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8 과거의 이야기,나는 선생이고 너는 학생이야
“…나를 속여?!”
“하하하. 눈 뜨고 코 베이셨군요.”
“죽어!”
“으앗! 조심! 칼은 위험해요!”
“칼 무서운 줄 알았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이익! 놔…!”
“아. 조심하라는 건 세피에르 아가씨 손이었어요. 이렇게 휘두르면 자기 손가락을 벤다고요. 앞으로 천의무봉을 이끌어야 할 중요한 손인데.”
“필요 없어…! 이딴 거…! 차라리 손가락이 없다면…!”
“천의무봉을 지키겠다는 당신의 마음가짐은 고작 그것뿐이었나요? 아직 할머님이 살아 계시는데, 손녀 손가락이 잘려나간 모습을 보면 억장이 무너지고 마음이 찢어지시겠어요.”
“….”
“…너, 절대. 곱게 안 죽을 거야.”
“예상한 바예요. 하지만 어떻게 죽냐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한 거 아니겠어요?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저는 지금 한 잔의 홍차를 마시렵니다…. 어라. 맛이 이상한데. 혹시 이 홍차에 독을 넣으셨나요?”
“…설사약.”
“후…후. 알면서 먹어드렸어요.”
“거짓말하지 마! 칫, 맹독을 넣었어야 했는데…!”
“이 이야기는 제가 화장실 갔다 와서 마저 하지요. 아, 죄송한데 설사할 때 습격하지는 말아 주세요. 아무리 저라도 묻히지 않고 저항할 방법이 없… 큭, 나온다.”
“더러운 말 하지 말고, 너 같은 인간쓰레기는 배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려!”
“…내가 어째서 총 쏘는 방법을 배워야 해?”
“이런 기회에 배워둬야죠. 저 같은 사람이 이럴 때 아니면 어떻게 총탄을 마음껏 쓰면서 사격술을 배우겠어요?”
“네가 배우려고 했던 거냐.”
“앗! 들켰다!”
“할머니의 돈으로 호사를 누리려고 하다니…!”
“어허. 잠깐. 흥분하지 말고. 총을 쏠 때 가장 필요한 건 차가운 머리와 느린 심장. 머리를 식히고 저쪽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 쏘세요. 아니, 이쪽 말고!”
“죽어, 쓰레기! …어? 꽃?”
“짜잔. 사실 꽃이 튀어나오게 가공한 가짜 탄환. 하하, 놀랐…. 아! 아! 가짜도 맞으면 아파요! 꽃으로도 때리지 말랬는데!”
“야. 이게 뭐야?”
“오늘은 연금술 수업이에요.”
“연금술? 수업? 네가? 나한테?”
“앗, 설마 천의무봉의 후계자인 내게 연금술을 가르친다고? 너 따위가?… 라고 생각하셨나요?”
“정확하네. 그다음에는 '지옥으로 꺼져, 바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몰랐나 봐?”
“후후. 그럼 한 번 시험해볼래요? 제가 연금술을 가르칠 능력이 되는지 안 되는지.”
“어떻게?”
“아무거나 문제를 내 보시죠. 다 맞춰볼 테니.”
“딱 기다려.”
“…자.”
“이야. 문제를 내라고 했더니 시험지를 가져오셨네. 중등군사학교 마지막 평가시험 이후로 이런 거 풀어 본 적도 없는데.”
“다 내가 직접 만든 문제야. 할머니에게 배운 내용을 토대로 했지.”
“어렵네요. 흐음. 이게, 이거고, 저게 저거고.”
“흥, 할머니는 재봉과 연금술의 경지에 이른, 정말 천의무봉이나 다를 바 없으신 분이셨어. 연금사 한 올 한 올의 형성 순서를 절묘하게 조정하여 옷을 짓는 가공할 능력을 지니고 계셨지. 할머니가 온 힘을 다해 발전시킨 기술 덕분에 의복 패킷이라는 기막힌 발상이 가능해진 거야! 네가 과연 그 기술의 파편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지….”
“다 풀었어요.”
“거짓말! 어떻게?!”
“저는 모르는 게 없으니까요. 아가씨가 아는 거라면 저도 다 알아요.”
“흥. 분명 대충 오답을 끄적인…. 어, 맞았…. 어떻게?”
“안다니까 그러네.”
“말…도 안…돼. 그러면 나는…. 내가 왜….”
“아, 맞다. 세피 아가씨.”
“…왜.”
“생각해보니 제가 선생이고 아가씨가 학생인데 호칭이 조금 무례하네요. 서열정리가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호칭을 조금 정리하죠?”
“…뭘로.”
“저를 선생님이라 부르세요. 저는 아가씨를 세피라고 부를게요. 알았죠, 세피?”
“어…. 으, 서, 새….”
“어허! 기세가 약해요. 네, 선생님! 이라고 해야죠!”
“필요 없어!”
“세피. 오늘은 손님이 오기로 했거든요?”
“…선생 손님이야?”
“우리 모두의 손님이요.”
“누군데. 아군이야, 적이야?”
“나중에 설명해줄 테니까 일단 옷 좀 벗어주시겠어요?”
“어디까지?”
“…어디까지냐니. 이건 저도 좀 당혹스럽네요. 당연히 외투를 말하는 거 아닐까요?”
“앗, 그, 그래…. 그나저나 이 날씨에?”
“이 날씨니까 부탁드리는 거예요.”
“알았어… 으으, 엣취. 추워.”
“조금만 참아보세요. 죄송해요.”
선생이 문을 열고 나갔다. 아직 불을 때지 않아 싸늘한 방에서 세피에르는 홀로 추위에 떨었다. 두 사람 중 한 명이 나갔을 뿐인데, 겨울 바람 찬 방에 한번 더 겨울이 찾아온 듯했다.
한 사람이 지내기에는 조금 넓은 방에서 세피에르는 몸을 떨었다.
“…그보다 내가 왜 선생 말을 따르고 있는 거야….”
선생은 의외로 아는 것이 많았다. 세피에르는 그와 함께 있으면서 배운다는 기분을 느꼈고,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오기가 생긴 세피에르가 훨씬 어려운 내용을 공부해서 와도 그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선생이 모르는 것이라고는, 세피도 관련된 내용을 찾지 못할 정도로 난해한 문제밖에 없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세피에르는 휴즈를 선생으로 인정하고는 진지하게 배움에 임했다. 과연 이번에는 또 무엇을 준비했을지, 기대 반 걱정 반 되는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추위 속에서 얼마나 떨었을까. 이윽고 문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 네가 나를 어떻게 꼬드겨도, 절대 누더기나 만드는 바키아에겐 협력하지 않는다!”
“아, 스멘 씨. 보기만 해보라니까요.”
벌컥. 문이 열리고, 수염이 지저분한 노년의 남성이 구둣발로 들어왔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방안을 둘러보고는 투덜거렸다.
“흥. 작업실이라고 해도 별거 없구만! 이게 공장이지, 여기 어디에 옷이 있나! 내 눈앞에 있는 건 예술성이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노년의 남성은 낡은 옷을 입고 있었으나 차림새는 깔끔했다. 노인은 인상을 팍 쓰고는, 한구석에서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는 세피에르를 발견했다. 노인이 코웃음을 쳤다.
“하! 옷을 만든다는 놈들이 꼬마에게 줄 천도 아까워하는구나! 여기 사용인이냐? 주인이 옷을 안 주디?”
“세피에르 바키아 아가씨입니다.”
“…뭐? 천의무봉의 손녀?”
스멘이 안색을 바꾸었다.
“천의무봉의 손녀가 어째서, 이런 날씨에 외투도 안 입고…? 널린 게 옷인데?”
“벌을 받는 중이거든요. 아가씨의 대부이신 알렉세이 사장님께서는 엄하신 분이라, 아키 아바타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아가씨에게 호된 벌을 주시곤 하죠.”
“천의무봉이 몸져 누웠다더니…. 아무리 그래도.”
“아, 물론 야만적으로 때리지는 않고요. 단지 삶에 필요한 것 하나씩 빼앗았다가 돌려주는 방식으로. 혼내죠. 의, 식, 주… 오늘은 옷 차례였나 보네요.”
‘선생이 벗으라고 했잖아….’
세피에르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진실을 스멘은 듣지 못했다. 스멘은 수염이 부들부들 떨 정도로 분노하며 외쳤다.
“어찌… 아무리 그래도, 그 천의무봉의 유일한 후계자가 아니냐! 어떻게 이런 꼴을…!”
“뭘 새삼스럽게. 스멘 씨도 저렇게 얇고 하늘하늘한 옷을 짓곤 했잖아요? 이보다 추운 날씨에.”
마음속 정곡을 찔린 스멘이 변명하듯 외쳤다.
“그것은 무도회용이었지!”
“무도회용이라고 이름 붙이면, 비슷한 학대가 괜찮아지나요?”
주름진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스멘을 향해, 선생은 또 불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그래서 더욱 오싹해진 웃음. 세피에르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린 사이, 선생은 노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스멘 씨가 말했죠? 옷의 기능적인 면모만 도려내어 이어붙인 천의무봉의 의복 패킷은, 미학 따위는 모르는 사도라고.”
“그건.”
“하지만, 미학을 추구한 끝에 저 나이대 소녀들에게 얇은 옷을 입혀서 춤추게 한 건 누구예요? 당신이 지은 옷을 입고 벌벌 떨면서,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춤을 춘 소녀들. 그들과 지금 삼촌 아래에서 학대당하는 아가씨와 무슨 차이가 있죠?”
“학대, 가 아니라… 나는 어디까지나, 요청에 의해.”
“요청한 덕에 만든 옷이 몸의 절반도 가리지 않는 드레스였나요? 겨울바람 차가운 공기와, 그보다 냉정한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하나도 보호해주지 못하는? 하아. 이제 의복 패킷에 대해 알겠네요. 당신이 도려내어 버린 옷의 기능이 다 의복 패킷으로 갔던 거구나.”
“그건, 왕국의 문화가 그래서.”
쾅. 선생은 책상 위를 세게 내리쳤다. 그보다 나이를 세 배는 더 먹었을 스멘은 입을 꾹 닫고 꼼짝을 못했다.
“웃기는 소리! 옷의 의미를 잊은 채 멋만 탐구하는 당신들은 옷을 만든다고 할 수 없어. 당신들이 짓고 있던 건 허영과 사치! 백성들의 피와 땀이자, 하루를 버틸 소중한 온기를 빼앗아서 만든! 사람을 죽이는 옷이란 말이다!”
‘아. 또 한 명 넘어갔다.’
후회와 회한에 잠긴 옛 왕국의 재단사도 선생의 말에 수긍하고야 말았다.
저것을 감언이설이라 해야 하는지 양약고구라고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 스멘은 완전히 마음을 꺾고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되겠나.”
“일단, 세피에르 아가씨에게 스멘 씨의 비법을 다 가르쳐줘요. 그러다 보면 당신도 얻어가는 게 있겠죠.”
결국 세피에르의 공부량이 늘었지만, 이제 세피에르는 쓸데없이 반항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 꾸준히 공부했다.
끊임없이 배움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하나를 쌓고, 그 위에 올라타서는 다른 하나를 쌓는다. 그렇게, 하나하나 발밑을 다지며 점차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던 때.
세피에르는 단정한 옷을 차려입고는 선생을 기다렸다. 미리 홍차를 따라둔 채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앉아있던 그녀의 앞으로, 마침 도착한 선생은 자기 코트를 툭툭 털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세피에르가 그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선생. 알렉세이가 사업을 확장한다고 하던데.”
선생은 코트를 패킷으로 돌려놓으며 말했다.
“아, 들었어요? 네, 맞아요.”
“스멘이 알렉세이를 돕고 있다고 들었어.”
“네. 가죽 장신구도 다뤄본 적 있는 사람이니까요. 실력도 경력도 있는 기술자가 생기니까 알렉세이 사장님께서 엄청나게 좋아하시던데요.”
태평하게 말하는 선생을 앞에 두고, 세피에르는 이를 악다물었다.
어떻게, 저런 태평한 얼굴로 배신할 수가 있을까.
세피에르는 분노와 실망, 슬픔으로 범벅이 되어 말했다.
“…가죽은 연금하지 못해. 동물 가죽은 구조가 더럽고 복잡하니까. 더 나은 제품을 만드는 방법은 태생적으로 강력한 짐승의 가죽을 쓰는 게 전부야.”
“네. 그렇더라고요. 어지간한 고급 가죽 아니면 주로 장신구로 많이 쓰인다고.”
“그러니까… 알렉세이가 가죽에 손을 대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내 영역 밖이야.”
“그렇겠네요.”
쾅. 세피에르가 책상 위를 강하게 내리쳤다. 연금사와 원단, 가위와 아키 아바타 도해(圖解)가 허공에 솟아올랐다가 나풀나풀 가라앉았다.
세피에르의 목소리 역시 그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아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에서는 이슬과 비슷한 질감의 빛깔이 났다.
“선생은… 내 편이 아니었어?”
“따지고 보면 세피 편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런데 왜, 알렉세이를 도왔어?”
“알렉세이의 적도 아니니까?”
“알렉세이가 제 주머니를 차리면…. 나는 이제 손 쓸 도리가 없어. 나는 아키 아바타를 만드는 기계가 될 뿐이야.”
“뭐, 그럴 수도 있겠죠.”
이토록 중요한 일인데.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대답에 세피에르는 맥이 빠졌다.
사실, 내심 바라고 있었다. 알렉세이의 편에 붙은 건 위장이었으며, 그를 방심시켜서 결정적인 순간 배신하려는 게 아닐까 기대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는 알렉세이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진심으로.
알렉세이가 제 주머니를 차는 순간 세피에르의 영향력은 급속하게 쪼그라든다. 이제 세피에르는 천의무봉 자체를 없앨 각오를 하지 않으면 멈출 수 없다….
아니, 이미 멈출 수 없었다. 천의무봉은 세피에르의 전부이자 꿈. 무조건 지켜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나가줘, 선생.”
세피에르는 자기 몸을 쪼개는 심정으로 말했다. 잠시 말없이 홍차를 홀짝이던 선생은, 벗어놓았던 코트를 다시 챙기며 고개를 꾸벅였다.
“그게 아가씨 바람이라면.”
홍차에는 독이 없었다. 그녀의 눈물이 섞여 들어가긴 했지만.
세피에르는 그날 처음으로 울었다.
몇 주 뒤, 군국에서 온 누군가가 세피에르를 찾아왔다. 옷깃을 입가까지 끌어올린 제복의 사내는 말없이 편지를 건넸다.
공공안전부.
우는 아이도 뚝 그치게 만든다는 비밀 부서. 존재부터 수사 내용까지 모두 극비인, 군국 내부와 외부의 기밀 작전을 관장하는 특수작전부.
회사도, 개인도, 혹은 군국에 충성하는 장교조차도. 필요하다면 잔혹하게 도려내고 잘라내 버리는 콘크리트 나라의 비정한 정원사들.
그 수장, 군국 초기부터 이 나라를 다듬어온 오장성 영궤의 서신에는, 믿기 힘든 내용이 한가득 적혀 있었다.
“…어?”
[친애하는 3대 천의무봉 귀하.
본국은 현존하는 두 천의무봉의 안타까운 사연에 심심한 유감을 표합니다. 천의무봉의 노고와 헌신에 모든 군국민이 커다란 은혜를 느끼고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나 천의무봉은 회사의 이름을 하고 있지만, 그 전신은 경지에 이른 재봉사였습니다. 1대 천의무봉으로부터 내려온 그 커다란 뜻은 대를 거쳐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으나, 최근 몇몇 무능한 이들이 그분의 높은 뜻과 이름을 더럽히려고 합니다….]
군국에서 보기 힘들 정도로 예의 바르게 적힌 편지였으나, 도리어 괴물이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 쓴 것만 같아 섬뜩했다.
세피에르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마저 읽었다.
그 뒤로도 어울리지 않은 온갖 미사여구가 적혀 있었으나, 본론은 맨 마지막 줄에 있었다.
[…하여. 본국에서는 그런 이들을 대상으로 소탕작전을 결행할 예정입니다.]
천의무봉은, 멸망의 위기를 맞이했다.
“1년이면 충분히 가르쳤어요, 세피. 이제 선택하셔야 해요.”
아마 이 모든 일을 획책했을 선생은 세피에게 선택을 종용했다.
“세피. 당신은 온전한 천의무봉을 손에 넣고 싶어 했어요. 천의무봉에서, 감히 주제도 모르고 2대와 3대 천의무봉에게 반항하는 알렉세이와 그 측근만 깨끗하게 잘라내고자 했죠.”
세피의 앞에 놓인 것은, 천의무봉의 재산과 인명 명부였다. 세피는 떨리는 손으로 펜을 잡았다.
이것은 죽을 이를 기록할 명부. 세피는 지금 천의무봉의 염라대왕이 되어 그들의 생사를 결정한다.
“하지만, 그건 괜찮을까요? 지금까지 회사에 헌신한 알렉세이는 천의무봉이 아닌가요? 쿠데타를 지원하면서 자금줄이 끊어질 뻔한 회사를 어떻게든 지탱한 친척들은, 당신이 그리는 아름다운 천의무봉에 들어갈 자격이 없나요?”
알렉세이가 아무런 능력과 수완이 없었다면 임시로라도 사장이 될 수 있었을까.
그는 오랜 시간 2대 천의무봉의 아래에서 온갖 잡다한 일을 떠맡았다. 젊은 날의 대부분을 천의무봉에 헌신하는 데 썼으리라.
“아키 아바타를 만들지 못하면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위치에서, 알렉세이도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뿐이에요. 천의무봉에게 선택받지 못한 이의 발버둥이라고 할까요.”
2대 천의무봉이 쓰러지고, 어린 후계자 대신 사장 대리를 맡은 알렉세이. 아무도 그 처사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고작 열일곱 아이보다, 산전수전 다 겪은 알렉세이가 훨씬 믿음직스러웠으니까.
“단, 발버둥을 치다가 고아원 아이까지 발로 걷어차고 말았네요. 직업교육이라며 끌고 와서 일을 시키다니. 아무리 군국이 노역자에게 별 관심이 없다지만 학교 다녀야 할 애들까지 방치하지 않죠. 군국 입장에서, 아이들은 아직 안 긁은 복권인데. 다 긁어서 버려도 되는 아저씨가 그짓을 하고 다니면…. 에휴.”
그러나 알렉세이는 선을 넘었고, 군국은 부정한 축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부정’이 더 문제인지 ‘축재’가 더 문제인지 몰라도 어쨌건 알렉세이를 남겨둘 이유는 없었다.
“알렉세이의 바람은 여기서 끝나버렸어요. 어쩔 수 없죠. 저는 최선을 다해 도왔지만, 그는 능력의 부족함을 스스로 증명해버리고 말았네요.”
엇나가는 제자를 보는 듯한, 안타까운 한탄에 세피에르는 왠지 모르게 자기 몸을 떨었다.
“군국이 천의무봉은 쉽게 쳐내도 아키 아바타는 못 잃어요. 오만하고 건방진 알렉세이와 천의무봉에게 과할 정도로 조심스레 접근하는 것도, 현재 유일한 아키 아바타 제작자인 아가씨를 길들이기 위해서죠.”
아키 아바타는 인간의 본.
팔, 다리, 가슴, 손, 배, 무릎, 발, 목.
각각의 구성요소를 모아 ‘인간’으로 보이게끔 하는, 개념적인 인체의 형상화. 이게 있어야만 생체 단말과 연동하여 자동으로 사이즈를 맞춰주는 의복 패킷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만일 아키 아바타가 없다면, 의복 패킷은 그냥 잘 개어놓은 옷과 다를 바 없으니.
군국 역시도 곁가지를 다 잘라내고 오직 세피에르만을 남겨놓으려고 움직이는 중이다.
“어쨌건, 조금 늦기는 했지만 이제 아가씨의 바람을 들어드릴 차례겠네요.”
이제 선생은 온전히 세피만을 바라보았다. 분명 그럴진대, 세피는 꼭 맹수의 앞에 선 것만 같은 불안감을 느꼈다.
“세피. 세피의 바람은 당신이 바라는 천의무봉을 만드는 것. 하지만 부수지 않으면 고칠 수 없어요. 무너뜨리지 않으면 다시 쌓을 수 없어요. 세피가 소중하게 여기는 천의무봉은 단순하지 않아요.”
분명 그럴 것이다. 세피도 배우면 배울수록, 시야가 넓어질수록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얻으려는 것과 상대해야 할 것이 뭔지 알았고, 알렉세이의 입장도 심경도 어느 정도 이해했다.
하지만 이런 결말이 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눈앞에 존재하는 선생 빼고는.
선생이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세피가 주저하는 것 같아서, 천의무봉은 제가 대신 부수었어요.”
자기만의 회사를 만들고자 했던 알렉세이는 무리하게 가죽 사업을 확장했다. 그 과정에서 왕국 출신 재단사도 끌어모으고, 노동력을 위해 고아원 아이들을 불러 일을 시켰다.
민심은 흉흉해졌고 군국은 칼을 빼 들었다. 지금 존재하는 약간의 유예는, 오직 3대 천의무봉 덕분.
만일 세피에르가 고개를 끄덕인다면, 군국은 그녀를 제외한 모든 천의무봉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리라.
“이제 세피가 원하는 것을 골라가세요. 세피와 함께 살아남아서, 다음 천의무봉을 이룰 것들을 장바구니에 담아요.”
군국 최고의 지주회사를 단숨에 파멸로 몰고 갔으면서도 여전히 순수하고 맑은, 시선을 사로잡는 미소로.
선생은 마지막 실습을 시작했다.
“당신이 원하는 천의무봉을 만들 시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