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53화 (153/384)

EP.153 먼 곳의 이야기. 검과 창 - 2

이 사태를 예견한 셰이와는 달리, 티르칸쟈카는 제법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래 봐야 고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수준이었지만, 지금껏 군대를 박살 낼 때 보였던 무심한 태도와는 또 달랐다.

“범상치 않은 기세구나. 마치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아니야. 아마 나일걸.”

셰이가 천앵과 지잔을 챙겨 들며 대답했다.

“여기서 아지와 나비를 보고 있어 줘. 나 혼자 갔다가 올게.”

“위험하지 않겠느냐?”

“그래야만 해.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거든.”

셰이는 크게 한숨을 내쉰 뒤, 좁은 창문 너머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기세가 느껴지는 곳으로 곧장 달려갔다.

예상했던 대로 그곳에는 파트락시온 장군이 서 있었다. 파트락시온은 나올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듯 위풍당당하게 서서는 셰이를 반겼다.

“여. 소년. 오랜만이다.”

그의 애병이 아닌 평범한 제식 창을 손에 들고 있었다. 특별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필수요건만 간신히 충족한 창.

그러나 이미 그의 강함은 무기를 초월한 지 오래. 어떤 창을 쓰든 지극히 위험한 존재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적당한 긴장감이 셰이에게 찾아왔다. 셰이가 인사했다.

“오랜만이야, 절창.”

“여전히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일세. 쯧, 그래도 싹수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다른 소개는 필요없었다. 둘은 구면이었기에.

셰이는 무저갱에 떨어지기 위해 파트락시온을 이용했다.

이번 회차, 셰이는 탄탈로스에 잠입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힘을 다 되찾지 못한 초창기, 탄탈로스에 도달하는 법을 억지로 캐내기에는 취할 수 있는 수단이 적었다.

그래서 셰이는 육장성, 파트락시온을 불러냈다.

방법은 간단했다.

적당히 번화한 도시에 자리를 잡는다. 내기 결투를 하자고 제안하며, 호기심에 접근하는 손님을 전부 쓰러뜨린다.

그렇게 쓰러뜨리다 보면 군대가 막으러 온다. 군국은 사적인 결투를 용납하지 않으니까.  그들도 쓰러뜨린다.

어느 순간, 군국은 병력을 보내지 않는다. 대신 때아닌 결투 소식에 흥분한 육장성 중 한 명이 한달음에 달려와서는 셰이와 겨루었다.

적당히 싸우다가, 셰이는 더 강한 상대와 방해 없이 겨루고 싶다고 말했다. 파트락시온 장군은 그 뜻을 높게 사서는 친절하게 셰이를 무저갱 안으로 안내해줬다.

“기량은 충분했다. 최소 장성감이라고 생각했지. 어쩌면 최연소 육장성이 될 수도… 아니, 최연소는 무린가. 어쨌건, 육장성이 칠성이 될 수도 있겠다고 기대했다.”

붕. 파트락시온이 창을 길게 휘둘렀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서늘했다.

“하지만 아주 거창하게 저질러줬더구나. 장성을 죽이고 지선의 오른팔을 자른 뒤, 나머지 죄수들을 끌고 밖으로 나와?”

양손으로 창을 고쳐잡은 파트락시온에겐, 깊은 실망과 적의만이 가득했다.

“에본 그 녀석, 말하는 꼬라지가 못마땅하긴 해도 내 전우다. 내 탓에 전우가 죽었으니, 그 정리는 나의 몫. 그의 넋을 이 결투로 기리마.”

싸움은 굳이 마다할 생각이 없다. 그러나 셰이는 불필요한 오해를 사는 것도 원치 않았다. 셰이가 대꾸했다.

“그쪽이 먼저 나를 죽이려고 했는데도?”

“뭐? 에본이 왜 굳이 탄탈로스까지 들어가서 너를 죽이려고 하냐?”

“그 자식, 만물의 영장이거든.”

“뭐?”

주춤한 파트락시온이 다시 창을 땅에 짚고는 되물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래.”

“걔가?”

“어.”

“왜?”

“몰라.”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낸 파트락시온은 곤란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아. 그래서 그놈이 자꾸 부하를 갈아 끼우던 거구나. 음. 왠지 사망률이 압도적으로 높더라.”

고민은 짧았다. 파트락시온은 창과 함께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지선의 팔을 자른 건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잔악무도한 행위!”

“나는 붙여주려고 했어. 그쪽에서 거절하던데.”

파트락시온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붙여줘? 그게 되냐?”

“잘하면.”

“그런데 왜 안 했냐?”

“싫다는데 어떻게 해?”

“그걸 어떻게 믿어?”

“죽일 생각이었으면 목을 날렸지.”

“것도 그렇네.”

끙. 헛되이 머리만 긁적인 파트락시온이 짜증스럽게 외쳤다.

“자. 어쨌건. 너에게 대충 명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도! 네 범죄행위가 사라진 게 아니야!”

“구차하게 해명할 생각 없어. 그냥 억울한 게 싫을 뿐이야.”

“하지만, 타협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

창을 다시 땅에 짚은 파트락시온이 은근히 물었다.

“너 장성 할래?”

영입 제안 치고는 참으로 소박한 발언이었다. 셰이는 잘못 들은 사람처럼 반문했다.

“하아?”

“너 정도 되는 힘이라면 군국도 반길 거다. 거기다, 너는 순수한 무투파가 아니지? 군국은 언제나 너 같은 비대칭전력을 바라고 있다.”

군국은 기사들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세운 나라. 군인을 모으고 총을 쥐여주며 사방팔방에서 전력을 끌어모으고 있다.

다만, 전쟁에 있어서 그러한 질적 향상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강함이 일정 경지에 이르면, 힘은 크기 성질이 아니라 세기 성질로 변모한다. 잡졸 천 명이 있어도 경지에 이른 강자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 시간이나 끌면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게 비대칭적인 전력. 상황을 바꾸고 판도를 뒤엎는 비장의 카드.

역사가 짧은 군국에는 그런 신비와 비밀이 부족했고, 전력을 확충하기 위해 그러한 존재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거절할게.”

셰이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파트락시온 장군은 그 단호한 태도에 표정을 흐렸다.

“…그러냐?”

파트락시온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나한테는 딸이 하나 있다. 딱 너만 한 나이지. 참, 귀여운 아이인데 말이야. 나도 늙어서 그런가, 앞길 창창한 아이와는 싸우고 싶지 않아.”

한때, 파트락시온은 혈기왕성한 젊은이였다. 왕국을 상대로 결투를 신청하는 무모한 행동은 어지간한 패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장군이라는 위치에 오르고, 전쟁도 몇 번 치르면서 그는 나이를 먹었다. 책임질 게 많아질수록 그의 행동 역시도 무거워졌다.

누구보다 젊게 살았던 파트락시온은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무엇보다, 나는 네 태도가 마음에 든다. 세상 모든 것과 싸우고자 하는 의지가 보여. 너 같은 아이들이 세상을 바꾸는 법인데.”

“자기 자랑하는 거야?”

“잃어버린 청춘을 부러워하는 거다, 이 녀석아. 쩝, 나는 휴가 나온 몸이고, 너를 잡아도 되고 안 잡아도 돼. 듣자하니 지금까지 아무도 안 죽였다는데, 그냥 넘어가 줄 수도 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파트락시온은 무언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힐끔거렸다. 그 뜻을 알아챈 셰이는 도전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쌍검을 들었다.

오른손에는 천앵, 왼손에는 지잔.

두 자루 보검이 한 인간의 손에서 숨을 죽였다.

“그건 아쉽지. 저번에는 한 수 가르침을 받았는데, 무저갱 안에서 얼마나 강해졌을지 궁금하지 않아?”

“…그래. 이래서 마음에 든다니까.”

휘릭, 착.

파트락시온은 기쁘게 창을 양손으로 쥐었다. 전신으로 기세를 뿜어낸 그는 희열에 찬 목소리로 창끝을 겨눴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제법 잘 싸우거든. 어떻게든 죽지는 않게 해주마.”

“나는 힘조절을 잘 못 해서. 죽을 수도 있어.”

“하하하! 그 건방짐! 아주 마음에 들어!”

그리고 직후, 빛살이 허공을 갈랐다. 셰이는 눈을 보랏빛으로 물들이고는 천앵을 들어올렸다.

양팔에 묵직한 무게가 실렸다. 칼날에 걸린 순간 창날이 뱀처럼 방향을 바꾸어 셰이의 목을 노렸다.

죽지는 않게 해준다더니.

투덜거린 셰이는 이를 꽉 물며 창을 튕겨냈다. 서로의 기공이 부딪히며 새빨간 스파크가 퍼졌다.

파트락시온은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분명 방금 전 창날이 목을 노렸는데, 그는 어느새 열 발자국이 넘는 거리에 있었다.

창대로 바닥을 한 번 찍고, 뒷발을 세게 디딘 뒤. 파트락시온이 크게 외쳤다.

“좋아! 인사는 되었으니 싸우자! 그 이상의 대화가 필요한가!”

“흥. 그래. 바라던 바야!”

셰이는 호기롭게 외치며 천앵을 머리 위로 들었다.

지잔은 방패다. 정확히는, 셰이에게만 유리한 지형지물이다.

깡, 거친 쇳소리. 절창의 창도 지잔을 밀어내거나, 꿰뚫거나, 튕겨내지 못했다. 파트락시온의 기공을 두른 창날은 강철도 끊고 부술 힘이 있었으나 지잔엔 흠집 하나 없었다.

철벽의 방어 앞에서 장군은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 보물이군! 그때는 못 봤는데!”

“저 아래에서 주워왔어!”

창과 몸 사이에 지잔을 두어 경로를 제한한 셰이는 즉각 짓쳐들어가며 천앵을 휘둘렀다. 초속의 검이 파트락시온을 노렸으나, 파트락시온은 씨익 웃으며 창과 몸을 뒤집었다.

챙, 창대가 길게 불타올랐다. 기공을 잔뜩 머금은 창과 검이 불티를 내며 마찰했다.

셰이는 천앵의 가벼움을 살려서 손목을 뒤집었다. 창대를 쥔 손을 노릴 작정이었다.

천반경이 경고를 토했다.

순간적으로 섬뜩함을 느낀 셰이는 지잔의 뒤로 몸을 숨겼다.

키잉. 창이 천앵과 지잔을 동시에 스치는 궤적을 정확히 찔렀다. 한 줄기 뱀처럼 빈틈을 비집는 움직임이었다.

“의도가 보인다. 가벼운 검으로 속도 싸움으로 몰아간다고? 이봐, 창은 세상에서 가장 방어적인 무기라고. 방패는 방어구니까 빼고!”

한 번 막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창날이 수십 개로 갈라졌다. 칼날은 닿지 않고 창끝만이 닿는 거리에서, 비겁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파트락시온은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간격이 너무 길고 빠르다. 셰이는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기에 바빴다.

“거리란 그 자체로 가장 훌륭한 방어수단! 무기의 장점은 이렇게 이용하는 거다!”

접근하려고 해도, 멀어지려고 해도 마땅치 않았다.

기묘한 보법이었다. 발을 떼지 않고도 그의 발과 다리는 땅을 가볍게 미끄러졌다. 그러면서도 원할 때는 뿌리 박은 듯이 땅을 딛고서 강맹하게 창을 내질렀다.

바람조차 꿰뚫는 창에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천반경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몸에 구멍 두 개는 났으리라. 파트락시온은 연신 셰이를 몰아붙이며 외쳤다.

“하하! 어때, 총은 몰라도! 창이 검보다는 좋아!”

“천검기, 도룡참!”

“어?”

그런 파트락시온 위로, 길이가 10m는 될 법한 거대한 칼날이 떨어졌다.

공간을 있는 대로 펼쳐서 거대화한 천앵은 거인이 휘두르는 칼과 같았다. 허리를 쪼개려 드는 칼날을 창대로 막은 순간, 거센 반발력이 휘몰아치며 파트락시온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잠깐. 이러면 창의 장점이?”

크기가 커졌으면 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한없이 가벼운 천앵은 기껏해야 같은 부피의 공기만큼의 무게만 지니고 있었다. 파트락시온은 길이의 우위를 잃고는 뒤로 휙 물러났다.

셰이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거리가 벌어지자 천앵을 휘두르는 대신 지잔을 땅에 박았다. 콰직,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땅이 쪼개지며 지잔이 움푹 들어갔다.

“지곤류, 뾰족엄니!”

그리고 그대로 크게 휘저었다.

파트락시온의 발밑이 흔들렸다. 직후 땅속에서 거대한 가시가 솟구쳐서 그를 날려보냈다. 지잔의 권능, 대지술이었다.

“와핫! 정말 엄청난 무기로구나!”

순간적으로 다리를 굽혀서 충격을 받아낸 파트락시온이 허공에서 자세를 다잡을 때, 셰이도 천앵을 길게 늘리며 지잔에 꽂았다.

천앵과 지잔의 합일. 지잔을 포신으로, 천앵을 포탄으로 삼은 오의.

“천지검곤, 오의.”

지평선 쪼개기.

보이지 않는 참격이 파트락시온을 세로로 쪼갰다. 위기감을 느낀 그가 창을 비스듬히 들어 막았으나, 곧이어 세차게 튕기며 저 멀리 나가 떨어졌다.

셰이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휘몰아치는 바람을 다잡으며, 붉은 눈으로 어둠 너머를 노려보았다.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다. 파트락시온 장군을 일부러 죽여서 군국과 완전히 척을 지는 것도 내키지 않고, 천앵의 공간을 다 쓰면 이후에 있을 전투에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파트락시온이 정말 위기감을 느끼면 모종의 수로 대응했을 것이다.

그는 조금이지만… 이치에 닿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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