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62화 (162/384)

EP.162 군국의 밤

세상 어디든 마찬가지이듯, 폐건물은 무법자가 모이기 딱 좋은 공간이다. 관리받지 못한 건물과 용납받지 못한 사람은 서로 기대며 결핍을 채웠다.

오늘도 방치된 폐건물에선 도시 정글의 포식자가 전리품을 계산하고 있었다.

2호가 황금색 가루가 가득 든 작은 유리병을 보고는 헤벌쭉 웃었다.

“크흐흐. 대박이군. 1호, 잘했어.”

그 병은 크지 않았다. 검지손가락을 쑥 집어넣으면 다 들어가기 전에 끝에 닿을 크기의 자그만 유리병이었다.

다만, 귀중한 물건은 오히려 작은 크기로 가치를 증명하기 마련.

고작 이만큼의 양을 위해 병이 따로 필요할 정도의 물건이란, 반대로 말하면 안에 든 물건이 그토록 중요하단 뜻이었다.

“이건 향신료야. 최소 2레벨 사치품, 종류에 따라서는 4레벨까지 올라갈 수 있는 그런 물건이라고. 0레벨 하층민은 가져도 안 되고, 가질 수도 없는 물건이지. 차라리 우리가 더 의미 있는 일에 써주는 편이 나을 거야.”

정작 그 물건을 훔친 1호는 반신반의한 표정이었다.

“고작 가루일 뿐인데 비싼 거 맞아?”

“진짜 몰랐냐? 고작 가루를 왜 뺏어왔냐?”

“그냥. 소중히 품고 있기에 두들겨 패고 뺏어온 건데.”

“에휴. 너처럼 얼빠진 새끼가 이걸 멀쩡히 빼앗은 게 기적이다.”

“뭐, 이 새끼야?”

발끈하는 1호를 무시하고 2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마켓’ 출신이라 아는데, 비싼 거 맞아. 정확한 가치는 알아봐야겠지만 잘하면 자동마차 하나는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먹어서 몸속으로 사라지는 사치품이라니. 군국에서는 이런 게 귀하게 팔린단 말이야.”

“나보고 얼빠진 새끼라고? 얼빠진 새끼한테 맞는 새끼는 얼마나 얼이 나갈지 볼래?”

“아니 씨. 예전 일로 아직까지 시비야.”

“방금 전에 했거든?”

티격거리는 1호와 2호를 가만히 지켜보던 3호가 문득 말했다.

“추적당할 위험은?”

1호가 호언장담했다.

“없어. 실제로 내가 중간중간 확인해 봐도 없었고.”

3호는 1호의 말에도 안심하지 못한 듯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도 주의해. 꼬리가 밟혔을지도 모른다.”

“에이. 누가 0레벨 시민이 조금 맞았다고 추적을 해? 0레벨 시민이 신고해봤자 접수도 안 돼. 마음 놓고 털어도 걸릴 게 없다는 말씀이시다.”

“그러니까 말하는 거다. 경찰이면 대놓고 쳐들어오겠지. 혹시 뒷배라도 있다면 철저하게 보복할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며 1호는 손을 내저었으나 3호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깐깐한 그의 태도에 1호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저 편집증 새끼 또 저러네.”

평소라면 3호도 그에 맞서 한마디 했겠지만, 웬일인지 오늘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채 대꾸하지 않았다.

“0레벨이 향신료를 구할 수 있을 리 없어. 분명 그에게 전해준 사람이 있을 거야. 혹 다른 뒷배가 있을 수도.”

“뒷배가 있으면 어때서? 그래봤자 그분에 비하겠어?”

1호는 킬킬거리며 웃었고, 3호 역시도 그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 뒷골목에 새로이 찾아온 바람은, 그야말로 이전 질서를 뒤흔들 힘을 지닌 폭풍. 잡다한 오물들을 몰아낼 진정한 어둠. 군국에 드리운 그림자.

그의 힘이 있다면, 군국의 핍박 아래에서 숨어 지내는 그들도 다시 숨통이 트일지 몰랐다.

따라서 고작 0레벨 시민의 뒷배 따위를 무서워할 수는 없었다.

그분에 대한 무례가 될 테니까.

“뒷골목 뒷배라고 해봤자 승냥이. 장성도 우습게 보는 강자이자, 탄탈로스에서 탈옥했다는 소문이 있는 그분에 비하면… 그야말로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해.”

1호가 자랑스레 말했다. 그를 따르게 된 일이 행운이라도 된 듯한, 혹은 평생에 다시 없을 영광이라도 된 듯한 태도였다.

3호는 한숨을 내쉬며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다. 정리가 끝났으면 나는 잠깐 화장실에 갔다가 오겠다.”

멀어지는 3호를 향해 1호가 외쳤다.

“가능하면 멀리서 싸고 와! 기지 근처에서 노상방뇨하다가 잡혀갔다고 그분께 보고할 수는 없잖아!”

“내가 중간에 끊지도 못하는 병신으로 보이나?”

“하긴, 안 나오면 안 나왔지. 못 끊지는 않겠지.”

“이 새끼가….”

볼일이 급했는지 3호는 뭐라 하지도 않고 급히 자리를 떠났다. 1호와 2호는 킬킬거리며 미지근한 맥주를 땄다.

1레벨 사치품, 압축 맥주.

압축해서 독한 데다가 미지근한 상태로 팔리기에 얼음을 띄우지 않으면 사람 먹을 게 못 되지만, 그나마 일반인이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주류.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뒷골목의 권력을 꽉 잡은 뒤라면 모를까, 지금은 이 끔찍한 맥주로 목을 축이는 수밖에.

2호는 맥주잔에 물을 타며 중얼거렸다.

“저 새끼 오줌보는 알아줘야 해. 오줌보 레벨은 0레벨이라니까….”

“내가 장담한다. 갈렌, 아니, 3호 저건 다른 죄목보다 노상방뇨로 먼저 걸려서 끌려갈 거야.”

“그러면 차라리 다행이지. 헌병대는 바지춤 추스를 시간은 줄 거 아냐. 저러다 누구에게 습격당했다간 어디 가서 말도 못해….”

쿵.

여기 없는 사람을 안주 삼아 실컷 물고 뜯던 둘은, 아래층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란히 입을 다물었다. 둘은 잠시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으나 아까 그 소리 이후로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린 2호가 말했다.

“3호, 너냐? 설마 바로 아래층에서 싼 건 아니지? 냄새나니까 멀리서 싸라고 했는데!”

대답은 없었다. 2호는 자리에서 주섬주섬 일어나더니 폐건물 가장자리로 향했다.

아직 벽이 세워지지 않은 건물, 발을 조금 헛디디면 곧장 5층 아래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끄트머리에서 2호는 고개만 밖으로 내밀어 아래층을 살폈다.

“뭐야. 아래층엔 아무도 없는데? 바람이라도 불었나?”

끄트머리에서 고개만 내민 2호의 위태로운 모습에 1호가 걱정스레 지적했다.

“야, 밀센. 위험하지 않겠냐? 떨어질 것 같은데.”

“새끼, 쫄기는. 너도 갈렌한테 걱정이 옮았냐? 이게 뭐가 위험해?”

“맥주 마셨잖아. 자칫 미끄러기라도 하면.”

“보다 보면 이런 쫄보 새끼들이 어떻게 조직에 몸담은 건지 모르겠다니까. 맥주 한 잔 마시고 취할 병신이면 그냥 떨어져 뒤져야지. 엄마라도 된 것마냥 쫑알쫑알 잔소리….”

엄마 잔소리를 무시하다니.

뭘 모르는 2호를 향해, 나 역시 진심 어린 조언을 건넸다.

“엄마 잔소리는 들어야지.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란다.”

“어?”

2호가 멍청하게 되물은 순간, 나는 불효자를 단죄했다. 갈고리에 매달린 와이어가 팽팽 돌아가며 그의 목에 감겼다.

와이어의 다른쪽 끝을 붙잡은 내가 중얼거렸다.

“잔소리를 무시한 죄, 탯줄형이다.”

“끄윽!”

그 직후, 와이어에 목이 졸린 그의 몸이 가장자리로 비틀비틀 끌려갔다. 당황한 1호는 다급히 2호의 다리를 잡았다.

덕분에 2호는 양쪽에서 당겨져 목이 졸리는 형태가 되었다.

컥컥거리는 2호를 두고 1호가 외쳤다.

“누구냐!”

“오늘 저녁을 잃어버려 슬프고 배고픈 인간이다. 태어나지도 못한 내 저녁밥의 복수를 하러 왔다.”

1호가 계단에서 멀어진 사이, 나는 터벅터벅 계단을 올랐다.

후, 계획 성공.

나는 평범한 인간이라 하늘을 날 수 없기에, 저들이 계단을 지키고 있다면 참 곤란했는데.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1호가 뒤늦게 내 등장을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너 이 자식! 3호는 어떻게 했지?”

“작은 방광의 사나이는 그가 더럽힌 벽을 자기 몸으로 가리고 있어. 내 생각에, 그의 방광 안쪽 내용물보단 그의 몰골이 더 더러워 보이지만 말이야…. 아씨, 상상하니까 또 기분 나쁘네. 좀 맞자. 잠깐 숨 좀 돌리고. ”

범죄를 저지른 것보다 5층에 자리를 잡은 게 더 나빠. 올라오는 데 한참 걸렸잖아.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인간이라면 제발 1층 애용하자고.

“누구냐? 누가 보낸 거냐?”

“세상이 내려보냈다. 그나저나 요즘에도 밑도 끝도 없이 사람을 두들겨 패고 그래? 군국 형법의 지엄한 심판이 두렵지 않아?”

내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1호는 다급히 목이 졸린 채 컥컥거리는 2호를 바라보았다. 그가 붙잡지 않으면 2호는 그대로 목이 졸린 채 5층 아래로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어쩔 수 없어. 이 상태에서 공격을 받았다간 둘 다 끝이다. 차라리 아예 놓는 편이 나아. 둘 중 하나는 살아야지!’

굳게 결심한 1호는 눈을 질끈 감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배신감에 눈을 크게 뜬 2호는 헛되이 손을 뻗었으나, 이미 손은 떠난 이후였다. 당겨진 2호의 몸이 가장자리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쳤다가, 툭 하고 사라졌다.

내가 감탄했다.

“와. 그걸 바로 놓네. 조금 더 잡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 개자식…! 2호를 죽이다니!”

“아니. 놓은 건 너잖아.”

나는 이런 식으로 막 죽이지 않아. 2호는 아래층에 내가 만든 와이어 그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거다. 너에 대한 배신감은, 글쎄? 느낄지도?

다만, 그걸 모르는 1호는 잔뜩 흥분해서는 주머니에서 날이 바짝 선 칼을 꺼냈다.

“너 혼자냐?”

“요즘 외롭긴 해.”

마술 모자를 살짝 들며 대꾸했다. 1호는 칼을 꼭 쥔 채로 기척을 살폈다.

‘기척은 저 녀석 하나뿐. 그리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애초에 강자였다면 기습해서 하나씩 각개격파하는 대신 처음부터 쳐들어왔겠지.’

1호의 예상이 맞다.

나는 평범한 잡범. 상대가 둘이면 경계하며 셋이면 도망가는, 칼에 찔리면 아파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러니 이런 어중이떠중이를 상대할 때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

‘내가 2호를 잡고 있을 때 기습할 생각이었나 보지. 하지만 틀렸어. 우리는 이미 각오가 되어있다. 2호도 이해할 거야.’

아니던데. 상당히 원망하고 있는데.

제멋대로 마음을 정리한 1호는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2호와 3호의 복수를 해주마, 이 자식!”

1호가 칼을 치켜들고 곧장 달려들었다.

정면 싸움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저쪽이 강하면 강한 대로 문제, 약하면 약한 대로 문제다. 싸우다가 제 발에 걸려 넘어져서 나를 찌르는 일은 피했으면 하니까.

그래서.

“짜잔.”

나는 숨겨두었던 카드를 꺼냈다.

다이아몬드 6, 여섯 개의 마름모가 동그랗게 배치된 카드.

‘카드? 저것 따위로 뭘 하겠다고!’

겉으로 보면 평범한 카드다.

하지만 진정한 정체는, 내가 전 재산을 들여 만든 연금 장비. 카드 한 장에 연금화 한 장, 많게는 두 장씩 써서 만든 돈지랄의 결정체.

생체 단말을 경유하여 카드를 연금변환. 순간 카드가 올올이 풀어지며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정체는, 손바닥에 딱 들어오는 작은 리볼버.

1호의 눈이 커졌다.

‘앗, 총?!’

응, 총.

탕.

소음을 죽인 총탄이 그의 발목을 강타했다. 그의 발목에 큼직한 구멍이 생겼다.

위력이 부족해 관통하진 못했지만, 이토록 지근거리에서 쏘아진 총알은 평범한 강도를 저지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끄윽!”

기껏해야 총이다. 인간은 총에 맞았다고 바로 죽지 않는다. 고통을 참고 그대로 발을 내디뎠다면, 그 상태로 나를 덮쳤다면 1호가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잡범인 것 이상으로 1호도 하찮은 존재였으니.

고통을 견디지 못한 1호는 균형을 잃은 채 땅을 미끄러졌다. 리볼버를 다시 카드로 바꾼 뒤, 꼬챙이를 들고 그의 위에 앉았다.

1호를 간단하게 제압한 나는 느긋하게 말했다.

“친구들. 나와 이 이상 친목을 도모하고 싶지 않다면, 이제 슬슬 타협하자. 이 정도면 향신료만 건네받고 끝내줄 수 있어.”

“큭! 개소리…!”

내 아래 깔린 1호는 투쟁심을 조금도 잃지 않고는 바둥거렸다.

그가 힘차게 발버둥 친 탓에 넘어질 뻔한 나는, 어쩔 수 없이 꼬챙이로 어깨를 찔렀다.

“끄아아아아악!”

몸에 뭔가 들어오자 1호는 한결 고분고분해졌다. 그는 더 난동을 피우는 대신 이를 악물며 외쳤다.

“우리가 누군지 알아? 우린 군국의 ‘그림자’다! 나를 죽이면 그분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그분? 그분은 또 뭔데. 그림자는 또 무슨 조직이야. 왜 내가 없는 사이 별 이상한 것들이 먹을 것도 없는 뒷골목에 들어왔는데?

뭐, 일단 그건 내 관심사 밖이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됐고. 향신료 어딨어? 그거 좀 귀중한 거라 돌려줬으면 해.”

“하!”

지금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지, 1호는 아래 깔린 상태에서도 한껏 허세를 부렸다.

“향신료? 흥. 내 배 속에 있다. 배를 갈라 꺼내 보던지!”

거짓말이다. 그는 향신료를 안주머니에 숨겨두었다.

그냥 옷을 뒤져서 가져가는 방법도 있으나, 나는 저 근거 없는 허세의 근원이 궁금하여 물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친구. 내가 네 배를 갈라버리면 어쩌려고?”

“하! 해보던가! 너에게 그럴 깜냥이나 있을까?”

그 호기로운 말이 의외로 진심이었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 1호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왜, 쫄리냐? 우리는 다 뒤질 각오를 했어. 그만한 각오도 없이 군국에서 강도 짓을 하겠냐?”

그렇기는 했다.

군국에서 강도 짓을 했다가 걸리면 최소 15년 노역형이다. 습격한 사람의 수나 죄질에 따라 즉결처분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이라도 손을 씻고 잠적한다면 그나마 살아갈 가능성이 있지만….

“어차피 평생, 뒈질 때까지 노역하다가 결국 뒈지는 게 우리 운명이라면! 차라리 화려하게 살다가 갈 거다! 우리 염원을 이뤄줄 그분을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도, 죽일 각오도 되어있다고!”

이해한다. 독심술사인 나는 그의 바람과 욕망을 이해했다.

‘나는 이 꿈도 희망도 없는 나라의 하층민. 이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건 오직 그분뿐이야! 그분은 군국을 뒤엎고 암흑가에 군림하실 거다! 그러면, 그분의 추종자인 나도 인생을 바꿀 수 있어…!’

군국, 국가가 나서서 모든 것을 차지한 이 나라에는 꿈도, 희망도, 낭만도, 사치도 없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천천히 닳아 없어질 뿐.

모든 게 통제되는 나라가 보여주는 미래는 너무나도 확고하고 통제된 잿빛이라. 낭만을 가진 이는 말라 죽기만 한다.

하지만.

“내 친구. 죽음을 각오했다는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특히 내 앞에서는 말이야.”

살아있는 그 누구도 아직 죽어본 적 없기에, 죽음을 각오했다는 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른다.

당장 진심이라고 해도 죽기 직전엔 추하게 발버둥 치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하지만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 각오를 무기처럼 휘두르며 타인을 죽이곤 한다. 그 죄를 자기 죽음으로 갚을 수 있는 것처럼.

갚을 능력이 있다는 사실은 증명하지 않은 채로, 계속 죄악을 만들어내기만 한다.

그러니까, 죽을 각오를 했다는 사람이 있으면. 최소한 자신의 각오에 대한 믿음이 진실이라면.

시험해 볼 수밖에 없잖아.

나는 느긋하게 말했다.

“사실 그 향신료의 별명은 뿌리는 금가루야. 동남쪽 해안가에서 간간이 발견되는 꽃의 암술만을 뽑아서 말린 것으로, 한 줌의 가루로 한 뙈기 땅을 살 수 있다는 최고급 향신료지. 먹는 사치품이라 군국에서도 대단히 비싼 값에 팔 수 있을걸.”

“하하! 안타깝네! 그토록 대단한 게 내 똥이 될 테니까!”

‘왠지 범상치 않아 보이더니…! 좋아, 녀석만 속여 넘기거나, 아니면 빼앗기더라도 그분에게 말씀드리면! 그분의 대업에 도움이 될 거야…!’

“그런데 짜잔. 향신료가 여기 있었네.”

나는 그의 눈앞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가루가 가득 든 병을 흔들었다. 그의 눈이 순간 당혹으로 물들었다.

‘분명 안주머니에 넣어놨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나는 마술사거든.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을 손도 안 대고 꺼낼 수 있단 말씀. 비록 이번 상자는 네 밥통이었지만.”

당연히 생각을 읽고 소매치기를 했지만, 나는 정말 그의 뱃속에서 꺼낸 것처럼 말했다.

“그거 알아? 이 향신료의 원료가 되는 꽃은 잘못 먹으면 죽을 수도 있는 독초야. 암술이 가장 독소가 적고 독특한 향이 나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걸 말리고 압축해서 만든 이 향신료도… 많이 먹으면, 사람을 죽이는 독이 되지.”

‘뭐? 독…?’

“사실, 그 전에 이 향신료를 차지하기 위해 죽은 사람이 더 많겠지만 말이야. 그래서 예전부터 이 향신료는 사람 목숨이랑 비교되고는 했지.”

그러니까 향신료를 다 먹었다는 그의 말은 거짓일 수밖에 없었다….

이젠 아니겠지만.

“네 말대로, 나에겐 죽을 각오도 죽일 각오도 없어. 각오도 없는 이가 사람 목숨만큼이나 귀중한 향신료를 가질 자격은 없겠지.”

한탄을 내뱉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콱 잡고 들어 올렸다. 살짝  벌어진 입 틈으로, 동그랗게 만 카드를 끼워 넣었다.

다물어지지 않는 입. 1호가 당황하는 사이. 나는 향신료 병을 두 손가락으로 잡았다. 1호의 눈에 떠오른 의아함이 점차 공포로 물들었다.

“멋대로 꺼내서 미안. 다시 돌려놓을게.”

괜찮아. 유리병은 튼튼하니까.

운이 좋으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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