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16화 (216/384)

EP.216 과거의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 2

히스토리아는 나를 낙오자 하나조차 쉽게 버리지 못하는 착한 호구로 생각하고 있다.

란카르트는 내가 그마저도 계산하여 행동하고 있는 냉혈한이라 여겼다.

둘은 알까. 그들이 나에게서 보고 있는 건, 그들이 보고 싶은 세상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면 나는 소망을 비추는 거울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일까? 호구? 아니면 냉혈한?

글쎄. 굳이 따지자면 나는 둘 다라고 생각한다.

원래부터 나는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내가 독심술사라서…가 아마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게 목숨 바쳐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라면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싶어진다.

그게 사탕을 자기만의 비밀장소에 숨겨놓고 모른 척하는 어린아이라면,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치고 싶어진다.

그게 과거의 자신을 투영하여 기대를 거는 행위라면, 그에 부응하고 싶어진다.

…상대가 나보다 어른일지라도.

“히스토리아가 통나무 구보에 참여했다, 라.”

총교관 니콜라스의 앞에 불려간 나는, 팔을 뒤쪽으로 모은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예. 니콜라스 총교관님.”

“잘했다, 휴이.”

하멜른의 총교관, 니콜라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히스토리아… 그 아이. 정말 축복받은 인재야. 이 하멜른의, 그리고 나아가 군국의 행운이다. 저 나이에 감 기공을 익히고 독자적인 무류를 만들어가는 재능은 저 제국에서도 손에 꼽을 터.”

그의 상념이 자연스레 란카르트에게로 옮겨갔다. 입가에 뜬 미소에 더욱 큰 미소가 덧칠해졌다.

“란카르트. 그 녀석도 마찬가지. 고유마도가 사람마다 다르다지만, 그것이 품은 심의(心意)에 따라 규모가 달라진다. 란카르트의 고유마도는 최소 전략급. 혼자 전황을 바꿀 정도. 혹여나 계기만 있다면… 마도사가 되는 것도 꿈이 아니다.”

총교관인 그보다 훨씬 위대해질 두 학생을 두고도 니콜라스의 마음속에는 오직 기쁨뿐이었다.

니콜라스 대령. 학생에게 엄격하면서도 다정하고, 군국에 충실하며 제 몸을 헌신하는 군인. 전설적인 군인은 아닐지언정 뛰어난 교육자의 자질을 가진 장교였다. 군국의 인선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우며 나라를 사랑하는 군인은 군국의 찬란한 미래를 그리며 기뻐했다.

“나는 너를 믿는다, 휴이. 히스토리아나 란카르트. 둘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너뿐이니.”

“…저는 히스토리아에게 지시를 내릴 수 없습니다. 부탁만 할 뿐이에요.”

“무슨 상관이겠나. 말대로 행동해주면 그게 지시고, 부탁이고, 명령이지.”

다만, 그는 어디까지나 군인이었기에. 이미 긁어서 꽝이 나온 복권에게까지 마음을 쓰지는 않는다.

“반장 역할은 그만해도 된다. 어차피 네가 그들에게 배울 건 없으니까.”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제 3학년이잖습니까. 이왕 맡은 김에 끝까지 하겠습니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지. 그때 너를 말리지 못한 게 내 천추의 한이다.”

“하하.”

애매하게 웃어넘기는 나를, 니콜라스는 안타까운 듯 바라보았다.

“내 생각에 너는 너무 많은 일을 떠맡으려고 한다. 기공, 마법, 탄도학, 전술, 신비 해체, 연금술, 의술, 제련…. 재능을 찾으려고 이것저것 건드려보았고, 나름의 분야에서 성과를 거뒀으나. 무엇도 대성하지는 못했지.”

성과를 거둔 게 아니다. 그냥 독심술로 읽으면서 요지를 파악하고 대강 따라갔을 뿐. 그러니 대성하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그걸 모르는 니콜라스는 내가 시간과 재능을 낭비했다고 여겼다.

“너는 너무 뛰어났다. 스스로 알아서 잘하겠지, 그리 여기고 잠시 관심을 끊었지. 그게 내 한이고, 후회다. 아직 네가 어리고, 자기 재능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어.”

절절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여섯 개를 맞추어야 하는 복권이 자기 실수로 마지막 자리가 틀렸을 때, 그때 느낄 법한 참담하고 망가진 감정.

사실, 나란 인간이 원래부터 무언가를 대성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던 나지만, 그의 절실한 감정을 읽고도 냉소를 지을 수는 없었다.

“다들 그런 거죠. 그게 저 혼자에게 찾아온 일은 아닙니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할 거예요.”

“…아아. 그렇지. 다른 아이들.”

니콜라스가 수긍한 건 그나마 그가 교육자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군인이었다면 논점을 흐리지 말라며 윽박질렀을 것이다.

아니, 1학년이 끝나기도 전. 억지로라도 나를 그들과 떨어뜨려 놨겠지.

‘휴이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과 시간을 많이 쏟는 성격이다. 히스토리아나 란카르트와 친해진 건 그 덕분이나, 부작용도 있어. 일반병이 될 이에게도 관심을 주지. 혹시 또다른 히스토리아나 란카르트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을까 싶어 놔두었지만, 애초에 휴이를 그들과 같이 두면 안 되었어. 처음부터 떨어뜨려 놓았다면.’

버려진 복권조차도 군국의 자원이라 생각하고 아끼는 니콜라스는 그나마 교육자에 가장 가까웠다. 그래봤자 군국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니콜라스는 참담한 심경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그래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에게는 고등사관학교가 남아있으니까. 거기서는 나보다 더 뛰어난 교관을 만날 것이다.”

“총교관님보다 높은 계급을 가진 교관은 만나겠지만, 더 좋은 스승을 찾기는 어려울 거예요.”

“인사치레는 필요 없다. 나는 이미 실패했으니까.”

자조적으로 말했으나 내 아부에 조금이나마 기분이 좋아진 게 틀림없었다. 나는 경례를 올려붙이고는 뒤를 돌아서 나섰다.

내가 밖으로 나서며 문을 닫자, 안쪽 홀로 남은 니콜라스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자기 서류 무더기 속에 담겨있던 기밀문서를 꺼냈다. 한층 착잡한 얼굴로 문서를 읽던 그는 눈을 질끈 감고는 중얼거렸다.

“…어쩌면, 내 실수를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동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저만큼 크다면….”

니콜라스는 내가 문밖에서 독심술로 읽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기밀문서의 글자를 읽어내려갔다.

하멜른은 과거 왕국이었던 시절의 아카데미를 기반으로 지어졌다. 그 시절의 자료도 그대로 남아있어, 신비 해체자나 군국 연구진이 자주 방문하곤 했다.

그중에서 누군가 건넨 자료에는 이런 게 있었다. 원래는 폐기해야 마땅하나, 니콜라스는 그를 만류하며 그 자료를 받아들였다.

-1종 금기, 탐식.

니콜라스의 눈이 점차 깊어갔다.

“아, 상쾌하다!”

“끄으으으으….”

히스토리아는 상쾌한 얼굴로 허리를 쭈욱 폈다. 그에 반해, 연신 두들겨 맞은 나는 거센 신음을 흘리며 땅에 엎드려 있었다. 팔과 다리를 수도 없이 얻어맞아서 아프다.

친구가 고통에 신음하고 있건만, 내 처참한 꼴에도 히스토리아는 여전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랜만에 움직이니 얼마나 좋아. 안 그래, 휴이?”

“두들겨 맞는 쪽이 되면… 너도 별로 기분은 안 좋을걸….”

“네가 나를 때릴 만큼 강해진다면 얼마든지 맞아줄게.”

“안 맞겠다는 말을 잘도 돌려서 하는구나….”

끄응. 작게 신음하고 몸을 돌렸다. 히스토리아는 흐른 땀을 닦으며 즐겁게 웃었다.

히스토리아가 기공을 쓰지 않은 대련이었다. 당연히 이 경우 보다 체격이 큰 내가 유리…할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기공을 익힌 자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 처음엔 한껏 휘둘리던 육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그 힘에 적응해간다. 결국은 일반인의 육신보다도 훨씬 강건한 몸이 완성된다.

그러니까, 지금 히스토리아는 내가 기공을 쓰더라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강해진 상태라는 거다!

“왜 나랑 대련하는 거야… 차석인 스프링필드나 전투부 교관도 있잖아….”

“재미가 없어.”

히스토리아는 아직도 기운이 남았는지 긴 팔과 다리를 쭉쭉 뻗어 스트레칭하며 대답했다.

“기공을 쓰면 내가 이기잖아.”

“거참 부럽네. 안 쓰면?”

“안 쓰고 하자니, 저쪽은 힘으로 찍어누르려고 하지. 수읽기나 허점 찌르기는 생각도 하지 않아. 하등의 도움이 안 돼.”

“배부른 소리…. 내가 너만 한 힘이 있었으면 바로 찍어눌렀는데.”

“얼마든지 찍어 눌러도 되니까, 어디서 기력 좀 길러와 봐.”

“말처럼 됐으면 이미 길렀지.”

한탄하며 품 안에서 종이갑을 꺼냈다. 달칵하고 위쪽을 젖히니, 동그랗게 말린 마력초가 딱 한 개비 남아있었다.

한 개비? 이제는 마력초마저도 나를 몰아붙이네.

마력초는 3레벨 사치 물품. 사관학생도 아니고 일개 군사학교 학생이 구할 수 없는 물건이다. 하지만 뭐 어떠랴. 마력초는 사람이나 때를 구분하지 않는다. 입에 물고 불꽃만 붙여주면 달콤한 연기는 상황과 때를 가리지 않고 속삭이며 나를 위로한다.

내가 종이 속 연기와 밀회를 나누고 있을 무렵, 히스토리아가 다가왔다.

“마력초? 너 그런 거 피우니?”

히스토리아가 잔소리하기 전에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말을 걸었다.

“리아. 만일 나에게 기력이나 마력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다면 어떨까?”

“그랬다면 더할 나위 없지.”

기공 이야기가 나오자 히스토리아는 연기도 신경 쓰지 않고 나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네 기공 운용은 정말 자연스러워. 가진 힘을 완벽히 다 소화해내고 있잖아. 기공에 대한 이해야 네 필기 점수를 보면 나오지.”

“그거야 내 기력이 한 톨이니까 그렇지. 욕조를 움직이는 것보다 한 컵 다루는 게 쉬우니.”

“거짓말. 내가 넘치는 기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칼과 창을 부숴 먹고 있을 때, 총으로 밸런스나 잡아보라며 권했던 것도 너잖아. 네가 이래도 이해가 부족하다고?”

아니, 니콜라스 총교관이 생각은 떠올렸지만 총에 대한 안 좋은 인식 때문에 그만둔 걸, 독심술로 읽은 내가 가로채서 말했을 뿐인데.

그걸 사실대로 알려줄 수는 없었기에 나는 말을 흐렸다.

“…그 탓에 맨날 나한테만 대련하자고 오지. 내 일생일대의 실책이다.”

“후후. 나에게는 일생일대의 행운이었고.”

맑게 미소 짓는 그녀에게서는 오직 즐거움만이 느껴졌다. 이미 무언가를 이룩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갖고, 찬란한 미래가 기다리는 그녀는 앞만 바라보면 되었기에.

히스토리아에게 부족한 건 너무 멀리 나아갔을 때 나란히 걸어줄 친구뿐이었으나, 란카르트나 내가 있는 지금은 그마저도 충족되었다.

그녀는 나아갈 일만 남았다.

히스토리아는.

“그런데 갑자기 왜 궁상을. 잠깐. 너, 설마?”

‘아까 휴이는 니콜라스에게 불려갔었지? 왜? 설마?’

감도 좋아. 무언가를 깨달은 히스토리아는 다급히 몸을 이쪽으로 들이밀며 내 얼굴을 살폈다.

“혹시 니콜라스가, 혹은 군국 사령부에서 네 기력을 늘려주겠다고 하면, 앞뒤 재지 말고 수락해, 휴이!”

“기력을 어떻게 늘려.”

“보약이나 영단 같은 거를 먹으면 되지!”

“말이 쉽지. 그걸 어디서 구해? 설사 구하더라도 일개 학생인 나를 줄까? 주더라도 기력이 는다는 보장이 없는데.”

“아냐. 내 생각엔 가능성 있어! 군국에 눈이 달렸다면 너를 그냥 두고 볼 리 없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군국이 그토록 특별취급할 거라면 나라 이름을 군국이라 짓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눈을 반짝이는 히스토리아의 얼굴은 너무나도 희망차 보여서 차마 꺾을 수가 없었다.

미안. 히스토리아. 군국이 나를 위해 준비한 건 영단이나 보약 같은 게 아니야.

그보다 더욱 질이 나쁜 무언가지.

딱히 나 하나만을 위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에휴. 푸우우.”

할 말이 없어서 담배 연기를 히스토리아 얼굴에다 대고 뿜었다. 연기를 들이켠 히스토리아는 코를 찌르는 향에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콜록. 거의 독 아니야? 도대체 이딴 건 왜 피는 거야?”

“후우. 너는 모른다. 이게, 인생을 살다 보면 가끔은 독이라도 입에 털어 넣고 싶은 날이 오는 법이야. 너는 이런 거 피우지 마라.”

“나랑 동갑인 게 허세는.”

쯧쯧. 겪어보지 못한 이만 이걸 허세라고 생각하지. 나는 마력초를 입에서 놓고는 휘적휘적 흔들었다. 그게 마치 결계라도 되는 것마냥, 히스토리아는 고개만 이리저리 돌려서 피했다.

“허세처럼 보여? 그러면 한 번 펴 보든가.”

“내가 못 필 것 같아?”

탁. 히스토리아는 재빠르게 내 손에서 담배를 낚아챘다. 반쯤 타 들어간 담배를 보며 잠깐 고민하던 히스토리아는, 나와 내 입술을 번갈아 보다가 앙하고 크게 물었다. 입에 담배를 문 순간 히스토리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누가 보면 훈연하는 줄 알겠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뺏어가란다고 진짜 뺏어가네.”

“콜록. 네가, 하라, 콜록!”

“야, 다 탄다. 못 필 것 같으면 다시 돌려줘. 그거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얻은 거란 말이야.”

“흡, 콜록. 내가 줄, 콜록!”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으면서도 히스토리아는 계속 내 손을 피해 달아났다. 담배 한 개비가 다 타 들어갈 때까지.

저게 마지막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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