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12화 (212/384)

EP.212 벼랑 위에 포로

한낮이라는 시간을 다 태운 태양은 땔감이 부족해지자 슬슬 불완전연소 단계로 접어들었다.

메타컨베이어 벨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여서 그런가, 오늘따라 저녁이 더욱 일찍 찾아온 기분이었다. 어쩌면 아침부터 있었던 오랜 추격전이 여유마저 쫓아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여유를 되찾은 나는 느긋하게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중얼거렸다.

“후우. 간신히 도망쳤네.”

결과만 놓고 봤을 때는 대성공이다. 우리는 해가 지기도 전에 군국의 추격을 뿌리쳤으니까.

다만 과정이 생각만큼 매끄럽진 않았다. 이런저런 사건과 변수가 작용한 결과였다.

어쨌건 나는 탈출의 일등공신인 회귀자를 치켜세웠다.

“셰이 씨! 정말 대단해요! 정말, 천지가 진동하고 땅이 갈라질 위력이었어요! 어떻게 그만큼의 힘을?”

“아, 그거? 별거 아니야.”

회귀자는 손을 내저으며, 허리춤에 매달린 지잔을 보고는 턱을 긁적였다.

‘마장이 땅줄기를 쥐고 흔드는 걸 보고, 혹시 지잔으로 따라 할 수 있을까 싶어서 해봤는데…. 되네?’

딸내미를 빼앗긴 장성들은 진짜 딸바보 아버지라도 되는 듯 생각보다 격렬하게 반응했다. 특히 격노한 마장은 장성들의 경고도 뿌리치고는 내려앉아 메타컨베이어 벨트를 쥐고 흔들었다.

메타컨베이어 벨트는 흐르는 땅이다. 발을 디딜 수 있긴 하지만, 결국 그 흐름은 마법과 대지술이 결합 된 것.

마장은 땅 그 자체를 건드리지는 못하지만, 흐름 중 일부에 간섭해서는 들어올려 채찍처럼 휘둘렀다.

땅에서 괴물이 튀어나온 듯한 광경에 나조차도 어라, 싶었다.

그러나 회귀자의 검 중 하나인 지잔은 대지술의 정수 그 자체. 마장에 맞서 회귀자는 지잔의 대지술을 발휘하여 땅을 진정시켰다.

‘지선의 힘이라고?! 설마!’

마장이 오랜 친우의 힘을 목격하고 당황하는 사이, 지잔이 대지술과 공명하는 것을 느낀 회귀자는 고개를 갸웃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땅을 크게 베었다.

그러자 메타컨베이어 벨트가 끊겼다.

지잔의 검흔을 경계로, 둑을 쌓은 것처럼 뒤따른 땅이 멈춰버렸다.

군국의 대동맥이 막히자 장성도 마장도 절창도, 마침 지척까지 다가왔던 군국 본대도 말 그대로 발이 묶여버렸다. 장병들은 회귀자가 벌인 끔찍한 짓에 경악하면서도, 멀어지는 우리들을 그저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 현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흐르는 강을 둑으로 막는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급조한 것. 땅의 압력은 물을 아득히 뛰어넘었고 둑은 금방 허물어졌다.

그래도 발이 묶인 건 마찬가지며, 어쨌건 이쪽이 흐름을 끊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으니 섣불리 접근하진 못할 것이다….

잘 하긴 했다, 회귀자. 넘치는 기력과 대지술이 있다면 흐르는 땅마저 끊어버릴 수 있구나.

그런데 말이야.

“별거 아니긴요. 그런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면 진작 말했어야죠!”

“지잔의 힘인데, 뭐.”

별일 아닌 척 손을 내저으면서도 회귀자는 내심 크게 기뻐했다. 절로 어깨가 으쓱거릴 만큼.

‘엄청난 능력이야! 지잔의 힘은 대지술의 영향을 받은 것들을 다스릴 수 있구나. 그리고 무엇보다, 대지모신을 믿고 가르침을 받아야만 쓸 수 있는 대지술을 자유롭게 썼어! 이건 대단한 성과야!’

그래. 엄청난 능력을 새로 개방했으니 얼마나 기쁘겠어. 심지어 대지술이라고 하면 유용해서 온갖 곳에 쓸 수 있으니까.

그런데 회귀자.

내가 너를 칭찬하는 것처럼 들려?

“지잔의 힘이어도 셰이 씨가 휘두른 건 변함이 없죠! 무기의 힘을 끌어내는 건 그 주인. 셰이 씨가 그 힘을 다루는 거니까요!”

“그런가? 흐흠, 뭐. 천앵으로도 힘을 쓰곤 했으니까. 지잔도 비슷한 힘이 있다는 사실이 딱히 놀랍지는 않다고 할까.”

‘그래. 지잔을 무거운 몽둥이로만 쓰는 건 낭비지. 단지, 지잔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건 지선 정도나 되는 신선 급 대지술사뿐이라 찾을 수 없었을 뿐. 그래서 성황청도 회수한 지잔을 나에게 맡겼던 거고….’

“그만한 힘이 있으면 진작 쓰시지 그랬어요!”

“나도 전투 중에 깨달은 거야. 마장이 땅을 일으켜 공격하려고 하길래 그대로 따라 했어.”

‘위험하다고 해도 일단 실전이 좋긴 좋아. 실전을 겪으면서 생기는 충돌, 거기서 난 불똥에서 영감을 얻는 경우가 많으니까. 후후. 아직 대지술은 그다지 자신이 없지만. 만일 천앵과 지잔 양쪽의 권능을 전부 쓸 수 있다면…!’

회귀자는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했을 때처럼 들떴다. 그렇게 그녀가 희망찬 미래를 그리던 잠시.

“우와. 그냥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땅을 그어본 거라고요? 아무 생각 없이?”

“응! …응?”

‘아무 생각 없이? 뭔가 느낌이 이상한데.’

이제야 알았냐, 회귀자!

“자기 힘도 모르는 사람이 그걸 막 휘둘러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어?”

와. 내 말의 본의를 파악할 때까지 문답을 열 번쯤 나누었네. 회귀자가 무언가 낌새를 느꼈을 때 나는 여세를 몰아 몰아쳤다.

“장난해요? 제가 셰이 씨보다 앞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땅의 파도에 휩쓸렸을 거라고요? 저건 물이 아니에요. 땅이라고요! 발이라도 파묻히면 그대로 바위 틈에 몸이 끼는 매몰자 신세가 되는 건데. 그딴 짓을 기분 삼아 한다고요?”

“기, 기분 삼아가 아니야! 마장이 비슷한 짓을 했잖아. 막기 위해서 힘을 써보다가, 마침 좋은 생각이 나서!”

“마침? 좋은 생각? 장난해요, 진짜? 그런 힘 있으면 전략적으로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대지술을 쓸 수 있다면 미리 그때그때 고민 좀 한 다음에, 미리 연습도 해보고 했어야죠!”

회귀자. 얘는 성격에 발상에 각성까지 왜 이리 발작적인 건지 모르겠다.

조금 생각을 읽을 수 있게 해주면 안 돼? 떠오른 발상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 시간이 너무 짧아서 독심술사도 반응하지 못하겠다고! 자칫 흙의 파도에 휩쓸릴 뻔했잖아!

“사, 상황이 급했잖아!”

“그러니까 미리 알았으면 안 급해졌을 거 아니에요! 아니, 셰이 씨! 힘이 방 한구석에 처박혀 있는 휴짓조각이에요? 땅을 끊어버릴 힘이 있으면 좀 미리미리 알아 놔! 나였으면 그만한 힘 아득바득 끌어모아서 제대로 써볼 생각을 했다!”

“뭐라고?! 싸울 땐 코빼기도 비치지 않은 주제에 입만 살았어!”

“네에? 무슨 성과를 부정하는 소리. 지금 이 결과 안 보여요?”

나는 손에 쥔 쇠사슬을 짤랑거리도록 들어 올렸다. 어딘가에 묶여 있는 쇠사슬이 짧게 흔들거렸다.

그 끝에는, 군국 최연소 육장성. 군국의 딸인 총사 히스토리아가 꽁꽁 묶여 있었다. 피곤한 듯 나른한 눈을 하고는, 입에는 담배 한 개비를 문 채로.

“여기, 이게 누구죠? 총사 히스토리아. 얘를 누가 잡았죠? 바로 나. 누가 이렇게 꽁꽁 묶어서 포로로 삼았죠? 그것도 나. 히스토리아로 군국 장성들 협박해서 함부로 못 쫓게 한 건 누구죠? 이 역시도 나!”

사실에, 사실에, 사실에, 사실만 덧붙인다. 과정은 몰라도 결과만 놓고 보면 내가 일등공신.

눈앞에 뚜렷한 증거가 있는데도 회귀자는 뭐가 억울한지 계속 고집을 부렸다.

“내가 반쯤 쓰러뜨려서 힘을 다 빼놓은 거잖아!”

“아아, 네에. 반쯤 쓰러뜨리고~ 마장과도 반쯤 호각으로 대치하고~ 반쯤 기분 삼아서 땅을 긋고~. 뭐 하나 확실한 거 없이 인생 그렇게 대충대충 살 거예요? 당신은 뭐 인생 수십 번 살 수 있어요?”

‘앗, 어떻게 알았지…?’

그냥 한 말이겠지, 이렇게 넘겨야지! 뭘 어떻게 알았지야! 농담도 못하겠네!

‘아니, 그냥 한 말이겠지. 그나저나, 왜 내가 이런 말 들어야 해? 내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거기다 마지막으로 상대한 것도 나비라며! 너는 탈진한 총사를 적당히 상대하고는 묶었을 뿐이잖아!”

“말은 쉽네요. 그렇게 쉬웠으면 셰이 씨가 다 해주시지 그랬어요? 1초 만에 리아를 제압하고 묶었으면 이런 말 들을 일도 없었잖아.”

‘그게 됐으면 진작 그랬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부들대는 꼴이 우스웠다. 나는 놀리듯이 웃으면서 쇠사슬을 잘그락거렸다.

“말린 콩도 콩이고, 불린 콩도 콩이듯, 탈진한 육장성도 육장성! 지치고 다쳐서 죽기 직전인 육장성이라고 해도, 방심하지 않고 완벽한 채비를 한 채 온 힘을 다해서 공격해서! 육장성을 쓰러뜨리고, 사로잡기까지 했단 말이죠!”

다시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히스토리아는 담배인 줄 알고 씹었다가 사실 씀바귀라는 걸 뒤늦게 깨닫고 정색했을 때와 비슷한 표정으로 일단 내 손짓에 따랐다.

“보세요. 육장성이랍시고 거들먹거리던 주제에, 단단한 쇠사슬에 꽁꽁 묶여서 무력화된 이 우스운 꼴을!”

계속 잡아당기고 사슬을 흔들자, 심기가 불편해진 히스토리아는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만 당겨.”

“하아?”

잡힌 주제에 말이 많네. 나는 고개를 건들거리며 팔이 뒤로 묶인 히스토리아에게 다가가, 그 볼때기를 톡톡 건드렸다.

“야. 너는 자기 처지도 자각하지 못하는 거야? 너는 포로라고, 포로. 어?”

툭, 툭. 딱 기분 나쁠 정도로만 뺨을 때렸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더라도 그 의도가 곧장 전해지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오해와 곡해가 괜히 있는 단어가 아니니까. 단,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하는 괴롭힘은 예외다. 세상에서 정직한 결과를 내는 대화법인 셈이다.

계속 톡톡 건드리자 히스토리아의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그만하라고 했어.”

“그만 안 하면? 어쩔 건데? 어? 네가 지위만 육장성이지, 여기서는 포로나 다름없잖아? 포로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이야, 엉?”

큭큭. 이 압도적인 갑의 위치에서 을을 휘두른다는 우월감. 기분이 좋구만.

한창 이죽거리고 있을 무렵. 박자를 세던 히스토리아가 내 다음 손짓에 맞춰 맹렬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뺨이 내 손을 거세게 때렸다.

파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이 채찍에 맞은 것처럼 튀어나왔다.

…아파.

뺨에 맞은 내 손이 아파!

“…셰이 씨! 저 포로 보세요! 포로 주제에 얼굴로 제 손을 때렸어요! 빨리 혼내줘요!”

정작 내 손을 후려진 히스토리아는 다시 나른한 얼굴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회귀자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할 거면 네가 해야지. 네 포로잖아.”

“그렇게 차갑게 굴 거예요? 제가 잡아 왔어도 우리는 동료! 책임은 같이 져야죠! 묶인 육장성도 육장성이에요. 힘을 되찾고 구속을 풀고 우리를 습격하면 어쩌려고요!”

“…끙.”

‘그것도 그래. 아예 죽여버릴 게 아닌 이상 나름 감시를 하긴 해야 하는데. 으음. 일단, 포로로 잡아두는 건 나쁜 선택이 아니야.’

히스토리아를 포로로 잡은 순간 군국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육장성에 군국의 딸이라 불릴 정도로 친숙하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그녀 역시 군국 최고전력 중 하나. 그녀가 무력화된 건 군국 입장에서도 커다란 전력손실이었다.

대지와 하늘의 검을 쓰는 회귀자와 흡혈귀의 시조 티르칸쟈카. 셋이어도 부족할 정도인데 마장과 절창 둘이서는 이에 대적하기 힘들다.

‘내가 땅을 끊을 수 있으니 저쪽도 군단을 투입하지 못해. 그렇다고 소수정예로 습격하기엔 육장성의 수가 부족하고. 어쩌면 포로를 앞세워 군국이랑 협상할 수도 있어…. 어, 그런데 이야기가 수상할 정도로 좋은데.’

골똘히 생각하던 회귀자는 문득 히스토리아를 의심스레 바라보았다.

‘그런데, 총사는 왜 순순히 잡혀주었지? 자기가 제압당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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