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3 큰 힘에는 강한 밧줄이 필요하다
히스토리아가 아무리 지쳤다고 해도 육장성이다. 강자일수록 생포하기 어렵다는 건 상식. 거기다 고작 쇠사슬 따위에 묶인 히스토리아를 보고서 회귀자는 의문을 표했다.
“그나저나, 네가 정말 잡은 거 맞아? 뭐 수상한 수를 쓰거나, 아니면 미심쩍은 점은 없었어?”
“못 보셨어요? 튼튼한 전신갑옷을 입은 제가 듬직하게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린 뒤 리아를 몰아붙이는 거?”
‘보긴 봤지. 마지막 공격 동작은 꽤나 매끄럽긴 했어. 마치 미리 합을 맞춘 것처럼 물 흐르듯 이어지던데.’
오, 회귀자. 오랜만의 정답이다.
처참한 내 실기 점수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미리 합을 맞춰둔 동작이었다. 원래는 내가 아슬아슬하게 패배하는 각본이지만 오늘은 히스토리아가 스스로 쓰러져주었다.
이것을 위해 나름의 변명도 준비해두었다고. 나는 으스대며 말했다.
“아실지는 모르는데, 제가 사실 리아랑 동기였거든요. 같이 대련을 하곤 했죠. 기공은 훨씬 약하지만 체술의 약점은 속속들이 알고 있어요. 그렇지, 리아?”
제때 맞장구를 쳐 주어야 할 히스토리아가 나른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손에 쥔 사슬을 절그럭거리며 대답을 종용했다. 히스토리아는 잠에서 깬 듯 눈을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음.”
“봐봐요. 얘도 맞다고 하잖아요.”
크크. 훈련교관도 이걸로 속여넘겼지. 먼발치에서 곁눈질로 본 네가 과연 알 수 있을까?
그때 지루하게 담배만 우물거리고 히스토리아가 툭 내뱉었다.
“휴이. 불.”
“아, 여기.”
냉큼 제식 마법으로 불을 붙여주었다. 심심함을 달랠 거리가 생기자 히스토리아는 만족스럽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불이 붙은 손가락을 휘둘러 끄는데 회귀자의 의심이 한층 더 깊어졌다.
“총사, 묘하게 당당하지 않아? 뭔가 일부러 잡혀준 것 같은 느낌인데.”
“네? 육장성이 일부러 잡혔다고요? 저한테?”
“그래. 총사는 너무 순순히 투항했어.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야.”
절반의 정답. 정확히 말하면 꿍꿍이는 내가 부리긴 했다. 예리한 지적이지만 갑자기 회귀자가 예리한 척하니까 좀 아니꼬왔다.
나는 자존심이 상한 척 무언가에 찔린 사람처럼 외쳤다.
“뭐요? 그러면 제가 히스토리아를 제압한 것도, 저쪽에서 일부러 어울려줬을 뿐인 가짜 성과다? 그런 말이에요?”
이건 회귀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접근방식이었다. 어찌나 의외였는지 의심의 시선을 보내고 있던 회귀자가 깜짝 놀랄 정도로.
‘뭐? 이걸, 그렇게 듣는다고?’
“내 말은, 그게 아니라. 합리적인 의심을.”
“합리적 의심? 그냥 자기 멋대로 의심한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까지 저를 깎아내리고 싶어요?”
‘이 녀석, 완전히 기분이 상해서 삐딱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딱히 기분 상하진 않았는데. 왠지 네가 날카로운 척해서 그만 나도 모르게. 너무 놀렸나, 그만 둘까….
‘고작 그게 문제였던 거야? 좀생이처럼?’
취소. 끝까지 간다.
당황한 회귀자는 나를 다독이기 위해 목소리를 가라앉히고는 말했다.
“수상한 점이 있잖아.”
“뭐가 수상해요? 나는 실패자에 범죄자니까, 제가 이룬 성과를 믿지 못하겟다는 거예요?”
“아니, 도망치고 싶었다면 메타컨베이어 벨트에서 뛰어내리면 될 거 아니야. 구태여 잡혀준 게 이상하다고….”
“잠깐! 그걸 말해주면 어떻게 해요! 셰이 씨. 당신은 지금 포로에게 도망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고요!”
“앗!”
내 지적에 회귀자는 다급히 제 입을 막았다. 그녀는 조심히 히스토리아의 눈치를 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흐렸다.
“설마. 군국이 육장성을 보내면서 계획도 안 세웠겠어? 저쪽도 그 정도는 알겠지.”
‘알겠…지? 내가 정말 탈출 방법을 알려준 건 아니겠지?’
오호. 그렇단 말이지. 나는 히스토리아에게 슬쩍 눈치를 주…려고 하다가 말았다. 히스토리아는 여전히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에서는 오랜만에 보는 장난기가 살짝 번뜩이고 있었으니까.
히스토리아는 담배를 문 채 입을 뻐끔거렸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네. 알려줘서 고마워, 귀염둥이. 네가 알려준 대로, 감시가 뜸해진 틈을 타 도망치는 방법으로 그걸 고려할게.”
“에엑?!”
이게 진정한 지원사격이지. 히스토리아가 자연스레 쿵짝을 맞춰주는 김에 나는 한걸음 더 나아갔다.
“와! 이제는 내 전공 깎아먹이기 위해서 적에게 기밀을 누설해? 너 간첩이지! 안 되겠다. 빨리 공안에 신고해야!”
“아니야! 난 간첩이 아니… 잠깐! 애초에 군국에 쫓기는 몸인데 간첩이나 공안이 뭔 상관이야!”
버럭 소리를 지른 회귀자는 이번엔 히스토리아 쪽을 바라보았다. 히스토리아는 여전히 뻔뻔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다.
‘칫, 나를 놀리기 위해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놀리는 건지…! 하나 확실한 건, 총사나 저 녀석이나 비슷할 정도로 열 받는다는 점이야! 누가 동기 아니랄까 봐!’
히스토리아에게도 놀려질 정도면 그건 네 문제가 아닐까. 방어만 잘한다더니, 대화에서도 남을 파고들기보다는 받아치는 쪽으로 발전했나 보다.
어쨌건, 히스토리아는 포로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만큼 여유로웠고 평온해 보였다. 심지어 탈출 방법도 알고 있었다.
고민하던 회귀자는 공간을 열고 포켓을 뒤적였다.
“어쨌든! 너는 포로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육장성이면 쇠사슬 정도는 어떻게든 풀어버리겠지. 그러니까 이걸로 다시 묶겠어.”
회귀자가 윽박지르며 포켓에서 꺼낸 물건은 녹색과 금색을 번갈아가며 덧칠한 듯한 얇고 긴 실타래였다. 나는 은은한 광택이 나는 실의 정체를 알아차리곤 물었다.
“천잠사예요?”
“맞아. 질기고 단단한 데다 기공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어서, 아무리 기공을 불어넣어도 튼튼해지기만 할 뿐 끊어지지 않지. 총사를 묶으려면 이정도는 있어야 해.”
와, 저 귀한걸. 천의무봉에서도 물량을 많이 못 구해서, 천잠사로 보자기 만들어달라니까 세피가 한껏 불평했었는데.
회귀자가 천잠사 한 타래를 풀어서 양손으로 쥐었다. 연달아 당겨진 천잠사가 공기를 쳐내며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그게 너한테도 좋을걸, 총사. 천잠사가 질기다곤 해도 쇠사슬처럼 딱딱하지는 않으니까 덜 아플 거야… 어디까지나. 너에게 도망칠 생각이 없을 때 말이지만.”
“흐음. 나는 포로니까, 너희 좋을 대로 해.”
“좋아. 휴즈, 사슬 풀어줘.”
“그럴 필욘 없어.”
담배를 꽉 문 히스토리아는 힘을 줘서 쇠사슬을 끊어냈다. 우득우득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리며 히스토리아의 뒤쪽으로 부러지고 끊어진 쇠사슬이 후두둑 떨어졌다.
팔 힘으로 쇠사슬을 끊어놓고도 히스토리아의 팔에는 붉은 자국만 조금 났을 뿐이었다.
“후우. 아프네.”
하나도 아프지 않으면서 히스토리아는 엄살을 부렸다.
인간이 쇠사슬을 벗어던질 수 없는 이유는, 쇠사슬이 몸보다 단단하기 때문이다. 힘이 아무리 강해도 육신이 사슬보다 약하다면 먼저 짓이겨지는 쪽은 피와 살이다.
건곤을 이룬 기공사도 마찬가지. 기공을 흘려 넣는다고 해서 자기 몸이 단단해지지는 않는다. 힘이 강해져봤자 그 힘은 자기 몸도 상하게 하니, 그들도 사슬에 묶이면 어중간한 각오로는 벗어날 수 없다. 군국의 구속복이 만들어진 이유다.
하지만 감(坎)을 잡은 인간부터는 셈법이 조금 달라진다. 기공을 몸 안쪽에 둘러 육신 자체를 강화할 수 있다면 더는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맨몸으로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무사하고, 자기 힘으로 구속복을 찢거나 쇠사슬을 박살 내도 피부가 살짝 눌리는 게 전부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뛰어넘는, 초인의 경지에 이른다.
그 너머에서, 이치까지 닿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초인조차 넘는다.
회귀자는 짧게 혀를 찼다.
‘저 나이에 건곤을 이루고, 감을 잡고. 리에 닿았어. 살짝 건드렸을 뿐이지만…. 칫, 신은 뭐해. 이왕 회귀를 줄 거면….’
짧은 상념을 끝마친 회귀자가 중얼거렸다.
“…흥. 역시. 언제든 부술 수 있었잖아.”
“걱정하지 마. 아까는 확실히 힘이 다 빠졌었으니까.”
손목을 문지르며 대꾸한 히스토리아는, 흘러나오는 담배연기 너머로 회귀자를 살폈다. 연기는 하늘로 솟아올랐지만 히스토리아의 눈은 더욱 가라앉았다.
‘휴이도 휴이지만, 저건 도대체 정체가 뭘까. 보고서에 의하면 스스로 탄탈로스에 들어갔다고 했는데. 군국의 비밀병기도 아니고, 휴이가 만들어낸 무언가도 아니야. 보물의 힘도 놀랍지만 기공은 그보다 더하고. 특히, 마지막에 갑자기 강해졌을 때….’
히스토리아는 회귀자와 맞서 싸웠을 때. 그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하멜른에서부터 그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았던 히스토리아였다. 같은 나이대는 물론이고 군국에서도 적수를 찾기 힘들어서 절창이 직접 나섰던 천재 중의 천재였다. 심지어 젊은 나이에 이치 끝자락에 닿은, 그야말로 군국의 자랑.
그런 그녀가, 훨씬 어려 보이는 회귀자에게 판정패를 당한 것이다. 심지어 마지막 순간엔 보물의 힘이라고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내막을 아는 나야 ‘아, 회귀자니까 그럴 수 있지.’라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군국도 그렇고 히스토리아도 그렇고 머리에 벼락이 친 듯한 충격을 느꼈을 것이다.
‘특히 마지막 순간. 잠깐이지만 머리가 길어지고 몸이 자란 것 같았는데. 뭐지? 봉인? 아니면, 저 나이에 이치에 닿기라도 한 걸까?’
“뭐해? 내밀어.”
회귀자가 천잠사를 한번 팡 치는 것으로 미묘한 탐색전이 끝났다. 히스토리아는 팔을 회귀자 앞으로 느릿하게 내밀었다.
“자, 묶어.”
“팔을 뒤로 붙이고 뒤로 돌아.”
히스토리아는 회귀자의 명령에 순순히 따랐다. 회귀자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천잠사로 히스토리아를 묶었다.
그토록 귀한 물건이라는 천잠사가 히스토리아의 몸 구석구석을 묶었다. 히스토리아는 온몸이 조여드는 와중에도 용케 담배를 문 채로 중얼거렸다.
“…읏. 귀염둥이, 생긴 것에 비해 손속은 거치네.”
“자꾸 귀염둥이니 뭐니 그럴래?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매듭 묶기에 열중하던 회귀자는 별생각 없이 대꾸했다. 반쯤은 탐색으로, 혹은 반쯤은 불편함의 표현으로 히스토리아가 말을 걸었다.
“이제 중등학교 들어갈 나이 같은데. 그 나이면 나와 하늘과 땅 차이지.”
“하늘과 땅 차이는 무슨! 나는 열아홉이거든!”
“열아홉? 정말? 아하. 발육부진이었구나.”
“발육부진? 네가 멀대같이 큰 거겠지!”
‘실제로 발육부진이긴 했지만…! 이제 영양을 충분히 섭취해서 자랐는데. 꼬마 취급당할 정도는 아니잖아!’
그건 그렇다. 히스토리아가 나보다 살짝 작은 정도의 장신일 뿐.
회귀자가 말이 짧고 가방끈이 짧지만 신장까지 짧지는 않다고. 큰 편이 아니긴 하지만.
“말버릇은 고쳐야지, 귀염둥이. 너보다 큰 사람을 향해 해야 할 말은 멀대가 아니라 누나, 란다.”
“누나? 머리라도 맞았어? 뭔 헛소리를.”
‘아. 맞다. 아직 아가르타의 가면이 있어서 남자로 보이겠구나. 나보고 꼬맹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인가.’
이럴 거면 왜 남장을 했을까,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도대체 탄탈로스에 떨어지기 전 회귀자에겐 무슨 바람이 불었던 걸까.
어, 잠깐만. 생각해보니 지금 묶은 모양새가…. 히스토리아가 불편해하는 것도….
내가 넌지시 지적했다.
“셰이 씨, 묶는 방법에서 조금 불순한 의도가 드러나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