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9 길은 여행자와 함께 흐른다 - 5
가는 도중에 두 번의 기착지를 거쳤다. 의무관은 예의 바른 경례와 함께 광산 기착지에서 내렸다. 끝까지 다친 사람은 없냐 물어보는 것이, 자기 실력을 뽐낼 기회가 없어서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린 사람은 있는데 더 올라타는 인원은 없었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점차 가까워졌다.
물리적인 거리든, 심리적인 거리든.
인간은 사회를 이룬다. 인간에게 필요한 건 같은 인간이 가장 많이 갖고 있기 마련이며, 그러한 자원은 나눌수록 효율성이 커진다.
빛, 온기, 지식, 울타리, 이야기.
그러한 모든 건 모이면 모일수록 서로에게 더 큰 몫이 돌아가기에, 인간은 오랜 세월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갔다.
…물론 효율보다 효용을 중시하는 몇몇은, 더불어 살기보다 죽이고 빼앗기를 선호하였지만 어쨌든.
램프를 모은 채로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지금 우리는 늙은 공병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 메타컨베이어 벨트를 만들 때, 형님이 돌아가셨다우. 끔찍한 사고였지. 땅이 다 굳지도 않았는데, 헷갈려서 발을 내디뎠다가 그대로 몸이 갈려나갔수. 땅의 급류에 파묻히는 모습은… 큭큭. 상상하지 않기를 바라겠수. 구태여 말로 표현할 수도 없수다.”
의도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말을 흐리는 게 더 상상력을 발휘하게 했다.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흐르는 땅에 짓이겨지는 사람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흐르는 땅 안쪽으로 용암처럼 붉은 피가 번졌다….
과거를 상기한 늙은 공병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메타컨베이어 벨트를 바라보았다.
“형은 훌륭한 목수였지만 훌륭한 석공은 아니었고, 흐르는 땅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수…. 이제는 아마 잘 알 거유. 지모신에 가장 가까이 있으니. 나는 형님의 시체를 타고 움직이는 셈이우.”
“저런….”
“형님이 돌아가신 뒤 영 일이 손에 안 잡히더우. 얼빠진 채 일하다가 나도 죽을 뻔했수. 그때 우리 형제는 그 부대의 유일한 목수라서 벽을 쌓을 때 가장 먼저 불려가곤 했는데, 형이 죽으니 일을 할 사람이 나밖에 없었수. 둘이 할 일을 혼자 하니, 목책이 무너지는 것도 당연하지….”
쿠데타가 일어난 뒤, 왕국 시절 배를 불렸던 이들은 포로가 되어 노역을 명령받았다. 그러나 아무리 채찍질을 시킨다고 한들 없던 기술이 생길 리 없다.
군국은 나라 곳곳의 기술자를 모았고, 그들에게 감투를 씌워주며 노역자를 다스릴 권한을 줬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존재가 바로 지선이었고.
“그때 마침 지선께서 나를 구해주셨는데, 배은망덕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더구만. 어째서 지금 오신 건지, 만일 일주일만 더 빨리 왔다면 형은 살 수 있지 않았을지. 큭큭. 나도 참, 이기적인 놈이우.”
자조하듯 말하는 공병을 향해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자책하지 마요. 정말 이기적이었다면 구해졌다는 기억조차 안 했을 거예요.”
“크크크. 세월이 지난 지금이야 이리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우. 그때는 얼마나 울분에 차 있었는지. 공사가 끝나고 몇 개월 동안 술만 마셨수…. 군국과 지선을 원망하면서 말이우. 그래도 만일, 지선을 다시 한번 뵐 수만 있다면. 무릎을 꿇고 사과를 드리고 싶수. 내 소원이라우.”
“그건 걱정하지 마요. 지선께서 구하신 분이 한두 명이 아닌데. 아저씨는 기억도 못 하실 거예요. 누군가가 뜬금없이 사과하면 더 당황할걸요.”
“…생각해보니, 그러시겠지. 나와는 달리, 지선께서는 진정으로 이타적인 분이셨수….”
글쎄?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모르는 게 약이다. 늙은 공병을 보고 마음 편히 먹으라고 위로 좀 해줬다. 혹여나 지선을 만나러 갔다가 오른팔 잘린 모습을 보고 충격받는 것보다는 낫잖아.
씁쓸한 이야기가 끝나고, 램프 위에 올려두었던 통조림을 꺼냈다. 장군은 나름 장군이랍시고 조금 더 고급스러운 고기 통조림에 물을 부었으나, 내 통조림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는 자꾸만 힐끔거렸다.
“그건 뭔가?”
“미리 해놓은 요리를 빈 통조림 캔에 넣어두고 다시 밀봉해둔 거예요.”
“다 조리한 음식을 통조림에? 그건 통조림 공장에서나 하는 거잖아? 재주도 좋군. 어디, 맛 좀 보자.”
당연한 듯이 요구하는 장군. 나는 잠시 속으로 계산을 끝냈다.
솔직히, 통조림 조금 주는 거야 문제없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장군의 정체를 모른다는 설정.
존대하는 중이고 뭔가 심상찮은 신분 같은 느낌은 받았지만, 나에게 실질적으로 손해가 된다면 선뜻 동의하지 않는다. 가족에겐 따뜻하지만 타인에겐 그렇게 너그럽지는 않은, 그런 컨셉으로 가자.
장군도 그편을 더 좋아할 거다.
살짝 몸을 닫고, 웃는 표정을 흐렸다. 공연히 다른 사람들을 흘끔거리며 대위 쪽으로 붙었다.
“…저는 통조림 공장만큼 압축을 잘하지 않아서, 통조림 하나에 고작 2인분 밖에 못 담아요.”
“엥?”
거절을 넘어 경계하는 기색까지 보이자 장군이 자존심 상한 듯 굴었다.
“야. 아우님. 내가 설마 맨입으로 달라고 할까 봐! 우리 통조림이랑 같이 먹자고! 이거 고기야!”
“고기는 정성을 대신할 수 없어요. 죄송하지만, 이건 저와 삐를 위한 거예요.”
체면상 차마 힘으로 빼앗지는 못하는지, 인상을 찡그린 장군은 가진 통조림을 전부 내밀며 외쳤다.
“에잇! 이판사판이다! 다섯 개 준다!”
“…정말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아! 동생을 위한 요리를 싸게 먹을 생각도 없다! 이걸 다 받아라!”
그렇다면야 이야기가 다르지… 라는 느낌으로 행동하자.
어차피 식량이야 넘치게 있지만, 신선미나 향신료를 아낌없이 쓴 것들. 추궁받을지도 모르니 당장 꺼내기는 어렵다.
내가 화색이 되어 통조림을 준비하는 사이 간드 대령이 조용하게 지적해왔다.
“스승님. 다섯 개면 저희가 가진 전부입니다.”
“아, 그래? 아우님, 줬다 뺏어서 미안한데, 그럼 네 개!”
“다섯 개가 전부라니까 왜 거기서 하나를 뺍니까. 그러면 당장 모레는 뭘 먹고요?”
제자이자 부하인 간드 대령에게 구박을 당하자 장군이 냅다 화를 냈다.
“너는 이 자식아. 통조림이 없으면 구해올 생각을 해야지! 빠져가지고선!”
“벨트 위에서 통조림을 어떻게 구해요? 강도짓이라도 하라는 말입니까?”
“강도짓?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더냐?”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어쨌건 통 큰 장군의 쾌척 덕분에 그날 저녁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호화로웠다.
흐르는 땅도 서쪽으로 지는 태양을 쫓아가진 못했다. 뒤쪽으로 흩어지는 연기와 함께 날이 저물었다. 다들 크게 하품하면서 바람 안 드는 자리를 찾아 잠을 청했다.
“뭐? 램프를 잃어버렸다고? 어쩔 수 없지. 야, 간드! 네 램프를 줘!”
장군은 서로 꼭 붙어 앉은 어머니와 아들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장군에게 또 시달리게 된 간드 대령이 미간을 꾹꾹 누르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면 저는 뭘 쬐고 잡니까?”
“알 게 뭐야.”
“…저도 알 거 없습니다. 스승님 거나 주시죠.”
“자식, 하늘 같은 스승님을 벗겨 먹으려고 하다니. 그러면 너랑 나랑 램프를 같이 쓸까? 앙? 서로 마주보고 밤을 보내 봐?”
“죄송합니다. 그냥 제가 혼자 잘 테니 제 램프를 건네세요.”
그렇게 다들 제 좋을 자리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당연히, 오누이를 연기하고 있던 나와 대위는 비슷한 공간에 위치하게 되었다.
제복 패킷을 벗고 셔츠 바람이 된 대위는 침낭 패킷을 끼웠다. 압축되어있던 연금모가 뭉게뭉게 부풀어 오르며 대위의 몸을 감쌌다. 마치 구름을 두르는 것 같은, 혹은 털이 급속도로 자라나는 황금양이 된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따뜻하고 폭신한 침낭 패킷에 파묻힌 대위가,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다사다난. 복잡한 하루였습니다.”
“복잡하긴 뭘. 좋은 사람들 만나서 좋은 밤을 보내는데.”
내 태연한 대답에, 대위는 내심 발끈해서는 말했다.
“귀하는 알지 못할 것입니다. 금일 본관이 어떠한 곤경에 처했는지.”
“또, 또 그런다. 아까 오빠라고 부르라고 그렇게 말을 들었는데. 형님이 들으셨으면 경을 칠 거야.”
저쪽은 극에 이른 건기공으로 세찬 바람까지 자기 지배 아래 두는 이들이다. 쫌생이처럼 남의 대화를 엿듣지는 않겠지만, 무심코 들려버릴지도 모른다.
‘…큿. 긍정. 파트락시온 장군은 인간의 강함을 초월한 자. 지금 본관이 하는 말도 그의 귀에 들릴 수 있습니다. 한 번 연기한 내용을 간파당하는 건 위험합니다.’
그러니까, 달리 말하면.
대위는 아직도 나를 오빠로 대해야 한다는 소리지.
“…말조심하십시오, 큿, 오빠.”
“나는 언제나 조심하고 있는데?”
‘놀리는 건지, 연기하는 건지 전혀 모를 태도 때문에 모르겠습니다!’
둘 다다, 둘 다.
빛과 열은 나눌수록 효용이 커진다. 나와 대위는 각자 램프 두 개를 사이에 놓고는 서로 마주 보고 누웠다.
나는 패킷이 아닌 일반 침낭을 입느라 끙끙거렸다. 그 사이 안락함 속에 파묻힌 대위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본관은 통신병입니다. 정체가 드러나서는 안 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느껴지는 감정은 의무감.
그리고 우울함이었다.
‘만일 누군가 본관의 정체를 안다면… 얼굴을 보고, 그 신분을 안 뒤, 둘의 연관성을 깨닫는다면. 본관은 자결해야 합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믿음이었다.
초등시민학교에서 중등군사학교로 진학한 직후, 부푼 꿈을 안고 수업을 듣던 어느 때.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군국의 사람이 찾아와, 그녀를 향해 말한다.
-축하한다. 너에게서 적성이 발견되었다. 통신병이 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적성이.
통신병이 될 수 있는 적성. 그 말을 들은 소녀의 가슴이 부푼다. 들어가기만 하면 곧바로 장교가 될 수 있는, 세상에서 제일 편한 계단. 그렇게 알려진 장소.
이미 사귀었던 친구와 헤어지며, 소녀는 아주 특수한 학교에서 찾아온 교관을 따라 이동한다.
그리고 동조한다.
군국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누구보다도 감수성이 높고 공감 능력이 뛰어난 소녀들. 그들은 서로를 서로의 버팀목으로 삼아 혹독한 훈련을 견뎌냈다.
혼자서는 결코 버티지 못하겠으나, 그들의 능력은 공감과 동조다. 끊임없이 가해진 압력은 그들을 잘 맞물리는 퍼즐로 정형한다. 서로 부딪히지도 않고, 상처 입히지도 않는다. 마찰은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사치스런 일이다.
그렇게 기수별로 나뉜 이들은, 처음부터 대위로 임관한 채 세상에 나온다. 홀로 일하겠지만 그들은 외롭지 않다.
고유하나, 고유하지 않은 마법.
서로가 서로에게 닿을 수 있는 고유마도를 지니고 있으니까.
‘단, 본관이 자결할 필요가 없어지는 경우. 본관은 자결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연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은 사실. 대위는 차가우려고 노력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귀하는 현재 본관에 대한 정보를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귀하가 죽는다면, 본관은 죽을 필요성이 사라지게 됩니다.’
타인보다는 자기를 죽이기 쉬운지라, 통신병은 자결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지금처럼 서로 방심한 채 묘한 동행 중이라면.
사람을 죽이는 것 그 자체보다는, 살고자 하는 이의 저항을 이기는 게 어려운 법이니까.
‘파트락시온 장군은 육장성입니다. 육장성은 5레벨, 그들에겐 어떠한 제약도 없습니다. 만일 본관이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히고 요청한다면 귀하를 처단할 것입니다. 즉, 본관은 귀하의 명줄을 잡아둔 셈입니다. 본관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귀하를 죽이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습니다.’
“휴. 다 됐다. 이거 사이즈가 잘 안 맞네. 에구. 나도 의복 패킷 멀쩡하게 착용할 수 있었다면.”
낑낑거리며 침낭 안에 몸을 구겨 넣은 나는 애벌레처럼 데구르르 누웠다. 눈이 마주치자 대위가 겁을 먹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기에. 본관은 자결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통신병의 가장 큰 적은, 바로 그 공감 능력. 타인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그러한 능력은 통신병이라는 군국의 조형을 망가뜨린다.
어쩌면 창문 없는 방은 그들 속에 있을 정보를 지키는 동시에, 통신병이라는 부품을 온전히 보관하기 위한 시설인지도 몰랐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뭐해? 안 자고.”
“…잘 겁니다. 메타컨베이어 벨트 위에는 알람이 없으니, 시간에 맞춰서 일어나주시기 바랍니다.”
“알람이 없으면 안 일어나면 안 될까.”
“어처구니없는… 소리… 기상 시각은… 철저히….”
점점 작아지는 숨소리를 따라 대위도 점차 잠들기 시작했다. 나는 누워서 대위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의식이 완전히 사라지자 몸만 일으켰다.
…자냐? 자지?
아, 가장자리 등지고 있어서 등 시렵네.
나는 내 몫의 램프를 들어서 등쪽에다가 놓았다. 앞뒤로 램프를 쬐니 좀 살 것 같다.
침낭이 구리면 환경이라도 좋아야지. 나는 앞과 뒤에서 불빛을 쬐며 따뜻함 속에서 꾸벅거렸다.
먼곳에서 대장의 생각이 들려왔다.
‘…글러 먹은 오빠라더니, 정말이로군. 자기 춥다고 램프를 앞뒤로 쓰다니.’
대장이 아직 안 잤네.
동생을 착취하는 건 오빠의 권리다. 끼어들지 말아줬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