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14화 (214/384)

EP.214 이왕 묶을 거라면

혹시 모를 육장성의 돌발행동을 막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꼼꼼히 매듭을 묶던 회귀자는, 내 참견에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넌 왜 또.”

“굳이 앞으로 한 번 더 싸매는 매듭을 할 필요 있어요?”

나는 회귀자가 묶은 매듭을 가리켰다.

지금 천잠사는 뒤쪽으로 겹친 팔을 묶은 것도 모자라 앞쪽까지 둘러져 있다. 혹여나 탈출하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구속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너무 세게 묶어서일까. 히스토리아가 조금 다른 의미로 불편해하고 있었으니.

“무슨 소리야. 내 매듭이 어때서?”

“아니,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데.”

일부러 낯 뜨거운 듯 손부채질을 하며 회귀자를 힐끔거렸다. 회귀자가 엄청 대담하고 노골적인 사람인 것처럼.

그 불순한 시선에 회귀자가 인상을 찌푸릴 때, 나는 손가락을 다 벌린 채 내 눈을 가렸다.

“굳이 리아의 몸매를 강조하는 듯한 포박을 하니까, 이거. 대담함을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동기가 희롱당하는 모습에 우려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하아? 쌍으로 무슨 헛소리를….”

내 손가락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긴 회귀자는, 그제야 한결 객관적인 입장에서 히스토리아를 보았다.

히스토리아는 육장성이다. 어지간한 포박으로는 구속할 수 없다. 쇠사슬도 끊어버리며, 여차하면 제 팔까지 늘이거나 줄일 각오가 되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다만, 그래서일까. 회귀자는 그녀가 남자였다면 눈길이 갔을 부분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조이는 데 집중한 결과 제복 위로 몸매가 한껏 돋보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아.”

‘아, 맞다. 나는 남자로 보이니까. 저 녀석이 보기엔 내가 꼭 변태처럼 보이겠….’

이제야 깨달은 회귀자는 짧게 탄식했다. 히스토리아는 고개만 돌려서 놀리듯이 대꾸했다.

“흐음. 별생각 없었구나. 아무런 생각 없이도 이럴 수 있다니, 생긴 것과는 달리 음흉한데.”

“아니! 포로가 뭘 따지고 있어! 그리고! 애초에 나는 묶느라 네 뒤쪽에만 있어서 몰랐지!”

아무리 말해봐야 변명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타자의 시선으로 자기 모습을 상상한 회귀자는 급히 손을 내밀며 부정했다.

“아무도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나도 이상한 생각은 안 한다. 그냥 내 동창이 처한 부끄러운 꼴을 즐겁게 감상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기회를 준 회귀자에게 감사를.

“본능이겠죠. 이해해요. 하지만 그래도 한때 절친했던 제 친구를 제 앞에서 희롱하는 건 좀, 저에 대한 무례가 아닌가.”

“무례는 무슨 무례야!”

“제가 더 잘 묶을 수 있는데. 먼저 저에게 순번을 줬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그나마 내가 한 게 다행이었네! 나는 너처럼 삿된 생각은 전혀 안 했으니까!”

“아, 맞다. 남자를 좋아하신다고 했.”

“그건 그만 잊으라고!”

정신적 내구도가 한계치에 달한 회귀자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그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총사를 우리 한가운데 아예 풀어놓자고?!”

[셰이.]

그때였다. 컨테이너 안쪽에 가만히 누워있던 새까만 목관에서 어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군국의 공격이 멈춘 사이 잠시 쪽잠을 잔 티르가 드디어 깨어난 것이다.

아군의 등장에 회귀자가 잔뜩 기대했다.

“티르칸쟈카! 네가 한 마디 해줘!”

아직 해가 다 지지 않았기에 티르는 관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어둠을 진동시켜 목소리만을 전했다.

[…남사스러워, 쉬이 볼 수가 없구나. 내 너의 행동에 불만을 표한 적 있어도 행실을 지적한 적은 없으나. 오늘부로 생각을 조금 달리해야겠구나….]

“아니라고!”

다만 전한 목소리도 회귀자의 편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을 뿐.

이리저리 치인 회귀자는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 그래도 풀어둘 수는 없잖아…!”

‘남장하니까 불필요한 오해를 사잖아! 저 자식이 합류하기 전에 한번 옷을 벗어봤어야 했어…! 아니, 차라리 지금 무리해서라도 가슴에 붕대 감은 걸 보여줄까?’

아, 그건 안 되지. 내가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다 아는데도 억지로 놀란 척을 해야 하잖아.

그리고 남장한 상태가 여러모로 이겨 먹기 편하고. 아직 네가 성별을 밝히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놀리는 건 여기까지 하자. 장난감은 아껴야 하는 법이다.

“적당히 풀어줘도 괜찮아요. 사실 셰이 씨 말마따나, 리아는 일부러 잡혔거든요.”

“봐봐!”

내 말에 회귀자는 화색이 되어 히스토리아를 가리켰다가, 삐걱거리며 다시 손가락을 나에게로 돌렸다.

“뭐어? 이미 알고 있었어? 그런데 왜 말 안 했어!”

“알든 모르든. 어쨌건 붙잡은 건 제 성과인데 자꾸 깎아내리잖아요. 기분이 상해서.”

“진짜 그것 때문이었던 거야?! 심지어 틀린 말도 아니었잖아!”

아지마냥 나를 향해 으르렁거린 회귀자는 한층 의기양양해진 채로 히스토리아를 가리켰다.

“그래! 나도 예상하고 있었어! 포로로 잡힌 척하며 잠입해있다가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두진 않을….”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리아는 저와 협상해서, 제가 정보를 건네는 조건으로 잡혀준 거예요.”

티르도 일어났고, 해가 거의 다 졌다. 다음 작전을 위해서는 슬슬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내가 눈짓으로 히스토리아를 보채자, 알아들은 히스토리아는 다 탄 담배를 툭 떨어뜨렸다. 땅에 떨어진 담배를 군화로 짓밟으며 히스토리아는 웃음기를 지우고는 딱딱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모두 나 개인의 의지이며 개인적인 문제. 군국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맹세할게…. 믿을지 안 믿을지는 자유지만.”

“…흥. 개인이라니. 군국답지 않은 말이네.”

지금껏 놀림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회귀자가 불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히스토리아는 회귀자를 향해 귀엽다는 듯이 피식 비웃음을 한 번 날려주고는 대답했다.

“군국이 쫓는 이 남자의 이름은 휴이. 하멜른 중등군사학교의 학생이었어. 휴이는 나와 동창이었고 3년간 같은 수업을 들었지. 그리고….”

히스토리아는 거기까지만 말하고는 반 박자 쉬었다. 딱히 극적인 효과를 노린 건 아니고 자기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였지만, 어쨌건 덕분에 회귀자와 티르가 더욱 집중하게 했다.

그렇게 시선을 모은 뒤, 히스토리아는 치밀어오른 감정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3학년 말 실습, 휴이는 다른 161명의 동기를 죽이고 자살했어. 정확히는, 그렇게 알려졌지.”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잠시 입가를 굳히고 어색하게 바라보았을 무거운 진실. 그러나 세계급으로 놀던 회귀자나 티르는 그리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특히 회귀자는 이죽거리기까지 했다.

“잘못 알려진 거겠네. 그는 여기 살아있고, 하멜른의 희생자들은 모두 강에 빠져서 자살했다고 하니까.”

나름 나를 변호해주기 위한 말이었다.

이전 회차, 군국의 치부를 들추고 레지스탕스와 협력하여 군국을 멸망시켰던 회귀자는 각종 기밀 정보를 꿰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도 알려졌지.”

여러 가지 의미가 축약된 대답에 회귀자는 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나름 기밀인데 어디서 들었나 봐. 네 말이 맞아. 실제로 군국에, 정확히는 하멜른 군사학교에 반기를 들었던 내 동기들은… 최후의 순간, 제 발로 강을 향해 구보했으니. 누가 봐도 자살이었겠지.”

그 말을 맺은 뒤, 히스토리아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른한 눈 속에서, 뜨겁다기보다는 가시처럼 따가운 열망을 담아. 히스토리아 노골적으로 나를 가리키고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오직 그만 알아. 하지만 그도 사라졌지. 다들 하멜른 강 바닥에 빠져 죽었다고 했고, 그러기를 바랐어. 나만 빼고는.”

휙, 고개를 돌린 히스토리아는 회귀자와 티르가 든 관을 향해 차례로 시선을 던졌다.

“나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 이야기를 듣겠어. 자진해서 포로가 된 것도, 군국의 적인 너희에게 기밀을 발설한 것도 다 그 때문. 너희가 듣고 있다면, 휴이도 쉽게 거짓말을 하진 않을 테니.”

듣는 사람이 여럿일수록, 그들의 힘이나 위세가 강할수록 거짓말에 부담이 커진다. 히스토리아가 노리는 건 그것이었다.

다만.

[…참으로 하찮은 이유로구나.]

티르를 비롯하여 내 동료는, 네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나를 믿어주고 있다는 게 문제지.

[휴가 너를 속이기 위해 거짓을 말한다고 해서, 내가 너 대신 휴를 추궁할 것 같으냐? 나름 머리를 쓴 모양이다만 틀렸다. 휴, 말할 것도 없다. 네가 하고픈 대로 하거라.]

히스토리아는 잠깐 당황한 게 틀림없었다. 설마 시조 티르칸쟈카라는 강대한 고대의 존재가 이토록 나를 비호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

포로로 붙잡힌 이상 목숨까지 건 셈이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에 히스토리아는 애써 평온한 척 말했다.

“시조마저도 꼬신 거야, 휴이? 대단해. 어쩌면, 너를 둘러싼 소문이 다 허구는 아니었나 봐?”

[…둘러싼, 소문?]

앗차. 티르의 흥미를 끌어버렸다. 한참 히스토리아를 압박해야 할 티르는 슬그머니 말을 멈추고 모르는 척했다.

[…한낮에 힘을 쓰니 피곤하구나. 너희끼리 결정을 내리거라. 나는 잠시 쉬고 있겠다.]

라고 말하면서 귀는 이쪽을 향해 연 게 괘씸하다.

회귀자는 태연히 대꾸했다.

“말해주기로 약속했다며. 그러면 말해야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거든! 네가 그러니까 꼭 나는 원래 약속을 어길 작정인 것처럼 느껴지잖아!

와중에도 정보 수집에 혈안이 된 회귀자는 이 기회에 히스토리아로부터 이것저것을 듣고자 했다.

“원래 적극적 교전회피가 붙은 우리에게 군국의 추격이 붙은 것도 그 때문이야?”

“나는 몰라. 그건 사령부의 판단이니까. 하지만 아예 관계가 없진 않겠지.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그건 군국에서도 가장 덮고 싶었던 치부였을 테니.”

“고작 백 명 가지고?”

시선이 회귀자에게 모였다. 그 시선을 느낀 회귀자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백 명은 많지. 하지만 군국이잖아? 하루에도 백여 명씩 노역으로 죽어 나가는 군국이라면 이 정도 죽음은 아무 일 아니잖아. 자살이라는 점이 좀 꺼림칙하긴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모를까, 군국의 입장에선 타당한 질문이다. 히스토리아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저주 때문이지.”

“저주라고?”

“이 이상은 나도 잘 몰라. 그러니까, 들어야 해.”

질문을 받아넘긴 히스토리아는 어둡고 탁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대답해야 할 의무는 이제 나에게로 넘어왔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그에게.”

어차피 말하려고 했다. 군국이 우리를 쫓고 있는데, 나와 함께하는 동료들이 이유조차 모르고 있으면 곤란하니까. 단지, 그럴 기회가 없었을 뿐.

자아. 어디부터 말해야 하나.

그때 나를 위로하는 듯한 티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다, 휴. 백 명 언저리가 별거더냐. 갓 흡혈귀가 된 녀석이 아니라면, 흡혈귀 중에는 세자릿수 안 되는 이가 드물다.]

“저기, 티르. 그렇게 말하는 거 제 위로에도, 흡혈귀 포교에도 전혀 도움이 안 되거든요.”

[…그러느냐?]

내가 헛기침하자, 티르도 말을 멈추고는 내 말을 경청할 준비를 했다. 회귀자도 마찬가지였다.

“…머엉.”

어느새 다가온 아지까지, 왠지는 모르지만 귀를 쫑긋거리며 진정한 의미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개까지 듣는 이야기가 되었담.

그중에서도 히스토리아는 특히 형형한 눈빛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양팔이 묶여 있었지만 아마 풀려있어도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날카로운 눈빛하며, 그 이야기를 꼭 알아야겠다는 열망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으니까.

무대는 준비되었고 관객은 자리에 앉았다. 남은 건 내가 이야기를 푸는 것뿐.

입술에 침을 바른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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