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76화 (176/384)

EP.176 과거의 이야기, 군립 호스트바

“대위.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가요?”

명실상부 군국 제일의 부자인 세피에르가 에이비를 독대한 뒤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느닷없는 질문이었으나, 뻣뻣한 자세로 앉은 에이비는 성실하게 대답했다.

“의문. 무슨 말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아, 당신이 스승님에게 바란 게 무엇인지 여쭙는 거예요. 도대체 뭐길래 스승님께서 당신을 그리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리려고 하는 것일까요?”

세피에르는 느긋하게 말하며 홍차를 잔에 따랐다. 흘러내리는 홍차에서 시작된 감미로운 향기가 좁은 식당 안에 퍼졌다. 쪼르륵, 흐르는 물이 잔에 휘몰아치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 가운데.

대위가 주저하며 대답했다.

“…혼인신고, 입니다.”

후두둑.

홍차가 잔을 가득 채우더니 줄줄 흘러넘쳤다. 대위가 다급히 말했다.

“천의무봉, 지금 홍차가 흐르고 있습니다.”

세피에르가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어요.”

“부정. 본관은 당황했는지 여부를 묻지 않았습니다. 본관은 어디까지나 홍차가 흐르는 것에 대해 물었을 뿐입니다.”

홍차 물줄기를 멈춘 건 에이비도 세피에르도 아닌 시간이었다. 세피에르는 아까 지었던 표정 그대로 멈춘 채 빈 주전자를 다시 세워놓았다.

“혼인신고를, 스승님께서…. 해준다고 대답하시지는 않았죠?”

에이비가 제발 부정하기를 고대하며 낸 목소리. 그러나 에이비는 그 기대를 읽지 못하였고, 그럴 의지도 없었다. 에이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긍정의 표시를 보였습니다만.”

쾅. 식탁 위의 물웅덩이를 장갑 낀 손이 내리쳤다. 홍차가 사방팔방으로 퍼지며 달콤한 향을 흩뿌렸지만 에이비도 세피에르도 신경을 쓰지 못했다.

“왜?! 왜, 스승님이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당신에게?!”

감정을 토해낸 그 말을 순수한 의문으로 알아들은 에이비는 잠깐 고민하다 대답했다.

“혹 본관이 죽으면, 본관의 사망보상금을 타기 위해서입니다.”

“네?”

대위가 죽으면, 그 보상금을 탄다.

즉, 저 대위는 지금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다는 뜻.

단박에 내막을 파악한 세피에르는 한결 차분히 사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반쯤 떨어진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이며 탁자를 톡톡 두들겼다.

“그렇군요. 스승님은 당신의 소원을 들어준 게 아니라… 후.”

세피에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순진무구한 눈으로 앉아있는 에이비를 보며 혀를 찼다.

참으로 멍청하고 얼빠진 눈이나, 분명 세피에르도 그와 비슷한 표정을 보였겠지. 세피에르가 에이비를 탓하는 건 제 얼굴에 침뱉기일 것이다.

세피에르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대위, 잘 들어요. 제 스승님의 명예를 위해 말하는 건데, 스승님은 돈 때문에 당신의 제안을 수락한 게 아니에요.”

“….”

에이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예상한 내용이었다.

군국 최고의 지주회사, 천의무봉. 이 재산의 일각만 떼어와도 대위의 사망보상금 따위는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리고 세피에르에게는 일각만 남기고 다 퍼줄 의향까지 있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는 제 돈도 거절했던 스승님이, 그깟 푼돈 따위에 혼인신고를 할 리 없잖아요.”

“푼돈…입니까. 그렇다면. 그이는, 어째서….”

에이비가 불쌍해서? 혹은 마음이 동해서?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거절하지 않았을 뿐?

혹은…?

어쩔 수 없이 뻗어나가는 상상의 나래를, 세피에르의 목소리가 다시 움켜쥐었다.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힘들어요. 대신, 스승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드리죠.”

세피에르가 홍차가 담긴 잔을 에이비에게 건넸다. 에이비가 찰랑거리는 잔을 양손으로 받자, 세피에르는 자기 몫의 홍차를 따르며 제안했다.

“꽤 긴 이야기가 될 거예요.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냉정하게 말해서 에이비가 그것을 들어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에이비는 지금 당장이라도 그림자의 음모를 막으러 가야 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있는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누구인가.

정체가 도대체 무엇일까.

어째서 돈이 아쉽지 않음에도 그녀의 제안을 수락한 것일까.

어차피 천의무봉의 자택까지 온 몸이다. 천의무봉과 직녀의 도움이 있다면 사태를 더 쉽게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여가며.

에이비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6년 전, 아미텐그라드.

짙은 구레나룻을 가진 까무잡잡한 남자가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페토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구레나룻만 제외한다면 상당한 미남자였고, 구레나룻에 신경 쓰지 않는 이라면 더욱 호감을 느낄 외모를 갖고 있었다.

어쨌건 외모만큼이나 구레나룻이 인상적인 그가 부속실을 박차고 들어오며 외쳤다.

“휴즈, 이 새끼야! 너 일 똑바로 안 해!”

“엑.”

갓 중등학교를 졸업한 정도의 나이일까. 성장기가 끝나기 직전의 소년, 혹은 갓 성년이 된 청년처럼 보이는 사내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휴즈라고 불린 청년은 질린 기색으로 대답했다.

“아, 왜요. 일은 확실하게 했잖아요.”

페토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장난하냐! 너 없는 동안 비렌치아 사모님이 너 내놓으라고 목놓아 울었어! 다독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모르죠. 그때 없었으니까.”

“그랬겠네!”

어쩔 수 없다. 그는 대타였으니까. 매일같이 출근해야 하는 페토와는 달리, 휴즈는 가끔 시간이 날 때면 한 번씩 얼굴을 비추는 게 전부였다.

그게 이 사단을 만든 거지만.

잠시 심호흡을 한 페토가 무게를 잡으며 말했다.

“자, 다시 강조해준다. 우리가 누구냐?”

“호스트바요.”

휴즈의 즉답에 페토가 소리쳤다.

“공보병, 새끼야! 공보병! 우리는 공보병! 충성스러운 군인들이 이 나라의 안녕을 위해 먼 타향에서 열심히 일할 때, 남은 가족들이 불안하지 않게 잘 보살펴주는 공보정훈병 아니겠냐고!”

“네, 맞죠. 남편을 먼 근무지에 보내서 외로워진 사모님들을 위로하는 게 주 업무인.”

페토가 잔뜩 흥분해서는 외쳤다.

“야!”

“왜요.”

페토는 잠시 반박할 말을 찾았다. 그러니까 달리 말해, 휴즈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공보정훈병. 그들은 고위 장교의 가정사, 행사를 도와주고, 그들이 가정 생활을 잘 해나갈 수 있도록 돕는 이들.

즉, 사모님들의 비위를 맞추는 게 주 업무였던 것이다.

한참 고민한 끝에 페토는 궁색한 변명을 토해냈다.

“사모님을 위로하는 것만은 아니야! 자녀분들도 보살핀다고!”

“한마디로 고위간부 가사도우미잖아요. 호스트바를 곁들인.”

“말조심해! 비록 사실이어도 입 밖에 내도 될 말이 있고 안 될 말이 있어!”

마침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기겁한 페토가 목소리를 죽이고는 휴즈에게 말했다.

“비렌치아 사모님은 군부의 중역인 비렌치아 중령의 아내야. 너, 분노한 중령의 방문을 받고도 무사할 자신이 있어?”

“없어요.”

“그러면 조금 더 잘했어야지!”

“나도 노력했다고요. 괜한 스캔들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얼마나 세심하게 대화했는데.”

휴즈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그의 노고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페토는 입을 다물었다.

비렌치아 중령은 멋진 콧수염을 기른 깐깐한 장교였지만 자기 부인에게만은 상냥했다. 그의 응석 속에서 결혼 생활을 한 비렌치아 부인은 남편 이상으로 까탈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둘은 서로 함께 있을 때는 깨가 쏟아지는 완벽한 부부였으나, 비렌치아 중령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자 완벽이라는 글자에 실금이 생겼다.

둘 다 서로의 부재에 불안해했지만, 그렇다고 전선 가까운 곳에 아리따운 부인을 두고 싶지는 않았다. 중령이든, 부인이든.

수도에 홀로 남은 부인은 매일같이 보훈처에 쳐들어와서 히스테리를 부렸다. 그녀를 유혹할 수도, 내칠 수도 없던 공보병들은 그저 중령의 발령이 끝나기만을 빌며 그 고통을 감내했다….

그때 혜성처럼 등장하여 부인을 진정시킨 사람이, 갓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수도에 도착한 휴즈였다.

처음 그를 이곳으로 데려왔을 때를 떠올린 페토가 자기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진짜, 네가 어려서 다행인 줄 알아. 앳된 티만 없었어도 비렌치아 사모님이 너를 아들이 아닌 남자로 여겼을 테니까.”

“다행이 아니라 불행이죠. 제 외모가 사모님들의 희박한 죄책감을 자극할 정도로 앳되지 않았다면 조금 더 많은 선물을 받았을 테니까요.”

“네가 그러면 여기서 일하지 못했겠지! 주제를 알아라. 너는 어디까지나 비렌치아 사모님을 위한 핀포인트에 불과해!”

“제가 시민 등록을 마친 뒤 공보병에 지원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탈락시키시게요? 나 같은 인재를?”

“그…!”

언제나 말싸움을 하곤 했던 둘이나, 페토가 그를 이겨본 적은 손에 꼽았다. 페토가 중얼거렸다.

“…너는 언제 네 입 때문에 아주 큰 곤란을 겪을 거야.”

“말로 못 이긴다고 악담을 하시면 어떡해요, 선배.”

“말로 못 이기니까 악담으로 끝내는 거지!”

그래도 결과 자체는 나쁘지 않다. 비렌치아 부인은 늘 호스트바에 얼굴 도장을 찍었고, 자식을 낳지 않았음에도 모성애에 눈을 뜨게 되었다. 아마 중령이 돌아온다면 금슬이 훨씬 더 좋아지리라.

휴즈를 향한 집착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아마도.

한숨을 내쉰 페토는 추억에 빠져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기껏해야 불륜으로 끝나는 이게 훨씬 낫지. 예전 기사들이 활개치던 시절에는… 어휴. 말을 말자.”

휴즈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선배는 미동(美童) 출신이라고 했던가요.”

“으아아아! 말조심해!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니까!”

왕국 시절, 기사들의 결혼은 일종의 계약이었다.

일신의 무력이 강하다고 대대손손 내 후대의 아이가 약해져도, 전력을 다해 서로를 보호하겠다는 피의 맹약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서로의 순결이나 깨끗한 후계관계가 필수다. 당연히 개뿔도 지켜지지 않았지만, 일단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야 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기사들은 미동을 데리고 다니곤 했다.

“이야. 그때 미동이라던 선배가 이렇게 되다니. 확실히 세월이 무서워.”

“너 한마디만 더해봐라!”

휴즈는 옛 미동을 향해 이죽거렸다. 페토는 몸을 벌벌 떨었다.

“말이 미동이지 사실은…! 어휴. 나라가 뒤집어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아!”

왕국 시절, 페토는 평민 출신 종자였다.

평민 출신 종자? 말만 종자지, 그 실체는 기사의 수발을 드는 노예나 다름없다. 가끔 주인이 술 먹고 칼부림을 좀 하면 가장 먼저 죽어나가는 감정의 쓰레기통.

그 와중에서도 특히 미색이 뛰어났던 페토는, 곧 종자에서 미동으로 바뀔 예정이었다.

쿠테타가 없었다면 말이다.

“군국 만세…! 영원히 충성하겠습니다!”

문득 넘쳐 흐른 충성심으로 군국기에 경례를 올린 페토는, 다시 주먹을 꽉 쥐고는 휴즈를 바라보았다.

“상대의 선을 지레짐작하지 말고 네 선을 타란 말이다. 네가 뭘 안다고 자꾸 상대에게 맞추어주려고 하냐? 너는 예언자도, 독심술사도 아니야.”

이 대목에서 휴즈의 미소가 진해졌다. 페토는 그것을 농담에 대한 반응이라 여기고는 말을 계속했다.

“비렌치아 부인께는 그게 통했지만, 다른 부인에겐 그러면 못쓴다. 너에게 과도하게 집착하게 될 수도 있어.”

“그러면 좋은 거 아니에요? 선물도 많이 받을 거 같은데요.”

“혹시 몸을 뚫고 들어오는 칼날의 서늘한 감촉도 선물이라면, 차고 넘치게 받을 거다.”

“미동 시절의 경험담이에요?”

“히익.”

몸을 부르르 떤 페토는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리며 휴즈를 바라보았다. 휴즈는 자신감도, 장난기도 가득 찬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진짜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는데, 문제는 정신보다도 초상집을 먼저 차릴 수 있다는 점이다. 상대에게는 그만한 재능이 있었다. 페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되겠다. 너는 당분간 어린애들 돌보는 일로 가라.”

“네? 개인적인 감정으로 좌천시키는 거예요?”

“그래. 꼬우면 네가 선배해라.”

페토는 입장으로 찍어눌렀다.

그들은 부속실을 나와, 기다란 바와 작은 테이블을 둔 접대실로 나왔다. 제복 중에서도 가장 치렁치렁하고 화려한 제복을 차려입은 청년들이 매력적인 미소를 꾸며내며 찾아온 이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호스트바에서나 보일 법한 풍경이었다.

와중, 혼자 쩔쩔매고 있던 다른 호스트…공보병이 마침 나온 그들을 바라보고는 화색이 되었다.

“페토! 휴즈! 잘 왔다. 여기 얘 좀 봐줘!”

“맡은 사람이 접대해야지, 왜 떠넘기고 그러냐.”

페토가 성큼성큼 다가가려다 문득 기억을 되새기고는 휴즈에게 턱짓했다. 휴즈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접대하기 위해 소녀의 앞으로 나섰다.

푸른 머리를 지니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소녀였다. 중등시민학교도 아직 졸업하지 않았을까 싶은 나이대의 조그만 소녀는 당돌하게 휴즈를 마주 보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꼬마 숙녀분?”

휴즈가 묻자 소녀가 대답했다.

“여기로 오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왔어요.”

휴즈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묘한 얼굴로 소녀의 표정을 읽었을 뿐이었다. 소녀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휴즈를 마주 보았다.

말없이 대치가 계속되자 불안해진 페토가 무릎으로 휴즈를 톡톡 건드렸다.

“야, 휴즈. 네가 곤란한 건 알겠는데. 그래도 계속 지켜보기만 하면 어떡하냐….”

그래도 휴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가만히 있는 휴즈 대신 페토가 소녀에게 물었다.

“꼬마야. 네 이름이 뭐니?”

소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접대실 안쪽을 가득 울렸다.

“세피에르 바키아요!”

“세피에르 바키아?”

그 이름에 몇몇 사람들이 반응했다. 바키아라는 성은 상속이 폐지된 군국에서도 몇 없는 유명한 것이었으니.

“바키아라면, 천의무봉?”

“네! 2대 천의무봉이신 당피르 바키아가 제 할머니예요!”

페토가 신음을 흘렸다.

바키아.

군인의 후원자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 군국 최고의 부자.

아직 어리지만 곧이어 천의무봉을 이어받을 후계자다. 그 자체만으로 상당한 거물.

어린아이도 많이 만나보았고 거물도 많이 만났으나, 어린 거물은 처음이었던 페토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가 말을 계속한 건 어디까지나 투철한 직업의식 덕분이었다.

“환영합니다, 바키아. 어떤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소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들리도록 외쳤다.

“저를 회사의 후계자로 만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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