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1 먼 곳의 이야기. 모든 개의 대언자
『군국 통신병 유엘이, 아미텐그라드 부근에 배치된 모든 부대에 전합니다.』
아미텐그라드 근교에 울린 그 목소리는 군국을 닮아 딱딱하고 무미건조했다.
한 명, 고작 한 명이 발하는 목소리는 그녀와 동조된 수십 개의 골렘을 타고 근처 부대로 전달되었다.
수도 방위군도, 헌병도, 보급 및 경계부대도. 하던 일을 멈추고는 가만히 통신용 골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경청했다.
『현 시점, 5레벨 위험도를 지닌 네 개체가 군국 수도를 향해 빠르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북동쪽 부근에서 일직선으로 향하는 중이며, 도착 예정시각은 약 2시간 후.』
군국의 수도인 아미텐그라드에는 통신 시설이 있다. 그리고 무겁고 눈에 띄는 통신 시설이 모종의 이유로 파손되었을 때를 대비해 통신병도 상시 대기 중이다. 최소한 한 명이 있는 건 확실하지만 몇 명이 더 있는지는 모른다. 기밀이기 때문이다.
어쨌건, 군국 중추로부터 직접 전해지는 명령이라 모든 부대는 숨을 죽이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3레벨 이하의 일반 부대로는 저지 불가. 4레벨 부대는 지연 작전이 가능하나 실질적 타격은 전무. 효율적인 제압 작전을 위해서는 최소 5레벨 부대와 육장성 2인이 필요하다 추측.』
그러나 통신병의 담담한 평가에, 인근에 있는 부대는 다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5레벨 부대와 육장성 2인. 이 조합이라면 대(對) 전쟁 전력이다. 한 나라와 싸워야 할 때나 꺼낼 정예 중의 정예가 있어야, 이 넷을 효율적으로 제압한다는 의미다.
심지어 효율적인 제압이 꼭 아군의 피해가 적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연 이 작은 전쟁에서 몇이나 죽어나갈지.
『다만, 그들의 폭력성은 극히 낮습니다. 현재까지 전투로는 한 명의 사망자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자리를 비워도 일반 시민들의 피해는 경미 혹은 전무할 것이라 예상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교전회피가 합리적이라 판단. 아미텐그라드 인근 부대에 모두 적극적인 교전회피 명령을 하달합니다.』
민간인을 해치지 않는다는 말에 몇몇은 안도했고 몇몇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만한 강자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그래도 나름 군인인데 수도마저 내줘도 되겠냐는 불만.
어쨌건 그만한 강자들이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적당히 대접해주면 꺼지지 않겠냐는 항변.
그렇다고 국토 유린을 가만히 두고 보면 체면이 말이 안 된다는 반박.
꼬우면 명령불복종 박고 나가서 싸우라는 외침.
진짜 평소 같았으면 목숨을 바쳐 침입자를 처단하는 건데 명령 때문에 봐준다며 물러나는 자기합리화.
『이동 경로에 닿을 것이라 예상되는 경계부대는 직접회피. 모든 장비를 지참하여 제 3보급기지로 향하십시오. 수도 방위군은 방위 사령부만 제외하고 전부 소개 명령을 하달합니다.』
어쨌건, 명령에는 복종해야 한다. 장교들은 즉각 군사들을 독촉하여 짐을 꾸리고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적극적으로 교전을 회피하기 위해.
그러나 군국의 누구도 몰랐다.
적극적인 교전회피를 진행하려는 그 넷은, 이미 야음을 틈타 아미텐그라드 내부에 진입해있었다는 것을.
흡혈귀 중 서열 높은 이들은 어둠을 다루며, 짙게 깔린 그림자 속을 헤엄칠 수 있다.
아미텐그라드에서 가장 높은 건물보다도 훨씬 위쪽. 새빨갛고 불길한 쌍성이 군국의 수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이 군국의 왕도(王都)이더냐.”
군국의 수도라고 들었던 아미텐그라드는 티르칸쟈카의 생각과는 너무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방 곳곳에서 끌어모은 재산으로 지은 위풍당당한 왕성도 없다. 도시를 길게 뒤덮는 거대한 성벽 역시도 아미텐그라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아미텐그라드는 거대한 용이 웅크린 것처럼, 오직 몸집만으로 적을 짓누를 듯했다.
밀집성과 보온성을 위해 거주지는 무조건 차곡차곡 쌓은 복층으로.
네모나게 재단된 구획의 사이사이 희미한 가로등이 줄지어 서 있고.
어떤 곳은 시커먼 어둠 속에서도 등대처럼 빛을 내뿜고 있다.
무수한 사람들은 밤에도 시체처럼 거리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서쪽으로 넘어가고 난 뒤, 땅거미가 지고 그림자가 하늘을 감싼 고요한 밤. 홀로 몸을 띄워 아미텐그라드의 전경을 바라보던 티르칸쟈카가 중얼거렸다.
“…대단히 크구나. 마치 수십 개의 도시가 서로 이어진 것 같다. 인간이 개미로 보일 정도로 작은데도 도시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니. 무수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이제는 조금 알겠구나.”
바람을 전신에 휘감은 채 둥둥 떠 있던 셰이가 대답했다.
“일단 군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사는 도시니까. 인구만 해도 거의 백만에 이르는….”
“저 많은 이들 사이에서 휴를 어떻게 찾는다는 말이냐?”
“역시, 그게 궁금했던 거구나. 걱정하지 마. 방법이 있으니까.”
도시를 빼곡이 채우는 저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딱 한 명만 걸러내는 건 셰이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셰이는 회귀자였고, 이런 상황에 대비할 수단 한두 개쯤은 있었다.
“군국에서 사람을 찾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어.”
셰이는 그렇게 말하며 세 가지를 하나하나 설명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티르칸쟈카는 조금의 고민도 않고 말했다.
“다 쓰자꾸나.”
“아니. 그건 현실적으로 무리지.”
“오른팔로 편지를 쓴다고 왼팔이 멈추는 게 아니거늘, 세 가지 수단이 있음에도 어찌하여 쓰지 못하느냐? 애초에 쓰지 못할 수단이라면 어찌하여 선택지에 올려두는 것이냐?”
선택지를 나열하며 이 나라에 대해 조금만 설명하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훈계를 당한 셰이는 조금 풀이 죽어서 대답했다.
“일단, 첫째는 군국에게 그를 찾아오라고 시키는 거야. 군국이 자국민 찾아내는 데는 선수거든. 문제는….”
“좋다. 가자꾸나.”
문제 따위는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티르칸쟈카가 흔쾌히 손가락을 휘저었다. 허공에 둥둥 떠 있던 거대한 관은 어둠과 그림자를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셰이가 황급히 천앵을 움직여 뒤를 따라붙었다.
“…아니! 문제점도 들어야지! 군국이 우리 말을 제대로 들어줄 리 없잖아!”
“우리가 찾으면 그들도 움직이겠지. 만일 그들이 고이 우리 요구를 듣는다면 그것으로 좋다.”
“만일 군국이 인질을 잡으려고 하면?”
“그들이?”
티르칸쟈카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럴 일이 있겠느냐. 우리가 두려워서 싸우지 않은 그들이, 과연 우리와 갈등을 빚으면서까지 그를 잡아두겠느냐? 나라가 불타고 싶지 않다면야.”
티르칸쟈카는 군국이라는 나라의 의중을 정확히 짚었다.
가난한 의원의 딸로 태어났으나, 시조로 거듭난 뒤 홀로 수만의 군세를 이끌며 절대자로 군림했던 그녀다. 내로라하는 왕국에서도 그녀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으며 본의 아니게 정치에 몸을 담기도 했다.
“적극적인 교전회피라. 참으로 거창한 포장이로구나. 뭐라 포장하든, 별다른 적의가 없는 우리에게 구태여 전력을 쏟고 싶지 않으렷다. 그렇다면 그들을 쓰지 않을 이유 없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아래쪽을 바라보는 티르칸쟈카의 눈에 한 인영이 비쳤다.
군국의 거리가 제 집 안마당인 것처럼 뚜벅뚜벅 걸어가는 개의 왕이.
티르칸쟈카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렸다.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군국과는 담판을 지어야 할 터이니.”
시조가 아닌, 개의 왕과 말이다.
1번 구역, 수도 방위 본부.
사령부에 앉아 부대를 쪼개고 쪼개 각지로 흩어놓던 그들의 본부에 침입자가 나타났다.
보초병은 그 침입자를 인지하지 못했다. 침입자가 너무 당당하게 들어왔으며, 그녀의 옷차림이 너무 이질적이었고, 동시에 아무런 적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당하게 대문으로 걸어 들어온 침입자는, 가장 먼저 마주친 인간을 보고는 곧장 말을 걸었다.
“인간. 너희의 왕을 불러줘.”
마침 수도 방위 본부의 릭토스 소령은 눈을 끔뻑였다.
소개 명령이 내려와서 한창 바쁜 지금이었다. 자랑스러운 계급장을 달고 하는 일이 도망이라는 사실에 가뜩 불만을 갖고 있는데, 수인 소녀가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갑자기 다가와서는 이상한 요구를 하는 것이다.
“뭐야? 어떻게 여기 들어왔지?”
수인이 대답했다.
“너희의 왕을 불러.”
“이곳은 보안 시설이다. 당장 꺼져.”
“너희의 왕을 불러.”
“당장 나가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너희의 왕을 불러.”
앵무새라도 되는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수인을 보고, 인내심이 바닥난 릭토스 소령은 군도를 빼 들고는 아지를 겨누었다.
“경고는 끝났다! 사살하겠다!”
쿵. 그가 한 발을 내디디며 군도를 휘둘렀다. 발을 내디딘 것만으로도 콘크리트 바닥이 쩌적 갈라졌다. 곤기공으로 단숨에 땅을 끌어당긴 그는, 장작을 쪼개는 것처럼 군도를 내리찍었다. 바람 가르는 소리가 매서웠다.
까득.
철이 이빨에 우그러지는 소리는, 그보다 몇 배는 소름끼쳤다.
팔목이 빠질 뻔한 충격에 릭토스 소령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떨리는 몸을 다잡으며 그의 애검을 내려다보았다. 손잡이 위쪽으로 군도의 칼날이 반쯤 사라져있었다.
이가 나간 게 아닌, 이에 나간 흔적. 경악한 릭토스 소령이 눈을 부릅떴을 때.
“너희의 왕을 불러.”
그제야, 릭토스 소령은 눈앞에 있는 수인 소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어두컴컴한 달, 만월을 배경 삼아서 귀와 꼬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소녀. 그녀의 눈빛은 우호적이었으나, 거기서는 이유 모를 권위와 품격이 느껴졌다.
마치 백성을 아끼는 상냥한 왕처럼….
왕국을 무너뜨리고 군국을 만드는 데 일조한 릭토스 소령은 거부감에 이를 악물었다.
“우리에겐 왕이 없다, 짐승. 너네와는 다르게 말이지.”
수인을 멸시하는 의미를 담고, 상대를 도발하기 위해 날린 한 마디.
그러나 수인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왕, 시장, 촌장, 마립간, 의장, 군주, 영주, 황제, 장군. 호칭은 상관없어. 나, 단지. 너희의 대표와 만나야 해.”
방위 본부의 대표라면, 방위사령관 부이둔 대장. 고강한 무력을 지니고 여러 전장을 누비며 전공을 세운 군국의 위대한 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곳은 비교적 안전한 수도. 그의 기공이 다른 장성 못지않게 고강하다고 하나 결코 육장성 급은 아니다.
만일, 저 소녀가 대장에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사령부는 괴멸하고 만다.
“너 같은 침입자에게 길을 열어줄까 보냐!!”
릭토스 소령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이건 필사의 각오이기도 하면서, 뒤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을 이들에게 보내는 신호이기도 했다.
릭토스는 마음속으로 빌었다. 제발, 누군가가 자기 뜻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가장 먼저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건, 역설적으로 수인 소녀였다.
수인 소녀는 꼬리를 늘어뜨리며 안타까운 듯 대답했다.
“너, 나와 말하는 게 싫구나.”
단정이며, 동시에 사실이다.
릭토스는 날아가는 칼날을, 그것도 기공을 두른 칼을 이빨로 끊어버리는 괴물이 싫었다. 그게 수인이라는 사실은 더 공포와 혐오를 일으킬 뿐이었다.
소녀는 자신에게 두려움과 혐오를 보내는 그를 보았다. 그의 눈 안에 있는 공포를 느꼈다. 그 공포를 만들어내는 주체가 자신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안타까웠으나, 어쩔 수 없다.
그게 인간인 것을.
“그래도 너희는 약속을 지켜야 해.”
“나는 그 약속을 모른다! 엉뚱한 소리 말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면 그만한 절차를 거쳐라!”
물론 릭토스에겐 절차를 거친다고 해도 만나게 해줄 생각이 없었으며, 그럴 권한도 없었다. 단지 절차를 구실로 삼아 시간을 끌려고 했을 뿐.
그리고 릭토스 소령의 노력은 보답받았다.
“시간을 잘 끌어주었다, 릭토스 소령!”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릭토스와 수인 소녀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사령부 건물 정문에서 별 하나를 단 장성이 콧수염을 씰룩이며 팔을 들었다.
“귀관의 노력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도 태세를 갖추었으니!”
그의 손짓을 따라, 방위 본부 곳곳에서 중무장한 병력이 내려왔다.
저건 대위, 저건 소령. 병사 하나하나가 최소 위관급이며 영관급도 흔하게 보인다.
마침 소개 명령을 따르기 직전이라, 그들은 자신의 군장과 무기를 전부 챙겨놓은 상태였다.
이미 출발한 병력을 제외하더라도 장교만 200명에 달하는 정예. 일정 수준 이하의 잡졸은 방해만 될 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당장 수도에서 모일 수 있는 최대의 전력인 것이다.
“전군!”
척.
장교들이 일제히 군장을 패킷에 꽂아넣었다.
촤라락, 촤락.
거대한 철판이 비늘처럼 갈라지며 솟아난다. 아키 아바타를 따라 정렬된 철편과 사슬 틈으로 새파란 연금광이 맺혔다. 강철이 맞물리고 비늘이 몸을 덮으며, 장교들은 전신 갑주를 착용한 전사로 탈바꿈해나갔다.
칼, 창, 총, 도끼. 자기 기공과 맞는 무기를 지닌 채, 틈 하나 없는 갑주를 착용한 장교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칼날에 서늘한 기공이 휘몰아친다.
몇몇은 군장을 차면서도 주저하며 되물었다.
“잠깐! 소개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습니까! 저희는 그들과 대적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따라잡힌 이상 방법이 없다. 이대로 사령관님을 내드릴 거냐!”
윽박지른 장성은 다시 아지를 노려보며 외쳤다.
“당장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라!”
그동안, 장성을 찬찬히 바라보던 소녀는.
“…부족해.”
방위 본부의 부사령관이자, 별 하나가 빛나는 장성을 보고도 고개를 저었다.
단호하고, 단정적으로.
“너, 자격 부족해. 대표 못 해. 너희의 왕, 그 파편도 안 돼.”
과연 누가 군국의 장성에게 자격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을까. 4레벨 시민에다 휘하에 수많은 병사를 거느렸으며, 건곤을 이룬 기공을 사용하는 강자.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에 발끈한 장성이 외쳤다.
“우리는 왕실을 무너뜨리고 태어난 군국이다! 왕 따위는 없어! 왕을 찾을 거라면 다른 나라로 가라!”
그 말에 아지가 고개를 들었다.
부드럽게 곡선을 그린 눈에는 반짝이는 빛이 비쳤다. 그건 밤하늘의 별이 아니라, 시퍼렇게 날을 세운 수많은 무기였다. 흉폭한 빛을 품고, 그 아래 살의를 감추어둔 각종 무기.
익숙했다. 개의 왕과 약속을 하고는, 지키지도 않을 것을 대가로 개의 왕을 이용하곤 했다. 하지만 개의 왕은 늘, 늘 배신당했다.
예전의 왕과 지금의 아지는 다른 개체지만, 왕으로서의 존재는 계승되었다. 위험 앞에서 약속이 얼마나 무의미해지는지 역시도.
그래도.
“왕, 아니어도 돼. 장군이어도 돼. 나와 마주할 자격만 있다면. 비록 일부라도 인간을 대표할 자격이 있다면.”
그래도 아지는 약속을 이루어줄 인간, 혹은 단체를 찾아야 했다.
늑대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양치기가 필요하기에.
“나의 앞에 나와서, 약속을 떠올려.”
아지의 이마 위에 새카만 점이 생겨났다.
장성은 당황했다. 누가 그녀의 이마에 총을 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총성이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에 한 번.
아지의 이마 위에 생긴 점이 점차 자라난다는 사실에 또 한 번.
이게 총상이 아니라는 것을.
애초에 이 현상 자체가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까드득, 까드득.
날카로운 조각칼로 공간을 긁고 파내는 소리가 들렸다. 점차 그 소리가 커짐에 따라 아지의 이마 선을 따라 새카만 균열이 생겨났다. 그 균열은 이리저리 이그러지고 합쳐지다가, 곧 하나의 형상을 이루었다.
누군가가 그 형상을 보고는 중얼거렸다.
“…왕관?”
그의 말마따나, 식물의 줄기를 엮어 만든 것만 같은 왕관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생겨났다.
그건 아지의 이마에서 시작되어 뒤통수까지 이어졌다. 공간 자체를 잠식하며 자라나듯, 왕관은 까드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지의 머리를 반 바퀴 돌았다. 그리고 더 나아가지 않고 멈췄다.
“나, 약속 지켰어. 무저갱에서 기다렸어.”
아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에 따라, 머리 한 뼘 떨어진 공간에 떠 있던 왕관이 아지의 머리를 따라 움직였다.
아무런 지지대도 없이, 그 자체로 신분을 증명하는 천사의 고리처럼.
그제야 장성은 상대의 존재를 상기했다.
“…개의 왕이 전하는, 대언?”
모든 짐승을 대표하는 짐승의 왕.
그들은 그저 짐승의 특성만 지니고는 다른 짐승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모든 짐승을 대신하여 말하기로, 혹은 행동하기로 한 짐승의 왕은.
그럴 힘과 자격을 얻는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줄기를 엮어 만든, 반으로 갈라진 왕관을 머리에 쓴 채. 아지는 개의 왕으로서 이곳에 임하였다.
비록 인간을 사랑하며 충성을 다하는 개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마음과 의지마저 인간의 손안에 있지는 않으니.
개의 왕은, 모든 개를 대표하여 선언했다.
“이제 너희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