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91화 (191/384)

EP.191 살고 싶다고 말해 - 7

빛이 잦아든 거리에는 오직 그림자뿐이었다. 넘실거리는 어둠 속에서 울펜은 눈을 가렸던 손을 뗐다. 그의 눈은, 먹물처럼 번진 어둠으로 물들어있었다.

“…조금 늦게 깨달았다, 마술사. 이제는, 속지 않는다.”

처음에는 경계하느라.

그 다음에는 평소 하던 대로.

이후에는 방심하지 않고 확실하게.

마지막으로는 상대에게 속지 않기 위해서.

일련의 흐름 모두, 과하게 조심한 탓에 마술사의 심리전에 말려들고는 말았다. 그게 마술사에게 한 방 먹은 이유였다.

“처음부터, 모든 힘을 전력으로 쏟아부어 죽였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제는 속지 않는다. 속임수는 무한히 가능하지 않고, 준비한 손패를 다 털면 그는 무력한 맨몸이나 다름없다.

다음에 마주친다면, 아니, 지금 곧장 감각을 뻗어 찾아내기만 한다면. 그는 그림자의 칼날 아래 쓰러지리라.

‘기척을 죽이고 몸을 숨겼지만, 찾아내면 그만.’

마침, 울펜의 귓가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저 먼 거리에서부터 사람의 기척과 함께 여러 사람의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이한 기척에 울펜은 청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곧 눈가를 찌푸렸다.

마치 아미텐그라드 자체가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수도 없이 많은 목소리가 한데 섞여 안개처럼 스며들었다. 건물에 부딪히고, 멀리서 퍼지고, 메아리치며. 무미건조하고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노래하듯 퍼졌다.

『군국 통신병 유엘, 이 목소리를 듣는 모든 거주자에게 경고합니다. 현시점으로 레벨 5 비상사태, 오망성이 발효됩니다.』

『군국 통신병 디케입니다. 레벨 5 비상사태가 발효되었습니다. 모든 시민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전달 내용에 집중하십시오.』

『군국 통신병 시엔입니다. 명령을 따르지 않을 경우 생기는 불이익은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의 합창. 그건 어떤 건물의 옥상에서, 독특하게 생긴 가로등의 안쪽에서, 시계탑과 동상에서, 거리에 걸쳐진 빨랫줄 한가운데에서 들려왔다.

골렘을 통해 전해지기 전에도 무미건조했을 목소리는, 콘크리트 건물에 닿으며 한층 무기질적으로 바뀌어 군국 곳곳에 전해졌다.

『이 목소리를 듣는 모든 시민에게 경고합니다. 현재 거주지 안에 있는 이는, 상황이 종료되기 전까지 결코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혹 밖에 있는 시민은 즉각 바닥에 엎드린 채 양손을 머리 위로 올리십시오. 저항의 의지를 보이지 마십시오. 오발의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긴급상황입니다. 상황 종료 선언 전까지 시민으로서 권리가 일부 제한되며, 지시를 어길 시 귀하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군국은 농담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지금 무언가를 전하는 이 목소리는, 오직 진실만을 전하고 있었으니.

군국의 목소리인 통신병이, 소리가 닿는 모든 이에게 경고를 전하고 있었다.

『금일 밤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벌어진 일은 전부 잊으십시오.』

『저항을 멈추고, 그 자리에 엎드리십시오. 만일 저항의 의지를 보인다면, 군국의 적으로서 처분될 것입니다.』

『군국의 적에게 고합니다. 무익한 저항은 그만두고 얌전히 사살당하십시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경고의 목소리가 멈추고.

그 뒤로 청명하고 맑은 한 줄기 목소리가 더해졌다.

『군국 통신병 에이비 대위가 히스토리아 소장님께 보고합니다. 다섯 블록 앞. 방금 이상 광량이 관측된 장소에서 목표가 포착되었습니다. 본관이 유도하겠습니다.』

“확인했어.”

그리고 이어지는 발소리.

뚜벅. 뚜벅.

콘크리트 바닥에서 징 박힌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마른 땅에 철이 부딪히며 나는, 규칙적이고 힘찬 박자가 더해졌다.

길게 땋은 새카만 머리카락이 뒤쪽으로 흔들렸다. 나른하고 피곤한 표정을 한, 장신의 여성이 긴 팔다리를 쭉쭉 뻗으며 모두가 숨죽인 거리에서 홀로 움직이고 있었다.

침묵이 내려앉은 밤, 그녀의 시간만이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이 무대 자체가 그녀를 위해 준비된 것만 같았다.

종아리까지 올려 신은 군화, 한껏 불량하게 걸친 군복, 모자는 챙기지도 않았는지 보이지도 않고 단추는 두어 개쯤 풀려 있다. 군복만 아니었다면 어딘가의 양아치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가슴팍에 반짝이는 하나의 별이, 그녀의 힘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렇게 뚜벅뚜벅 걸어가던 그녀는, 아무런 전조 없이 자기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었다. 그리고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당겼다.

타앙. 한 줄기 소음이 어둠을 찢었다. 번쩍이는 불꽃이 그녀의 관자놀이에서 번쩍였다. 총탄이 그녀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반탄기공이라 하여도 멀리서 날아오는 것을 막는 기공이지,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총알에는 큰 효력이 없다.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를 저질렀음에도, 여성의 태도는 침착하다 못해 나른해 보였다.

“으에… 잠도 못 자고 달려와서…. 컨디션이 말이 아니네.”

피곤함에 찌든 목소리로, 그녀는 머리를 쓸어넘겼다. 훤칠한 이마와 시원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눈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물들어있고 입술은 말라 부르텄으나, 짙은 피로를 뒤집어 써도 연약함과는 거리가 먼 인상이었다.

그녀가 총을 치우자, 툭, 하고. 힘을 잃은 총알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총알은 새것처럼 멀쩡했다.

관자놀이에 대고 총을 쏘았던 그녀 역시도, 조금 피곤해보였을 뿐 총알과 별로 다를 바 없이 멀쩡했다.

“아이고, 머리야. 술 없다고 맥주를 처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쓰으. 그냥 대기만 하라더니만. 이럴 줄 알았지. 그런데….”

한탄인지, 불평인지. 나른하게 중얼거린 여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군국 최연소 육장성.

아무런 경력 없이, 그저 강함만으로 장성에 올라간 총의 성좌.

패왕의 별 아래 태어난 폭력의 화신. 군국의 딸. 초신성.

총사, 히스토리아 소장.

“짐승의 왕이야 짐승이니 그렇다고 쳐도, 하다못해 시조도 조용히 있는데.”

거칠게 머리를 쓸어올린 그녀는, 서늘한 잿빛 눈동자로 정확히 울펜을 노려보았다.

“왜 좆밥새끼가 못 깝쳐서 안달일까? 아직 안 죽어서 그런가?”

그리고 직후, 총사는 울펜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울펜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군국의 소장이라는 여자가, 울펜을 공격하기 위해 ‘총’을 겨눈다는 사실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탄기공이 존재하는 한 총은 무의미하다. 강력한 화살조차도 갑옷 한 장에 기공을 두르면 아무런 문제 없이 막아내는데, 짧고 가벼운 총알은 전신에서 뻗어 나가는 반탄기공을 결코 극복해낼 수 없다.

그래서일까. 울펜이 총을 보고 잠깐 방심한 틈에.

한 줄기 총성이 울려 퍼지고, 그와 거의 동시에 울펜의 어깨가 크게 비틀어졌다. 전신에 기공을 두른 울펜조차도 충격을 못 이기고 뒤로 두 발자국 물러났다.

오른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고통에, 울펜은 내심 감탄하며 말했다.

“…강하군. 내세울 만해.”

방심하지 않았다. 마술사의 경우와는 달리 반탄기공을 극성으로 발휘하고 있음에도 그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자칫했다간 들고 있던 소도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러나.

“그래봤자, 총.”

이 위력이라면, 거리를 둔 채로 일방적으로 사격받으면 위험하다.

하지만 어떤 바보가 위험하다는 걸 알고도 거리를 유지할까.

그는 즉시 흑영기공을 뿜어내며 도로 가장자리를 미끄러뜨리며 달렸다. 눈앞에 있는, 총을 든 군인을 향해.

군인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연달아 총을 쏘아냈다.

탕.

어둠으로 몸을 가린 덕분일까. 다음 총알은 울펜의 머리 위쪽으로 빗나가고 말았다. 위력적이지도 않은 주제에 맞추는 것조차 담보하지 못하다니. 저게 무기인가 싶다.

탕.

이번에는 반탄기공에 비스듬히 튕겼다. 반탄기공은 밀어내는 힘. 총탄이 직격하지 않으면 대부분 빗나간다.

탕.

이번에는 울펜 앞의 땅에 맞았다.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이 산탄처럼 그를 덮쳤으나, 그것조차 울펜의 돌진을 막는 데에는 부족했다.

그리고 다시 한 발….

찰칵찰칵. 허무한 소리가 들렸다. 총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총구를 눈에 갖다 대곤 그 너머를 살폈다. 안쪽을 확인한 총사가 중얼거렸다.

“아. 총알 다 떨어졌다.”

얼마나 멍청한 소리인가. 군국은 과연 저런 장성을 가지고 그를 막으려고 드는 건가.

‘빠르게 처리하고 몸을 숨기자, 장성 한둘 처리하는 건 쉽지만, 나라와 척을 지면 귀찮아지니. 본을 공격하는 것이 손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그렇게 어둠이 파도처럼 거리의 빛을 쓸어버리며 다가오는 때.

총알이 없는 것쯤 문제도 되지 않는다는 듯, 골렘으로부터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급이 필요하십니까?』

“됐어. 보급 전에 끝나.”

중얼거린 총사는, 곧 옆에 있는 가로등을 쥐어 뜯었다.

가로등이 급격하게 휘어졌다. 희미한 불빛이 단숨에 사그라들며, 거인이 잡아 비튼 것처럼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어둠을 찢는 소리와 함께 빛을 머금던 유리가 깨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고작 움켜쥐는 것으로 가로등을 부수어버린 총사는, 가로등의 비참한 최후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이 주먹을 쥐었다.

“전투 연금.”

까드드드득.

질 낮은 연금강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20년 가까이 빛을 매달고 군국에 봉사해온 가로등 몸체가 총사의 손아귀에 틀어 잡혔다. 금속이 마찰하여 문드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른 연금강은 찰흙처럼 뭉개졌다.

비록 품질이 낮아 무르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철이다. 어디 가서 이토록 초라한 대접을 받아본 일 있을까.

다만 상대가 상식을 우습게 보는 존재였을 뿐.

콰득. 손바닥으로 연금강을 가볍게 주무른 총사가 다시 손아귀를 펼쳤을 때. 그녀의 손에는 불균일하게 압축된 금속 구체가 나타나 있었다.

대위가 지적했다.

『의문. 소장님께서 쓰신 기술은 연금술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쳇, 깐깐하네. 모로 가도 총알만 만들면 되는 거 아냐.”

투덜거린 총사는 만들어낸 총알을 억지로 총구에 끼워 넣었다.

들어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손바닥으로 찰흙을 주물렀다고 균일한 모양의 구체가 나오지는 않으니, 규격에 맞을 리가 없다….

아직까지는.

총사가 중얼거렸다.

“총 안에 들어가면 그게 총알이지.”

그러나 충분한 힘이 있다면, 규격은 무의미하다.

총사가 힘을 주었다. 규격에 맞지 않는 부분이 비명을 지르며 갈려 나갔다. 짓이겨진 부분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총구와 딱 맞는 모양으로 재단되어 고분고분 안쪽으로 굴러 들어갔다.

맞지 않는 부분은 잘라낸다. 들어가지 않으면 욱여넣는다. 버티면 민다.

지극히 군국다운 방식으로 총알을 만들어낸 총사는, 총을 빙글 돌려 다시 앞쪽을 겨누었다.

“됐네.”

연금강을 총알로 빚어내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5초 남짓.

그동안 울펜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상태였다. 어둠으로 몸을 숨긴 울펜이 몸을 미끄러뜨리며 총사의 뒤를 점했다. 차갑게 정련된 거무튀튀한 살의가 총사의 목을 노렸다….

라고 생각했을 때, 울펜의 시야에 징 박힌 군화가 나타났다. 분명 마지막으로 보인 건 무방비한 목덜미였는데, 언제 튀어나왔을지 모를 군홧발이 울펜의 시야에서 점차 커지고 있었다.

울펜이 급히 소도를 찔렀다. 이왕 발을 내민 것, 그 다리째로 갈라버릴 생각이었으나.

닿지 않는다. 순식간에 쏘아진 군홧발은 그대로 소도를 깨부수고, 팔을 꺾으며, 울펜의 머리까지 덮쳐 단숨에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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