있던 자그마한 조명이 일제히 솟아났다. 하나하나만 보면 주간등보다 훨씬 어두운 빛이지만.
테두리에서 솟아난 조명이 일제히 켜지자, 무저갱 전역에 눈부신 빛이 도래했다.
낮은 천장, 사방을 둘러싼 광원에서 쏘아내는 그림자 없는 빛.
덕분에 이제 시체들의 산이 똑똑히 보였다.
옷과, 살점과, 팔과 다리, 가끔 보이는 머리로 이루어진 산. 둥근 굴곡을 지닌 인간이 쌓이고 쌓여 동그란 능선을 이룬 광경은 이제 끔찍함을 넘어 질 낮은 예술품을 보는 것 같은 불쾌함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그 불쾌함을 느끼기도 잠시, 더욱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시체의 산 테두리, 걸러진 핏물의 바다.
그 혈해의 해안선을 따라, 펑퍼짐한 옷을 입은 시체들이 일제히 일어나기 시작한 것을.
가히 군대라고 부를 만한 규모의 원혼. 그것을 앞에 두고 티르는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밝구나. 그림자를 다루기 어렵다. 대신.”
찰박거리는 핏물이 그녀의 부름을 따라 솟아올랐다.
비록 심장이 뛴 뒤 혈조술이 몸 밖으로는 잘 표출되지는 못하지만, 이토록 가까이에 있는 피는 다룰 수 있다.
티르는 새빨간 핏빛 구슬을 허공에 띄우며 말했다.
“내 곁에 붙어있거라, 휴.”
그리고 손가락을 튕기자, 피의 파도가 부채꼴로 일어나 시체를 일거에 쓸어버렸다. 원혼이 서린 시체는 시체조차, 아니, 존재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못했다.
그럼에도 티르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왜냐면, 그녀는 원혼 서린 시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혹여나 내가 상처라도 입을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으니까.
“너는 내가 반드시 지켜주마.”
너무 든든하네. 나는 엄지를 치켜들며 외쳤다.
“흑장미가 흑기사보다, 아니, 흙잡졸보단 낫네요!”
“너는 정말 긴장감이 하나도 없나 보구나!”
저편에서는 칼리스와 불사자가 원혼이 서린 시체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불사자는 연달아 주먹을 휘둘렀으며, 그때마다 시체들이 부서지거나 하늘을 날았다.
그러나 상성이 좋지 않았다. 불사자가 지치지 않는다고 하나 그에게는 두 손밖에 없다. 가끔 주먹 한 방으로 세 구의 시체를 치운다고 한들, 그 틈에 수십이 더 몰려드니 점점 밀려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면 더욱 소극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 불사자가 외쳤다.
“칼리스! 내 곁에 붙어있으시오! 절대 떨어져서는 안 되오!”
“아니요! 저도 참전하겠습니다!”
“부상자가 참전은 무슨! 나는 지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저것들은 한주먹 거리도 안 되오!”
그러자 칼리스가 냅다 소리쳤다.
“멍청이! 그거 다 연기였습니다! 슬슬 눈치를 좀 채십시오!”
“엇?”
불사자가 머뭇거리는 시간이 곧 시체들이 다가오는 거리가 되었다. 입술을 깨문 칼리스는 군장 패킷을 생체 단말에 끼워 넣었다.
“콜 투 암스!”
철컥, 철컥.
연금광과 함께 왼팔을 감싸는 강철 건틀릿. 군장을 장착한 칼리스는 마침 다가오는 시체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콰직, 시체의 골통이 깨지며 이빨이 튀어 나갔다. 칼리스는 오른손으로 이빨을 낚아채고는 신속하게 건틀릿 손등에 난 홈에 끼웠다.
그리고 그것을 겨누며 외쳤다.
“세트, 리, 리, 리, 파스칼, 건!!”
본래라면 증기를 내뿜어야 할 홈. 그러나 대신 압축된 공기가 이빨을 격렬하게 밀어낸다.
투웅.
일종의 바람총. 쏜살같이 날아간 이빨이 다가오는 시체의 머리를 맞추었다. 빡, 하는 소리와 함께 시체의 목이 뒤로 살짝 꺾였다.
그러나 그뿐. 시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걸어왔다.
“큭! 규격이 안 맞습니다! 무게도 부족하고…!”
“이빨이니 그렇지 않겠소?”
“죽은 지 오래되어서인지, 이빨이 무르고 연금저항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간이 연금술!’
칼리스가 오른 주먹을 꼭 쥐었다가 펴자, 연금술로 변형된 이빨이 나타났다.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이지만 두께 하나만은 일정했다.
칼리스는 크기가 꼭 맞게 갈려 나간 이빨을 홈에 끼우고 쏘아냈다. 후욱. 아까보다도 저 조그만 바람 소리.
“건!”
그렇게 날아간 이빨은 다가오던 시체의 오른 발목을 그대로 꿰뚫었다. 다가오던 시체가 발목을 균형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보조하겠습니다!”
“어, 음. 무리하지 마시오?”
지금까지 괴물들 틈바구니에 있어서 빛을 발하지는 못했지만, 준비된 장교는 정밀하게 설계 된 전쟁수행기계다. 이 정도는 해주지 않으면 군국이 곤란하지.
물론.
아무리 그래봤자.
“천검기, 천둥새!”
“지모신이시여!”
저기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번쩍.
벼락이 몰아친다. 천앵으로부터 시작된 샛노란 전격이 지선을 향해 떨어진다.
그러나 지선은 몸을 낮추고 뛰는 것으로 벼락을 피했다. 속도는 벼락에 비하면 느렸으나, 벼락은 대지와 하나가 된 지선을 추적하지 못했다.
쿵. 지선이 발을 구르자, 진동이 시체를 타고 흘렀다. 그것들은 파문처럼 퍼지다가 회귀자의 발밑으로 수렴하더니, 곧 그 지점에서 시체가 폭발하여 솟구쳐올랐다.
회귀자를 향해 투포환 비슷한 속도로 날아든 시체. 우연인지, 의도한 건지. 빙글 돌아가는 팔이 정확히 회귀자의 옆구리를 노렸다. 회귀자는 가볍게 몸을 띄운 뒤 시체를 사뿐히 밟고 한 번 더 도약했다.
‘칫. 벌써 시체들의 대지에 적응했나. 발밑에 땅이 없으니 내가 유리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 땅은 흙과 바위로 된 대지가 아니니 유리할 것이다, 그리 생각했소이까?”
지선은 회귀자의 생각을 간파했다.
“대지는 본디 지모신의 신체. 아래 사소한 것이 있다고 한들, 그건 전부 대지에서 비롯된 것. 소인은 땅을 구분하지 않으니!”
“잘났어, 정말…!”
투덜거린 회귀자는 거꾸로 된 천장에 착지했다. 경지에 이른 기공은 기울어진 천장에서도 그녀의 가벼운 몸을 땅처럼 걸을 수 있게 했다.
지선도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겠지만, 회귀자만큼이나 민첩하지는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대지술은 대지에 발을 디뎌야 쓸 수 있으니….
그게 오해라는 사실을 아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 땅에는 하늘 역시 없으니. 거대한 대지가 천장이 되었다고 해서 그대의 편이 아닐 터!”
단호하게 말하며 지선은 허공에 손가락을 박아넣었다. 손가락 끝에 힘줄이 돋았다.
겉모습만 보면, 그녀가 마임을 하고 있다고 여겼으리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힘을 들이는 기색이었으니.
그렇지만 그건 마임이 아니었다. 마임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있는 척하는 거지만.
“분노를!”
지선의 힘은 실제로 발휘되고 있었기에.
무언가를 붙잡은 듯한 손이 휘둘러진다. 그 동시에, 천장에 있던 콘크리트 대지가 격자 모양으로 잘려나가며 네모난 블록이 회귀자를 습격했다. 발이 닿지 않았음에도 대지가 그녀의 뜻에 따르는 것이다.
‘지잔이 없어도 이 정도라니!’
이걸 거꾸로 솟아났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떨어졌다고 해야 할까.
어쨌건 네모나게 연마된 단단한 콘크리트가 회귀자를 스치고 지나갔다. 급히 뛰어서 직격을 피했음에도 충격이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치잇…!”
발을 대는 그 어디든 안전하지 않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저 멀리 내리 앉는 회귀자.
그에 반해 지선은 처음 발을 디뎠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걸어갔다.
“맥이 빠지는구려, 대전사여. 능력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적의가 없는 것인가? 어찌하여 둘 중 하나를 갖추지 못한 채 소인의 앞길을 막는 것인가? 사명감? 아니면, 이것이 원하는 미래를 향한 유일한 길이외까?”
지선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회귀자를 바라보았다.
“싸우지 않을 거라면 비키길 바라외다. 소인은 적의 없는 이와 싸우고 싶지 않으니.”
회귀자가 대꾸했다.
“…네가 맞닥뜨릴 그들도, 적의는 없을 거야.”
“그런 이들은 알아서 피하겠지. 소인은 오직 죄를 물으려 함이라. 그들이 숨긴 악덕에 대해 낱낱이 밝히고 사죄해야 할 터이외다.”
“그렇다고 비켜서지는 않을 거야. 그들에게도 성지를 지킨다는 사명감이 있을 테니. 너처럼, 말이야.”
사명감과 사명감의 충돌. 그것의 다른 이름은 선도 악도 없는 순수한 비극이 아니겠냐고.
회귀자는 없는 말주변으로도 어떻게든 그런 뜻을 담아 말했다.
지선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으나, 고민은 짧았다. 그녀의 안에서 결론은 이미 나온 상태였다.
“…그렇다면, 치우고 갈 뿐이외다.”
“그러니까, 내가 못 가게 하려는 거야. 너는…. 그래. 넘어지지 않을 테니까. 다른 모두를 넘어뜨려서라도.”
그것이 미래를 지키기 위한 회귀자의 사명이었다. 회귀자는 다시 검을 들었다. 마음을 다잡은 듯, 이제는 검 끝 하나 떨리지 않았다.
결심한 상대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던 지선은 자기 감정을 정돈하며 담담하게 선언했다.
“소인은 저 위로 올라가, 대종사의 유품을 쥘 것이외다. 이는 바위가 굴러가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니, 앞에 서려면 그만한 각오를 갖추길.”
명백히 회귀자를 노린 발언. 애매한 태도를 보일 바에야 확실하게 정하라는 상냥하면서도 단호한 선포였다.
“부수지 않고는 막을 수 없을 것이외다.”
그렇게, 넘어지지 않는 자는 시체들의 산을 올랐다.
정상을 향해 올곧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