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194화 (194/384)

EP.194 살고 싶다고 말해 - 마무리

“찾았다.”

히스토리아가 섬뜩하게 중얼거렸다. 그 소리가 들린 직후 나는 밧줄을 대충 몸에 두르고는 즉각 뛰어내렸다. 인간이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는 자유낙하. 밧줄에 매달려 있다는 건 알지만, 무시무시한 속도감과 발밑이 허전한 아찔한 느낌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자극했다….

그래도 내 뒤를 쫓아오는 저 히스테리한 목소리보단 덜 무섭겠지.

쿵쿵거리는 소리. 방금까지 내가 서있던 건물에서 기이한 진동이 느껴졌다. 거주지 안쪽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럴 만하다. 지금, 히스토리아는.

건물 벽을 깨부수며 걸어올라오고 있었으니까!

“거기 서-!”

“너 같으면 서겠냐아아아!”

중력에 이끌려 땅으로 떨어진다. 계산한 것에 비해 밧줄 길이가 살짝 부족하다. 밧줄의 최저점에서, 나는 밧줄을 놓고는 낙법으로 땅을 구른다.

“아야야야야야!”

사실 낙법이란 뭣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방법임이 틀림없다. 배운 대로 했는데 아프잖아! 잘 떨어지는 법이라니, 애초에 사람은 날짐승이 아니라서 떨어지면 안 된다고!

어쨌건, 똑바로 선 나는 아려오는 왼팔을 부여잡은 채 온힘을 다해 달렸다.

뭐, 그래봤자.

“찾았다!!!”

발 디딜 데 없이 매끈한 벽을 기어오르는 방법이 무엇일까. 그건, 벽에 발 디딜 데를 만들며 올라오면 된다.

한 발을 세게 내디디면 벽이 깨지면서 몸이 고정되고, 그것을 턱 삼아서 뚜벅뚜벅 걸으면 벽을 걸어오를 수 있다.

개소리 같지만, 조금 전까지 히스토리아가 한 일이다.

그렇게 거주지 벽을 걸어올라온 히스토리아는 옥상에 서서 정확히 나를 포착했다.

“휴이! 거기 멈춰! 멈추지 않으면 쏜다!”

보통 말이 먼저 나온다는 건 쏠 생각이 없다는 뜻이지.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외쳤다.

“네가 쏘면 나는 죽는다! 하하! 톡 건드리면 죽을 선량한 시민에게 총을 쏠 셈이냐!”

“못 쏠 것 같아?”

히스토리아의 눈빛이 위험하게 변했다. 손에 쥔 총탄을 장전한 히스토리아가 가늠쇠 너머로 나를 겨눴다.

아, 젠장. 괜히 도발했나.

‘죽지 않을 정도로만 쏴주지. 다리를 깨끗하게 관통하도록.’

다리에 깨끗하게 구멍을 내주겠다는 게 어떻게 친구냐. 내가 속으로 불평하며 옆으로 뛰려는 무렵이었다.

‘…그런데, 저건 뭐지?’

총을 쏘기 직전, 히스토리아는 내 곁에서 달리는 인영을 보고는 눈을 찌푸렸다.

어? 내 옆을 누가 따라붙고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렸고, 거기서 나와 보조를 맞춰 뛰어가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 소녀는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나와 비슷한 속도로 태평하게 달려가고 있었다.

…네 발로.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아지는 해맑게 웃으며 짖었다.

“멍! 반가워! 반가워!”

대위. 사람이라더니. 개잖아.

심지어 도움도 안 돼. 아지는 사람 상대로 못 싸운다고!

그래도!

“이런 말하기는 조금 그런데, 나도 반가워. 지금 반가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아.”

“멍! 울보!”

“아직 안 울었거든?”

‘상관없다. 일단 다리를 쏘는 편이.’

히스토리아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아지의 귀가 먼저 쫑긋거렸다. 소리보단 육감으로 먼저 그 사실을 파악한 아지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뛰었다. 잘 안 보이는 어둠 속, 아지 눈에 반사된 빛이 한 줄기 광선이 되었다.

타아아앙!

뒤이은 총성과 함께, 어느 순간 내 뒤로 뛰어든 아지의 머리가 홱 돌아갔다. 동시에 아지의 몸이 저 멀리 튕겨나가 등부터 떨어졌다.

아지는 펄떡펄떡 뛰며 외쳤다.

“멍! 뜨거워! 딱딱해! 아파!”

인간을 상대로는 못 싸우지만, 총탄을 상대로는 싸워주는구나. 그보다.

“너도 총에 맞으면 아파하는구나. 새삼 놀랍네.”

그런 애가 총알을 이빨로 잡아내니. 그래도 육장성의 총알이라 그런지 아파하는 기색이다.

아지가 눈물을 그렁그렁 맺으며 외쳤다.

“이빨, 흔들려! 아파!”

“침 발라.”

“멍…! 나아도 아파! 멍!”

“그러니까 누가 그걸 이빨로 잡아내니. 반탄기공 같은 거 못 쓰니?”

“멍? 반찬? 고기?”

“됐다. 개에게 무슨 소리람.”

아지라도 히스토리아의 총탄을 연달아 잡아내지는 못할 거 같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히스토리아에게 총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거.

“멈춰어어어어!”

옥상에서 단숨에 뛰어내린 히스토리아가 땅에 착지했다. 기세가 어찌나 흉폭한지, 콘크리트를 타고 진동이 흘러들어온다. 바닥을 깨부수며 내려앉은 히스토리아는 짐승처럼 거칠게 눈을 빛냈다.

“거기 서!”

또로록. 그녀의 손 위로 총탄 네 발이 더 떨어졌다. 그것을 단숨에 탄창에 쑤셔 박은 히스토리아가 달려들면서 다시금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뭐, 개가 있으면 돌보는 사람도 있겠지.

“천검기!”

회귀자가 내 앞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떨어진 회귀자는 즉각 보이지 않는 검을 펼쳤다.

“천경!”

반탄기공과는 다르다. 하늘의 검, 천앵을 사방으로 펼쳐서 만들어낸 순수한 공간의 휘어짐. 빛조차도 비트는 기술이다.

히스토리아의 사선에 보호막을 친 회귀자가 다급히 말했다.

“야! 너는 어쩌다가 육장성에게 쫓기는 몸이 된 거야?!”

회귀자의 말에 나는 차분히 반박했다.

“틀려요. 원래 쫓기는 몸이었는데 쫓는 쪽이 육장성이 된 거예요.”

“무슨 상관이야!”

“순서가 중요하다고요, 순서가. 상대가 육장성이면 제가 저토록 밉보였겠어요?”

“하나도 중요하지 않잖아! 아니, 어쩌면 더 심각한 거 아니야?! 어쩌다가 쫓는 쪽이 육장성이 되었는데!”

“쩝. 쟤가 저렇게 진급을 빨리할지 알았나.”

타, 타, 타.

연달아 쏜 세 발이 천경에 의해 비켜났다. 파앙, 파앙, 파앙. 빗나간 세 발의 총알이 콘크리트 바닥을 두부처럼 파헤치고 도려냈다.

내 양옆으로 땅이 박살나는 광경은 빗나간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공포스러웠다.

심지어, 아직도 안전하지 않다. 나도 회귀자도 위험을 감지하고는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했다.

회귀자는 이전 회차의 경험 때문에, 나는 히스토리아의 생각을 읽은 덕분에.

다음 번은 빗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히스토리아는 서늘한 눈으로 나를 겨누었다.

‘영점 잡이.’

세 발로 영점을 잡으면, 다음 한 발에 필중을 약속한다. 총탄에, 총신에, 총술에 기공을 덧씌운 채로 싸우던 히스토리아만 깨우친 기공총술.

그 역시, 이치에 조금이나마 닿은 기공의 극의.

많이 강해졌구나. 그동안 나는 뭐 했지….

다음에 동창회 하면 가지 말아야겠다. 어차피 수배범이라 갈 수도 없겠지만.

아니, 애초에 동창회를 열 만큼 많이 살아있지도 않구나. 헤헷.

‘저건 비껴낼 수 없어! 막아야 해!’

전회차에서 겪어본 적 있는지, 회귀자는 흘려내거나 반탄기공으로 튕겨내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지잔을 크게 휘저어 땅 자체를 뒤집어버렸다.

“지곤류, 땅부수기!”

지잔을 세게 내리치자, 그 근방이 풀썩 주저앉으며 조각 난 콘크리트가 가시처럼 솟구쳤다. 순간적으로 튀어오른 콘크리트에 총사와 우리 사이가 갈라졌다.

그 사이를 꿰뚫고 나타난 총알. 그러나 콘크리트를 부수느라 기세가 죽은 총탄을 회귀자가 손쉽게 튕겨냈다. 천앵이 피잉, 하고 휘어지며 총탄을 반으로 갈라버렸다.

‘몇 번은 막아낼 수 있어. 하지만 영원히는 못 막아! 근접해서 맞서 싸울 셈이 아니면…!’

판단을 끝낸 회귀자가 즉각 소리쳤다.

“티르칸쟈카! 어둠으로 시야를 가려줘!”

“받아들이마.”

나긋한 목소리가 들린 직후, 가로등이 불길하게 깜빡였다.

군국의 밤은 어둠을 몰랐다. 그녀가 등장하기 전까지, 가로등이 비추는 거리의 어둠은 얼굴에 줄무늬를 그어놓고 호랑이라 참칭하는 여우나 다를 바 없었다.

진정한 의미의 밤이 찾아왔다. 거대한 어떤 존재가 군국의 촛불에다가 입김을 분 듯, 훅 하고 바람소리가 들린 순간 가로등이 일제히 꺼지며 암흑이 세상을 뒤덮었다.

가짜 그림자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는 권능, 그림자의 여왕이라 불린 재앙이 ‘고작’ 25년밖에 안 된 나라의 밤에 찾아왔다.

내 손발조차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 새카만 어둠 속에서, 시조 티르칸쟈카는 양산을 어깨에 걸친 채 나긋하게 다가왔다. 독심술로 기척을 파악한 나는 깜깜한 어둠 한 곳에서 붉게 빛나는 눈동자와 마주했다.

이야. 위기의 순간 나타나니 든든하네. 내가 인사하려고 할 때였다.

“결혼 축하한다, 휴. 네가 이 나라로 돌아오고자 한 이유가 있었구나.”

미묘한 적대감이 더해진 차가운 한마디가 나를 밀어냈다. 어라. 인사할 분위기가 아니네.

어설프게 손을 내리는 나를 향해, 티르가 원망과 적의가 가득 담긴 시선을 보이며 말했다.

“그래. 너도 나이가 찼으니 장래를 약속한 약혼자 정도는 있을 법하지.”

“미안한데, 티르. 지금 그런 걸 따질 때는 아닌 것 같아요.”

“혹 저 아이가 네 신부더냐?”

흘긋. 티르는 어둠 너머에서 이쪽을 향해 뛰어드는 히스토리아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티르의 붉은 눈에는 흉폭한 기세로 뛰어오는 히스토리아가 똑똑히 보였다.

“보아하니 사이가 원만하지는 않은 것 같구나. 어떠냐. 혹 원한다면 너를 흡혈귀로 만들어주겠다. 부부싸움을 하다가 죽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

“부부 아니에요. 쟤한테 그 말 했다간 진짜로 죽을 각이거든요?”

“음? 부부가 아니라고?”

그 바다처럼 넓고 깊은 사정을 설명하기 귀찮아서, 제일 간단하고 명쾌하게 답했다.

“결혼사기를 치려다가 이상하게 일이 꼬여서 도망치게 되었거든요.”

“…그러면, 결혼은?”

“가짜 정보죠.”

티르의 눈가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결혼으로 사기를 칠 수 있다니, 신기한 일이구나. 어쨌든, 알겠다. 그런데 어찌하여 무저갱에서는 도망쳤던 것이냐?”

“설명하자면 긴데, 그쪽이랑 같이 다니다간 제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지금도 딱히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만. 어찌, 목숨이 열 개라도 되도록 흡혈귀로….”

“아니, 좀. 그러지 말고.”

어둠 너머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어둠을 찢고 들어오려는 히스토리아 앞을 회귀자가 막아섰다. 근접 박투로 접어든 히스토리아의 앞에서 회귀자는 천앵을 흩뿌리며 공격을 받아냈다.

지잔과 천앵을 쓰는 회귀자는 쉽게 밀리지 않았다. 거세게 지잔을 걷어찼다가 반동에 인상을 찌푸린 히스토리아가 외쳤다.

“비켜!”

하하. 비키라고 한다고 순순히 비켜주면 그게 회귀자겠냐? 너도 맛봐라, 고집불통 회귀자의 맛을!

“…슬슬 그럴까? 굳이 육장성이랑 싸우면서까지 데려갈 필요는 있을까…?”

야! 회귀자! 네가 그럴 때냐!

진지하게 고민하는 회귀자의 옆으로 무언가가 나타났다. 날카로운 발톱이 히스토리아의 옆을 노렸다. 은밀하게 습격한 그림자에 히스토리아가 발을 갖다대어 막았으나, 그 그림자는 앞발을 세차게 휘둘러서 히스토리아를 날려보냈다.

“냐아…. 소란스럽다냐. 인간은 영역을 너무 자주 바꾼다냐….”

어느샌가 나타난 나비가 투덜거리며 회귀자 곁에 섰다. 히스토리아는 갑자기 참전한 나비를 보고는 얼굴을 구겼다.

“고양이의 왕…! 죽고 싶냐?!”

“냐아아! 감히 냐를 보고 죽고 싶냐고 말했다냐?!”

이를 세우는 나비는 적이었을 때는 까다로웠지만 아군이 되니 이토록 든든할 수가 없었다. 적에게 적대적인 짐승의 왕이란 이러한 존재였구나.

어쨌든, 동쪽에서 귀인들이 왔으니. 이 기회를 잡아야겠지.

“저기, 티르. 셰이. 그리고 다른 짐승분들.”

나는 모두가 들리도록 소리 높여 말했다.

“저 살고 싶은데, 바쁘지 않으면 좀 구해주시겠어요?”

엉뚱한 생각이나 작전 따위는 담지 않은, 솔직한 요청.

아지나 티르는 내 말이 의외였는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아지였다. 아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멍! 구해줄게! 목 대!”

“목덜미 물고 달려가려고? 미안한데 인간은 그걸 처형이라고 불러.”

아지의 제안은 정중하게 거부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나는 이미 구해주는 중… 이잇!”

“네. 저도 이미 고마워하는 중이에요.”

“조금 더 진정성 있게 말해…! 칫! 까다롭긴!”

저쪽에서는 회귀자가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총탄이 다 떨어졌는지, 총구를 잡고 거꾸로 든 채 둔기처럼 휘두르는 히스토리아를 상대로 천앵을 휘둘렀다.

“후우. 괘씸하기는 하다만.”

티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어둠이 썰물처럼 밀려나며 히스토리아를 덮쳤다. 히스토리아는 즉각 총으로 기공을 내뿜었지만, 어쨌든 헤치고 나오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일단, 네게 져주마. 여기를 벗어나자꾸나.”

“물러날 거지?! 적당히 하다 빠질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회귀자의 말. 그보다 더욱 너머에서 히스토리아의 발작적인 외침이 들려왔다.

“닥쳐! 너희들은 관계 없잖아! 휴이 그 새끼를 놓고 가!”

“미안, 리아! 나 갈 데가 있어서! 내가 나중에 밥 한 번 살게!”

“야아아아아아!”

동기에게 기약 없는 인사를 건네며, 나는 티르가 들고 온 관 위에 올라탔다. 어둠을 탄 관은 내가 본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거리를 질주했다.

안녕, 아미텐그라드. 나를 소중하게 안아주었던 평범한 사람들의 도시여.

평범한 잡범은 이만 물러갈게.

점차 멀어지는 아미텐그라드를 향해, 나는 허리를 깊게 숙이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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