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2 먼 곳의 이야기. 검과 창 - 1
“하하! 요즘 사람들 참 마음에 들어. 저 늙은 공병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어이, 여동생 쪽! 공병이 나서기 전에 네가 먼저 나서려고 했지?”
이제는 저쪽에서 정체를 드러냈기에, 지목당한 대위는 급히 경례했다. 장군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위면 일신의 무력은 있겠지만, 그래도 사방이 총구면 조심해야 해! 아직 기공이 덜 여물었다면 위험하거든!”
“…영광입니다.”
내가 생각을 읽어본 결과 딱히 싸우러 나선 건 아니었지만, 대위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흐뭇하게 대위를 바라보던 장군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우님! 나서려는 용기만큼이나, 말리려는 용기 역시 필요하지! 잘했어! 야, 네가 10년만 더 젊었어도 내 제자로 삼는 건데!”
나를 제법 좋게 봐주는 모양이었다.
좋아. 여기서는 더 아부하자. 생판 처음 보는 사람보다, 자기가 인정한 사람의 아부가 훨씬 더 실감 나게 다가오는 법이니.
“저도 10년 전으로 돌아가면 어떻게든 장군님께 찾아가 가르침을 받을 겁니다.”
“이야. 아우님이 사람 기분 좋게 만드는 법을 알아! 하하하!”
장군이 철없는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콱콱 두들겼다. 그 뒤 장군은 고개를 돌려 늙은 공병을 쳐다보았다.
“노익장이 대단해! 암, 저 기사라는 것들은 댁만큼의 패기도 없어. 정말 아쉬운 일이지!”
“아아. 영광입니다, 장군님. 이렇게 뵙게 되어 대단히 영광입니다….”
늙은 공병은 지금 당장이라도 심부전으로 죽을 것 같았다. 황송해하다 못해 숨을 못 쉬던 그가 띄엄띄엄 떨어지는 목소리로 장군을 찬양했다.
“왕국을 단죄하신 분을 뵙고서도, 제가 아무것도 드리지 못하는 게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뭔. 넣어 둬!”
장군은 부담스러운 듯 손사래를 쳤다.
“단죄라니. 나는 딱히 대의가 있던 게 아니야. 그냥, 알잖아? 힘깨나 쓴다는 것들이 약한 자들만 찾아다니는 게 아니꼬워서. 어디, 진짜 결투 맛 좀 보여주고자 했지…. 솔직히, 그냥 들이받고 뒈질 생각이었는데. 마침 쿠데타가 일어나서 엉겁결에 장군이 되었단 말이야.”
그가 군국과 공모한 게 아니다.
군국이 그의 결투에 편승했을 뿐이다.
도리어 그랬기에, 쿠데타가 개인의 변덕만큼이나 발작적으로 벌어졌기에 왕국은 미처 대항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물론 그 가운데에는 군인에게 불리한 시가전을 혼자 치러낸 파트락시온의 업적이 제일 컸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장군님의 결투를 폄훼하지는 못하겠죠. 외곽에서 내성까지 홀로 진군하며 백 번의 결투를 벌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잖아요.”
“거 참, 부담스러워서 장군도 못 해 먹겠어. 누가 들으면 나 혼자 왕국 무너뜨린 줄 알겠군. 자, 어쨌든! 정체도 들켰으니!”
말을 마친 장군은 훌쩍 뛰어올랐다. 그와 보조를 맞추어 간드 대령도 창을 털고는 그 뒤를 따랐다.
“자! 즐거운 여행이었고, 이제 슬슬 헤어질 시간이야. 나는 할 일이 있거든.”
“아, 휴가라고 하셨죠?”
“말만 휴가지, 사실상 자원봉사야. 내가 잘못 버린 게 조금 크게 돌아와서 말이다. 내가 버린 쓰레기는 내가 치워야 하지 않겠나.”
거기까지 말한 장군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쯧. 재능은 충분하고 마음가짐도 잘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이 어떻게 될지 잘 몰라.”
파트락시온 장군의 기억을 읽어본 결과, 그가 막으러 가는 ‘그들’은 비대칭적인 전력을 지닌 흉악범이다.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 그리고 수인 두 명으로 구성된, 군대조차도 막지 못한 규격 외의 강자들. 싸웠을 때의 손해가 워낙 커서 '적극적인 교전회피'라는, 사실상 도주 명령이 내려올 정도의 괴물이 군국을 활보하고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누구나 예상하겠지만, 내가 아는 그들이 분명하다.
그런데 왜 여기 있지?
“어쨌든, 나는 슬슬 이쯤에서 내려야 해. 여기서… 야, 간드. 어디로 가야 하지?”
마침 지도를 꺼내 펼쳐보던 간드 대령이 대답했다.
“팔카리스 근처 주둔지에 방문하여 정보를 얻고 장비를 챙기시죠.”
“좋아. 어쨌든. 이 근처라는 거지.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군.”
장군은 우리가 미처 인사하기도 전에 미련도 없이 훌쩍 뛰어내렸다. 간드 대령도 그의 뒤를 따랐다.
분명 메타컨베이어 벨트는 꽤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는데, 그가 벨트 위에서 땅으로 내려앉을 때는 모든 속도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땅을 뒹굴거나 휘청거리는 꼴사나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장군과 그의 부관은 조그만 언덕에서 뛰어내린 것처럼 태연하게 걸어갔다.
“아아… 장군님.”
장군의 뒷모습을, 늙은 공병이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거리는 순식간에 멀어져서 어느새 보이지 않을 지경까지 되었다. 나는 대위를 향해 말을 걸었다.
“크으. 살면서 파트락시온 장군을 다 만나네요. 생각보다 괜찮은 분인데.”
대위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긍정. 다만, 사소한 규칙 위반이 걱정됩니다. 자의적으로 휴가를 사용하셨으니.”
“뭐 어쩔 거예요? 수틀린다고 나라 뒤엎은 사람인데. 지금이 오히려 성질 죽인 것일 수도 있어요.”
“긍정.”
바람과도 같은 인연이었다. 그는 괜찮은 사람이었고, 덕분에 일도 수월하게 풀렸다. 거기다 옛 친구들의 행적도 들었고.
그나저나 회귀자는 이번 회차 군국 부수기를 하려고 그러나. 왜 군국에서 행적을 다 알리며 배회하고 있지?
뭐, 그래도 생각이 있다면 수도까지 당당하게 걸어오지는 못할 테니. 나랑 만날 일은 없을 거다.
이대로 반나절만 가면 아미텐그라드, 그곳에 도착하면 어디로 향했다고 또 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갑자기 궁금해지네. 뭐하고 있으려나.
***
거점 도시, 팔카리스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이 공존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몇 시간 전, 경보가 울렸다.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탄탈로스에서 기어 나온 흉악범이 현재 아미텐그라드를 향해 일직선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그 경로에 팔카리스가 존재한다는 끔찍한 사실을 알렸다.
몇몇 발빠른 이들은 냅다 도망갔고, 도망칠 여력이 없는 이들은 몸을 숙인 채 방 안에 틀어박혔다.
제발 흉악범들이 쾌락살인마는 아니기를 빌면서.
아니긴 했다.
“제일 큰 방 내놔. 쉴 거니까.”
“드, 드리겠습니다!”
“얼마야?”
“네? 공무 중 군인이 아닌 여행객에게 대형실은 1박에 1500알케….”
“자.”
죽음을 각오하고 자기 위치를 사수하던 보급관은 1만 알케짜리 연금화를 받았다. 보급관이 거스름돈을 줄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있는 사이 셰이가 손을 내밀었다.
“선금이야. 망가진 거 있으면 그걸로 때워.”
보급관은 좋든 싫든 자기 의무에 충실했다. 대형실의 열쇠가 셰이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방에 짐을 푼 셰이를 향해 나비가 공물을 보챘다.
“냐아아. 오늘 자, 오늘 자 공물을 주라냐!”
“….”
셰이는 말없이 오늘치 마력초를 꺼내 나비의 입에 물려주었다. 티르칸쟈카는 그 모습을 유심히 보다가 말했다.
“슬슬 고양이의 왕을 향한 일에 성의가 없어지는구나. 귀찮은 것이냐?”
“…아, 아니, 아직은 괜찮아. 단지.”
“단지?”
셰이는 마력초를 흠뻑 빨아들이며 기분 좋게 갸릉거리는 나비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도 영원히 나비 뒷바라지를 할 수는 없으니까. 어느 시점엔 나비와 헤어져야 하는 날이 올 거야. 그러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
“정말 허튼 고민이로구나.”
티르칸쟈카는 혀를 차고는, 자세를 가다듬으며 셰이를 향해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네가 무엇을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이냐? 제 발을 가진 생물은 제 갈 길을 따라 걷는 법이다. 떠난 이후 어떤 길을 걸어갈지는 네 책임이 아니니. 적당히 흘려보낼 줄 알아야….”
분명 연륜을 담아 낸 조언이었으나, 말하던 도중 티르칸쟈카는 누군가를 떠올리고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정작 그녀마저도 제 길을 걸어간 이를 뒤쫓고 있던 것이다.
이번에는 셰이가 심심한 위로를 건넸다.
“괜찮아. 원래 자기 흠은 잘 안 보인대.”
“…참 고맙구나! 그래서, 아녀자만 있는 방에 언제까지 있을 예정이냐? 일을 다 보았으면 나가거라!”
티르칸쟈카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셰이는 작게 신음하며 이 방 안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사실, 셰이가 구태여 이 방에 남아있을 필요는 없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며, 군국 육장성급이 아니라면 흠집조차 낼 수 없을 테니.
티르칸쟈카라는 믿을만한 전력이 있는 이상, 이들이 어디로 튈까 걱정이 되지도 않았고.
하지만 자꾸 남자로 취급되는 것도 이제 귀찮다. 셰이는 슬슬 성별을 드러내야 할까 고민했다. 조금 극단적이지만, 옷을 벗은 모습이라도 보여주면 오해가 풀릴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맨살을 보이냐는 건데….
티르칸쟈카가 워낙 보수적인 터라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셰이가 언제 온천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고민하는 때였다.
낯선 기척을 느낀 티르칸쟈카가 고개를 돌렸다.
“손님이 찾아왔다, 셰이…. 흐음? 문 앞까지 오더니 그냥 돌아가는구나.”
“아. 대충 누군지 알 것 같아.”
셰이는 문을 열자, 손님 대신 가지런히 놓인 편지 한 장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셰이는 코옷음을 치며 편지를 잡아들었다.
“레지스탕스 놈들이야.”
“레지스탕스라고 하면, 부흥군 같은 이들을 말하는 것이냐?”
“정확해. 우리 이야기를 듣고는 접촉해온 모양인데.”
“이야기라니? 우리는 무저갱에서 나오지 않았느냐?”
“오면서 다섯 중대를 제압하고 만물의 영장 기지 두 개를 박살냈잖아. 그 소문이 흘러갔나 봐.”
불사자 라쉬와 칼리스 전 중령은 군국을 멀리 도는 방향으로 움직이기로 결정을 내렸다. 라쉬는 선생에게 안부를 전해달라 말하며 멀어졌다.
휴즈를 찾으러 가는 것을 일차 목표로 삼았으나, 그와 별개로 셰이는 효율을 중시하는 성격이었다. 지나가는 길에 만물의 영장 기지가 보이면 살짝 들려서 우지끈 부수고 다시 갈 길을 가곤 했다.
“소식도 참 빠르구나. 여기까지 오는데 지체한 시간도 얼마 되지 않거늘.”
“군국에는 통신병이나 통신기기도 있고, 다른 곳도 나름의 수를 강구했으니까.”
셰이는 피식 웃으며 편지를 찢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태도에 티르칸쟈카는 의아해했다.
“기이하구나. 너는 군국이란 나라를 대단히 증오하는 줄 알았건만.”
“맞아. 나는 군국을 증오해.”
셰이가 손가락을 튕겼다. 불길이 솟구치며 편지를 감쌌다.
재도 남지 않고 타 사라지는 편지를 보며 셰이가 중얼거렸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대안이 없다는 점이 제일 증오스러워.”
셰이는 군국을 무너뜨리려고 한 적이 있었다. 군국이라는 빌어먹을 나라는 언제나 셰이가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적이었고, 이것을 넘어서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공했다.
철저한 준비와 몇 회차에 걸친 노력 끝에 셰이는 한 번 군국을 멸망시켰다. 그녀는 절창 파트락시온처럼, 새로이 만들어진 자유공화국의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씁쓸한 뒷맛을 삼키며 나라를 떠났다.
그 뒤, 다시는 자유공화국의 땅을 밟지 않았다.
모든 회차를 통틀어서.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들, 구시대의 잔재들, 그저 군국을 증오하는 이들. 레지스탕스는 이 세 집단의 집합체야. 태생도, 꿈도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서 그리는 나라는… 모두 평등하고 행복한 세상.”
셰이의 말을 듣자마자 티르칸쟈카는 그들의 본질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 군상은 몇백 년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구나, 생각하며.
“답 없는 이상론이로구나.”
“맞아. 다들 목표만 있고 길을 마련해두지 않았지. 그런 이들이 현상유지라도 할 수 있을 리가 없어….”
정확히는, 직접 보았다.
혹사당하던 노역자를 해방하고, 대신 보수를 주며 일꾼을 부리기로 했다.
특히 가장 중요한 메타컨베이어 벨트. 군국의 핵심 시설인 그곳만은 현상유지라도 해야 했다. 나라를 운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벨트가 멈추는 데에는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다.
메타컨베이어 벨트는 편리하고 유용하며 필수 불가결한 시설이지만, 기착지에서 한 번 화물을 놓치면 일주일 넘게 행방불명이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한 치의 실수라도 있으면 그만한 부담이 나라에 걸린다.
일주일의 실종, 그 때문에 늦어지는 일정, 늘어나는 비용과 바닥을 치는 신뢰.
이 일의 중요성을 깨달은 일꾼들은 벨트를 인질로 삼아 더욱 나은 대우를 요구했다. 일꾼들을 탓할 수도 없을 것이다. 보수가 얼마라고 한들, 그 노역은 실제로 살인적인 수준이었으므로.
군국을 부정하고 나온 상냥한 나라는 그들에게 끌려다녔다.
핏줄에 기름이 꼈다. 나라 전체가 삐걱거렸다.
결과적으로 나라를 망가뜨리게 된 셰이는, 일년 뒤 달라진 나라를 눈에 담고는. 크게 상심하며 나라를 떠났다.
“…그깟 놈들에게 맡기느니, 그냥 만물의 영장만 쏙쏙 골라 먹고 나머지는 내버려 두면 돼. 그리고 군국은 행동 원리만 파악하면 그다지 귀찮지 않으니까.”
“셰이 너는 그들의 행동 원리를 파악했다는 말이냐?”
“당연하지. 봐봐. 대놓고 수도로 향하고 있는데 나라가 전력을 다해서 막아서지 않잖아.”
“그러고 보니, 특이한 경우이긴 하구나. 왕성을 향해 진군한다면 모든 힘을 집중해서 막아서야 하거늘.”
이유는 너무 간단했고, 그만큼 허무했다. 셰이가 저번 회차에서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허탈해했는지.
그래서 얼마나 군국을 더 증오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다섯 중대를 깨부수었지만 한 명도 죽이지 않았지. 여기서 군국은 결론을 내린 거야. 제압하기엔 너무 강한데, 그렇다고 전력을 집중하기에는 우리 넷이 너무 사소하니까. 타산이 맞지 않으니 적극적으로 방치하는 거야.”
적극적인 교전회피. 싸워봤자 수지가 맞지 않으니 아예 싸우지 마라.
그야말로 효율성에 미친 나라다운 판단이었다.
“정 사생결단을 내겠다면, 육장성 중 최소 세 명은 모아서 찾아올걸. 어설프게 전력을 투입했다가 손실이라도 나면 국가적인 손해니까. 하지만 육장성쯤 되는 전력을 그 위치에서 함부로 뺄 수 없으니, 할 일 더럽게 없는 육장성 아니면 찾아오지 않겠지….”
그렇게 셰이가 중얼거릴 때였다.
아지가 귀를 쫑긋거렸다. 나비가 인상을 찌푸리며 털을 곤두세웠다.
짐승과 마찬가지로, 셰이와 티르칸쟈카 역시 그 노골적인 기세를 느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셰이는 올 게 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왔네. 할 일 더럽게 없는 육장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