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79 소원은 이루어진다
밤이 어둑했다. 잠을 방해하지 않을 만한 희미한 야광등이 에이비의 앞머리를 간지럽히다가 사그라들었다. 문득 찾아온 밤처럼, 어느 순간 에이비는 자연스럽게 잠에서 깼다.
슬그머니 눈을 뜬 에이비가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곧 벼락을 맞은 듯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읏?! 본관은, 도대체 언제 잠을…?”
식당에서 직녀와 독대하던 에이비는, 직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던 중 깜빡 졸았다.
요 며칠간 마력을 무리하게 운용하며 군국의 각 구역을 탐색했던 에이비다.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부하가 온 것이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가득 찬 배와 따뜻한 홍차 향기 속에서 잔잔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누구도 잠에 빠질 것이다.
“불찰…!”
그렇게 밤중에 벌떡 일어난 에이비의 곁에는, 정장 차림의 세피에르가 느긋하게 앉아있었다.
“일어났어요, 대위?”
이 모든 일을 예상이라도 한 듯, 세피에르는 너무나도 평온한 태도였다.
에이비가 다급히 일어나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의문. 그는 어디 갔습니까?”
“먼저 출발하셨어요. 기다리고 있겠다는 전언을 남기시고.”
“…그렇, 습니까….”
에이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오늘 낮만 하더라도, 인생 마지막에서야 느낄 행복에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올랐던 그녀였다.
평범한 결혼과 안타까운 이별.
고작 형식뿐이겠지만 그녀의 최후를 꾸미기엔 충분한 장식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에이비 따위 전혀 아쉬울 게 없는 상상 이상의 거물이었다. 지주회사를 뒷배로 둔 채 뒷골목에서 암약하며, 온갖 곳에 영향력을 끼치는 그.
아마도… 그는….
에이비는 눈을 질끈 감고는 잡념을 끊어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본관은 해야 할 소명이 있습니다. 공무를 위해서 마차를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차를 빌려주는 거야 아주 쉬운 일이죠. 하지만 그 옷차림으로 갈 수 있을까요?”
“옷?”
뒤늦게 에이비는 자기 옷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늘 입던 제복이 아니라, 노랗고 푹신푹신한 옷이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어깨부터 다리까지 부드러운 털로 이루어진, 뭐라 설명하기 힘든 해괴한 옷이었다.
와중에 털옷의 부드러운 촉감만은 일품이라, 에이비는 이 옷을 입은 것만으로도 침대에 누운 것만 같은 포근함을 느꼈다.
“이, 이 비정상적인 옷은 무엇입니까?”
“제가 직접 만든 특제 병아리 잠옷이에요. 아키 아바타로 털옷의 질감을 얼마나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한 끝에 나온 걸작이에요.”
“본관이 말한 건 그게 아닙니다! 어째서 본관의 옷이 이것이 되었냐고 물은 겁니다!”
“어울릴 것 같아 서 제가 입혀보았어요. 실제로도 꽤나 어울리더군요. 챙겨 줄 테니까 들고 가세요.”
“거절!”
대위가 급히 패킷을 해제했으나, 연금사 하나하나에 미세한 털을 덧붙인 잠옷은 패킷으로 돌아가기까지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세피에르가 중얼거렸다.
“밤 중인데, 더 쉬고 가시지. 지금 출발하시게요?”
“본관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 더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할 일이 무엇인가요, 대위?”
“기밀입니다!”
세피에르는 군인다운 대답이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그렇다면 기밀이 아닌 부분만 대답해주세요. 대위의 목적지 정도는 들어야 제 마차가 어디까지 갈지 참고할 수 있을 테니까.”
중간에 마차에서 쫓겨나듯 내리기 싫으면 어느 정도는 털어놓으라는, 협박 아닌 협박이었다.
에이비는 상대의 태도를 지적하고 싶었으나 마음으로 그쳤다. 직녀의 시민 레벨은 5레벨. 에이비보다도 높으며, 군사기밀에도 여럿 손대고 있는 걸물이다.
통신병에 관한 극비만 아니라면 말해도 기밀 누설은 아니다. 에이비의 소속과는 별개로, 지금 에이비가 하려는 행동은 일단 군국의 치안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니.
계산을 끝마친 에이비가 대답했다.
“본관은 10번대 구역에서 암약하는 '그림자'와 '마술사', 그 둘을 조사하고 감시해야 합니다. 본관이 그들의 음모를 거의 파악하였으니, 이제 그들의 동향을 파악하다가 적절한 순간에 개입할 것입니다.”
“마술사, 라고요?”
의외의 사실을 접한 세피에르는 의문을 살짝 담아 물었다.
“군국의 대위가 그들을 왜 찾으시는 거죠?”
“…귀하께서 그에 대해 묻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반동분자를 처단하고 군국의 치안을 지키는 것은 군인 된 이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흐음. ‘그림자’와 ‘마술사’라. 그림자야 왕국 시절부터 명맥을 유지해온 흉악한 단체라고 해도, 마술사는 왜?”
1구역에 거주하는 세피에르 바키아가 왜 상관도 없는 뒷골목 사정에 해박할까.
평소라면 순식간에 변할 의복 패킷은 오늘따라 변환이 느렸다. 아직 패킷이 다 해제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았다.
에이비는 그동안 생각해둔 바를 말했다.
“그림자는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려는 흉악범입니다. 마술사는 모든 잡다한 범죄의 온상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네. 그림자에 비하면 마술사가 저지른 짓은 귀엽다고 볼 수 있죠.”
“긍정.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대놓고 날뛰는 그림자보다, 오랫동안 잡초처럼 살아남은 마술사가 훨씬 위험하다며. 에이비가 딱딱하게 말했다.
“마술사는 위법행위에 대한 거부감을 흐립니다. 그는 도박, 협박, 금품갈취, 이간질, 소매치기 등등을 일삼은 범죄자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도 그를 꺼리거나 밀고하지 않았습니다. 떠받들거나 두려워하거나, 둘 중 하나의 모습만 보일 뿐.”
자기도 그랬다는 듯, 세피에르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미소였다. 에이비는 점차 뒷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말을 계속했다.
“시민들은 사소한 범죄의 온상이나 다름없는 그를 보고도… 방관하거나, 좌시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법규는 준수해야 하며, 필벌은 엄정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법과 질서로 쌓아올린 사회가 유지됩니다.”
“그래서, 마술사까지 체포하시려고.”
“…긍정. 다만.”
에이비의 입술은 어느새 바싹 말라 있었다.
“만일, 마술사가 본관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그림자를 처단하는 일을 도왔을 경우…. 상황에 따라서는 의혹을 추궁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법규를 준수해야 할 대위가 그래도 되나요?”
“그가 현행범으로 잡힌 것은 아니기에, 범죄를 소명할 근거가 없습니다. 어디까지 정황증거뿐. 그러니.”
제발, 아니기를.
에이비는 간절히 바랐으나.
세피는 에이비의 희망을 깨부쉈다.
“대강 짐작하시는 것 같네요. 다행이에요. 설명할 노고가 줄어서.”
아는 쪽으로 넘어온 에이비를, 세피에르는 양팔 벌려 환영했다. 그 직후 에이비의 잠옷이 완전히 풀어지며 새하얀 나신이 드러났다.
완벽한 무방비가 된 에이비를 바라보며, 세피에르는 진실을 전했다.
비밀을 미리 접한 이가 그러지 못한 이에게 보내는, 우월감에 찬 미소와 함께.
“네, 맞아요. 당신과 함께 오신 그분이 바로 마술사이자, 제 스승님이세요.”
에이비는 입을 꾹 닫고는, 탁자 위의 제복 패킷을 들어 생체 단말에 꽂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곡선 위로 연금사가 자리를 잡았다. 그 뒤, 수만 가닥의 연금사가 차례대로 조형되며 에이비의 몸 위에 대고 새카만 제복을 지었다.
에이비가 군국의 대위로 바뀌는 데에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대위는 장교 모자를 챙기고 일어났다. 에이비 대위는 세피에르를 지나쳐 방의 문을 나섰다.
성큼성큼 걷는 에이비의 곁으로 세피에르가 따라붙었다.
“협조할게요, 대위. 제 마차를 빌려드리죠.”
미리 준비하고 있었는지 구레나룻이 자란 마부가 곧장 마차를 끌고 왔다. 세피에르는 에이비를 뒷좌석에 태우고는 자기도 냉큼 옆자리에 앉았다.
에이비는 나란히 앉은 세피에르를 힐끔거렸다.
“…본관은 작전 중입니다. 암중의 세력으로부터 귀하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상관없어요. 제 한몸 정도는 지킬 수가 있으니까.”
“또한, 군국이 발휘하는 모든 군사 작전은 군사 기밀입니다. 민간인에 불과한 귀하에게 작전 내용을 알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마차가 어디까지 가야 할지는 알려주셔야겠죠. 그게 효율적이잖아요?”
정론을 통하여 상대를 억지로 수긍시키는 듯한 화법. 세피에르의 말에서 그의 그림자가 비쳐 보였다. 아무래도 가르친 게 지식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새삼, 에이비는 그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이비가 슬프게 중얼거렸다.
“…어디부터 연기였습니까. 어디부터 그의 계획이었을까요.”
군국의 뒷골목을 주름잡던 마술사이자, 지주회사 천의무봉의 후원을 받는 범죄자.
벌써 드러난 것만 해도 상상 이상의 거물이다. 단순 노역자로 무저갱에 갇힌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로.
“마술사는,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본관에게 접근한 겁니까…?”
딱히 정보를 캐낸 적도 없고, 에이비를 이용하려고 든 적도 없다. 요청에는 꼬박꼬박 응했고 에이비를 위해 이것저것 배려해주기도 했다.
에이비가 한껏 머리를 굴려 떠올린 보답조차, 그에게는 의미가 없었으나. 그는 에이비의 요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왜?’라는 물음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대답은 에이비에게 호감을 품어서, 일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종류의 호감일까.
“저도 몰라요. 아마 스승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모를 거예요.”
막연한 호의 속에서 혼란과 의문.
한참 예전에 졸업한 감정을 다시금 느끼는 에이비를 보며, 세피에르는 동지의 탄생에 즐거워했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 스승님께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당신의 소망을 이루어줄 거예요.”
“불가능. 본관에겐… 귀하와 같은 소망이 없습니다.”
군국에서 태어나고 통신병으로 자라, 어두컴컴한 방에서 군국의 모든 정보를 접하며 살아왔던 그녀다.
에이비는 스스로 이루고 싶다는 소망이 없었다. 단지 의무만이 있을 뿐….
“아하.”
에이비의 말에서 무언가를 깨달은 세피에르는 작게 탄식했다.
“이제 알겠어요. 스승님께서는 당신에게 소망을 선물하실 작정이네요. 의무보다도 소중할, 당신만의 소망을.”
14구역에 있는 어느 은신처.
대업을 앞두고 ‘그림자’를 불러모은 울펜은,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입을 열었다.
“…결행은 내일.”
그림자에 반쯤 잠긴 울펜이 엄숙하게 선언했다.
“내일, 군국은 혼돈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불꽃의 그림자가 이 도시를 뒤덮으리라. 잠시 자리를 차지했던 승냥이들을 없애고, 진정한 어둠인 우리가 암약하리라.”
‘그림자’들은 곧이어 찾아올 그들의 세상을 떠올리며 환호했다. 소리를 삼킨 환호는 조용한 열기로 회의실 안을 가득 메웠다.
울펜은 검을 들었다. 뽑는 자세도 보이지 않았는데, 날을 새카맣게 칠한 소도(小刀)는 유령처럼 어느새 그 자리에 있었다.
“시스템은… 이용해야 의미가 있는 법. 군국이여, 왕국의 시체를 밟고 태어난 흙과 철의 나라여. 그대들의 시스템, 본을 위해 쓰겠노라.”
이제부터 군국의 그림자는, 그들의 영역이 될 것이다.
울펜의 계획을 들은 반그림자들은 자기 심복들을 조용하게 불러모았다. 나름 중간 관리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자,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행동대장들.
“결행은 내일이다. 준비하고 있도록.”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말리느라 힘이 들 지경이었어요.”
“내일까지만 막아둬라. 계획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 내일, 둑이 터지는 것처럼. 한꺼번에 움직여야 나라를 뒤집을 수 있을 테니까.”
고도의 훈련을 받은 그림자라면 모를까, 어중이떠중이의 집합을 기민하게 움직이기 위해선 귀띔해주는 게 편하다. 반그림자들은 각지의 심복에게 말을 전했다.
어두운 밤에 물결이 치듯, 그림자의 계획은 조용하고 은밀하게 퍼져나갔다….
“오늘이 바로 그 결행일이다!”
“와아아!”
“자, 들어가자!”
“혁명이다! 이 빌어먹을 나라를 뒤집는 거다!”
“마켓? 패밀리? 똑같은 쓰레기들 주제에 거들먹대기는! 덮쳐!”
“경관도 사람이다! 쫄지 마!”
아직 충분히 기름이 뿌려지지 않았는데, 아미텐그라드 곳곳에서 불길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