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0 살고 싶다고 말해 - 6
울펜은 심리전을 거는 대신, 오직 힘과 기공으로 나를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제길, 단순한 피지컬 싸움에 약하다는 내 약점을 간파하다니. 비겁하다.
하아. 이제 꿀 빠는 것도 끝인가.
이제는 진짜, 진짜 시간 끌기밖에 없다. 가진 수단을 전부 활용해서 시간을 끌어야 했다.
“필살!”
리볼버의 총탄은 다섯 개. 남은 건 빈 총.
총탄 없는 총은 필요 없다. 나는 과감하게 빈 총을 냅다 던졌다.
“총던지기!”
깡. 날아간 총이 소도에 가로막혔다. 총까지 던져가며 알차게 빈틈을 만든 나는 곧장 땅을 뒹굴어서 건물과 건물 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로 난 좁은 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던 사람 둘이 서로 마주치면 어색한 관계가 되어야 하는 비좁은 틈.
나는 그 골목을 냅다 달리며 다음 카드를 꺼냈다.
다이아몬드 8. 가늘고 긴 모든 것들.
사슬, 와이어, 실, 철편, 고무. 마력전선.
카드 안에 담긴 다종다양한 종류의 매듭 중, 내가 고른 건 와이어. 미리 매듭지어진 와이어를 한쪽 난간에 걸었다. 철컹, 매듭은 난간을 마술처럼 통과하고는 단단히 걸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세 개의 와이어 트랩을 설치한 나는, 일부러 하나를 팅 튕겨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내 뒤를 따라온 울펜은 팽팽하게 당겨진 와이어를 보고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다.
‘…트랩? 골치가 아프군. 힘으로 돌파하기는 부담이 큰데.’
하하. 어떠냐. 고대부터 짐승을 가장 잘 잡았던 게 바로 함정이다. 힘만 쓰기로 한 네가, 과연 이 골목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벽을 박차고 뛰어넘어야겠군.’
그건 반칙이지!
탁, 탁. 울펜은 가볍게 양쪽 벽을 박차고는 10m 위까지 솟아올랐다. 그리고 한쪽 벽에 발을 붙인 채, 경사를 내려오듯 가볍게 미끄러졌다.
가만히 구경할 틈이 없다. 회심의 함정이 무력화된 나는 즉시 골목 밖으로 몸을 날렸다. 도망치는 내 뒤로 울펜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잡았다. 이제는 도망칠 수 없을 거다.’
내가 막 모퉁이를 돌고, 울펜이 소도를 꺼내어 내 등을 노리는 차였다. 경사의 끝에서 내리뛴 그가 방향을 틀려고 땅에 착지한 순간.
풀썩, 하고 땅 밑이 꺼졌다. 멋진 착지 자세 그대로 그의 신형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아주 잠깐, 발밑을 잃은 울펜은 크게 당황했다.
‘함정? 어느 틈에?’
도로는 한 꺼풀만 벗겨내도 흙. 그 안쪽 흙더미를 다 치워버리니, 울펜처럼 묵직하게 착지하자 도로가 땅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대지술로 만들어낸 싱크홀 함정. 울펜의 당혹스러움을 읽은 나는 즉각 아끼고 아껴놓았던 카드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다이아몬드 10, 검과 방패.
왼손에는 자그마한 버클러, 오른손에는 팔 한 마디쯤 될 법한 직검이 나타났다. 버클러를 앞세워서 울펜의 머리에 들이밀고, 동시에 그의 사각으로 직검을 찔러넣었다.
전신을 밀어넣어, 상대의 허점을 완벽히 노린 그림과도 같은 일격.
투콱. 버클러가 정확히 울펜의 안면을 강타했다. 동시에 내 직검이 그의 어깨를 그었다. 옷깃이 길게 찢어지며 그 위로 튀어 오르는 피.
‘한 방 먹었군.’
그러나 성취감을 느낄 새도 없다. 당황한 와중에도 명확한 공격 의지가 나를 향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가볍다. 버틸 만해.’
버클러에 밀려났던 머리가 되돌아오며 울펜의 눈이 불길하게 빛났다. 동시에 왼쪽에서 새까만 칼날이 불쑥 솟구쳤다. 빛조차 삼킨 거무튀튀한 기공은 절묘하게 내 목숨을 노렸다.
살의를 읽은 나는 이를 악물며, 팔과 허리를 단단히 비틀어서 버클러를 끌어당겼다. 한 줌뿐인 기공을 아끼지 않고 내뿜어 버클러를 감쌌다.
끼기긱.
단단한 버클러가 어둠에 물든 검을 비스듬히 막아냈다. 칼과 방패의 대결, 상식적으로는 방패가 더 우세한 게 분명한 싸움이나.
기공을 두른 칼과 기공을 두른 방패의 대결은, 더 강한 기공의 승리로 끝난다.
쩌적. 잠깐 버티던 버클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얼어붙은 빵을 땅에 떨어뜨린 것처럼, 깨지고 조각나며 방패의 역할을 다했다. 단숨에 버클러를 부수고 찢어버린 소도는 내 왼팔에 길게 찢으며 자상을 남겼다.
“아야야!”
더럽게 아프네!
고통에 신음할 새도 없다. 그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는 방패보단 칼이 필요하다. 나는 울펜의 어깨를 찢었던 직검을 끌어당겨서 팔을 썰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약하군.”
탁. 울펜은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으로 내 직검을 움켜잡았다. 칼날을, 맨손으로.
고작 그랬을 뿐인데, 직검은 어디 바위에라도 박힌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쳇!”
이대로 잡혔다간 죽는다. 나는 직검을 놓고는 곧장 뒤로 뒹굴었다. 짓눌린 왼팔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지만 다스릴 틈이 없었다.
그에 반해, 울펜은 어깨의 상처 따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걸어나오며 중얼거렸다.
“전부, 잔재주였군. 연금술부터 온갖 장난질까지, 약함을 숨기기 위한 속임수였어.”
다 까발려졌구나.
하긴, 방패로 칼도 못 막고 왼팔을 내줬는데 못 느끼면 이상하지.
그래도 여전히 여유를 잃어서는 안 된다.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야 하니까.
나는 여전히 여유를 가장하며 피 흘리는 왼팔을 들어 올렸다.
“짜잔. 어때요. 즐거웠죠?”
“제법. 마술사여, 너는 어쩌면 본보다도 뛰어난 암살자의 자질이 있을지도.”
그는 내 직검에 베인 어깨 상처에다가 손을 가져다가 댔다. 넘실거리는 기운이 상처 속으로 스며들더니, 피가 새까맣게 굳어서는 금방 출혈이 멎었다.
내 회심의 일격조차도 간단하게 무위로 돌려버린 울펜은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하나. 이 세상은 힘이다. 결국 힘이 없으면 꺾이기 마련이며, 힘 있는 자는 군림하지. 그게 세상의 이치이다.”
“당신의 깨달음은 알겠는데, 그래서요?”
울펜은 나를 철없는 아이를 보듯, 한껏 깔보며 말했다.
“살고 싶다면, 본의 앞길을 막지 말았어야지. 너는 어리석었다, 마술사. 주제에 비해 너무 큰 꿈을 꾸었어.”
“하하. 그러면 당신이 꾸는 꿈은 그토록 소박해서, 군국의 손을 빌려 뒷골목을 청소하고는 무주공산을 차지한다는 계획이나 세웠나요?”
“보다 약한 자들 한가운데 있는 것이야말로 온전히 군림하는 방법이니까.”
“소시민이군요.”
“주제를 아는 것이지. 너와는 달리.”
진심이네. 울펜은 진짜로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왕국 시절의 잔재였어.
아아. 재미없어라.
가진 힘에 비해 행동은 소시민에 불과하다. 그냥, 평범한 사람보다도 조금 더 강하고, 이성적이며, 운이 좋았을 뿐.
“재미없어. 진짜,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타입이네.”
나는 한탄하며 손을 뒤집었다. 몇 안 남은 다이아몬드 카드가 손아귀에 잡혔다.
다이아몬드 7. 마술 지팡이.
카드는 순식간에 손잡이 부분이 휘어진 기다란 지팡이로 변했다. 그러나저러나, 울펜은 이제 별달리 경계하지도 않고 터벅터벅 걸어왔다.
“전부 다 읽혔다. 더는 잡기술에 현혹되지 않는다. 본은 이대로 너에게 다가가 목숨을 앗아갈 것이니, 네 대단한 속임수조차 너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아아. 진짜. 이게 끝인가?
왼팔이 아려온다. 아, 마술사는 손이랑 팔이 생명인데. 이런 손해를 보고도, 이렇게 끝나야 해?
그때였다. 하늘에서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 떨어졌다.
골렘이었다.
『피하십시오!』
그 말과 함께, 골렘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움직이지 않는 감시용 골렘과는 달리, 이건 직접 움직일 수 있는 싱크로 타입.
이야. 오랜만에 보니까 조금 반갑네.
왼팔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을 삼키며 물었다.
“대위. 저는 시간을 충분히 끌었나요?”
싱크로 타입 마도골렘은 나를 보호하듯 서서는 외쳤다.
『긍정! 귀하,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십….』
대위가 말을 꺼낼 새도 없었다. 몸통에 울펜의 단검이 틀어박히자 골렘의 목소리가 끊어질 듯 흐려지더니, 곧 삐걱거리며 힘없이 허물어졌다.
1초도 버티지 못하고 기능이 정지된 대위를 향해 목놓아 외쳤다.
“대위이이이이이!!”
조금은 더 버텼어야지! 멋있는 등장과 함께 허무하게 퇴장하면 어쩌자는 말이야! 힘빠지잖아!
“시간을 너무 썼군.”
네가 그렇게 알려주니까 울펜도 몸이 달아서 나를 죽이려고 든다고!
‘더는 질질 끌지 않겠다. 죽어라.’
턱, 땅을 단숨에 박찬 울펜이 소도를 들어 올렸다. 더는 기운을 낭비하지 않고, 온전히 몸과 검 안에만 담은 채. 올곧게 나를 죽이려들었다.
명확한 살의와 그것을 이룰 힘. 그 앞에서, 무력한 나는 힘없이 목을 내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마술의 극치.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보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상상조차 못한 방식으로 도망칠 수 있어야… 마술사를 자칭할 자격이 있지.
“혹시, 제가 가진 카드가….”
오른팔을 뿌렸다. 그 끝에서 새로운 카드가 나타났다. 나는 능숙하게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어들었다.
그림자를 위해 미리 준비해둔 단 한 장의 카드.
다이아몬드로 빚어낸 무기는, 지금 이 한 장을 위한 포석에 불과했다.
“무기만 있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시죠?”
그렇게 뒤집은 카드는, 클로버 1.
날카롭게 각이 진 붉은색 다이아몬드와는 달리, 땅에 뿌리 박은 채 자라난 둥근 나무의 모양이 울펜의 앞에 드러났다.
‘잡기술이다. 속지 않는다. 무엇이 튀어나오든, 눈을 똑똑히 뜨고 대응한다.’
나는야 양치기 소년.
반복된 거짓말은 깊은 불신을 낳고, 상대에게 하여금 흔들림 없는 태도를 강요하지.
고맙다. 내 마지막 마술을 똑똑히 지켜봐 줘서.
나는 클로버가 그려진 카드를 뒤집으며, 이 안에 담긴 마력을 해방했다. 응축해놓은 마력이 하나뿐인 클로버로 몰리며 하얗게 달아올랐다.
울펜은 빛나는 카드를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빛으로 시야를 가리려고? 도대체 무엇을 숨겨둔 거지?’
틀렸다.
빛으로 시야를 가리려는 게 아니라, 숨겨둔 게 빛이거든.
점차 빛을 더해가는 클로버를 보며, 뒤늦게 울펜의 머릿속으로 불길한 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마법? 설마!’
깨닫는 게 늦었다. 이미 마법은 이루어졌으니.
빛이 있으라.
“피에트 럭스.”
그가 기운을 전부 갈무리했기에, 전신을 두른 어둠도 지금은 없어졌다. 사방에 기공을 흩뿌려놓지 않았으니 다채로운 대응이 불가능한 상태.
즉, 울펜은 완벽하게 무방비라는 말씀.
클로버의 한가운데에서 응축된 빛이 폭발했다.
거리에 존재하는 모든 그림자가 사라졌다. 한순간, 백열하는 백광이 카드 전면으로부터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태양 바로 앞에 창문을 낸 듯한 압도적인 광량.
눈꺼풀조차도 빛을 걸러내지 못한다. 투명한 피부로 뼈와 핏줄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 같다.
그림자를 없애는 것은 빛. 자신의 대척점에 직격당한 울펜이 급히 눈을 가렸으나, 이 빛은 그의 시야를 잠시 빼앗았다.
“기공이 어두운 속성이라 다행이에요. 눈이 멀지는 않은 것 같네요. 당분간 움직이기도 힘들겠지만.”
“네놈…! 마술사!”
어둠은 눈을 가리나, 빛은 눈을 멀게 만든다. 너와 이 마법은 완전히 상하관계에 있지.
시력을 잃은 울펜은 뒤로 풀쩍 물러나며 사방으로 검을 흩뿌렸다. 그의 전신에서 다시금 어두컴컴한 기운이 뿜어져나왔다. 대응하지 못하는 틈을 타 가해질 공격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직격당한 너보다야 낫지만, 나도 지금 눈앞이 잘 안 보이거든. 어차피 공격 못 해.
“큭…!”
“끝까지 지켜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울펜 펜슈타인. 당신은 재미없는 사람이었지만 제법 괜찮은 관객이었어요. 하지만, 힘의 논리를 따르는 당신을 꺾을 존재는 당신보다 강해야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자격 미달이군요.”
“죽여주마. 그림자의 명예를 걸고, 네놈과 그 주변 모두! 전부 죽여주겠다!”
“아, 네에. 그럼 안녕히.”
그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미리 봐둔 퇴로로 달아났다. 빛이 집어삼킨 거리는 어둠 이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누구도 내가 도망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정작 나도 앞이 안 보여서 달아나다가 머리를 부딪히긴 했지만, 뭐, 어쨌든. 건물 안으로 달아나는 데에는 성공했다.
나의 역할은 여기까지. 위험했지만 어찌저찌 잘 풀렸으니.
다음은 군국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