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19화 (219/384)

EP.219 과거의 이야기,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 5

이러쿵저러쿵 일이 벌어진 끝에, 결론만 간단하게 말해서.

나는 나무 덩굴로 만든 밧줄로 꽁꽁 묶였다.

아이들의 얼굴에 떠오른 경악과 분노가 날카로운 창처럼 나를 찔렀다. 그들은 무기까지 치켜든 채로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하며 힘을 합쳐 싸우고 있었는데. 그때의 우정과 신뢰는 다 어디 갔는지. 버는 건 힘들어도 탕진하긴 쉽구나.

뭐, 당연한 일이다.

“아이고, 들켜버렸네.”

이 기지 한복판에 온갖 짐승을 불러들이는 초대형 페로몬 미끼가 숨겨져 있고, 그게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질 예정이었으며, 그랬다간 불청객 인간 무리를 경계하던 짐승들이 캠프를 쓸어버릴 예정이란 것도.

전부 들켜버렸으니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

시아티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혼란에 빠진 그녀를 향해 묶인 채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왜 그래. 다들 알잖아?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수 없는 처지인데?”

스스로 도달한 답은 그 무엇보다 확실해서, 굳이 설득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들이 찾아낸 단서와 엮은 논리, 그리고 서서히 쌓아온 의구심이 하나의 진실로 귀결되니까.

어제 나와 캐러팔드가 어디 갔는지 궁금해했던 첸토는 우리 흔적을 되짚다가 표류물을 잡아두던 밧줄을 발견했다. 아이들은 그 밧줄의 존재를 눈치채고는 이 상황 또한 시험이라 지레짐작하며 기뻐했다. 긴급상황이 아니라 시험의 일부라면, 통제에서 벗어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제멋대로 안심하고는 한층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 와중 캐러팔드는 팀을 꾸려 캠프를 뒤졌다. 캠프의 지도를 그린 그는 이곳이 무언가 마법진의 형태와 비슷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것이 퍼즐, 혹은 시험 문제라고 생각한 아이들이 끙끙거리는 동안, 시아티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 식량과 식수 등을 구해왔다.

캠프 아래에는 반석이 있었고, 얕게 난 홈을 따라 기이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마법진에 다들 머리를 싸매며 고민할 무렵.

마침 캠프 텐트 중 하나에서 그 한복판에서 새까만 상자가 나타났다. 그게 단서라고 추측한 아이들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짐승을 부르는 미끼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미끼에 가득 묻어있던 페로몬이 퍼졌다. 사냥꾼 부모를 둔 아이가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급히 닫으라고 외쳤으나 이미 늦었다.

저 멀리에서 짐승이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군사 훈련을 받은 백오십여 명의 학생들은 나름 적절하게 대처를 했으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적절한 대처.

이것으로 짐승이 지금까지 인간 무리를 습격하지 않은 건, 지금껏 살아남은 짐승들의 타고난 조심성 때문이라는 게 증명되었다.

뿔 달린 사슴이 잔뜩 흥분해서는 침을 튀기며 캠프를 종으로 관통했다. 기병의 돌격에 비견되는 공격이었다. 집채만 한 사슴은 머리에 나무 두 그루를 매달고 휘젓는 거인 같았고, 올가미 하나를 당기는데 열 명이 붙어야 했다.

그 뒤를 따라서 조심스레 배회하던 늑대가 덮쳤다. 은밀한 사냥꾼의 습격을 알게 된 건 희생자가 생긴 뒤였다.

싸움의 기미를 발견한 까마귀와 독수리가 저 멀리에서 배회했다.

열일곱이 죽었다.

미리 함정을 만들어두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이 죽었을 것이다.

어쨌든 인간은 그들의 저력을 발휘했다. 하나 된 유대, 적절한 지시, 그리고 처절한 사투 끝에 짐승놈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소중한 친구가 죽었으나 슬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지친 아이들은 바닥에 앉은 채, 죽은 아이들에게서 흐르는 피가 흘러가는 모습을 경악한 채 지켜보았다.

피는 음각된 홈을 따라 주르륵 흘러… 거대한 마법진을 빛내고는 스며들었다.

땅 아래 숨어있었다면 보이지 않았겠지만, 마침 조사하느라 반석을 드러냈기에 보였던 비밀이었다.

모두가 까닭 모를 불길함을 느끼는 와중, 누군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부상과 감염의 위험이 있으니, 옷을 벗어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아이들은 수긍했고, 의복 패킷을 해제했다.

그리고 내 등에서 불길하게 빛나는 새빨간 자국을 발견했다. 의미하는 바가 너무 명확해서 차마 눈을 돌릴 수조차 없는 그 흔적을.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딴…, 니콜라스가, 우리를 희생양으로….”

모두가 일련의 사태를 이해했다. 나라가 그들을 버리고, 믿었던 리더가 사실 양의 탈을 쓴 늑대이며, 어제까지 웃고 지내던 친구가 팔다리 기괴하게 비틀린 채 죽어있고, 그들도 머지않아 그렇게 되리라는 사실을.

그때, 누군가 그들의 죽음을 취해 힘을 얻으리라는 것을.

“죽여버려!”

누군가 외쳤다. 사슴을 막다가 팔이 부러져 붕대를 감은 아이였다. 그는 눈가가 붉게 충혈된 채 나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어차피 여기는 우리를 막을 교관도 없어! 죽여서 어딘가에 묻어버려!”

“그, 그러면 뭐라고 설명해?”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졌다고 말하면 그만이잖아!”

“그래! 이건 정당방위야!”

사납게 외치는 이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당연한 판단이야. 이 와중에 내통자라고 예상되는 나를 살려두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지. 안 그래?”

“포로면 포로답게 조용히 해, 휴이.”

새로이 학생들의 대표가 된 시아티와 캐러팔드는 혼란에 빠진 아이들을 진정시켰다. 특히 나에게 분노한 시아티는 입술을 꾹 다물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휴이. 나는 너를 좋아하진 않았지만, 최소한 네가 다른 둘보다는 인간적이라고 여겼어.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을 잘못 봤네.”

“하필 비교해도 그 둘과 비교하냐. 그래, 시아티. 이 끔찍하고 비인간적인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 처죽이고 싶지만.”

이제 그녀가 설득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닌 다른 아이들이었기에, 시아티는 고개를 돌려서 외쳤다.

“여기서 죽여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우리는 너를 묶어서 배에 실은 뒤 하멜른에 가서 따질 거야. 니콜라스가 애지중지 감싸고 도는 너라면 좋은 교섭 재료가 되겠지.”

“교섭?”

“그래! 금기는 성황청이 눈에 불을 켜고 잡으려는 행위야. 비밀을 지키는 대가로 무언가를 요구할 수 있을….”

“푸하하하!”

나는 묶여있는 채로 크게 웃었다. 폭소가 이어지자 시아티를 비롯한 아이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충분히 시선을 끈 나는 웃음을 뚝 그치고는 말했다.

“시아티. 스스로도 믿지 못하는 말 그만둬. 니콜라스는 너희를 다 죽이고 금기를 일으키려고 했는데, 너희가 그 사실을 간파해서 돌아간다고 아하 미안하구나 상으로 3레벨을 주겠다, 이럴 것 같아?”

그럴 리가. 그게 되었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겠지.

“아니, 다 죽이겠지. 금기와 함께 너희들까지 묻으려고, 조금 더 강경한 수단을 쓸 거야.”

“그러면, 어쩌라고! 여기서 너에게 죽어줘?!”

“무엇을 할지는 너희 선택이지만, 이왕 할 거라면 최소한 너 자신이 믿는 바를 따라. 네 선택은 현실성은커녕 당장 현실조차 부정하는 망상에 불과해.”

“잘난 듯이 말하긴…!”

시아티는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멱살을 잡았다. 묶인 채로 목이 이끌리니 아파서 켁켁거렸으나, 그녀는 나의 상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했다.

“너를 죽여버릴 거야! 네가 잘났으면 다야?! 네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서, 우리 운명을 결정지을 수는 없어…! 나는, 우리는! 네 먹이가 되기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해온 게 아니라고!”

말을 할수록 거센 외침은 점차 흐느낌으로 젖어 들었다. 멱살이 늘어날 듯 붙잡은 시아티는 투명한 눈물을 흘리며 나를 원망했다.

“왜? 어차피 너는, 이미 사관학교에 갈 수 있잖아!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3레벨에 이미 도달했으면서…! 더 큰 것을 원했어? 그보다 더 뛰어나지고 싶었어? 우리를 다 죽여서라도?”

한껏 원망을 토해낸 뒤 남은 건 시꺼멓게 눌어붙은 감정이었다. 마음을 죽인 듯한 어두컴컴한 눈이 나를 올려다본다.

“그러면 너도… 죽어. 그게 공평하잖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아, 이건 위험하다. 이대로 계속 있다간 진짜 휩쓸려버린다.

금기가 괜히 금기일까. 지금까지 쌓아왔던 인간에 대한 믿음 그 자체를 부정하기에 금기.

그 부정당한 쪽이 된 시아티는 이제 완전히 증오와 절망에 사로잡혀 주먹을 쥐었다.

…그래서, 히스토리아.

지금이 나를 구해줄 마지막 기회야. 만일 네가 구해주지 않으면.

나는.

졸업 실습을 떠난 교육생들이 조난당했단 사실은 순식간에 전해졌다. 그 사태에 깊은 책임을 통감한 니콜라스는 자기 측근만 데리고 먼저 하멜른 중등군사학교를 뛰쳐나갔다. 본대는 구조선에 물자를 싣고 니콜라스를 뒤따르기로 했다.

‘도와달라고 하더니. 진짜 무슨 일이 있을 줄이야. 설마 이것까지 예견한 거야?’

히스토리아는 약속을 잊지 않았다. 그렇기에 졸업 실습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안 순간, 총 한 자루를 등에 메고 하멜른 강까지 뛰어가 나룻배 하나를 빌렸다.

그녀가 노를 저으면 강에 양옆으로 갈라지는 이상한 파도가 쳤다. 물을 밀어내는 게 아니라, 수면을 힘으로 가라앉혀 경사를 만들고 그 위를 미끄러지는 듯한 노질이었다.

나룻배는 강 위를 말 그대로 미끄러지며 쑥쑥 나아갔다. 히스토리아는 순식간에 표류물이 가득한 강가에 도착하여, 몸을 숨기고 상황을 살폈다.

그녀가 목격한 광경은… 기묘했다.

‘휴이? 왜 묶여있는 거야? 애들 꼴은 뭐고?’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는 상황. 그 와중 소년은 교수대에 매달린 죄수처럼, 혹은 십자가에 꿰어 죽은 처음의 성녀처럼. 모두의 우러름 속에서 구속당해있었다.

그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은 절망과 분노 속에서 무언가를 성토하는 듯했다.

뜻밖의 사태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히스토리아는 일단 총을 꺼내들었다.

목표는 나.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시아티.

‘시아티. 네가 왜 휴이를 붙잡은 건지는 몰라. 하지만, 그를 죽이려 든다면 반드시 막겠어.’

저쪽의 의도를 파악하기 전까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편이 좋다. 별거 아닌 일이라면 그냥 넘어가게 될 것이며, 위험한 상황이라면 히스토리아가 등장했을 때 더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은신술이나 잠입술처럼 조용하고 은밀한 기술은 히스토리아의 요란한 기공에는 맞지 않는다. 대신, 히스토리아는 시야가 닿지 않는 사각에서 총을 겨누었다.

총의 가늠쇠로 시아티와 나를 본다. 나는 아직 무사하고, 심지어 묶여있으면서도 입가에는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다.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얼굴에 히스토리아는 긴장이 다 풀릴 뻔했지만, 다시 호흡을 가라앉히고 조준했다.

‘소리는 잘 들리지 않네. 대충 예상하건대, 누가 죽어서 휴이를 원망하는 모양인데….’

아무리 내가 리더라고 한들, 그래도 고작 그거 가지고 사람을 저리 묶어놓을까?

같은 의문에 도달한 히스토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시아티를 조준한 채로 그녀의 전신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켰다.

단, 섣불리 나서거나 쏘지 않았다.

시아티 역시, 히스토리아의 동기다. 상대가 적이거나 짐승이었다면 바로 바람구멍을 내주었겠지만, 일단 구면이라서 손이 모질지 못했다.

물론 꼭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휴이. 이제 알겠어? 여차할 때 믿을 건 자신의 힘이야. 너는 기공에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어.’

만일 내가 목숨의 위협을 느낀다면, 기공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에 더 열중할 것이라고. 그런 생각에 잠시 나를 방치했다.

그 탓에 늦었다. 나는 군국을 향한 증오와 절망에 충분히 물들어버렸으니.

나와 시아티는 대화를 나누었다. 지루한 시간이 흘렀다. 심각한 분위기가 다 어디 갔는지, 대화는 유창했고 또 내가 짓는 표정이 다채로웠다.

히스토리아가 보기에, 나는 꼭 이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듯 보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뭐야. 내 도움이 필요한 거 맞아?’

도움이 필요했었어. 이제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처음부터 기공을 익혔다면. 고마움도 모르고 너를 배신할 아이들을 위해 쓸데없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면. 너는 묶여있지 않아도 됐잖아. 칫, 불안하게 하긴.’

몸은 묶여있지 않아. 이런 로프로는 나를 묶을 수 없으니까.

뒤로 묶여있던 손을 펼친다. 뻣뻣한 덩굴로 묶은 어설픈 매듭이다. 덩굴이 스르르 풀리며 양팔은 언제 묶여있었냐는 듯 어깨 위로 올라왔다. 당황한 아이들이 깜짝 놀랐으나, 나는 손을 내밀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심지어 묶여있지도 않아? 점점, 내가 바보가 되어가는 기분인데.’

히스토리아에겐 전부 동기에 구면이었다. 아무리 하찮게 본다고 한들 그 역시 동기의 범주에서다. 그들을 공격할만한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긴장을 푼 히스토리아가 잠깐 멈추었던 호흡을 다시 재개하던 때였다. 지근거리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멧돼지 여자.”

철컥. 총구가 순식간에 돌아갔다. 그녀의 총구가 향한 곳에는 란카르트가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아리송한 얼굴로 히스토리아와 내쪽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히스토리아가 총구를 내리며 물었다.

“아, 씨. 깜짝이야. 너, 뭐야?”

“내가 할 말이다. 나야 니콜라스와 같이 출발한 선발대이니 여기 있지만. 너는? 너는 대체 뭐지?”

“나는 후발대.”

“후발대가 어떻게 벌써?”

“너희가 느린 거지. 노를 젓고 온 나보다도 늦게 와서야 어쩌겠어?”

란카르트는 마침 강가에 있는 나룻배와 커다란 노를 발견하고는 중얼거렸다.

“미친, 또라이 멧돼지….”

그래도 히스토리아가 여기 온다는 것 자체는 예상 내였다. 란카르트가 니콜라스를 따라온 이유이기도 했다.

‘이 멧돼지는 짐승마냥 기분파에다, 발정기인지 휴이 상대로는 더욱 노골적으로 관심을 쏟는다. 탐식이 일어나기 전에 떨어뜨려 놓아야 해.’

“니콜라스 총교관의 지시야. 휴이 문제는 교관 측이 해결할 테니, 너는 잠깐 빠져있어.”

“해결? 무슨 해결?”

‘탐식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는지 확인하고, 혹 남은 게 있다면 직접 처리하기 위해.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도대체….’

상념에 빠진 란카르트를 향해 히스토리아가 이죽거렸다.

“또, 또. 되도 않는 대가리 굴리지. 재능 없는 머리로 같잖은 수작 부리지 말고 똑바로 말 안해?”

“이건 너에게는 없는 개념인 생각이라는 거다, 잡년.”

서로 사이 좋게 폭언을 내뱉은 뒤, 란카르트는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해. 그 이상은 말하지 않겠어. 말해도 네가 이해하지 못할 거고.”

“왜, 갑자기. 숨기는 일이라도 있어?”

“그래.”

란카르트가 흔쾌히 수긍하자, 히스토리아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지었다.

“…허. 당당하네. 그러면 더욱 빠지고 싶지 않아지는걸.”

‘쯧. 고집만 더럽게 세고 설득도 통하지 않으니 짜증나는군. 힘으로 배제하고 싶어도, 여기서 싸워보았자 결판도 나지를 않겠지. 그렇다면.’

“휴이를 위한 일이야.”

“뭐? 휴이를 위한 일?”

“네가 알까 모르겠지만, 아니, 그냥 모르겠지. 이 평가는 사실 휴이를 위해 준비된 시험. 네가 지켜보고 있다면 그 시험의 의미가 퇴색돼.”

“시험이라고?”

“그래. 이것, 바로 이것으로, 휴이는 한 단계 더 나아갈 거다.”

와아. 틀린 말은 아니네. 나를 위한 장소이긴 했으니까.

나를 언급한 덕분에 히스토리아는 화를 누그러뜨렸다. 내쪽과 란카르트를 번갈아보던 그녀는 잠시 고민하고는, 이제 해방된 나를 보고는 작게 혀를 찼다.

‘…란카르트 이 놈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일처리는 확실한 녀석이야. 휴이를 반쯤 떠받들고 있으니 해칠 리는 없어. 거기다 총교관이 왔다면 뭐. 사태는 다 끝났겠지.’

수긍한 히스토리아는 어깨에 장총을 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고하는데, 나한테 명령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대꾸할 힘이 있으면 저 강변 따라 맴도는 짐승이나 잡아먹던가. 너에게 딱 어울리는 일인데.”

일단 히스토리아를 떼어놓는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란카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내 쪽을 지켜보았다.

‘탐식을 거부한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수락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너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 거지, 휴이…?’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둘이 사담을 마치는 동안, 스스로 밧줄을 풀고 나온 나는 아이들의 설득을 끝마친 상태였다.

시아티는 내 말을 부정하고 싶은 듯이 크게 외쳤으나.

“…아니야. 시아티…. 아니야.”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쪽 대표자, 캐러팔드는 눈을 꼭 감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휴이는 우리에게 힌트를 줬어. 그물의 존재를 알고도 모두에게 알렸고, 우리보고 캠프의 비밀을 파헤쳐보라고 했어. 가장 먼저 뛰어들어 페로몬 미끼가 든 상자를 닫고, 직접 들고 가서 강에 던져버린 사람도 휴이야. 또 휴이가 함정을 미리 설치해 두자고 시키지 않았다면 사람은 더 죽었을 거야. 만일, 그가 우리를 죽이고자 했다면….”

더.

혹은 다 죽었을 거라고. 캐러팔드는 설명을 마쳤다.

그리고 침묵하던 다수가 그의 뜻에 동조했다.

꼬박 하루를 같은 장소에서 지냈다. 언제나 지시를 내리고 불철주야 일했던 나에게 무언가를 꾸밀 시간이 없었다는 걸 알기에. 내 행실을 보았기에 설득이 통한 것이다.

시아티도 그것을 믿지 않을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단지, 그 이상으로 화가 났을 뿐. 화낼 대상을 잃은 시아티는 두 손을 꽉 쥐며 외쳤다.

“그러면! 그러면, 뭐냐고! 도대체 뭔데…!”

“궁금하지? 나도 궁금해. 솔직히 말해서, 나도 여기 오기 전까지는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으니까.”

이건 분명한 진실이다. 탐식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표류물과 미끼용 캠프, 그리고 페로몬으로 탐식을 발동시키려고 했을 줄이야.

성공적, 이라고 하기엔 희생자가 있었지만. 어쨌든 극복해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첫 번째 고비.

모두를 죽이려고 했던 진짜 악의는 지금 다가오는 중이니.

“이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건, 한 사람밖에 없어.”

“누군데…?”

“니콜라스 총교관. 이 모든 것을 계획한, 하멜른 중등군사학교의 수장.”

아이들의 머릿속에 훈훈하면서도 엄격한 인상의 제복 남성이 떠올랐다. 그는 교육에 열성적이었고, 아이들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았으며, 매질하고 체벌을 가할지언정 절대 굶기거나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비교적 인격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 쓴 괴물처럼 보일 뿐이었다.

“자, 그러니까 준비하자, 얘들아.”

나는 니콜라스를 안다. 그는 좋은 교육자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군국 장교의 특성으로서 존재한다. 그의 교육관은 나라를 위한 것. 교육은 나라를 위한 인재를 만들어내기 위해 나라가 가꾼 밭.

어설픈 백 명보다 그 힘을 일부 취한 나 하나가 더 뛰어나리라 생각한 모양이지만.

단언컨대, 확실하게 틀렸다.

나는 백 명 속에 있을 때 더 뛰어난 사람이라서 말이지. 그들의 힘을 하나로 뭉쳤다고 한들, 그건 책을 찢어서 땔감으로 쓰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지식의 수호자는 양서를 가득 담은 도서관이지, 그 앞을 지키는 사서가 아니다. 사서를 위해 책을 찢어 불을 땐다니 주객전도나 다름없다.

물론 책을 땔감으로 쓰는 만행을 저지른다면 누구보다도 사서가 가장 크게 화를 내겠지만 말이다.

“저 페로몬 미끼가 든 상자는 몇 시간 뒤에 저절로 열리는 구성이었어. 잘은 몰라도 그 시간이 아마 결행시각이겠지. 그런데, 니콜라스 총교관이 이런 일을 저지르고도 그냥 방치만 해둘까? 예상컨대, 니콜라스 총교관은 머지않아 찾아올 거야.”

“초, 총교관님이…? 직접?”

“그래. 이 실습, 표류물을 묶어둔 그물, 금기가 숨겨진 캠프와 언젠간 터질 페로몬 상자… 이 무덤을 직접 준비한 그가 직접 찾아오지 않으면 금기라는 단어가 다 무색하지.”

확신은 없었다. 조금 전 히스토리아와 란카르트의 생각을 읽지 앟았다면 단언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제 정보를 얻었으니 준비해야겠지.

“니콜라스 총교관이 찾아왔을 때, 무엇을 물어볼지. 어떻게 환영하고, 맞이하고, 질문하고 대답해야 할지. 우리는 미리 준비해야 해.”

군국에 버림받고 초점 잃은 눈동자들을 둘러보며, 나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모두에게 전했다.

“이야기를 듣고 납득할 수 있도록.”

나는 알지만, 너희는 모르니까.

모든 의구심과 절망, 탈력감을 뒤로 한 채. 아이들은 일단 일어섰다. 그들은 조금 전 친구의 시체를 묻은 손을 꼭 쥐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모두를 향해 힘차게 말했다.

“우선, 함정부터 만들까?”

대화수단으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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