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5 본그림자
“기상, 입니다.”
알람이 울리기 반 박자 전, 에이비는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단숨에 몸을 일으킨 에이비는 푹신한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서는, 자명종이 울리기도 전에 그것을 껐다.
한평생 제 시간에 일어난 이만 익힐 수 있는, 알람이 울리기 전 잠에서 깨기.
에이비는 벌써 그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양호. 컨디션 난조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젯밤 비교적 늦게 잠들었음에도 몸은 더없이 개운했다. 부상과 피로로 지치고 피곤했다면 모를까, 매일 제시간에 잠들고 제시간에 일어난 에이비에게 약간의 수면부족 따위 문제가 될 수 없었다.
“….”
물론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던 공로를 온전히 그녀의 성실성 덕분이라고 주장하는 건, 환경의 영향을 너무 무시하는 행위일 것이다.
포근한 이불과 따뜻한 방, 햇볕에 말린 듯 건조하면서도 상쾌한 냄새. 깨끗하게 세탁되어 말려진 옷과 언제나 보글보글 끓고 있는 주전자.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은 에이비를 부드럽게 감싸는 것이라, 에이비는 낯선 편안함에 익숙지 않아 하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그 속에 파묻혀 있곤 했다.
방 안을 둘러본 에이비는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세상 편안한 자세로 잠든 그는 여전히 스스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일어나십….”
그를 깨우려던 에이비는 문득 손을 멈추었다.
어제 저녁, 어딘가로 사라진 그는 의사를 데리고 돌아왔다. 덕분에 안나는 적절한 처치를 받고는 그녀의 거주지에서 정양하게 되었다.
더불어 그가 안나를 간호할 이까지 구해놓았기에, 에이비는 한결 마음 편히 잠들 수 있었다.
에이비가 어젯밤 바빴던 것 이상으로 그도 바빴으리라.
“…푹 주무십시오.”
어깨를 건드리려던 에이비는 대신 담요를 그의 어깨까지 끌어올렸다. 그는 아기처럼 입가를 우물거리며 뒤척였다. 그 모습을 보자 잔잔한 미소가 에이비의 입가에 떠올랐다.
어차피 에이비는 따로 해야 할 것이 있는 몸. 굳이 그를 깨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제복으로 갈아입은 에이비는, 모자를 쓰며 방을 나섰다.
아직 출근 시간이 다가오지 않아서일까. 해가 다 뜨지 않은 거리는 어제보다 훨씬 한산했다. 일찍 일어나 출발한 에이비는 제복을 입은 채로 한가한 거리를 걸었다.
목표로 하는 곳은 10구역. 걸어갈 거리가 아니다.
자동마차를 잡으려고 대로로 향하는데, 마침 에이비의 눈에 어제 보았던 복도형 거주지가 보였다. 어제 두 청년이 연신 두들겼던 문은 오늘 활짝 열려 있었다.
오늘은 늦지 않게 잠에서 깬 것일까, 에이비가 생각할 무렵.
그 문 안에서… 어제 아침에 문을 두들기던 두 청년이 걸어나왔다. 그들은 대단히 침통하고, 또 슬픈 표정이었다.
동조 마법을 익힌 사람은 과한 공감능력을 지닌 이들. 에이비의 가슴이 잠시 조여들었다. 에이비는 본능적으로 그쪽 아래로 붙어서 귀를 기울였다.
“필립… 개자식, 갈 거면 말이나 하고 가지…. 왠지 자기가 한 턱 낸다고 하더니만….”
먼저 나온 청년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그를 뒤따르던 다른 청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어쩔 거야? 돈을 안 내면 필립은, 아니, 필립의 시체는 소각장 행이야.”
“…젠장, 장례 치르는 흉내라도 내려면 일당을 일주일 정돈 모아야 한다고. 그동안 우린 뭐 먹고 살아? 어쩔 수 없어. 제 팔자야.”
죄책감을 외면하기 위해선 으레 화를 내곤 한다.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르게 윽박지른 청년은 성큼성큼 그 집으로부터 멀어졌다. 다른 청년도 허둥지둥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활짝 열린 문만이 을씨년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둑한 안쪽은 굳게 닫혀 있던 어제보다도 더 싸늘하게 보였다.
에이비는 자동마차 운전수가 용기를 내어 그녀를 재촉할 때까지 그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보호소’. 그건 에이비도 익히 아는 단체였다.
군국에는 수많은 군인이 있었고, 그만큼 많은 전역자가 있었다. 그중에는 왕국 시절부터 복무했다가 부상이나 노환 때문에 전역한 이들도 많았다.
전직 군인인 만큼 그들의 육신은 강건했다. 돈도 남고, 왕국을 무너뜨렸다는 자부심으로 차 있으며, 조직에 몸담았던 경험 덕분에 새로이 단체를 만드는 것도 쉬웠다.
그렇게 전역한 이들이 모여서 만든 단체, 보호소는 일종의 자경단이면서 동시에 고아들을 보호하고 구호하는 자선 단체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관등성명을 대지 못하는 것에는 양해바랍니다. 본관은 기밀작전을 수행 중이기에.”
10구역. 도심과 뒷골목의 경계에 위치한 보호소의 본부.
전 군국 소장이자 현 보호소장 프론타인이 눈가를 씰룩이며 대답했다.
“그래. 원칙상으로는 그렇지. 내가 전 소장이라고 하나, 현역한테 관등성명을 대라고 할 수는 없어.”
“긍정. 또한, 귀하는 전 군인이나 동시에 민간인이기에, 본관에게 협조할 의무를 가집니다. 성심성의껏 협조해주시기를 요청합니다.”
기공을 익힌 이들의 신체는 일반 사람보다도 강건하나, 노화로 인한 체력 고갈은 피할 수 없다. 아무리 계급 높은 군인도 전력으로 치기 힘들 정도로 늙으면 전역하는 게 의무이자 미덕이었다.
옛 왕국 시절부터 군인이었던 프론타인이 딱 그렇게 전역한 경우였다.
프론타인은 주름진 눈가를 더욱 좁히며 말했다.
“허? 이봐, 대위. 그래도 나는 전 소장이었다고. 그런데, 협조? 허! 영관도 아니고 기껏해야 위관 급이…. 너 소속이 어디야?”
“기밀입니다. 또한, 규정상 귀하에게 대답할 의무 없습니다.”
“허! 뭐만 하면 기밀이니 규정이니 뒤에 숨고. 군인이라면 좀 더 당당하게 행동하란 말이다!”
“본관은 당당합니다. 또한, 그러한 발언은 현재 상황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에이비의 말에도 프론타인은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렸다.
“그래도 나 무서운 줄은 아는지 소속은 숨기는군? 그러겠지. 장성 중에서도 내가 키운 녀석만 둘이야! 일개 대위 주제에 뭐라도 된 것 같나? 내가 한마디만 하면 너는 대위로 군생활을 끝내야 할 수도 있어!”
유치하나 진급에 목마른 장교에게는 꽤 치명적인 협박이었다.
다만, 에이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통신병의 정체는 기밀이라 드러나지 않으며, 애초에 에이비는 진급은커녕 살아남는 것조차 욕심이었기에.
“의문. 지금 본관에게 전관예우를 바라는 것입니까?”
에이비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묻자, 움찔한 프론타인은 기가 죽어서 우물거렸다.
“…크흠. 꼭 그런 건 아니고.”
“혹 협조할 의지가 없다면 그렇게 말씀해주십시오. 본관은 그 사실을 확인하고는 다른 수를 강구하겠습니다.”
“내가 언제 협조 안 한다고 했냐! 그냥 뻣뻣한 태도를 지적한 거지!”
물론, 군국이 돌아가는 사정을 조금만 안다면 프론타인의 협박이 턱도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군국이 전관예우가 될 만큼 여유로운 나라가 아니기에.
프론타인이 크게 헛기침하고는, 한층 더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대위. 무엇이 궁금하지?”
“본관은 군국의 10번대 구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 조사하는 중입니다. 귀하께서는 혹 ‘군국의 그림자’에 대해 아는 내용이 있습니까?”
노장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야 관심을 가지냐는 듯, 혹은 이런 일에 관심이 있었냐는 듯한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다.
“허. 이제 당국도 슬슬 뒷골목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나? 그러면 왜 헌병대를 데리고 와서 뒤집어엎지 않지? 그게 확실할 텐데.”
군국이 관심을 가진 게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에이비의 개인적인 수사일 뿐이다.
단, 통신병인 에이비는 가진 정보를 직접 전달할 수 있다. 이것은 오직 통신병만 가질 수 있는 권한이며, 그렇기에 주의해서 사용해야 하는 권한이었다.
물론, 이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기밀입니다.”
“허. 그러겠지. 나 같은 퇴물한테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못하는 거겠지!”
코웃음도 웃음의 일종이라며 자기주장을 하는 듯, 프론타인의 코웃음에는 허탈한 감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말해주지. 대위, 혹시 그들이 자기를 무어라고 칭하는지 아나?”
“군국의 그림자입니다.”
“좋아. 그러면 혹시 그들이 어디서 그 이름을 따온 것인지는?”
머릿속으로 정보를 떠올린 에이비가 반박자 늦게 대답했다.
“왕국의 그림자, 아닙니까?”
“정확하군. 아니, 처음부터 예상하고 있었나.”
프론타인이 눈을 살짝 치켜뜨며 에이비를 살폈다. 에이비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통신병, 온갖 정보를 다루고 기억하는 특수병과다. 기밀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전역한 소장보다 아는 게 많을 수밖에 없다.
물어보러 온 것은, 단지 확인이 필요했을 뿐.
“네 생각이 맞을 거다. 수법이 비슷해.”
늙은 퇴역군인은 굳이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에이비가 이미 아는 정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설명을 시작했다.
“예전, 왕국에는 ‘왕국의 그림자’라고 자신을 칭하는 조직이 있었다. 기사랍시고 거들먹대던 녀석들의 뒤처리를 대신 해주던 하이에나 놈들이지. 기사가 대놓고 하기 힘든 살인, 약탈, 협박… 그런 일을 도맡아 했던 일종의 처리반이었다. 시민들은 물론 군인에게도 악명이 높았어.”
절창과 반란군이 왕국을 무너뜨린 뒤, 자연히 왕국의 그림자 역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되었다. 구태의 악이었던 그들을 군국이 잡아들인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조직의 수장이었던 ‘본그림자’ 울펜. 탄탈로스에 오랜 시간 갇혀있었던 그가 돌아왔다고… 나는 확신한다.”
역시.
에이비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울펜 펜슈타인. 과거, 왕국의 그림자를 이끈 본그림자.
옛 왕국의 추악한 부분 중 가장 짙은 어둠.
탄탈로스 깊숙이 갇혔던 그는, 저번 탈옥사건을 계기로 탈출하여 그의 본거지로 돌아왔다.
구 왕국의 수도인 동시에, 그것을 콘크리트 아래 묻어버리는 방식으로 모독한 도시.
군국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땅.
아미텐그라드로.
“군국은 그를 죽이는 대신 탄탈로스에 가뒀지. 쯧, 그냥 죽이지, 왜 쓸데없이 가둬서는….”
이유는 에이비가 알고 있었고, 그 정보는 기밀이 아니었다. 에이비가 또박또박 말했다.
“‘본그림자’인 그는 자신의 심장에 마법적인 처리를 가했습니다. 그의 심장이 멎으면 그 즉시 군국 곳곳에 있던 ‘반그림자’들이 일제히 소요사태를 만들어낼 터. 따라서 군국은 구태여 그를 죽이는 대신, 그냥 탄탈로스에 가두기로 결정했습니다.”
술술 나오는 정보에 프론타인이 눈을 크게 떴다.
“뭐야. 잘 아는구만. 다 알면서 나한테 왜 물어보러 온 건가?”
“기밀입니다.”
“허. 싸가지 없기는…. 요새 장교는 경의도 없나?”
옛 장성의 앞에서도 에이비는 전혀 겁을 먹거나 어려워하지 않았다. 원칙과 소신을 지켰을 뿐.
프론타인은 그 태도가 못내 불만스러운 듯 혀만 쯧쯧 찼다.
“군국의 그림자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뭐인 것 같은데?”
에이비는 잠시 눈을 감고 정보를 정리했다.
무차별적인 강도 행위. 군국의 장교마저도 습격하려는 움직임, 그리고 조직적인 범죄.
헌병대를 부르고 싶지 않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만 골라서 하는 무법자들.
그렇기에 목적이 보인다. 에이비가 대답했다.
“헌병대를 부르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깡도 있고, 머리도 있는데. 예의만 없다…? 참군인 나셨구만, 참군인 나셨어.”
한껏 비아냥거린 프론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답이다. 그들은 헌병대가 오도록 유도해서 뒷골목을 한번 싹 청소할 셈이야!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의문. 하나, 어째서 그들이 헌병대를 부른다는 말입니까? 헌병대가 그들만 못본 척 넘어가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낸들 아나. 군국 고위층과 커넥션이라도 있나 보지. 어쨌든 그놈들이 청소를 계획하고 있는 건 확실하다. 날이 갈수록 범죄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어. 이대로 가다간 어디 장교까지 습격할 모양새야.”
그에 대해서는 에이비 역시 동의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녀는 실제로 그 일을 당할 뻔했기 때문이다.
“동의. 본관 역시 습격을 당했습니다.”
“습격을 당했다고? 네가?”
프론타인이 눈을 부릅뜨고는, 불안한 듯이 손에 쥔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에이비는 그제야 프론타인이 쥐고 있는 물건이 작은 십자가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면 준비가 거의 끝난 모양인데. 이런, 벌써…. 설마 거기까지….”
한껏 초조해진 프론타인이 안색을 바꾸고는 저자세로 말했다.
“대위. 부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