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8 양심 상자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자! 맛있게 먹으렴!”
라고 외치며 안나가 그릇에 담아준 건, 다른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뭔가 덩어리진 볶음 음식이었다.
생김새는 세상 그 어느 음식도 닮지 않았다. 기름으로 살짝 번들거리는 게 볶았다는 사실만 묵묵하게 알려줄 뿐.
대위는 그릇을 말없이 빤히 바라보았다.
익숙한 반응이라, 안나가 크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생긴 게 좀 그렇지? 하지만 이곳은 이런 음식점이라서 말이야. 배를 채울 건 콩 통조림밖에 없는데, 그 끔찍한 음식만 먹으면 가끔 내 혀를 자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니. 그럴 때 사람들이 여기 찾아오는 거란다. 콩 통조림이랑, 더해 먹을 재료 하나 들고.”
안나는 수프까지 떠서 우리 앞에 내려놓았다. 역시 이름 모를 수프에선 온갖 복잡한 향기가 났다. 들어간 재료가 최소 두 자릿수는 될 것이다.
이 난해한 향이 식욕을 돋우는 건 순전히 안나의 기량 덕분일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걸 모아서 대강 볶거나 끓여서 새로 음식을 만들어낸단다. 일종의 품앗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이 서로 도와, 그렇게 콩 통조림과는 다른 새로운 맛을 내는 거지. 잡탕볶음이라 생긴 건 이래도 맛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츄릅. 헛!”
그러나 대위는 세상에서 가장 콩 통조림을 많이 먹어본 사람 중 하나. 음식의 외견 때문에 못 먹는 게 아니었다. 이미 대위의 신경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릇을 향해 온통 쏠려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가에서는 침이 뚝뚝 떨어졌다.
“안 먹는 게 아니었니? 그런데 왜 지켜보고만 있…. 아.”
안나는 그제야 대위의 손에 어떤 식기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남은 식기를 찾아 찬장을 뒤적거렸다.
“원래 자기 식기는 자기가 지참하는 게 룰이란다. 그릇은 통조림 캔을 두드려 펴서 만들면 대강 마련할 수 있지만, 그런 식으로는 스푼이나 포크를 만들기 힘들어서.”
“규칙, 말입니까?”
규칙이라는 말에 반응한 대위가 격하게 마다했다.
“만일 그것이 규칙이라면, 본관이 따로 나가서 마련해오겠습니다.”
“하지만, 가끔 이 규칙을 모르고 찾아오는 사람을 위해서 한두 개쯤 예비를 마련해둔단다. 자, 받으렴.”
“규칙은 규칙이잖습니까?”
“처음 오는 사람에게는 식기를 제공하는 게 내 나름의 규칙이야. 팔 아프니까 빨리 받으렴. 조금 전까지 요리하느라 팔이 떨어질 것 같아.”
대위는 화들짝 놀라서 재빨리 받아들였다. 안나는 인자하게 웃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대위를 푸근하게 바라보았다.
“착한 아이구나.”
느닷없이 칭찬을 들은 대위는 스푼을 꼭 쥔 채 생각에 잠겼다.
‘그렇지 않습니다. 본관은 임무를 미루고 있습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을뿐더러, 규칙을 조금씩 어겨가는 중입니다. 거기다… 만약 본관이 임무에 충실하려면. 본관은….’
이토록 복잡한 상념도, 인간의 원초적인 식욕 앞에서는 금세 자취를 감췄다. 대위는 흔적만이 남은 생각을 한마디로 흘려냈다.
“…부정.”
숟가락이 아주 어렵사리 잡탕볶음으로 향했다. 몇 번 주저하던 대위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잡탕볶음을 떠서 입에 넣었다.
요리가 혀에 닿은 직후, 순간적으로 대위의 표정이 잡아당긴 것처럼 쫙 펴졌다.
‘…대단히 맛있습니다! 이것은, 군국특선조리법 99가지 레시피에서도 발견하지 못한 맛입니다!’
볶으면 신발도 맛있어진다고 한다. 원래부터 먹을 만한 콩 통조림을 볶았으니 얼마나 괜찮을까.
거기다 안나는 이렇게 보여도 한때 온갖 요리를 접한 사람이었다. 맛을 미세하게 조정하는 건 그녀에게 있어서 손쉬운 일.
아니, 오히려 그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나저나.
“안나. 내 숟갈은?”
“너는 이곳에 오는 게 처음도 아니면서 뭘 수저를 찾고 있니? 없으면 손으로 처먹으렴.”
“쳇. 다들 나한테만 가혹해.”
어쩔 수 없이 내 숟가락을 써야겠네. 씻기 귀찮아서 안 꺼내려고 했는데. 나는 가방에서 내 전용 숟갈을 꺼낸 뒤 잡탕볶음을 퍼먹기 시작했다.
홀로 숟가락을 들고 있으니 안나가 차게 식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와중에도 자기 건 챙기고 있었구나. 지금까지 저 아이는 무엇으로 음식을 먹었니?”
“통조림 뚜껑을 살짝 구겨서.”
“저 아이가 그렇게 먹게 놔두고, 너 혼자? 참 짓궂은 아이구나.”
“에이. 칭찬하지 않아도 돼.”
“넉살 하나만큼은 대단해….”
한숨을 내쉰 안나는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대위를 차분하게 지켜보았다. 어지간히 굶주렸는지, 벌써 대위의 그릇은 바닥을 보였다.
안나는 한 그릇 더 줄 요량으로 철판 위의 잡탕볶음을 덜어냈다.
“뭔가 안쓰러워 보이는 아이구나. 그래도 너를 믿고 따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제법 잘 대해준 모양이구나.”
“콜록! 콜록!”
앗, 잠깐. 사레들었어.
내가 콜록대는 사이, 안나가 한층 더 식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저런 아이를 놀려먹거나 한 건 아니지? 네가 그만한 분별력은 있다고 믿는단다.”
“어험험. 물론이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도움을 주었다고.”
거짓말은 아니다. 미필적 고의라지만 대위도 내 덕분에 스트레칭을 할 수 있었으니, 그나마 건강을 유지한 건 다 내 덕분이 아닐까?
“정말 도움을 준 게 맞니? 갖고 논 게 아니라?”
“아하하.”
그런데 이건 통신병이, 아니, 군국이 나빠. 대위라고 말하면 얼음 동동 띄운 맥주를 마시며 호화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누가 골방에 틀어박힌 채 통신만 한다고 생각해?
안나의 시선이 한층 의심스러워졌다. 이대로 먹으면 얹힐 것 같아, 나는 안나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가방에서 숨겨두었던 그것을 꺼냈다.
“아, 안나. 이거. 먼저 줬어야 했는데 깜빡했어.”
“뭐니?”
“뭐긴, 여기 올 때는 잡탕볶음이나 찌개에 넣을 재료 하나씩 들고 오는 게 룰이잖아.”
“새삼스레….”
그렇게 내가 슬그머니 내민 건, 회귀자의 향신료 중 내가 빼돌린 물건이었다. 안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 향신료를 살피다가, 화들짝 놀라 재빨리 품 안에 숨겼다.
향신료의 가치를 알아챈 안나가 목소리를 낮추고 되물었다.
“…뿌리는 금가루. 이걸 어떻게?”
“먼 곳에서 온 귀인이 주고 갔어.”
“잠깐 못 보는 사이에 도대체 뭔 짓을 하고 다녔던 거니….”
아주 잠깐 고민하던 안나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너무 비싸. 특히 이곳 사람들이 먹기엔.”
“누가 금가루를 먹으래? 팔아서 적당히 수수료 떼고 남은 거 나 줘.”
한때, 안나는 왕국에서도 알아주는 메이드였다. 자기가 곧 무력이자 권력인 기사 귀족들은 언제나 믿을 만한 가신을 모으기 일쑤였으며,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가신은 천금을 주고도 얻지 못하는 귀중한 인재였다.
안나는 유력한 기사 귀족의 밑에서 기미와 요리까지 도맡은 인물. 지금은 다 내려놓고 모두의 밥을 해주고는 있지만, 이 향신료의 가치를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다.
군국이 나라를 꽉 잡고 사치품에 높은 가격을 매기는 지금, 안나 정도는 되어야 살 수 있는 곳에 정가에 팔 수 있을 거다.
안나가 깊은 고민 끝에 말했다.
“10%만 떼갈게. 괜찮니?”
“10%? 참나. 손도 작아. 이래서야 애들 밥 먹이고 살겠어?”
“…너는 사람을 화나게 하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구나. 그래, 적게 가져갈 테니 네가 가지렴. 저 아이를 돌보는 대가라고 생각해.”
마침 뒤쪽에서 다른 주문이 들어왔다. 안나는 그쪽을 향해 몸을 돌리며, 대위의 앞쪽으로 잡탕볶음이 가득 든 그릇을 내밀었다.
“그래도, 너는 어딘가에서 안쓰러운 아이들을 하나둘씩 주워오고는 했지. 나는 너를 믿는단다. 그러니까 저 아이나 잘 돌봐주렴.”
“걱정하지 마. 내가 군국 뒷골목 투어를 확실하게 시킬 테니까.”
그렇게 배를 채운 이후. 나를 알아보는 사람과 몇 번 인사를 나눈 채 거리를 걸었다.
나는 뒷골목에서 꽤 살아온 만큼 두루두루 친했고, 나와 친분을 지닌 이들 역시도 허물없이 대해왔다.
처음에는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대위는, 점차 인사하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자 의아해했다.
‘말도 안 됩니다. 어떻게 이러한 사람에게 인망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내 인망을 의심하기 이전에 네 고정관념을 의심하는 게 어떨까? 내가 왜 인망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거야?
어느덧 시간은 7시. 조금 이르기는 하지만, 먼 여행길을 다녀온 우리에겐 휴식이 필요했다. 나는 내 보금자리로 대위를 안내했다.
자, 이제 미루고 미루었던 확인의 시간이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내 집은 어떤 꼴이 되어 있을까?
“저, 지금 엄청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어요. 선물상자를 까기 직전의 어린아이도 저보다는 덜 두근거릴걸요.”
“귀하의 집으로 안내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왜 두근거린다는 말입니까?”
“아아. 모르시는구나. 뒷골목에서 흔히들 들리는 이야기인데 말이죠.”
15-5구역의 낯익은 이층집. 그리 높지 않은 건물이지만 설계상의 결함으로 이 위에 층을 더 얹지 못한 구식 건물. 덕분에 삶의 질이 압도적으로 올라간 이 건물에 내 집이 있다.
나는 계단을 오르며 설명을 계속했다.
“실수로… 크흠. 억울하게 잡혀서 먼 곳에 노역갔다가 돌아온 사람은, 신을 믿지 않는 배교자조차 자기 집에 들어오기 전에 양손을 모으고 기도한대요. 내가 없는 동안 누군가 내 집을 털지 않기를 기원하며.”
2층 오른쪽 복도 세 번째 방. 나의 보금자리이자, 지난 몇 개월 간 빈집이었던 곳.
“이 잡범들의 천국에서, 빈집이란 그냥 심심할 때 들려서 돈 되는 거 챙겨가는 보물상자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빈집에 남아있는 물건이 곧 이 군국의 양심. 빈집은 곧 양심 상자인 셈이죠.”
이 군국 뒷골목의 양심 상자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군국의 양심은 다 도둑맞았네요. 하긴, 몇 개월을 비웠는데 멀쩡할 리 없지.”
군국은 잃어버린 재산을 찾아주지 않는다.
물론 치안 관리를 게을리한다는 뜻이 아니다. 도둑이 현행범으로 잡히면, 보통 지금까지 도둑맞은 다른 물건에 대해서 덤터기를 쓰기 때문에. 도둑질도 어지간한 각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훔쳐 가는 돈 한 푼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노역장에 끌려가느라 빈집에는 해당사항 없다.
신고할 사람이 없으니까.
“캬, 새 집 같네.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내 집은 난장판이면서, 동시에 깨끗했다. 가져가기엔 너무 커다란 가구 몇 개를 제외한 다른 모든 물건이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새끼들. 깨끗하게 밀어놨구나.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지내기 어려워 보이네요.”
방의 처참한 흔적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으니, 대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 잘 못 들었습니다? 무엇이 어렵다는 말입니까?”
“네?”
“모포 하나만 있으면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만. 나가서 모포 하나만 구입해 오겠습니다.”
여기서? 지낸다고? 노숙이랑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어떻게?
‘본관이 지내던 창문 없는 방보다 넓습니다. 그건 본관의 직업적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그래도 이곳에는… 창문이 있군요. 본관은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제발, 가끔가다가 갑자기 비련의 드라마를 찍는 것 좀 그만해줘. 짠해서 뭐라 할 수가 없잖아. 군국 대위라는 직함만 없었으면 그냥 불우이웃이다.
나는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기꾼이자, 사람의 심리를 농락하는 차가운 심장의 마술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구나.
마음을 읽는 사람보다 대단한 건,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이니….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 어지러운 방 한쪽 벽으로 향했다.
“사 올 필요 없어요.”
나는 벽에 있는 자명종을 만지작거렸다.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여섯 번, 다시 왼쪽으로 두 번. 그러자 철컥, 하고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며 잠금쇠가 풀렸다.
그 상태로 벽을 밀자, 콘크리트인 줄 알았던 가짜 벽이 서서히 뒤집혔다. 숨겨둔 빈 공간이 드러나고 진짜 우리 집이 나타났다.
“여기가 진짜 우리 집.”
“?! 1인이 두 거주지를 배정받은 겁니까? 그건 불법을 넘어, 행정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거주지로 등록되지 않은 방은 있죠. 이 건물은 설계상 결함 때문에 없던 방이 하나 더 생겼었거든요.”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잡범들의 땅. 주인이 사라진 빈방에서 도둑질은 할 수 있어도 감히 집을 허물 생각은 못 한다. 군국이 사소한 도둑질을 잡진 않지만 건물이나 기물을 파손하는 건 눈에 불을 켜고 잡아대기 때문이다.
멋대로 개조하는 거는 뭐, 들키지만 않으면 죄가 아니지.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안락의자와 램프가 돋보이는 방이 있었다. 사람이 오랫동안 지내지 않아 싸늘한 공기가 가득했으나, 램프를 켜자마자 밝은 빛과 함께 포근한 열기가 방 안을 감쌌다.
넓지는 않지만 혼자 살기에는 차고 넘치는 방이었다. 낮은 책장에는 여러 권의 책이 꽂혀있고 방 한가운데 있는 램프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고급품이었으며, 양탄자와 모포도 적절하게 깔려서 오랜만에 들어오는 주인을 부드럽게 반겼다.
단적으로 말해, 군국에서는 보기 힘들 정도로 사치스러운 방이었다.
‘본관의 창문 없는 방보다 좋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본관이 지냈던 본부의 숙소보다 좋아 보이다니! 본관은 3레벨 대위인데! 이, 이건 불공평합니다! 사치입니다!’
그리고 대위도 똑같은 생각인 듯했다.
“사치입니다! 본관은 귀하가 축재한 재산에 의문을 표합니다!”
“부러워요?”
“부럽…! 지는 않습니다! 본관은 군국의 군인이기에! 다만! 귀하가 부정하게 축재한 것으로 보이는 품목에 대해 의문을 표할 뿐입니다!”
“증거는?”
“아, 아직 찾지 못했지만…! 필시 무언가 문제가 있을 터!”
이럴 줄 알았다.
하지만 예로부터 관료를 유혹하는 건 인정과 재물이다. 나는 일단 대위를 구워삶기로 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저, 죄송한데 냄새가 너무 심해서 얼굴 맞대기 곤란하네요. 먼저 씻고 나오지 않을래요?”
“냄새? 본관에겐 느껴지지 않습니다만….”
“자기 냄새니까 안 느껴지지. 빨리 씻고 와요.”
나는 그렇게 수건이랑 비누를 대위의 품에 안겨주며 욕실로 떠밀었다. 대위는 반신반의하며 자기 몸을 킁킁거렸다.
그렇게 욕실에 들어간 대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비명을 질렀다.
“비상! 비상!”
“또 뭐요.”
“물이 뜨겁습니다! 화재가 난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 대위가 온탕이라는 걸 알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안쪽을 향해 외쳤다.
“안 죽어요. 고행한다고 생각하고, 욕조에 물 받은 다음에 몸 담가서 씻어요.”
“욕조에 뜨거운 물을?! 귀하는 본관을 삶을 작정입니까?”
“구워삶을 작정이었지만, 지금 보니 괜한 생각이었네요. 저도 뜨거운 물로 씻으니까 삐도 해봐요.”
나도 했다는 말에 용기를 얻은 모양인지, 욕실 안쪽에서 물 끼얹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뒤이어.
“하으으으.”
생전 처음으로 뜨거운 물로 몸을 닦아 본 대위의 탄성이 튀어나왔다.
“뜨겁, 뜨겁습니다. 그런데….”
“할 만하죠?”
“…긍저엉….”
늘어지는 목소리가 길게 울렸다.
이게 평범한 군국민의 삶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지간한 군국민보다 못 살고 있던 대위에게는 이런 기회가 있어도 되겠지.
물소리가 끊겼다. 대위는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욕조 속에 몸을 담갔다.
‘…본관은 의무에 충실해야 하나, 이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오늘 그녀가 겪은 일은 15구역 시민들의 일상이었지만 대위에겐 너무나 강렬한 자극이었다.
쏟아지는 관심이나 호의 같은 건, 갇힌 채로 오랜 시간을 보내던 통신병에겐 너무나 생소한 일이었기에.
‘그는 인망이 높아 보였습니다. 필시 그가 죽으면 슬퍼할 이가 많겠지요. 그에 비해, 본관은…. 같은 기수의, 몇 안 되는 통신병들이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본관이 사라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본관이 없어도, 다른 통신병이 자리를 채우면 그만이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군국. 어떻게 통신병을 이런 존재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철저하게 더럽혀서 되돌려줄 테니까.
‘…그런데, 묘한 기분입니다. 살이 익는 것 같은, 몸이 풀어지는….’
어, 잠깐. 아니지? 정말 아니지?
‘…이대로, 잠들어… 깨고 싶지 않습니다….’
“저기, 삐 대위?”
‘zzz….’
잔다! 이 미친 대위가!
“삐! 일어나요!”
“….”
“아니, 생전 처음 하는 뜨거운 물 목욕이 그렇게 자극적이었어요?! 빨리 일어나라니까!”
“….”
“왜애애애애앵!”
“….”
“아니, 나는 이렇게 깨워놓고 왜 자기는 이렇게 안 일어나!”
젠장, 큰일이다. 아무런 생각이 안 들려. 진짜 잠들었나 봐. 혹시 죽은 건 아니겠지?
어쩔 수 없다. 나는 냅다 욕실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욕조를 가득 메운 뿌연 수증기 속에서, 대위는 욕조 속에 푸근히 잠긴 채 잠들어 있었다. 얼굴 쪽에서 거품이 부글거렸다.
“아오, 이 화상이!”
나는 욕조 안에서 축 늘어진 대위의 몸을 끌어냈다. 가장자리에 몸을 걸치게 하고, 그 앞에 무릎을 굽힌 뒤 팔을 어깨 너머로 당겨서 업었다. 등 뒤로 말랑말랑한 살결이 느껴진다. 촉촉한 습기를 머금은 풀잎 같은 향이 등 뒤에서 덮쳐온다.
아, 제길. 생각이 들려오지 않으면 위험한데. 착한 생각 착한 생각.
“…헤에. 어부… 빠….”
고맙다. 덕분에 잡생각이 싹 사라졌어.
재빨리 침대에 눕힌 뒤, 팔목을 더듬거리며 준비한 잠옷 패킷을 끼웠다. 햇빛을 보지 못해서 뽀얀 살결 위로 연금실이 형태를 이루더니 곧 몸을 포근히 감싸는 잠옷으로 바뀌었다. 대위는 위기감이라곤 하나도 없는 순진한 얼굴로 세상 모른 채 잠들었다.
한숨을 깊게 내쉰 나는 모포를 가슴께까지 올려주었다.
“아이고, 진짜 손이 많이 가네. 여동생 하나 키우는 것 같아.”
후우. 어쨌든 재웠으니.
이제 나는 나의 일을 하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