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7 과거의 이야기,내부자
군국의 역사는 의복 패킷과 함께한다.
2대를 거쳐 내려오며 개선된 의복 패킷은 그야말로 혁명적인 발명품이었다. 간편하고 튼튼하며 마력만 불어넣으면 순식간에 몸을 감싸는 옷. 의식주가 노동의 일부인 군인들은 의복 패킷의 편리함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당시 유행을 선도하던 살롱과 재단사들은 의복 패킷의 존재 자체가 탐탁지 않았다. 기술은 모자라도 돈과 인맥은 충분했던 그들은 금화 한 상자를 들고 기사들에게 접근했다.
효과는 확실했다. 불과 몇 주 뒤, 의복 패킷 사용 금지령이 왕국 전역에 내려왔다. 겉으로는 군인들의 사치와 방탕을 막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걸었으나, 사실은 권력을 쥔 기사들이 금화 한 상자와 군인들의 ‘사소한’ 불편을 저울질한 결과였다.
더불어 천의무봉은 의문의 기사에게 결투 신청을 받았고, 3대 천의무봉이 될 후계자가 결투 끝에 패배했다. 거부할 권리 따위는 갖지 못한 채로.
만일 금화 한 상자를 받은 기사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크게 후회했으리라.
쿠데타가 오직 그것 때문에 일어난 건 아니겠지만, 그 일이 없었다면 몇 년은 더 늦춰졌을 테니까.
“…2대 천의무봉은 군국에 헌신하셨죠. 그분께서 군인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신 덕분에 군국은 쪼들리는 와중에도 군인이 춥게 지내는 일은 없었습니다. 저희도 그 사실은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나….”
페토가 난감한 기색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그래도 지주회사의 건은 저희가 끼어들 수 없는 영역입니다. 저희는 공보정훈병이며 가정의 대소사를 비롯한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해드리지만, 회사의 후계 문제는 저희가 다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까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씩씩하게 서 있는 소녀조차 페토의 말에 낙담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하, 하지만 도움을 받고 싶다면 이쪽에 가보라고 말했단 말이에요!”
“도대체 누가 그랬습니까?”
“친구가, 저처럼 돈 많고 겁 없는 애는 호스트바에나 가면 딱 도와줄 남자 옆구리에 끼고 다닐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그 친구랑 당장 절교하십시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두의 입에서 그 말이 반쯤 튀어나왔다가 들어왔다. 아직 내막을 잘 모르는 이상, 남의 사생활에 함부로 훈수를 두는 건 금기다.
더 깊은 대화는 그만큼 깊은 관계를 맺은 후에. 이게 공보병의 철칙.
“흐음. 흥미진진한데요.”
그때였다. 드물게 입을 다물고 집중하고 있던 휴즈는, 내뱉은 것처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몸을 바로 세웠다.
페토가 설마, 하고 중얼거릴 무렵.
“선배. 제가 도울게요.”
설마가 현실로 나타났다.
“뭐? 네가?”
“저보고 애나 돌보라면서요. 뭐, 마침 좌천도 당했겠다. 바키아 아가씨의 일에 손이나 보탤게요.”
마치 자기가 나서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는 듯, 휴즈는 조금의 거리낌 없이 자신만만하게 나섰다. 천의무봉의 손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페토는 자기 구레나룻을 다 잡아 뽑고 싶은 감정을 느끼며 말했다.
“네가 돕기는 뭘 도와? 우리가 잘난 척 공보병이라 말하고 다니지만, 우리는 호스트바나 다름없어!”
“자기 입으로 인정하네요.”
“인정해야 할 때는 인정해야 하니까! 얼굴이랑 말주변 말고 우리에게 있는 게 뭔데!”
페토의 말이 끝날 때마다, 조금 밝아졌던 세피에르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어두워졌다. 손님의 불쾌함을 전신으로 느낀 페토는 휴즈의 멱살을 잡아끌고는 그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주제를 알자, 휴즈. 너나 나나 기껏해야 겉만 번지르르한 쭉정이일 뿐이야. 이 호스트바라도 지키기 위해서는 몸을 바싹 엎드려야 해!”
“그래서 그냥 보내자고요? 군국 최고의 지주회사, 천의무봉의 후계자가 도움을 청하러 왔는데 모른척하고? 그게 군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이 할 말이에요?”
“우리도 안타깝지. 하지만 뭘 어떡해? 우리는 그냥 능력 없는 한량이잖아! 이딴 커다란 일에 끼어들 능력도, 책임도 없어!”
공사를 구분하는 건 모든 공직에서 요구되는 덕목이나, 공보병은 몇 배나 큰 의무를 지닌다.
공적으로 죽을 수 있는 군인과 사적으로 죽을 수 있는 호스트라는 직업의 있어선 안 될 결합이기에, 그 책임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격분한 장교가 칼을 들고 쳐들어오는 일을 방지하려면 알아서 사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 태도가 몸에 익은 페토는 적극적으로 휴즈를 말렸다. 결국 휴즈는 수긍하고야 말았다.
“아아. 안 되겠네요. 그러면.”
“그렇지? 잘 생각했….”
휴즈는 패킷을 해제했다. 덕지덕지 붙인 온갖 장식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가며, 휴즈는 간단한 셔츠 차림으로 돌아왔다.
단숨에 제복을 벗은 휴즈는 제복 패킷을 페토에게 건넸다.
“이 말 꼭 해보고 싶었어요. 저, 오늘부터 여기 그만둡니다.”
“미친 새끼….”
“이제 선배 아닙니다. 말 함부로 하지 마세요, 페토 씨.”
“진짜 미친 새끼….”
휴즈는 멍하니 선 페토의 품에 패킷을 밀어붙이고는 세피에르에게 다가갔다. 낙담한 기색을 숨기려던 세피에르는 마침 다가온 청년을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제가 도와드려도 될까요, 세피에르 아가씨?”
“…고마워요. 그런데.”
지금껏 화려한 제복을 입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지만, 제복을 벗은 휴즈는 어른보다는 몇 살 나이 많은 세피에르의 또래처럼 보였다. 세피에르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페토를 보며 물었다.
“이 남자도 공보병인가요?”
페토가 눈을 질끈 감고는 대답했다.
“이제는 아닙니다.”
“한때는 맞았다는 건가요?”
“대타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렇습니다.”
급격한 성장기를 겪은 아이 특유의 마르고 큰 키. 아직 앳된 티가 남아있는 얼굴. 젊은이라는 단어조차 살짝 모자란, 어린 얼굴이다.
세피에르는 휴즈를 위아래로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멋있어 보이는 제복을 빌려 입은 아이가 아니고요?”
“푸하하하하! 야, 휴즈! 너보고 빌려 입었대!”
페토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박장대소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다지만, 진짜 지푸라기를 눈앞에 들이밀면 표정이 썩어들어갈 것이다. 지금의 세피에르가 딱 그랬다.
세피에르는 미심쩍은 눈으로 휴즈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즈는 싱글벙글 웃으며 소녀의 곁에서 나란히 걸었다.
“그러니까,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휴즈는 일목요연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2대 천의무봉의 지병이 악화된 틈을 타, 다른 친척들이 세피에르 아가씨의 후계자 자리를 탐내고 있다는 거죠?”
“…네. 일단은요.”
“일단은?”
세피에르가 손안의 의복패킷을 꽉 움켜쥐며 대답했다.
“현재 군국에서 아키 아바타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저와 할머니밖에 없어요. 할머니가 정정하실 적에는 저를 가르쳐주시며 제 뒤를 봐주셨죠. 하지만….”
2대 천의무봉의 건강이 악화되고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어지자, 세피에르를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휴즈가 말을 흐리는 세피에르에게 물었다.
“이상하네요. 아키 아바타는 의복 패킷을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라고 들었는데. 세피에르 아가씨가 아예 손을 놓아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죠?”
세피에르는 어물대다가 대답했다.
“…천의무봉을 없애고 싶지 않은 이상에야, 아키 아바타를 만들지 않을 수는 없으니까요.”
“아하. 아무리 억울해도 아가씨가 회사를 없애고 싶지는 않은 거군요. 그쪽도 그걸 알고 있고.”
“천의무봉은 예전부터 내려왔던 유서 깊은 포목점이에요.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최근에 다시 성세를 이루게 되었는데, 고작 제 욕심에 망가뜨리는 건… 불가능해요.”
“흐음. 이거 어쩐다.”
세피에르는 무겁게 말했으나 듣는 휴즈의 대응은 한없이 가볍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믿음직스럽지가 않던 세피에르가 슬그머니 물었다.
“…이번에는 제가 한 번 물어볼게요. 몇 살이에요?”
“열여덟 살이요.”
“고작 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
“큰일을 하는데 나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무슨 작전이라도 있어요?”
대답 대신, 휴즈는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적으로 세피에르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주제를 모르는 악동 같기도, 혹은 세기의 책사 같기도 한 미소는 세피에르는 알 수 없는 불길함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저 남자가 아군이라 안심한 게 아니다.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남자가, 최소한 적이 아님을 알게 되어 드는 안도감….
“아가씨, 저 믿을 수 있나요?”
…하지만 여기서 비위를 맞추면 왠지 진 것 같아, 세피에르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대답했다.
“아니요. 도저히 믿음이 안 가요.”
“현명하시네요. 하지만 믿으셔야 할 거예요.”
“왜죠?”
“그야.”
어느덧 둘은 3구역에 있는 천의무봉 본사에 도착한 상태였다. 7층 규모의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는 본사의 정문에는 고용된 경비원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휴즈는 손가락으로 그쪽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다 이를 거거든요.”
노환으로 병상에 드러누운 2대 천의무봉 대신 회사를 관리하는 사장 대리, 알렉세이 바키아는 때 아닌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휴즈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그는 연말에 찾아온 올해 가장 유쾌한 소식에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크하하하! 멍청한 계집 같으니! 갈 데가 없어서 공보병한테 찾아가! 기껏해야 호스트에 불과한 놈들에게! 꼬마는 어쩔 수 없는 꼬마인가!”
“뭣도 모르는데 바로 호스트바에 찾아온 걸 보면… 오히려 조숙한 거 아닐까요? 크헬헬헬!”
“하하하하! 너, 마음에 드는군! 말주변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한참 웃던 알렉세이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눈치가 빨라서, 바로 나를 찾아온 것도 그렇고.”
소인배는 소인배를 알아본다고 하던가. 휴즈 역시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알렉세이의 말을 받았다.
“역시, 대충 소재를 파악하고 있으셨군요?”
“아아, 물론이다. 다른 구역은 발도 디뎌본 적 없는 조그만 계집애가 갈 수 있는 곳이라고는 이 부근밖에 없지…. 설마 호스트바에 들릴지 몰라 놓치고 말았지만.”
“하지만 더욱 위험한 곳에 제 발로 들어간 셈이죠. 한탕 해먹을 생각밖에 없는 쭉정이들이 가득한 곳에…. 크크크큭.”
“크하하하하하! 웃기지도 않은 농담이야!”
“케헬헬헬헬헬!”
거울처럼 닮은 꼴로 한참 웃던 둘은, 몇 분이 지나고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그토록 즐겁게 웃었던 알렉세이가 표정을 굳혔다. 알렉세이는 지극히 수비적이고 아쉬운 얼굴로 휴즈에게 보수를 물었다.
“그래. 너. 나에게 원하는 게 뭐지?”
“저는 호스트입니다. 정확히는, 여자의 말상대를 해주고 그들이 제 앞에서 감히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심란하게 만드는 게 일이지요.”
“호오. 그래서?”
심란하게 만든다는 대목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다. 성공했음을 직감한 휴즈는 양손을 싹싹 문지르며 말했다.
“사장님께서도, 저 꼬마 아가씨가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2년 뒤 시민등록이라도 받으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데. 곁에 두고 감시할 인원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감시하겠다고?”
“감시는 좀 어감이 그렇고, 가정교사 하나 필요하지 않겠냐는 뜻이었습니다, 사장님.”
다른 그 무엇보다도 사장님이라는 단어 선택이 알렉세이를 흡족하게 만든 게 분명했다. 알렉세이는 전보다 훨씬 호탕하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보이며 휴즈에게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한다. 오늘부터 너는 세피에르의 가정교사다. 후계 수업 때문에 중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으니, 가정교사라도 구해주는 게 대부의 의무겠지!”
휴즈는 비굴하게 허리를 숙이며 그 손을 맞잡았다. 그 태도는 알렉세이를 더욱 흡족케 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다시는 반항할 생각도 못 하게 몰아붙여서, 아키 아바타를 만드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하겠습니다!”
만일 그때 세피에르에게 총이 있었다면 휴즈를 쏘았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그때는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세피에르는 인간을 쉽게 믿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