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8 강처럼 흐르는 땅 - 마무리
당당하게 항복을 요청하는 마장은 정중했으나 오만했다. 그렇지 않아도 언짢았던 티르는 마장의 언사에 격렬하게 분노했다. 그녀의 충실한 종복인 어둠이 주인의 분노를 목도하고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어처구니가 없구나. 하늘에 떠서 나를 내려다본다고, 너희가 우위에 있는 것 같더냐?”
벌컥 열린 관에서 솟아나는 어둠이 더욱 진해졌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앞을 분간할 수 있는 안개와 같았다면, 지금은 한 치 앞만 간신히 보이는 물속에 있는 듯했다.
점차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서 티르의 눈만 새빨갛게 빛났다.
“마법이 너희만의 것이라 생각했느냐. 혈마법은 본디 내 권속들의 도구이나, 너를 위해 특별히 보여주도록 하겠….”
마력 대신 혈기를 이용하여 발현하는 마법, 혈마법.
피로 마법진을 그리려던 티르는, 이내 자기 피가 몸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예상 밖의 사태에 티르가 잠깐 당황했다.
‘혈마법을 쓰려고 하는 것인가. 살아생전 시조와 마법을 겨룰 수 있다니 영광이로다.’
“그렇다면, 나도 준비하겠습니다.”
프렐비요르가 망토를 더욱 펼쳤다. 흩날리는 망토 자락 사이사이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강철 구슬이 거센 숨을 토했다.
장성기. 우공이산(愚公移山).
자신을 어리석다 칭하는 이를 위한, 산을 옮기는 마장비.
능력은 마법의 후폭풍으로부터 착용자를 보호하는 것과 마력의 축적, 그리고 마력의 재활용.
프렐비요르의 마법은 규모 면에서는 어마어마하나 마법 자체는 기초적이다. 물질이든, 마법이든 단순할수록 변환하기 쉬운 법이다. 그 마력을 재활용하여 전략 급 마법을 연발하게끔 돕는다.
프렐비요르에 의한, 프렐비요르를 위한 장비였다.
“프리셋. 리.”
우공이산이 화염 마법의 잔재를 빛으로 뒤바꾸어 머금었다. 거대한 망토에 달린 금속 구체에서 눈 부신 빛이 번뜩였다.
그에 비해 혈마법을 못 쓰게 된 티르는 대신 자기 몸 안을 맴도는 힘을 마주했다. 혈기는 티르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명랑하게 핏줄을 누비면서 생명을 불어넣는 중이었다.
티르가 허탈해서 중얼거렸다.
“하. 우악스럽구나. 정녕 이 수밖에 없는 것이냐.”
결심한 티르는 마법으로 비트는 대신 무릎을 굽혔다. 티르칸쟈카의 의지에 따라 새까만 어둠이 그녀의 발밑을 받쳤다.
“잡졸이라도 된 것처럼 직접 몸을 앞세워야 한다니….”
그녀가 굽힌 다리를 편 순간 대지가 요동쳤다. 티르의 몸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몸에 두른 어둠이 티르를 따라오지 못하고 뒤쳐졌으나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하늘로 치솟은 티르는 자기 어둠을 밟고는 프렐비요르와 가까워졌으니까.
아직 마장의 마법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주문을 외우던 프렐비요르의 눈이 커졌다.
‘뭣이? 이건, 시조의 방식이 아니…!’
“이는 나도 반갑지는 않으니, 빨리 끝내마.”
바람을 가르고 뛰쳐나온 티르의 새하얀 손이 망토를 낚아채기 직전이었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창이 티르의 몸을 쳐냈다. 마지막 순간 서로의 거리가 멀어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티르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꿰뚫기 위해서가 아니라 튕겨내기 위한 투창으로 시조를 요격한 파트락시온이 다른 창을 잡아들며 외쳤다.
“전장에서 다시 만났군, 시조! 저번엔 싸울 이유가 없었지만 이번엔 다르다고!”
“기사 따위가…!”
티르가 사납게 표정을 바꾸는 동안 프렐비요르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압축된 빛줄기가, 어둠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티르의 위로 쏟아져내렸다.
회귀자는 마장이 등장한 직후 몸을 빼려고 했으나, 낌새를 읽은 히스토리아는 귀신처럼 따라붙었다.
“어디 가?”
히스토리아는 곤란해하는 회귀자를 보며 은근히 미소지었다.
“나랑 놀아야지. 아, 연상은 좀 자극적인가, 귀염둥이?”
나름 본심을 조금 섞은 말이었으나, 그것을 도발로 받아들인 회귀자가 이를 으득 악물았다.
“연상, 이라고? 흥. 알지도 못하는 게.”
“입은 험하네. 그래, 버릇 없는 행동. 어린아이의 특권이지.”
“…버릇이라 했어? 내가 할 말이야.”
회귀자가 잠시 눈을 감았다. 여유만만하던 히스토리아는 급변한 기세에 몸을 낮추고는 긴장했다. 다시 회귀자가 고개를 쳐들었을 때, 그 눈에는 무지갯빛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칠색안, 전안 개안. 전륜천안.
미래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관측, 동시에 이쪽 세상으로 끌어온다.
건, 곤, 감.
이치에는 닿지 못했으나, 한때 절정에 이른 기공이 몸에 깃들었다. 넘치는 기운을 제 것인마냥 운용하며, 순간적으로 가속하여 쌍검을 동시에 치켜들었다.
“까불지 마!!”
느리다는 단점 때문에 수비적인 위치에서 그저 지키고만 있던 지잔이 갑자기 뱀처럼 기민하게 움직였다. 히스토리아가 안색을 굳혔다.
“윽?!”
태산처럼 무거우나 오직 회귀자에게만 가볍게 느껴지는 유물, 지잔. 그러나 그것은 지잔이 따라주기 때문이지, 빠르게 휘둘러서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쩐 일인지 지잔을 평범한 장검처럼 휘두르고 있다. 기공을 잔뜩 불어넣은 채로.
“약이라도 한 거야? 갑자기 기량이 늘었…!”
“미안한데, 이쪽이 본 실력이거든!”
센스나 요령에 크게 의존하는 건곤과는 달리, 감(坎)은 신체 자체를 강화하는 기공.
회귀하면 초기화되는 바람에 회차마다 새로 익혀야 했고, 그 탓에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매 회차 성장하는 회귀자는 탈피를 하듯 감기공을 새로 익히곤 했다.
“지금까진, 무거워서 쉽게 쓰지 못했지만…!”
공성추도 수숫대에 매달면 부러지기 마련이다. 단단한 떡갈나무 정도는 되어야 그 힘을 버틴다.
마찬가지. 지금까진 회귀자가 아무리 지잔을 휘둘러도 그것을 이끄는 몸이 버티지 못했다.
그러나 운명안으로 미래의 힘을 덮어쓴 지금은, 지잔의 원래 힘을 100% 사용할 수 있었다.
“템빨도,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하는 거라고!”
지금껏 따라주듯 움직였던 지잔이 수동적으로 휘둘러졌다.
항거불능의 일격이다. 당연히 히스토리아는 지잔의 범위 밖으로 잠깐 물러나고는, 뒷발을 내디디며 곧이어 뛰어들 준비를 했다.
그때, 지잔이 방향을 바꾸었다. 노리는 건 히스토리아가 아닌, 그녀를 반 박자 늦게 뒤따른 쇠사슬. 뭉툭한 끝이 사슬 끝에 걸렸다.
살짝 걸렸을 뿐이다. 그런데 지잔이 자석이라도 된 듯, 쇠사슬이 지잔에 딱 달라붙었다.
지곤류, 자철.
천앵이 척력이라면, 지잔은 인력. 강철의 모태이자 세상 만물을 붙잡아두는 대지의 포옹이다.
‘물론, 상대도 반탄기공으로 떨쳐낼 수 있지만…. 사슬까지 기공을 두르긴 힘들지!’
“이번엔 네가 낚였어!”
지잔은 반동이 없다. 힘껏 당기자 히스토리아의 전신이 그에 딸려 나왔다. 다급히 총구를 겨누어봤으나 그를 예측한 회귀자가 천앵으로 총구를 틀어막았다.
그와 동시에, 뻥, 회귀자의 발이 히스토리아의 복부를 가격했다.
“큭…!”
히스토리아 역시 기공으로 몸을 보호했으나, 회귀자의 기력이 짧은 순간 예상치를 아득히 초월했다. 히스토리아는 반으로 접혀 데굴데굴 굴렀다. 배를 헤집는 고통에 그녀가 숨을 거칠게 토했다.
“크윽! 콜록, 콜록!”
“아쉽네. 내 다리가 좀만 더 길었으면, 일어나지도 못했을 텐데!”
어쨌건 회귀자가 몸을 돌리려는 때였다.
발목에 아릿한 감각이 느껴졌다. 회귀자의 발목엔 쇠사슬이 묶여 있었다. 마지막 순간 히스토리아가 방어를 포기한 대신 사슬로 다리를 묶어버린 것이다.
다시 일어선 히스토리아는 나른하면서도 도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적극적이네…. 하지만 너무 무리하는 거 같은데? 빌려온 힘이면 오래 가지 못하겠지. 안 그래?”
“진짜, 까다롭기는…!”
‘지금 붙잡혀 있을 시간이 없는데…!’
이 메타컨베이어 벨트에서 하늘을 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이 벨트의 속도랑 똑같은 속도로 하늘을 나는 것이다. 이 방법에는 상당한 노고가 든다. 매번 바람을 극복하고 몸을 띄우며 속도를 맞춰야 하므로.
그런데 마장 프렐비요르, 마력량은 어마어마한데 요령이 썩 좋은 편은 아니다. 하늘을 날 수야 있지만 컨트롤이 거칠기 짝이 없다. 저토록 매끄럽게 하늘을 날지는 못할 터.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조금 더 단순하며 쉬운 속임수지.”
위쪽에서 세기의 전투가 벌어지는 틈을 타, 나는 마장의 발밑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아래쪽은 어둠으로 시야가 방해받는 상태였고, 마장도 감각이 둔한 편이라서 내 존재를 눈치채진 못했다.
그렇게 발밑까지 도착한 나는 컨테이너 연결고리에 매달린 마력의 실을 발견했다. 무언가를 꽉 붙잡고 있는, 팽팽히 당겨진 실.
역시.
“당신의 트릭은 간파했어. 넓은 망토를 연 삼아서 하늘에 떠 있으셨겠다?”
마력사는 거칠게 펄럭거리는 망토에 연결된 채, 그녀가 하늘 멀리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꽉 붙들고 있었다.
어린아이 같은 장난기가 당장 이 팽팽한 실을 잘라버리라고 외친다. 나는 들뜬 마음을 다스리며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네.”
다이아몬드 5. 낫.
안팎으로 둥근 칼날을 지닌, 농기구이면서 무기로도 쓰인 자르기에 특화된 도구.
상태 멀쩡한 무기가 그것밖에 없었기에 나는 오른손에 낫을 든 채였다.
낫을 꺼내 들고 마력사에 걸었다. 장력도 충분하니 자르는 건 쉽다. 중요한 건 타이밍. 최대한의 효과를 볼 순간을 노려야 했다.
고개를 들어 프렐비요르를 살피니, 마침 티르가 땅을 박차고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중이었다.
“어라. 우리 편이 이기는 중이네.”
그러면 조금만 더 보고 있을까. 괜히 실을 끊었다간 마장이 도망칠 기회만 주는 거니까.
뛰어오른 티르는 허공에서 어둠을 밟고는 움직였다. 전설의 허공답보가 펼쳐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마장은 티르의 손에 잡힐 것이다.
“무투가가 되어서 그런가. 오히려 마장 상대로 유리해졌나? 즐거운 오산이네.”
오히려 마장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문답무용으로 죽여버리면 곤란한데… 내가 그리 보고 있던 찰나.
어딘가에서 날아온 창이 티르의 뒤통수를 때렸다. 공중에서 요격당한 티르가 핑글핑글 돌아간다.
우와. 아프겠….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마장의 망토가 빛났다. 마법이 완성된 것이다.
나는 다급히 낫을 당겼다. 마장이 만든 마력사답게 잘 잘리지 않았다. 순간 없는 기공 있는 기공 다 끌어서, 이를 악물고는 그에 매달렸다.
뚝, 하고 반가운 소리가 났다. 끊어진 실이 하늘 위로 흩날렸다.
“럭스, 밀리어네어… 윽!”
제때 끊은 덕분에 마장의 조준이 빗나갔다. 원래 티르를 강타했어야 할 광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몸을 맨 실이 끊어진 탓에 조준이 빗나가자, 이유를 찾던 마장의 시선이 순간 나를 향했다.
‘어느 틈에!’
“도망쳐!”
나는 즉각 달음박질쳤다. 마장이 급히 쏘아낸 마탄 두 줄기가 나를 향했다. 마력으로 후려갈기는 단순한 공격이지만, 나에게는 그것만큼 무서운 게 또 없다.
그나마 마장의 몸이 흔들리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 나는 상자를 등에 멘 채로 냅다 뛰었다.
내가 뛰는 방향에서는 회귀자와 히스토리아가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싸운 건지, 사슬이 둘을 묶어둔 상태였다.
상황을 살피고 있던 회귀자가 먼저 내 기척을 알아차렸다.
‘저 웃기지도 않은 갑옷은 뭐야? 적인가? 포위되기 전에, 일단 베어야…!’
만나면 일단 베려고 하네!
회귀자가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 전에 나는 다급히 외쳤다.
“셰이 씨! 연상이랑 노닥거리는 건 그쯤하고! 가서 마장 할머니를 좀 어떻게 해 봐요!”
내 목소리를 알아들은 회귀자는 멈칫하고는 외쳤다.
“너도 내가 노는 거로 보여?! 봐봐! 매여 있잖아!”
“벌써 매인 몸이 된 거예요? 저런. 그 나이에 벌써.”
“동기라더니 쌍으로 헛소리를 하네! 너지?! 총사 입버릇 너한테 옮은 거지?!”
어떻게 알았지? 감은 좋아.
어쨌든.
“발 대요!”
“왜?”
“아, 일단!”
회귀자는 사슬에 매인 발을 살짝 들었다. 나는 회귀자의 발아래를 미끄러지며 묶인 쇠사슬을 톡 치고 지나갔다. 어디까지나 발목을 감았을 뿐 묶인 게 아니었던 터라, 간단히 손을 대는 것으로도 풀어낼 수 있었다.
“탈출! 자, 당신은 사슬을 잃고 자유를 얻었어요! 인생의 무덤에서 해방되었으니까 빨리 가서 티르를 도와요!”
“총사는?”
“제가 맡을 테니까요!”
“…그럼, 맡길게! 놓치지 마!”
‘장담할 정도면 죽지는 않겠지…!’
회귀자는 곧장 몸을 날렸다. 마장을 상대하기 위해 그녀가 멀어지는 동안, 나는 깊게 숨을 내쉬고는, 오랜만에 보는 동기를 살폈다.
잡으려면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악착같이 붙들었으면 조금은 더 시간이 끌렸을 터.
하지만 히스토리아는 회귀자를 그냥 보내고는 나를 맞이했다. 나에게 용건이 있었을 테니까.
“…오랜만이네, 리아.”
“그러게.”
히스토리아는 이마를 쓸었다. 격렬한 전투로 젖은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히스토리아는 나를 향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진짜, 진짜. 빌어먹게도 오랜만이야.”
그래도 반가워하는 것 같다. 역시 동기는 동기야. 이 정도면 나도 죽지는 않겠….
‘지금껏 잘도 숨어다녔어, 이 빌어먹을 자식. 일단 그 뺀질뺀질한 면상을 뭉개놓고 시작해줄게.’
어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