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15화 (215/384)

EP.215 과거의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 1

널따란 연병장에 앳된 얼굴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각을 맞추어 선 그들의 좁은 어깨에 두꺼운 통나무가 징검다리처럼 걸쳐져 있다. 허리와 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통나무의 묵직한 무게를 악으로 깡으로 견디며, 시뻘게진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던 이들은, 선두가 호각을 부는 순간 일제히 발을 굴렀다.

-야트막한 동산의 배움의 전당. 오, 하멜른의 품이여.

모래가 흩날리는 땅바닥 위에 작고 깊은 발자국이 다닥다닥 쏟아진다, 자기보다 몇 배나 큰 통나무를 어깨에 걸친 아이들이 제복과 비슷한 교복을 입은 채 구보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주먹을 꼭 쥐고는,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묘한 유대감을 느끼며 소리 질렀다.

-피와 땀을 다 태워 적들을 무찌르고….

그것도 잠시. 몸의 고통은 그 모든 것을 잊게 만든다.

걸음과 함께 호각 소리도 흔들리고, 묵직한 통나무는 아이들을 더욱 찍어눌렀다. 살점이 짓이겨지는 듯한 압력을 더해, 아이들은 폐부를 쥐어 짜내어 더욱 악을 썼다.

-찬란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진격한다….

구보가 끝나갔다. 악쓰던 목소리에서도 서서히 힘이 빠졌다. 거의 한계에 이른 아이들은, 저쪽에서 보이는 결승선을 향해 보조를 맞추어 다가갔다.

-앞으로, 앞으로.

노래 가사에 맞추어 나아가는 그들.

그리고 선두가 결승선을 밟는 것과 동시에 노래가 끝났다.

-군국의 미래로.

“아오! 숨차!”

나는 물고 있던 호각을 벗어던지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땀에 젖은 옷이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이게 피부인지 옷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중등군사학교의 훈련 커리큘럼 중 하나, 통나무 구보.

아직 군사로 무르익지 않은 학생들의 체력과 단합력을 기르기 위해… 라고, 이유야 갖다 붙였으나. 실상은 그냥 나라가 부리는 꼬장에 가깝다.

“단합력은 무슨. 정치질이나 늘겠지.”

사람의 키는 제각각이다. 보폭도, 어깨높이도, 걸음걸이는 물론 숨을 쉬는 간격마저도 무엇하나 맞는 게 없다. 그런데 통나무가 억지로 학생을 누르니 어쩔 수 없이 가진바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호흡을 맞추어야 했다.

만일 호흡이 맞지 않는다면 통나무는 기울어지거나 굴러떨어지고, 누군가는 호된 벌을 받을 테니까.

“아이고, 어깨야. 끄응. 내가 키 안 자라거나 어깨 짝짝이가 되어봐. 다 이 빌어먹을 학교 탓이야….”

짧은 휴식시간 동안 풀썩 주저앉아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땅 위를 가볍게 저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인지는 볼 필요도 없었다. 혹사나 다름없는 훈련에 모두가 땅에 쓰러져 신음하는 동안, 사뿐사뿐 걸어 다닐 수 있는 존재는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히스토리아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내 곁으로 다가왔다. 지쳤다기보단 지루한 표정을 하며.

“리아. 잘 왔다. 와서 내 어깨 좀 주물러 봐아아아아악! 취소! 항복!”

엄청난 압력! 통나무보다도 묵직해!

고통에 휩싸인 내가 무릎을 굽히고 항복 선언을 하자 그제야 히스토리아가 손을 풀었다.

“휴이. 약속 기억하지?”

“무슨 약… 아아아! 기억나! 기억나니까 그만!”

내 어깨를 위협하던 손아귀가 사라졌다. 나는 어깨를 어루만지며 그 손아귀의 주인을 보았다.

흙먼지가 자욱이 일어난 하멜른의 연병장에서 히스토리아만은 이질적이었다. 혼자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고, 허리춤에서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에는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여기서 확인하지는 못하겠지만, 어깨를 걷어보면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새빨갛게 눌린 자국이 있어야 할 어깨는 티 하나 없이 말끔할 테니까.

누가 보면 마치 혼자 구보를 빼먹은 것 같은 모습.

“통나무 구보에 참가해 줘서 고마워. 오늘은 인원이 부족해서 살짝 위험했는데, 덕분에 오늘 낙오자가 없게 되었어!”

“입에 발린 말은 됐어. 그래서. 약속, 지킬 거지?”

“…어, 그게.”

“내가 부족한 인원을 메워주면, 대신 네가 한 시간 동안 내 대련 상대가 된다. 그게 약속이었을 텐데?”

그러나 실은, 오늘의 구보는 그녀 혼자 통나무를 옮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국 최강의 존재는 아닐지라도, 군국 최강의 학생인 히스토리아.

태어날 때부터 기공에 남다른 소질이 있던 그녀는 열여덟 나이에 이미 건곤을 이루고 감마저 잡았다. 힘은 벌써 영관급 장교를 넘어 장성과 비견되는 정도였다. 아직 빛이 없기에 별이 반짝이지 않을 뿐.

통나무를 앉은 자리에서 들어 올릴 수 있는 그녀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구보에 참가한 건 내가 내건 조건 때문이었다.

“아아. 또 뒤지게 얻어맞겠네.”

“유난 부리지 마. 어차피 서로 기공 안 쓰는 조건이잖아.”

“기공 안 쓴 채로 얻어맞는다는 점은 다를 바 없잖아. 차라리 기공 잘 쓰는 다른 사람이랑 하는 건 어때?”

“싫어. 다른 녀석들은 제힘에 휘둘리고. 교관들은 몸을 사리고. 그나마 나와 수를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너뿐이야.”

그건 수를 나누는 게 아니라, 독심술로 미리 읽고 피하는 거다.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히스토리아가 흥을 내기 시작하면 사정없이 얻어맞는다.

하지만 어쩌랴. 약속은 약속인 것을.

“에휴. 알았어. 오늘은 좀 맞지 뭐. 그렇게 때리고 싶다면야.”

“애초에, 네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진심으로 기공을 익혔다면. 충분히 내 상대가 되었을 거 아니야.”

“그건 아닐걸.”

독심술이라는 사기적인 기술에, 저쪽이 기공을 쓰지 않는다는 조건으로도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걸 보면 재능의 차이가 극심하다. 거기에 기공 조금 익힌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진 않다.

내 미적지근한 태도가 불만이었던 히스토리아는 말 나온 김에 가진 불평을 토해냈다.

“너도 이상해. 왜 통나무 구보 같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거야?”

“쓸데없다니. 통나무 구보가 협동심 함양과 체력 단련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데.”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말고, 잘 들어. 휴이, 다시 한번 말하는데.”

가만히 앉은 나를 타이르듯, 히스토리아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수석인 네가, 저들을 위해 희생할 필요 없어.”

머리를 거칠게 넘긴 히스토리아는 모두를 둘러보았다. 나에게 향할 때와는 조금 다른, 길가에 있는 돌멩이를 바라볼 때의 무심한 눈길.

가장 잘 드러나는 감정은 거슬림이었다.

하멜른에 입학한 뒤, 한없이 나약하고 어린 다른 동기들은 히스토리아의 발목을 잡는 존재나 다름이 없었다. 그나마 대등한 친구는 나 정도.

그리고 내가 반장 역할을 충실히 하는 동안, 히스토리아는 내가 그들 때문에 제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일까. 히스토리아는 나를 향한 듯하면서도 모두에게 들리도록 말했다.

“토끼 무리를 이끌어봤자 우두머리 토끼가 될 뿐. 낙오자, 혹은 낙오 예정자와 어울려봐야 네 발목만 잡아. 제발, 부탁인데 시간을 아껴, 휴이.”

아이들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누구도 히스토리아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 감정은 온전히 자기 것이건만, 그들 중 누구도 히스토리아와 눈을 마주치지조차 못했다.

이만 악물고 고개를 돌릴 뿐.

히스토리아는 그들을 비웃지도 않고 흘려보냈기에, 다른 동기들이 갖는 열패감은 더욱 컸다.

“용기도, 기백도 없는 낙오 예정자보다는 네 시간이 훨씬 더 소중해. 제발 쓸데없는 것에 시선을 돌리지 마.”

한 명의 강자가 천 명을 압도한다. 히스토리아는 그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예시였다. 압도적인 강자.

말 그대로. 히스토리아는 합동 전투 훈련 때… 딱 한 사람을 제외한, 하멜른의 모든 학생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적 있기에.

…딱 한 사람을 제외하고.

구보에 참여도 하지 않은 채로 그늘에서 책을 읽던 소년이, 히스토리아의 목소리를 듣고는 인상을 팍 구기며 다가왔다.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살아라.”

새빨간 머리카락을 지닌, 학구적인 동시에 신경질적인 인상의 소년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는 두꺼운 책을 팡 소리 나게 덮고는 자기 이마를 톡톡 두들겼다.

“아직도 모르겠냐? 세상은 다 때려 부순다고 능사가 아니거든. 수석이자, 반장이자, 모든 학생의 모범이 되는 휴이는 지금 군국에게 잘 보이기 위해 점수를 따고 있는 거라고.”

그의 갑작스런 등장에 히스토리아는 올 게 왔다는 듯 하,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한테 안 물어봤어, 란카르트.”

“이미지 관리에 열심이신 수석 님 대신 차석인 내가 대신 대답해주는 거 아니야. 새겨들어.”

홱. 그의 손가락이 교관들을 향했다. 단상 위에서 통나무 구보를 명령했던 교관들은 히스토리아와 내 쪽을 보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상의하고 있었다.

이쪽에게 들리지 않도록 소리 죽여 속삭이는 교관을 흘긋 본 란카르트는 이죽거리며 말했다.

“욕심쟁이 수석 님은 말이다. 양손잡이가 되실 생각이라고. 너나 나처럼 이질적인 왼손잡이는 물론이고, 저 평범한 오른손잡이 놈들마저 잘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교관에게 보이고자 한다, 이 말씀이야.”

기공으로는 히스토리아가 있다면, 마법에는 란카르트가 있다. 정확히 히스토리아의 반대편 극단에 선 인물. 군국 유일의 신비.

란카르트 스펜드라이.

그는 고유마도를 각성한 마법사인 동시에 마학자이며, 소속만 하멜른일 뿐 벌써 마도장교를 이끌고 있는 불세출의 천재였다. 교관조차도 그를 대하기 어려워할 정도였으니.

물론 히스토리아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오른손잡이니 왼손잡이니. 또 자기만 아는 말 만들어내서 쓰네. 란카르트, 그렇게 살면 불편하지 않니?”

“잡년이. 자기 무지를 인정 못 하고 논점을 흐리긴.”

기공의 천재와 마법의 천재. 군국의 미래를 이끌어나가리라고 기대받는 쌍두마차…는, 서로만 보면 으르렁거렸다. 히스토리아는 마침 손에 쥐고 있던 수통을 우그러뜨리며 란카르트를 노려보았다.

“휴이가 너처럼 타산적인 성적주의자인 줄 알아?”

“아니. 나보다 훨씬 대단한 성적주의자지.”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다 그런 줄 아네.”

“콩깍지가 쓰인 너보다야 훨씬 객관적이지 않을까.”

란카르트는 히스토리아의 날카로운 기세를 받고도 태연히 걸어왔다. 사정거리 안에 거리낌 없이 발을 들이민 그는 조롱의 의미로 한숨을 내쉬었다.

“군국에 기공사는 많아. 멧돼지, 네년이 아무리 강해봤자 오장성 자리 하나 꿰차는 게 한계겠지. 너는 아주 중요하겠지만, 그래봤자 중요한 부품일 뿐이야. 군국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잘 돌아가게 만들겠지만, 네가 아니어도 성능의 차이만 있을 뿐 달라지는 건 없겠지.”

세상을 비관적으로, 그리고 계산적으로 바라본다면 란카르트와 비슷한 관점을 갖게 될 것이다. 그에게 있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설명할 수 있는 현상에 불과하며,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었으니.

마법사보다도 마법사다운 사고방식을 지닌 그는, 동류를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에 비해 휴이는 독특한 위치에 올라섰지. 마법은 나보다 별로. 기공은 너보다 별로… 하지만 모든 분야에 두루 능통해. 인원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고. 아는 게 많아서 떨거지들한테도 인기 있고. 너나 나처럼 특이한 케이스와도 대화가 통하지. 이런 인재는 휴이가 유일해.”

“…네 말은, 다 계산적인 행동이라 이거야?”

“그래. 휴이는 사령부, 그 자체가 될 셈이다.”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란카르트는 다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누가 보면 꼭 그가 독심술사인 줄 알겠네.

그에 맞서 히스토리아는 자기 귀를 후비적거리며 대꾸했다.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말이네.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 같은 줄 알아서 그것만 보이나 보지. 네가 휴이와 직접 맞대봤으면 알 텐데.”

“아아. 머리 굳은 년이 이해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어.”

“…근데 이 열등생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비를 걸지? 죽고 싶어?”

히스토리아는 구겨진 수통을 란카르트를 향해 냅다 던졌다. 파아앙, 파공성과 함께 수통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사람이 맞는다면 그대로 즉사할 위력이다.

그러나 히스토리아는 물론 란카르트도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수통은 공중에서 누가 잡아챈 것처럼 휙 비틀어지더니, 근처 땅을 박살 내며 틀어박혔다.

공격이 닿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듯, 란카르트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야만적이긴. 이래서 멍청이들과는 대화도 나누기 싫어.”

“…마법 없으면 죽도 밥도 아닌 주제에.”

언제나처럼 으르렁거리는 둘. 하지만 진짜 싸움까지 이어진 적은 없다. 내가 언제나 둘 사이를 중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나도 피곤하고. 계속 있으면 히스토리아에게 잡혀서 얻어맞겠다 싶어서. 둘이 싸우도록 내버려 두고는 냉큼 자리에서 벗어났다. 저 둘은 내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연병장을 걷는다. 바스락거리는 모래 사이, 통나무 구보를 끝내고 힘겹게 몸을 추스르는 아이들 틈에서 다양한 감정이 느껴진다.

고통, 아픔, 질시, 후회, 두려움, 열등감, 그리고 절망.

그리고 나에 대한 원망.

빛나는 재능을 가진 둘과는 달리, 나의 재능은 애매한 편.

란카르트와 히스토리아는 각자 마법이나 기공이라는 분야에서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아득히 높아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으나, 나는 고작 계단 한두 걸음 앞서갈 뿐.

자연재해를 원망하는 이들은 없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존재에게는 인간적인 감정을 품지 못하기 마련이다.

내가 비록 수석일지라도, 코앞에서 아득바득 앞서나가는 내가 더욱 원망스럽겠지.

어두컴컴한 감정이 나를 향한다. 차마 증오할 수 없는 밤하늘의 별 대신, 감히 그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평범한 나를 원망한다.

나는 거무튀튀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 땅을 지나, 나를 부르는 교관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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