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3 비스듬한 천장과 웃는 시체들의 산 - 5
간신히 몸을 일으킨 회귀자에게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죽이지… 않으려고 했어. 다른 길이 있지 않을까… 했어.”
아무리 봐도 만신창이. 더는 싸울 수 없는 꼴을 한 회귀자였으나.
툭, 툭. 흐르는 피가 되돌아간다. 혈조술로 되돌이킨 것이다. 동시에 바람이 몸을 감싸며 흙먼지를 털었다. 한순간, 그녀의 몸이 깨끗해진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건 겉모습일 뿐, 지룡에 직격당한 몸 안쪽은 상당한 타격이 누적되어 있다. 두 발로 서는 것도 힘들겠지만.
회귀자는 고통과 절망을 울분으로 바꾸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그저. 잘하고 싶었어. 나밖에 할 수 없으니까.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의도가 좋으면, 진심으로 노력하면. 모든 게 좋아질 거로 생각했어.”
회귀 초창기, 상황이 이전보다 점점 나아지는 게 보였을 때.
회귀자는 믿었다.
문제가 생기면 어디든지 나타나, 모든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반복하고 반복하다 보면 점차 나아질 거라고.
그리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데, 왜! 왜, 왜! 왜애애애!”
바꾸지 못한 미래. 움직이지 못하는 마음. 굳은 신념과 아집 혹은 고집.
부패한 단체, 악한 개인, 그 가운데 몇 없던 선한 이들은 위기 앞에서 가장 먼저 죽어간다.
도와줄 것이라 믿었던 이들은 각자 다른 꿍꿍이를 숨겨두고 있고, 그 속에서 회귀자는 홀로 광대놀음을 할 뿐.
진정으로 도와줄 이는, 그 약속도 무색하게 다음 회차에서는 고개를 젓는다.
“왜 아무도 안 도와주는 건데에!!”
울분에 찬 회귀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에서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명멸했다.
온도를 보는 적안.
내려다보는 주안.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금안.
꿰뚫어 보는 녹안.
깊이를 보는 청안.
멀리 보는 남안.
힘을 보는 자안.
일곱 중 하나만 나타나도 세상을 진동시킬 마안, 칠색안. 그 일곱 가지 빛이 동시에 반짝인다.
섞인 것도 아니다,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일곱 개의 빛은 별개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명멸했으니.
회귀자의 눈동자에 광륜이 떠오르며 밤하늘 별처럼 반짝였다. 그 끝으로 흐르고 있는 건 눈물인지, 아니면 빛무리인지.
칠색안 전안 개안.
전륜천안(轉輪天眼).
일곱 마안이 모여야만 이룰 수 있는 권능이, 이치 너머의 것을 목도했다.
“그렇게 죽고 싶으면, 일단 한 번 죽어어어! 너를 살릴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 이후 고민해볼 테니까아아!!!”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일곱 개의 마안, 그 총의인 전륜천안이 보는 것은 가능성.
한때 운명안이라고 불렸던, 자신의 가능성을 재단하는 눈.
그 모호함과 불확실성, 그리고 운명에 집착하다가 파멸한 이들 때문에 점차 외면받다가 갈래갈래 찢긴 마안이나. 회귀자에게는 달랐다.
회귀자에겐 이미 가능성의 결실이 그녀의 회귀 숫자만큼 존재하므로.
자기 자신을 본다.
셰이라는 인간의 가능성을 가져온다.
예언이 아니며, 예지도 아니다.
과거, 어느 회차에서 얻었던 힘. 그 회차에서 이룰 자신의 가능성을 읽고 관측하여, 잠깐이나마 그 힘을 재현한다.
대가는 수명이나.
회귀자에게는 차고 넘치는 것이다.
“천검기, 용오름!”
회귀자의 뒤로 폭풍이 몰아쳤다.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긴 기운이 난폭하게 소용돌이쳤다. 그렇게 단숨에 땅을 박차 날아오른 회귀자는 바람을 휘감은 거대한 참격을 날렸다.
“또 뛰었구려. 학습 능력이 없는 것인지….”
공간진으로 붙잡고, 지룡으로 물어뜯는다. 지선은 주먹을 움켜쥐고 비틀었다.
끼기긱.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지룡의 육신이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진 기둥처럼 불길한 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이야아아아아!”
“지룡.”
용수철은 금속만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부러지지만 않는다면, 콘크리트 역시 용수철이 될 수 있다.
지선의 힘으로 움직이는 지룡은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다.
솟아난 땅의 용이 용트림하며 순식간에 회귀자의 코앞에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하나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지점. 회귀자는 지룡을 세로로 쪼개며 다가갔다. 폭풍을 휘감은 회귀자는 그대로 무방비 상태인 지선을 향해 천앵을 휘둘렀다.
지상에서 휘둘렀다면, 저 멀리 있는 구름마저도 쪼갤 듯한 기세.
촤악.
지선의 몸이 크게 베였다.
다물 수 없는 상처에서 피가 넘쳐흘렀다. 어깨부터 반대편 허리까지 긁어낸 치명상이었다.
그러나 회귀자는 일격을 가했음에도 방심하지 않고 곧장 수비태세를 취하며 이를 악물었고.
그 위로 지선의 발차기가 작렬했다. 회귀자의 몸이 공처럼 날아갔다.
직후.
뚝. 지선의 오른쪽 귀걸이가 갈라졌다. 그 상흔은, 지선의 몸에 난 상처와 똑 닮아있었다. 그렇게 부스러진 귀걸이가 땅으로 떨어지는 동시에, 지선에 난 상처가 꿰맨 것처럼 딱 다물어졌다.
“미리 치른 장례…! 짜증 나! 왜 너는 죽을 지경이어도 그냥 살아나냐고!”
회귀자가 신경질을 부렸다.
회복도 아니고, 복원도 아니다. 그냥 상처를 잠시 미뤄두었을 뿐. 흙으로 부두인형을 만들어 충격을 잠시 옮겨두고 멀쩡한 몸을 ‘연기’하는, 더 싸우기 위한 기술, 미리 치른 장례.
말은 그렇지, 한참 싸우는 도중 저걸로 부활하면 억울하기 그지없다.
물론 어이없는 감정은 지선이 더 컸지만.
“…기이하구려. 예언은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보아도 익히지 않으면 기량을 올릴 수 없소이다. 헌데, 조금 전 그건, 기량 자체가 달라진 듯한….”
발차기에 당한 순간 앞으로 뛰어 타점을 흐렸다. 동시에 팔을 미리 뻗어서 다리를 짚으며 충격을 줄였다. 그 자연스러운 움직임과 기공의 흐름은 이전과 또 달라진 것이었다.
기공도, 신체 능력도, 그 모든 게 이전에 비해 압도적이다. 지선은 그것을 느꼈다.
“다만. 한 치수 큰 옷을 입은 것처럼, 틈으로 흐트러진 기운이 줄기줄기 새는구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빌려온 힘은 오래 가지 못할 터.”
“빌려오기는! 원래 내 기량이거든! 이거 없이 딱 3년만 더 있어도 너는 이겨… 지잔만 없다면!”
급속도로 소모되는 기력이 몸을 무겁게 붙든다. 그래도 회귀자는 여전히 울분으로 몸을 태우며 외쳤다.
“항복해! 말로 하는 건 지금이 마지막이니까-!”
“소인이 묻고 싶소이다. 위태로워 보이는데, 더 싸울 생각이외까?”
“웃기네! 미리 치른 장례 아니면 이미 한 번 죽었거든!”
“두 번은 더 죽여야 할 것이외다.”
짤랑. 지선의 왼쪽 귀에 있는 흙인형이 흔들렸다. 여분의 목숨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의 목숨은 그녀 자신.
짧게 바라보고, 서로 의지를 확인했다.
회귀자는 다시 검을 처들고, 지선은 콘크리트를 몸에 둘렀다. 이렇게 된 이상 시간 싸움. 제한시간이 다 되기 전 회귀자가 지선을 쓰러뜨릴 수 있냐, 그것이 승패를 가른다.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지선을 올려다보던 회귀자는, 문득 저 너머 시체들의 산 정상에서 움직이는 사람 형체를 보았고.
어이가 없어서 넘어질 뻔했다.
회귀자는 눈을 부릅떴다.
‘저건… 저기서 뭘 하는 거야?!’
불사자가 주먹을 휘둘러 시체 하나의 배를 꿰뚫었을 때, 그 시체는 쓰러지는 대신 멍하니 자기 몸을 헤집은 불사자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배를 꿰뚫린 시체의 입에서 힘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흙이다.
흙?
시체의 목소리에 다른 시체가 반응했다. 그 중얼거림은 시체와 시체를 타고 흐르더니, 이윽고 모든 시체가 일제히 ‘흙’ 한마디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직후 그들의 고개가 삐걱 돌아갔다. 눈도 돌아갔다. 그리고 불사자를 향해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어엇! 칼리스, 떨어져 있으시오!”
시체들의 파도에 삼켜지기 전, 불사자는 칼리스를 번쩍 들어 저 멀리 내던졌다. 느닷없이 내던져진 칼리스는 낙법을 취하며 데구르르 굴렀다.
그 이후, 불사자는 시체들의 파도에 휩쓸렸다.
“라쉬!”
칼리스의 비명은 시체들의 읊조림 아래 파묻혔다.
묻어, 묻어야.
넋을 기려야.
미친듯한 읊조림. 사명만이 남은 외침. 펑퍼짐한 옷을 입은 시체들이 목마른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칼리스는 이를 까득 물었다. 이미 그녀가 해결할 수 있는 숫자를 넘어섰다. 자신의 무력함을 탓하며, 칼리스는 티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시조시여! 제발! 라쉬를 구해주세요!”
“…알았다. 잠시 기다려보거라.”
마침 티르가 핏방울을 허공에 한가득 띄우던 도중이었다. 시체들 틈에서 불사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뭔가 이상하오!”
개미처럼 바글거리는 시체들.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이미 갈가리 찢겼겠으나, 정작 불사자의 목소리는 멀쩡했다.
“생각보다 이들, 적의가 옅소! 어쩌면 우리를 공격하려는 게 아닐지도 모르겠소…!”
그리고 불사자의 몸이 시체들 틈에서 솟구쳤다. 시체들은 관이라도 이고 가듯, 불사자를 머리 위로 떠받들고는 시체들의 산으로 걸어갔다.
불사자는 시체들 위에서 외쳤다.
“하하! 꼭 왕이 된 것만 같군!”
그리고 쾅, 티르가 튕겨낸 핏방울이 불사자의 아래쪽을 일거에 쓸었다. 선보다는 면에 가까운 공격. 시체들은 산산조각 나고, 지지를 잃은 불사자는 그 아래로 쿵 떨어졌다.
불사자가 엉덩이를 문지르는 무렵 티르가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남겨둘 이유는 없지. 어쨌건, 원혼은 곧 죽을 이들이 마지막에 외쳤던 단말마의 메아리에 불과하니. 미리미리 없애는 것이 도리어 자비이다. 그렇지 않느냐, 휴….”
라고 말하며 티르가 고개를 돌렸을 때.
내가 있던 자리에는 내 겉옷을 두른 시체가 서 있었다.
티르는 고개를 갸웃했고,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아연실색했으며, 곧이어 경악했다.
“휴?!”
놀란 티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사라져버린 나를 찾을 때.
그때 나는 원혼 서린 시체의 위에 올라탄 채로 시체들의 산을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