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27 안녕? 나는 잠의 요정
나에게 한창 놀림을 받던 티르는 마침 구실이 생기자 냉큼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마침 오래도 있었다. 자리를 바꾸자꾸나!]
순간적으로 어둠이 내 눈앞을 가렸다. 다시 시야를 되찾았을 때는 아지가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이러면 순서가 리아, 티르, 아지, 나, 회귀자인가. 한가운데 낑기게 된 아지는 불편한지 바둥거리며 외쳤다.
“멍! 나, 밖! 나갈래!”
“아지야.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 티르의 어둠이 있긴 해도, 군국 탐조등은 인간 형체는 귀신같이 잡아낸다고.”
초고성능 조명을 개발한 가장 큰 이유가 탈주하는 사람을 잡아내기 위해서라니. 희극도 그런 희극이 또 없다.
이너서클은 군국에서도 가장 발전했으면서, 동시에 착취당하는 인간이 우글우글한 군국의 어둠. 군국의 정수만 모아놓은 비밀스러운 땅.
그렇기에 은밀히 움직여야 한다. 밖은 밤이고 낮이고 가혹한 노역에 허덕이는 사람들과, 혹여나 그들이 탈주할까 봐 감시하는 탐조등이 가득하니까.
그런데.
“멍멍! 갑갑해! 아우우우! 공간권 보장!”
“쓰읍. 활달한 게 이동 스트레스 없어서 좋긴 한데, 이럴 땐 또 고양이처럼 좁은 곳 좋아하는 게 편하네.”
이거 어쩐다.
짐승의 왕은 관념의 존재라 일반성을 잃지 않는다. 개는 개처럼, 고양이는 고양이처럼 행동한다.
나비가 그 난리를 피우면서도 결국 개박하 마력초를 사랑하고, 좁은 장소로 파고들고, 인간과 대화를 하면서도 수틀리면 용서가 없는 것처럼. 아지도 나름의 성격을 지닌다.
와중에 나비도 잠에서 깼는지, 발밑에 있는 상자에서 만족스럽게 갸릉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냐아. 움직이지 않으면 정신을 못 차리는 멍청한 멍멍이…. 불쌍하다냐. 안쓰럽다냐. 냐처럼 품위를 지키라냐.”
“멍! 쟤만 편해!”
그나마 다행이다. 나비마저 발광했으면 이토록 수월하게 움직이진 못했을 것이다. 네가 난리를 피우는 것보다는 아지가 갑갑한 게 낫지. 최소한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으니.
나비의 태도는 친근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날이 섰지만… 사실 인간을 해치지 않는 아지가 이상한 거지, 짐승이 서슴없이 다가와 냉큼 교감부터 시도할 정도면 거의 절친이나 다름없다.
평범한 짐승이라면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멀찍이 도망치거나… 혹은, 모습을 보인 순간 이미 죽음이 결정된 경우가 대다수니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것들이 괜히 개나 고양이를 모으려고 그러겠어? 아니면 답이 없으니까 그렇지.
“멍! 난폭한 고양이, 편해! 착한 나, 불편해! 불공평해! 아우우우우!”
“좀만 참으라니까. 고작 하룻밤이야.”
“아우우! 폭력, 배려! 비폭력, 냉대! 멍멍!”
“에휴. 떼만 쓰긴. 그래서 어쩌라고?”
“눈눈, 이이! 답, 무력시위!”
“잠깐. 결론이 이상한데?”
이 개는 맨날 운동만 하더니 운동권이 되었구나! 안 되겠다. 이럴 때는 편리한 도구를!
“알았어! 지분이고 뭐고 챙기고 좀 진정해!”
“멍! 10%!”
“그래, 가져가라!”
“멍, 알았어!”
그리고는 아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하게 귀를 내리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 작전세력에 당해버린 것 같은데.”
“멍! 아냐! 정당한 보상!”
“네가 뭘 했다고 정당한 보상…이라고 하기엔 이것저것 많이 하기는 했구나. 음.”
생각해보니 나비를 이용해서 히스토리아를 제압할 때도 아지의 본성을 이용했지. 그때 히스토리아보다 나를 더 편들도록 한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을 한 셈이다.
그래, 실효성도 없는 지분 따위 개나 주라지. 군국이랑 맹약을 맺어놓고도 저쪽이 채무불이행 선언하자 대충 난동만 피우고 만 아지다. 내가 배 째라고 나온다고 진짜 배를 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 죽잖아.
아지 기분을 풀어주는 일은 처음부터 별로 어렵진 않았지만, 공짜 당근을 얻으니 기분이 좋구만!
“멍! 멍! 멍!”
내 속내도 모르는지 아지는 활기차게 움직였다. 아, 잠깐만. 좁은데 그렇게 움직이니까 아파….
[…개의 왕. 꼬리를 그만 흔들어다오. 팔랑거리는 게 거슬리는구나.]
“멍멍?”
[아니, 되었다. 그냥 내가 수를 쓰마.]
휘릭.
어둠이 내 앞을 가렸다. 몸이 한순간 어디로 쓸려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시야가 돌아왔을 때, 이제 내 눈앞에 보이는 건… 관의 벽이었다.
지금 순서는 아지, 티르, 리아, 회귀자, 나. 아지의 꼬리는 관의 가장자리를 향했다.
[처음부터 개의 왕을 가장자리로 보냈어야 했다. 요란해서야 원….]
타당한 선택이었으나, 그러다 보니 회귀자와 히스토리아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똑같이 눕게 되었다. 해도 하필 이런 조합을. 막 섞다 보니까 별 경우가 다 나오는구나.
히스토리아가 담배를 질겅 씹으며 말했다.
“시조. 옮겨준 건 고마운데. 이건 좀 그래. 꼬맹이에게는 자극이 좀 과하지 않을까.”
“자극은 무슨!”
말마따나. 히스토리아는 아직까지 양팔이 묶인 채다. 심지어 옴짝달싹할 공간도 없는 관 안에서 셔츠 하나만을 입고 있는 상태로 구속당해 있다. 미끼로 쓸 인형에 입혀야 해서 겉옷만 벗겼기 때문이다.
단, 의복 패킷은 묶인 상태로도 벗을 수는 있으나 입을 수는 없기에. 그 위에 옷을 입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다.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기공을 익혔으니 몸이 상하거나 그러지는 않겠지만, 설사 히스토리아라고 해도 이 정도로 강하게 묶이면 아프겠지.
하지만 회귀자는 그런 불평 따위는 단박에 찍어눌렀다.
“흥, 그럼 진작 보내준다고 할 때 갔으면 좋았잖아? 몸 성히 보내준다고 하니까 같이 데려가 달라고 한 주제에.”
“미끼가 되느니, 포로가 되는 게 낫지. 최소한 아군의 발목은 잡지 않을 테니.”
“붉은 말은 미끼. 네가 썼던 암호. 그게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고?”
히스토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붉은 말은 미끼. 그녀가 손가락으로 직접 찍은 군용 점자 암호.
단서는 단서이나, 상대방의 사고를 제한하는 악마의 정보다. 그것을 결정적 단서로 여긴 군국이 어떻게 나올지는 뻔했다. 그런데 히스토리아는 단 한 번의 주저 없이 그것을 찍었다.
몰아붙였다고 생각한 회귀자는 의기양양하게 히스토리아를 도발했다.
“그래. 거짓말은 하지 않았지. 실제로 그건 미끼였으니까.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그것을 읽은 군국은 당연히 우리가 벨트에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어?”
“…그러게. 몰랐네.”
“아하, 몰랐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히스토리아가 대답도 못 하고 시선을 피하고 있다. 오오. 회귀자. 시즌 1호 말싸움 승리인가?
“과연 뭘까? 군국 육장성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쪽을 따라오고, 이렇게 소극적으로 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는데.”
“맞춰볼까?”
‘역시, 확실해. 이 녀석은 군국에 충성하지 않아. 다른 육장성들은 절창을 제외하면 거의 다 충성하는 입장이지만, 이 녀석은 누구보다 성실한 척하면서도 정작 언제든지 군국을 버릴 수 있어….’
힐끔. 그러면서 회귀자는 고개를 살짝 꺾어서 내 쪽을 힐끔거렸다.
‘아마, 하멜른의 사건과 이 녀석이 영향을 줬겠지? 하멜른은 커다란 사건이지만 그것만은 아닐 거야. 무슨 영향일까. 일단 둘이 친했던 사이라는 건 알겠는데… 혹시?’
어, 잠깐만. 이거 약간 또 생각이 멋대로 뛰쳐나가는 기분인데. 회귀자, 잠깐 생각 멈….
내 사고가 행동으로 옮겨지기도 전에, 회귀자는 퍼뜩 든 생각에 목소리를 죽이고는 은근히 물었다.
“혹시, 너… 이 녀석이랑, 사귀는 사이였어?”
이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단 한 마디로 분위기를 바꾸어버리는 재능.
관 안에 침묵이 찾아왔다. 원래 관은 죽은 이들이 담기는 장소이며,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어쩌면 순리를 이끄는 것일지도.
뜬금없는 질문을 들은 히스토리아는 눈만 끔뻑거리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의도를 쟀다.
하지만 회귀자의 눈에는 순수한 호기심만 있을 뿐이었다. 뭐, 회귀자 특유의 다음 회차용 정보 수집에 가까웠지만.
‘정말인가? 레지스탕스가 봉기하고 공화국을 만들었을 때도 이 녀석만은 묘하게 소극적이었단 말이지. 군국이 타국에 의해 멸망하고 신왕국을 옹립해도 비슷했고…. 에이, 설마 남자 때문에 그러겠어?’
사실 온전히 나 때문은 아니지. 내가 그 계기를 제공하긴 했지만 말야.
그러나 히스토리아도 성격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살짝 내리깐 채로 말한다.
“…그러게. 미련이 뚝뚝 떨어져서, 나라도 팔아버리고 와 버렸네.”
“어, 정말? 진짜야?”
“내가 거짓말할 이유가 있을까?”
거짓말은 아니다, 라는 화법. 많이 써봐서 안다.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건 맞지만 사귀어서가 아니라고! 히스토리아가 가진 미련은 그런 종류가 아니란 말이야!
‘어어? 정말? 정말이었어? 와, 와! 그러게, 생각해보니 총사가 누군가와 맺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 그게?!’
자기가 물어봐 놓고도 설마 했던 회귀자는 호기심을 번뜩이며 물었다.
“사귀었던 거야? 하멜른 때부터? 몇 학년?”
“글쎄.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데. 하도 가까이, 그렇게 오래 지내서, 언제 그런 관계가 되었는지 가늠할 수가 없어.”
“와, 아아.”
음해는 거기까지다, 히스토리아. 나는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되기 전에 끼어들었다.
“야! 멀쩡한 사람 이상하게 하는 소리 그만해! 애초에 그런 관계가 된 적 없으니까 가늠을 못한 거겠지!”
내가 소리치자, 회귀자는 고개를 돌려 빽하고 소리 질렀다.
“관이 다 울리잖아! 시끄러우니까 상관없는 녀석은 조용히 있어!”
“네? 제 이야기인데, 제가 상관없는 녀석이라고요?”
그러나저러나. 회귀자는 나에게 관심을 끄고는 오로지 히스토리아에게 집중했다. 뭐지, 이거. 내 말을 신용하지 않는 느낌인데… 지금까지 너무 놀려먹어서 안 통할 정도가 됐나?
하필 그러고서 히스토리아의 이야기를 듣다니. 너는 잘못된 선택을 한 거야.
“그, 그래? 어쩌다가 알게 되었어?”
“우리는 같은 시기에 입교한 동기였어. 서로 처음부터 안면을 텄지. 거기다 나, 란카르트, 휴이는 입교할 때부터 전부 천재로 유명했으니… 내심 서로를 경쟁상대로 보았지.”
경쟁상대는 무슨. 내가 압도적인 1등이었잖아. 2등이 누군지는 국가 정세와 판단 기준에 따라서 달라졌지만 1등은 논란의 여지가 없었다고.
“누가 1등이었는데?”
“아슬아슬했지만, 1등은 늘 휴이였어. 나는 언제나 2등이었고.”
“쳇, 그게 진짜였단 말이야?”
‘허세이길 바랐는데!’
생각이 불순하다, 초졸. 나는 너의 판단을 속이지 정보를 속이진 않는다. 너를 속이는 데 거짓 정보까지도 필요 없어.
“휴이를 이기기 위해 노력하고, 열중하고, 탐색하다가… 그만, 물들어버렸달까.”
“우, 와아.”
봐봐. 필요없지. 그냥 속아서 이야기에 빠져버리잖아. 이거 안 되겠는데. 통할까 모르겠지만 일단 말려보자.
“저, 셰이 씨.”
“시끄럽다니까!”
“조용히 이야기했는데….”
쩝. 그래. 실컷 씹고 뜯어라. 어떻게 속든 나는 신경 안 쓸란다….
‘으흠흠. 휴의 예전 이야기라… 하긴, 휴 정도 되는 이라면 여러 명에게 구애를 받았겠지…. 기분은 미묘하다만, 일단 들어보자꾸나.’
나 신경 안 써도 되는 것 맞아? 관도 좁아서 행동하기도 힘든데 이상한 소문까지 퍼지면 곤란해!
내 불안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회귀자는 자꾸만 캐물었다.
“…하, 하지만 그 중등군사학교인데? 다 같은 곳에서 지내고 교관도 감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연애할 수 있어?”
“하고자 하면 방법은 많지. 자유 대련 때, 서로를 상대로 지목하고 대련한다든지.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서로 싸우면서 서로를 익히고.”
“와아….”
‘나름… 꽤 로맨틱하네.’
로맨틱? 너도 뇌가 근육으로 이루어졌구나? 요즘 로맨틱은 일방적인 구타를 가하는 사이로 의미가 바뀌었니?
“한 명이 피우던 마력초를 나눠 피우기도 하고….”
“어어? 마력초는 입으로 물고 피우는 거잖아?”
“후우. 그러게, 어떻게 했을까?”
“그, 그건. 간접….”
‘와아아. 그건 조금 두근거리는 기분….’
큰일 났다. 회귀자가 자기 꾀에 걸려서 모드가 살짝 뒤바뀌어버렸다. 너, 다음 회차를 위해 냉혹하게 정보를 캐내려던 회귀자 모드 어디 갔어? 날조된 이야기에 빠져버린 거야?
‘그게 정말이더냐…! 피우던 마력초를 나누어 피운다니!’
와중에 저편에서 어두컴컴한 기운이 몰려왔다. 티르였다.
아, 날조된 이야기에 빠진 건 여기 한 명 더 있었네. 그나저나 마력초 나누어 피우는 게 도대체 무슨 불만….
‘내 앞에서는 피 한 방울도 아까워하던 주제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호들갑을 떨었던 주제에! 참 입이 싸기 그지없구나!’
관심없는 척 귀만 기울여 이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티르는 서운한 감정을 나에게로 쏘아냈다.
아니,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인데요. 체액이라고 다 피가 아니거든요? 흡혈귀처럼 피를 침처럼 쓰지 않는다고요. 거기에 왜 입이 싸다는 표현을 쓰는 거야?
거기다! 마력초는 쟤가 일방적으로 뺏어 피운 거라서 저항할 수가 없었단 말이야! 이건 억울해!
와중, 회귀자는 상대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는 생각은 어디 갔는지, 이제는 진심으로 몰입한 채 질문을 해대고 있었다.
“군사학교가면 눈 뜬 순간부터 잠들기 전까지 정해진 일과를 보내야 한다고 했는데, 만날 시간이 없지 않아?”
“나나 휴이나 특별 커리큘럼이라서. 몇 가지 과목은 면제였고, 자유 시간이 충분했어. 우리는 그 시간을 공유했지.”
“와….”
공유?
늦잠을 자기 위해 자유 시간 오전에 만들려 하니까 냉큼 뛰어들어선, 식후 운동해야 한다며 제멋대로 바꿔놓고선! 나는 매일 밥 먹고 운동하게 되어 복통에 시달렸다고!
회귀자, 저딴 것 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마!
‘만일 나도 중등학교에 들어갔다면… 훗. 한때, 기억에도 없던 아주 먼 옛날에는 중등학교를 동경했고, 나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총사가 육장성이 되었다는 소식에 감탄하곤 했는데…. 웬걸. 지금은 내 포로가 되어 눈앞에 묶여 있네. 심지어 평범한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
큰일 났다. 이제 자기 기억에 빗대는 지경까지 와 버렸어. 이렇게 되면 자력으로는 탈출할 수가 없어…! 이 블랙홀 같은 파자마 토크에서!
되돌아오지 않는 추억을 떠올리며 자조적으로 미소를 지은 회귀자는 문득 의문을 떠올렸다.
“어라? 잠깐만. 그러면 너는 왜 이 녀석을 잡으려고 했던 거야?”
“왜냐니. 미련이라니까.”
“아니, 군대를 몰고 올 필요는 없었잖아.”
그 질문에 이르러선 히스토리아도 잠깐 고민했다. 질문이 그녀의 본심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이 관 안에서 나 역시 듣고 있음을 상기한 히스토리아는 회귀자를 통해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하멜른 때, 휴이는 그때도 혼자 유유히 도망쳤지. 나 혼자서는 또 놓칠지도 모르는 일이고, 또… 그는 추궁당해야 했어.”
“학생들과 같이 강물에 빠진 거? 큰일이긴 하지만, 조금 전 다 들었잖아? 결과적으로는 군국이 죽인 셈인데 왜 그걸 이 녀석에게 추궁하려고 해?”
“그건….”
대답을 하다 말고 히스토리아는 마력초를 질겅 씹었다. 불을 붙이지 않은 풀에서는 탄 듯한 쓴맛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맛은 기억이다. 기억 속 맛을 찾기도 하며, 맛 속에서 기억을 되새기기도 한다. 히스토리아에게 있어서 마력초란 그때를 의미했다.
“162명이 동시에 사라졌어. 중간에 낙오, 혹은 다른 길을 선택한 몇몇 빼고는, 내 기수가 통째로 증발한 거야. 졸업은 빈자리를 되새기는 일이 되었어. 추억을 나누고 미래를 그렸던 애들이 강 아래로 가라앉았어. 가끔 고개를 돌려 저 멀리 흐르는 강을 보면, 깊이 잠기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지.”
마력초를 피우지도 않았는데, 잠깐 히스토리아의 초점이 몽롱해졌다. 이곳이 아닌 다른 먼 곳을 보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죽어버리면, 안 돼. 한두 명도 아니고. 그 많은 아이들이… 살아나올 생각조차 않고 죽는 건, 이상하지. 차라리 군국이 죽였다면… 그에 환멸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그런 방식은 있어선 안 돼.”
히스토리아는 동기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니콜라스나 란카르트와는 달랐다.
니콜라스는 학생을 군국의 일부로 보며,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다듬듯 ‘가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자기 독단으로 학생들을 재료로 쓰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란카르트는 그들에게 아무런 가치를 두지 않았다. 호숫가 돌멩이 하나가 강에 떠내려가든 그의 알 바인가. 살든, 죽든, 아니면 발버둥 치든 관심 밖이었다.
단, 내가 그들과 함께했고, 자기보다 똑똑한(것처럼 보이는) 나를 차마 어리석다 매도할 수가 없어, 그저 독특한 방식으로 시험하려고 했을 뿐.
“하지만… 잘 모르겠어. 내가 지금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그 광경에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일지.”
그에 비해, 히스토리아는 자기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존재를 찾았다.
달리 말해 외로워했다. 자기보다 열등한 이들이 그녀의 곁까지 따라오기를 바랐다. 재능이 부족하고 기력이 적더라도 아득바득 따라잡기를 원했다.
…단지, 그 기대치가 너무 높았고, 연달아 실망했을 뿐이지.
“그래도 그건 아니었어. 떠올려서도 안 될 계획일 텐데. 차라리, 그 전에 나에게 말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 거다, 라고 확언하지조차 못한다. 왜냐면 히스토리아는 그 일이 있기 직전 나에게서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직접 코앞까지 다가왔었기 때문이다.
동기들, 혹은 이 졸업실습을, 무언가를 어그러뜨리기 싫어서 발걸음을 돌렸다.
만약을 가정할 수조차 없는 끔찍한 회한.
‘전후사정을 전부 알았다면. 그것을 알았다면… 나는. 그래도 그들을 도왔을까? 군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지금의 나와 똑같은 선택을 했을까.’
진짜 감정이 담긴 절절한 말이 오가는 와중, 회귀자가 무언가를 알아차리고는 묘한 얼굴을 했다.
“응? 마치 그 광경을 직접 본 사람처럼 말하네?”
“아.”
그 말에 히스토리아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마력초를 입에 문 채, 불편한 자세로도 용케 몸을 뒤집으며 중얼거렸다.
“…됐어. 나는 포로일 뿐이니. 나머지는 마음대로 생각해.”
“어어? 잠깐만! 아직…!”
자꾸만 질문이 길어지네. 안 되겠다. 특단의 조치다. 이 대화를 끝내야 한다.
나는 회귀자의 귓가에다 대고는 최대한 느끼하게 속삭였다.
“잘 자요, 셰이 씨.”
“흐으이잇?!”
와. 고작 목소리만 전했을 뿐인데 허리를 쭉 젖히고 몸을 파들파들 떤다. 이게 자극받은 회귀자의 민감함?
“너, 너 뭐야!”
“뭐긴요. 잠의 요정입니다. 내일도 힘든 하루가 기다리고 있으니 오늘의 나에게 수고했다고 인사해줘야죠. 자, 다들 이제 주무세요. 이만 해산!”
[…나는 굳이 잘 필요 없다만.]
“티르는 연장자면서 애들이 이 시간이 되도록 안 자는데 뭐 했어요? 반성하세요! 애들 수면도 좀 챙겨줘야지! 자기가 밤잠 없다고 애들 깨우면 되겠습니까!”
냅다 윽박질러서 억지로 대화를 끝맺었다. 볼멘소리가 여기저기, 여기 회귀자와 저기 티르에게서 튀어나왔지만 무시하고는 강제로 소등했다. 머리맡에 달린 작은 광원을 손가락으로 가리자 어둠이 찾아왔다.
‘반장 때 쓰던 멘트를 계속 돌려쓰고 있네…. 너는 그다지 변한 게 없어 보이네, 휴이.’
이제 슬슬 나도 기분이 이상해지네. 히스토리아, 너 진짜 내 전여자친구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