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3 강처럼 흐르는 땅 - 5
아침이 되자 군국의 부대는 행군을 시작했다. 공수한 자동마차에 병력을 나눠 태운 채, 때때로 나타나는 컨테이너를 피해가며 좁다란 메타컨베이어 벨트를 달렸다.
흐르는 땅 위에서 내달리니 행군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단숨에 행정구역 다섯을 뛰어넘고, 이름 있는 산과 강을 순식간에 지나쳤다. 말그대로의 축지법과 함께한 기적의 행군을 거친 그들의 시선 끝에, 저 멀리 불길한 어둠으로 둘러싸인 불그스름한 컨테이너가 나타났다. 시조를 비롯한 적성존재들이 머무는 컨테이너였다.
진군을 멈춘 절창은, 확성기도 마다하고는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쪽은 포위되었다. 순순히 항복을….”
말을 하다 말고 인상을 찌푸린 절창이 즉각 창을 고쳐잡았다. 탁. 기다란 창을 어깨 위로 든 그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힘껏 창을 내던졌다.
푸른 유성이 흐르는 땅 위를 따라 날아갔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창이 컨테이너를 꿰뚫었다. 뒤쪽을 관통하여 사라진 창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앞쪽 뚜껑을 깨부수고는 튀어나왔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 안쪽 가득 담겨있던 화물이 조각 난 내장처럼 튀어나왔다.
절창의 투창에, 컨테이너 안쪽에 담겨있던 모든 것이 휩쓸렸다. 파트락시온은 담담하게 쏟아지는 물건의 면면을 확인했다.
맞바람을 타고 데굴데굴 굴러오는 콩과 밀가루, 그리고 연금용 잡철.
“…아무래도, 내 투창으로 적을 일소한 것 같지는 않구만. 그렇지?”
먼저 뛰쳐나간 절창의 부관이자 제자, 간드 대령이 컨테이너 안쪽을 확인하고는 소리쳤다.
“그렇습니다. 일반 화물 컨테이너입니다!”
“그래. 속았다.”
정찰을 게을리하진 않았다. 다만, 벨트를 타고 흐르는 저들을 정찰하기 위해선, 이쪽에서도 벨트로 접근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뒤쳐질 뿐이니까.
그러나 상대가 무시무시한 강자라면, 정찰병이 접근할 수 있는 한계 거리가 점차 멀어진다.
심지어 상대는 시조 티르칸쟈카. 어둠을 직접 다룰 수 있는 권능의 주인. 어둠은 보통 정찰병의 친구였으나 이번만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발견한 정찰병은 다 연락이 끊겼다.
그녀가 어둠을 두르고 있는 정찰의 공백 동안, 컨테이너가 뒤바뀌었다.
“밤 동안, 컨테이너를 바꿔치기했군.”
절창은 담담히 말하고는 자동마차 위로 훌쩍 올라탔다. 잠깐 멈추었던 자동마차가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들이 밤 동안 모습을 숨기고 더 멀어졌다는 사실을 알았음에도, 장성 중 그 누구도 착잡해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왜냐면, 군국이 저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테니까.
“…예상대로입니다. 뒤에 추격자를 매단 이들이라면, 운신이 자유로운 밤 동안 무언가 행동을 취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저쪽도 머리를 쓴다는 거지. 합리적이게도 앞쪽으로 가는 걸 택했군.”
밤 동안은 군국의 전력보다도 시조를 포함한 저쪽의 전력이 우위이다.
이 자체만으로도 조금 비합리적이고 억울한 계산이지만, 어쨌건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소모되지 않는 불사의 군단과 싸우는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동안 군국은 교전을 회피해야 해며, 적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메타컨베이어 벨트에선 자유가 앞과 뒤 둘 중 하나로 귀결된다.
합리적인 선택은 앞쪽. 앞쪽으로 움직이면 저들의 목표와 더 가까워지며, 동시에 이쪽의 추격을 늦출 수 있다. 바람에 맞서 도보로 걸어가야 하는 일반병의 체력을 빼놓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전력에 별 차이는 없겠지만.
이미 충분히 예견된 결과이자, 대응책까지 나온 건.
절창의 옆에 있던 골렘이 텅 빈 컨테이너를 눈에 담고는 덤덤하게 보고했다.
『메타컨베이어 벨트 담당, 군국 통신병 피유 대위입니다. 관측 정보 갱신, 포인트 1은 더미. 목표를 포인트 2로 전환합니다.』
절창은 벨트 앞쪽을 바라본 채, 골렘을 쳐다보지도 않고는 명령했다.
“앞질러 간 군국의 딸내미에게 전해라. 여기는 더미였다고.”
『히스토리아 소장님께는 이미 보고를 끝마쳤습니다. 이 정보는 별동대에게 더욱 급한 정보이기에.』
“아, 그러냐?”
머리를 긁적인 파트락시온은 다시금 명령을 기다리는 본대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어쨌든, 낮에는 밤만큼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겠지. 자, 다시 행군 준비! 적을 추격한다!”
“옙!”
잘 훈련된 군대는 일사불란하게 진군하기 시작했다. 지금 상황과 관계가 없다는 듯, 곳곳에 놓인 채 길 따라 흘러가는 컨테이너를 피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야. 간드 대령. 이리 와 봐.”
그때, 파트락시온이 제자를 불렀다. 부름에 응한 간드 대령은 재빨리 달려왔다.
비록 절창의 제자이고 무력은 장성급 못지 않지만, 직책상으로는 젊은 부관에 불과하다. 그에 비해 절창은 장성조차도 몇 수는 접어주는 사령관.
간드 대령은 일반병이라도 된 것처럼 최대한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서 절창의 곁에 섰다.
절창은 한없이 진지한 태도로, 그가 꿰뚫은 컨테이너를 가리키며 말했다.
“야. 그런데 컨테이너를 저렇게 꿰뚫으니까 꼭 똥구멍에서 입으로 창을 꿰어버린 것 같지 않냐? 예전에 저랬을 때 내장이 입으로 다 튀어나왔었는데, 컨테이너도 비슷하네?”
“….”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근처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성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썩어들어갔다.
운명의 아침이 밝았다. 동틀 시간이 되니 동쪽 머나먼 선 아래에서 동그랗게 빛나는 구체가 세상을 향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태양은 가끔 신 혹은 절대자의 얼굴이라고 주로 묘사되지만, 최소한 인격 그 비슷한 게 없다는 건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겁의 시간 동안 매일 질리지도 않고 동쪽에서 얼굴을 들이밀 리 없으니까.
“멍! 아침이야! 멍!”
취소. 이 개도 나와 마주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질리지도 않고 아침마다 깨운다. 마다하지 않으면 영겁토록 깨울 기세다.
나를 더 잠들게 하라는 말이야. 어째서 이놈의 개는 무저갱도 아닌데 나를 깨우려는 건지….
“개의 왕, 그대로 두어라. 쉴 수 있을 때까지는 쉬게 해주자꾸나.”
“멍? 안 돼! 아침, 일어나야 건강해! 규칙적인 생활, 중요!”
“저 가증스런 햇빛을 조금 받지 못한다고 죽지는 않는다. 거기다 동이 튼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거늘, 그리 급할 게 무엇이라는 말이냐.”
역시 티르야.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건 티르밖에 없어.
뭐? 아침은 일어나는 시간? 그건 누가 정했지?
너를 세상에 맞추지 마. 세상을 너에게 맞추는 거다! 일어나는 시각이 곧 아침이며 잠들기 전까진 오늘이니!
“멍! 오냐오냐 나빠! 건강에 나빠!”
“혹 저 태양의 부재가 휴의 몸을 상하게 한다면, 내 책임지고 그럴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주겠다.”
‘휴는 잠을 좋아하니, 흡혈귀가 되더라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지도….’
“으랏차! 아지같이 기상! 반가워, 오늘의 태양아!”
살아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날의 아침을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다니, 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어쨌건,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컨테이너의 문을 열고는 바깥을 살폈다. 밤 중에 맺힌 한기 사이로 동틀 녘의 온기가 배는 가운데, 메타컨베이어 벨트 위 세상은 여전히 뒤쪽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저 멀리 광활한 농지에서는 작물이 파릇파릇 자라고 있으며, 산과 들 사이사이에 아침을 맞이한 사람들이 세상을 누비는 광경이 보였다.
초목이 무성한 땅은 아침 태양을 한껏 머금으며 제 몸을 불리려는 듯하다. 어제와는 명백히 달라진 광경에 새삼 밤중에 꽤 많이 움직였음을 깨달았다.
“밤 중에 많이 옮겨주신 것 같네요. 무거웠을 텐데.”
“물에 잠긴 물건에 무게가 없듯, 어둠 안의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무겁더라도 문제없으니.”
어젯밤, 더미 컨테이너를 마련한 우리들은 컨테이너째로 바꿔치기했다. 회귀자가 그 주변에 함정을 설치하는 동안 티르는 우리가 거주하는 컨테이너를 통째로 들어서 옮겼다.
어둠 속에 파묻힌 채 둥실 떠서 움직이는 컨테이너는, 그 위압감과는 다르게 대단히 승차감이 좋았다. 불안해했던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잠들 정도로.
덕분에 우리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군국 쪽은 한참 뒤처졌다. 그쪽이 전속력을 다해서 쫓아오더라도 도착하는 건 정오가 지난 이후겠지.
“다만, 어제도 말했듯 바람이 거세게 부는 터라 멀리 움직이지는 못하였다.”
“그거야 뭐. 애초에 티르의 이동 방식은 부유에 가까우니까요.”
땅을 걷는 이들은 바람만 조금 견디면야 더 빠르게 갈 수 있지만, 티르는 어둠으로 들어 올리는 방식이라 메타컨베이어 벨트 위라는 이점을 잘 살리지 못한다.
뭐, 그래도 거리가 벌어진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그나저나. 휴, 물어볼 것이 있다. 이리 도망칠 바에야 차라리 밤중에 적을 무찌르는 게 낫지 않겠느냐?”
티르는 소극적으로 나서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다시금 물었다.
‘겁도 없이 나의 길을 가로막는 녀석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면 되지 않겠느냐. 크게 혼쭐을 내버리면 감히 추격할 엄두도 내지 못할 터인데.’
이게 강자의 마음가짐인가. 홀로 군대와도 싸울 수 있는 존재는 이리 생각하시는 듯하다.
뭐, 가능만 하다면 나쁠 건 없지만… 굳이, 싶지.
나는 어제 했던 설명을 차분히 반복했다.
“그러려면 뒤로 돌아가야 하잖아요. 하루빨리 군국을 떠야 하는 우리들이 구태여 돌아갈 이유가 없죠.”
“가끔은 돌아가는 것이 더 빠른 길일 때도 있지 않느냐.”
“대부분의 경우 빠른 길이 가장 빠른 법이에요. 시간에 쫓기는 저희가 돌아가는 길을 택할 이유 없어요.”
“…흐음. 네가 그렇다니 그렇겠지만.”
이해하지 못했는지 티르는 불만을 표했다. 아아, 이게 현대적인 전술이라는 거다. 천년 전과는 결이 다르다고.
‘멋지게 적을 격파하는 모습을 보여야, 휴가 나를 조금 더 믿고 따를 터인데. 최근 들어 의지가 되지 않는 모습만 보인 것 같구나. 그 탓일까, 흡혈귀가 되기를 완강히 거부하니….’
그게 아니라, 단순히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였냐. 뭔 혈기왕성한 청년도 아니고!
혈기가 왕성하긴 하지만, 그 혈기는 좀 다르지!
앞으로는 티르를 상대할 때 조금 더 차분하게 말해야겠다.
“우리가 공세를 취해봤자 저쪽이 물러나면 그만이에요. 그러면 저희는 다시 거기서 선택을 강요받아요. 거리를 좁히느냐, 다시 돌아가느냐. 두 선택 모두 저희가 원래 계획한 것보다 더 손해를 보기 마련이죠. 결국 원래 생각했던 본전도 못 찾는 셈이에요. 저희 목적은 적의 섬멸이 아니라 도주. 그렇다면 그 부분을 1순위로 놓고 행동하는 편이 합리적이에요.”
“한 나라의 군대가 그리 쉽게 물러나겠느냐?”
“군국은 합니다. 그런 나라에요. 혹시 적극적 교전회피라는 말 들어보셨나 몰라.”
‘적극적 교전회피…. 아, 대적해보았자 손해만 있을 터이니 전투를 회피하라고 하였던가.’
무저갱에서 수도로 향할 때 직접 경험해본 적 있던 티르였기에, 훨씬 수월하게 수긍했다. 여전히 티르는 모든 것을 내버리도 도주하는 군단의 모습을 상상하지 못하기는 했지만.
“만일, 우리가 물러나는데 저들이 물고 늘어지면 어찌하느냐?”
“저쪽에서 억지로 개처럼 물고 늘어질 때. 그때가 딱 싸울 때죠.”
“멍? 나? 물고 늘어져?”
개를 언급했는데, 제 부른 줄 알았던 아지가 다가왔다. 아지는 꼬리를 힘없이 흔들며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미안, 나, 인간은 못 물어! 유감이야!”
“진짜 유감이긴 해.”
“그래도 나, 힘낼게! 멍! 휴지조각, 싫어!”
“웬 휴지조각…. 설마 나 말하는 거냐? 내가 휴지조각처럼 찢기면 네 투자가 휴지조각이 되니까 그렇게 말한 거냐?”
“멍!”
해맑게 대답하는 아지는 꼭 자기가 내 주인 혹은 빚쟁이라도 된다는 태도였다.
돈이라도 주고 말해야지. 어이가 없네. 나는 아지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내 손이 더 아팠지만, 인간에게는 고통을 감내해서라도 지켜야 할 존엄이 있는 법이다.
“나는 아직 너한테 투자받은 거 거의 없거든? 인마, 투자라는 건 말이야. 그만한 값어치는 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아지는 한 대 맞고도 별달리 반항하지 않고는 말했다.
“할 거야!”
“인간도 못 무는 게 뭘 한다고.”
개가 도움이 되어봐야 개지. 내가 별 기대하지 않는 얼굴로 핀잔을 주자, 아지는 잠깐 주저하더니 고개를 홱 들었다. 또렷하고 큼지막한 갈색 눈동자에는 개답지 않은 강한 결의가 깃들었다.
“멍! 인간 말고 다 물게!”
어라. 그건 좀 든든할지도?
굳은 결의를 담아 대답한 아지는, 이내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는 조금 더 안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제 정찰병을 견제하기 위해 후방을 잠깐 지키다가 늦게 따라온 회귀자가 침대에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인간을 깨우는 게 자기 의무라도 되는지, 아지는 회귀자의 침대맡에 다가가서는 크게 짖었다.
“멍! 일어나! 아침이야!”
“어허. 아지야. 아빠는 어제 늦게 오셔서 피곤해. 천천히 깨워.”
“누가 아빠야….”
‘엄마면 또 몰라도…. 으으. 아니, 이건 아니지. 저 녀석 영향인가. 나도 슬슬 아지나 나비를 애완동물처럼 보게 되는 것 같아….’
제 머리를 감싼 회귀자는 금방 몸을 추스르고는 몸을 일으켰다.
“해가 떴네… 적은 아직 안 나타났지?”
“아직까지는요.”
“대충 요기만 하고…. 슬슬 준비하자.”
전투 중 요기가 익숙한지, 회귀자는 만한전석도 꺼내지 않고 급히 조리한 식량을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나도 아지와 나비를 위한 통조림을 까놓고는 앞에 하나씩 놓아둔 채로 통조림 식량을 억지로 삼켰다.
그동안 식사할 필요가 없는 티르는 가만히 바라만 보다가, 다 먹었을 때쯤 우릴 재촉했다.
“서두르자꾸나. 밤에 움직여야 했다면, 낮에도 움직이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아, 그럴 필요는 없어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쪽 멀리에서 총성이 울려퍼졌다.
타다다다. 한참 멀리서 들려왔지만, 그것들이 이쪽을 겨누는 건 확실했다. 컨테이너 외벽을 두드리는 익숙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회귀자는 익숙한지 통조림을 집어던지고는 수통을 꺼내 물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나 역시도 입안에 남은 음식을 꿀꺽 삼켰다. 먹은 양은 얼마 되지 않지만, 긴장 때문에 조여든 위장은 부족한 티를 내지 않았다.
“낮에는 저희 쪽이 쉽게 움직이지 못할 테니까요.”
지연전.
본대가 이쪽에 도달하기 전까지, 우리의 발목을 잡아채려는 부대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