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32화 (232/384)

EP.232 망국의 공주, 첫 번째 레지스탕스

흐르는 땅은 그 자체로 계곡을 이룬다.

메타컨베이어 벨트는 고저차가 존재해서는 안 되기에, 북쪽 고지대에 길을 만들 때 군국은 역사에 남을만한 대공사를 벌였다.

보통 흐르는 물이 오랜 시간 땅을 깎아내 계곡을 형성하기 마련이나, 군국은 수많은 인간이 계곡을 깎아 땅이 흐르게 했다. 자연의 섭리마저 뒤트는 인간의 위업. 비록 원수의 작품이라고 하나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원수가 맞긴 맞을까.

그녀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 이 나라는 그녀의 부모를 죽였다. 쿠테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왕국의 정당한 주인인 그란디오모르 왕과 왕비를, 감히 말도 안 되는 죄목을 붙여 처형했다.

그것도 모자라, 세상에 몇 남지 않은 고귀한 왕가의 핏줄을 끊어버리려고 했다. 감히 왕을 거꾸러뜨리는 역천을 저질렀다.

따라서 예리엔 그란디오모르는 마땅히 그들을 증오해야 한다…

고 들었으나, 지식으로 엮은 울분은 헐거워서 금방 흩어지곤 만다. 아무리 마음을 되새겨도 예리엔은 분노를 찾지 못했다.

마지막 공주. 태고에서부터 내려온 그란디오모르 왕가의 말예.

그러나 대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작은 소녀는 하염없이 흐르는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쯤 경탄에 잠긴 채로.

그러던 그녀의 눈에 익숙한 흰색 손수건이 눈에 띄었다. 예리엔이 중얼거렸다.

“…저 손수건.”

그녀의 곁에 가만히 기립해 있던 수호기사, 란데마이어 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의 것입니다. 정말, 그들이 맞나 보군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 란데마이어 경은 곧 경탄에 찬 시선으로 예리엔을 바라보았다. 그는 존경심과 경외, 그리고 경애를 가득 담아서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하십니다! 공주님께서는 그들이 이쪽으로 올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고귀한 피를 이으신 분께서는 감히 범인이 다다르지 못할 선견지명을 갖고 계신 모양이군요!”

이들은 예리엔이 휘파람을 불어도 천상의 음색이라며 자지러질 이들이다. 느닷없이 얼굴에 금칠해주는 건 익숙했음에도 여전히 부끄러웠다. 예리엔은 어설프게 미소를 지었다.

“에헤헤. 그건 아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북부를 근거지로 삼은 우리가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따지자면, 카드 하나 노리고 한 도박이라고나 할까요.”

“남다른 통찰력과 그걸 가능케 하는 천운. 그것이야말로 군주의 자질! 공주님께서는 그것을 다 갖고 계십니다!”

“에헤헤….”

지고한 공주는 조금 내키지 않은 웃음으로 얼굴을 가렸다. 경애하는 마음이 너무 컸던 탓일까. 기사는 예리엔의 얼굴 뒤에 숨은 고뇌를 읽지 못했다.

컨테이너를 바라보던 란데마이어 경은 조심스레 다음 용건을 꺼냈다.

“그런데, 공주님. 외람되옵니다만, 사절단에 대해서 감히 한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보고 가지 말라고 말할 거라면, 하지 마세요. 제가 결정한 내용이에요.”

“이렇게 간청드립니다. 공주님! 위험합니다!”

질리지도 않았는지, 란데마이어 경은 발칙하게도 주군이 결정한 내용을 돌이키려고 시도했다.

중의적인 의미로 경을 칠 일이었으나, 충의에서 비롯된 것임을 아는 예리엔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결론은 같아요. 제가 직접 나설 거예요.”

“재고해주십시오. 위험합니다. 상대는….”

“알아요. 하지만, 그 힘을 이용하려는 자가 두려움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는 건 언어도단. 란데마이어 경, 저는 여러분의 주군으로서, 그리고 레지스탕스의 대표로서 가야 해요.”

“크윽…! 그렇다면, 최소한 호위를….”

“란데마이어 경이면 충분하잖아요? 왕국 최후의, 그리고 레지스탕스 최강의 기사인데. 아니면 경은 저를 지켜주지 않을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목숨을 걸고 지킬 것입니다! 하지만…!”

각오만으로는 지킬 수 없는 게 있다.

25년 전, 왕성이 불타고 명예가 땅에 떨어질 때. 한 인간에 의해 숭고한 결투의 민낯이 드러날 때. 고작 열 살의 나이로 그것을 깨달은 란데마이어 경은 창 손잡이를 꽉 쥐며 짓눌린 목소리를 냈다.

“시조 티르칸쟈카는 전설의 흡혈귀니까 그렇다고 치겠습니다. 하지만! 셰이라는 이름의 소년 검사는 그 나이에 절창과 동수를 이룬 괴물입니다!”

“경. 신경 쓰지 말아요. 그 소년은 그저 조금 어린 절창일 뿐이에요.”

“그게 괴물이라는 겁니다! 홀로 나라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괴물!”

고귀한 결투의 가치 아래, 기사가 얼마나 이 세상에 군림했던가.

그러나 결투의 가치가 거꾸로 사용된 이후 왕국의 명예는 산산이 짓밟히고야 말았다. 단 한 명이 시작한 결투는 왕국을 거꾸러뜨렸다. 왕국의 잔당이 뿔뿔이 흩어진 것도, 그토록 강대한 세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재기하지 못한 것도. 그들이 지킬 가치 자체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절창이 존재하는 한 기사는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죽어갈 뿐.

“혹여나, 공주님께서 해코지라도 당했다간…!”

“경. 쉿.”

예리엔은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 란데마이어는 즉각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

짧은 침묵으로 자기 불편함을 강조한 예리엔은, 표정을 풀고는 자애로운 한 마디를 건넸다.

“저는 망국의 공주에요. 위험을 감수하는 것. 제 의무는 그것을 포함하고 있어요.”

란데마이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군이 허락하지 않으면 말을 꺼낼 수 없는 계율 때문이었다. 예리엔은 그 계율을 자주 써먹으면서도 불편함을 느꼈다.

기사란, 그리고 왕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사람들은 왕을 저버렸을까. 어쩌면 이게 왕이 사라진 이유가 아닐까.

예리엔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리고, 제가 장담하건대. 저들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통찰하기로는 그래요.”

말만 갖다가 통찰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 사실 아무런 근거도 없다. 이미 몰릴 대로 몰린 구석, 적이 득실득실한 앞쪽을 보고 활로라고 외치는 꼴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판돈이 다 떨어진 이들은 매 순간이 올인인 법.

공주는 왕국의 모습을 모른다. 무훈시에서 묘사하는 그 나라가 목숨을 걸고서 복고해야 할 만큼 귀중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이 그녀를 구했고, 그녀를 보살폈으며, 그녀를 사랑했다. 예리엔은 자신을 보살펴준 이들을 버리지 못한다.

공주가 아니더라도, 모두의 딸로서. 예리엔은 자신의 의무를 다할 작정이었다.

각오를 다진 그녀는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친구를 불렀다.

왕국의 복고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그렇기에 의무로 얽매이지 않은.

군국에게 친구와 미래, 오른팔을 잃은… 소중한 친구를.

“그리고, 시아티가 저를 도와줄 거니까요.”

메타컨베이어 벨트에 올라타, 우리가 머물던 컨테이너에 방문한 레지스탕스의 공주는 난감한 상황에 부딪혔다.

‘흐에에….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에….’

동감이다.

레지스탕스가 기세 좋게 접근해온 건 좋았다. 그 수장이 망국의 공주라는 사실 역시, 회귀자의 생각을 읽어 알고 있었다.

뭐, 망국의 잔당을 규합하려면 왕가의 혈육 정도는 되어야겠지. 25년 가까이 저항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일단 마음이 꺾이지 않는 게 중요하니까.

하지만.

“아하핫! 반가워, 히스토리아! 너무! 너무나도!”

하멜른의 생존자가 공주의 곁에 있을 줄은.

“휴이, 너도! 설마, 이곳에서 그리운 얼굴과 재회하게 될 줄이야!”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오른팔에 달린 의수. 얼마나 햇볕 아래에서 오래 활동했는지, 까슬까슬하게 탄 피부. 그러면서도 어딘가 고장 난 듯한 삐걱거리는 미소.

히스토리아는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묶인 채로는 피할 수 없다. 오른팔의 의수가 그녀의 턱을 붙잡았다.

겁도 없는 짓이다. 묶인 지금이라도 사람 하나쯤은 우습게 박살낼 수 있는 게 육장성이다. 군국에 반하는 레지스탕스 주제에 저토록 가까이 다가가다니.

수호기사의 등 뒤에 숨은 공주가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시, 시아티. 그분… 육장성이죠? 묶여있다고 해도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건 좀, 위험하지 않나. 싶은데요.”

그러나 시아티는 멈추지 않는다. 대신, 히스토리아가 그만큼 물러난다. 시아티의 기세에 압도당해 외면하고 싶은 듯이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그렇지만 과거의 흔적은 눈꺼풀처럼 히스토리아에게 달라붙었다. 기공이 경지에 이른 그녀는 눈을 감아도 시아티의 모습을 완전히 그려냈다. 난폭한 기세, 잔뜩 흥분한 숨결, 그리고 불쾌한 골짜기에 간신히 걸칠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오른손 의수까지.

“아, 신경 쓰지 말아요, 공주님. 내가 말했잖아. 군국 높으신 분이랑 절친한 사이라고.”

시아티가 히스토리아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필사적으로 멀어지려고 하지만, 묶인 채로, 힘도 쓰지 않고 시아티를 떨쳐낼 방법이 없었다. 가슴이 서로 맞닿고, 노골적인 시선이 히스토리아를 향한다. 히스토리아는 이를 꾹 악문 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심지어… 내 소중한 친구는. 내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니. 하멜른의 강 밑바닥을 헤집으며 나를 구해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포로를 희롱하는 것처럼, 겁도 없이 육장성의 얼굴을 억지로 붙잡아 당겨 볼을 비비며. 시아티는 잔뜩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괴물에게도, 사람의 마음이 있다는 뜻이니까! 무적처럼 보였던 군국의 딸에게도, 우리 힘으로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뜻이니까!!”

하멜른, 강의 밑바닥.

아이들은 서로 팔짱을 낀 채 강바닥을 걷기로 했다.

혼자서는 물살에 휩쓸려 갈 위험이 크기에, 서로가 서로를 쇠사슬처럼 붙잡기로 계획한 것이다.

단, 시아티를 비롯해 희망을 완전히 버린 몇 명은 그냥 흘러가기를 택했다.

시체 몇 구가 떠서 흘러가는 편이 더 큰 충격을 줄 거라며, 니콜라스와 짐승에게 당해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껴안고 물에 빠지기로 했다.

아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시아티를 붙잡았다. 그러나 시아티의 의지는 확고했다.

어차피 희생양도 필요하며, 죽은 사람이 많을수록 군국의 의심도 줄어들 거라고. 자살 사건으로 보이기 위해선 진짜 익사한 시체도 필요하다고.

오른팔을 잃고 상처가 덧나 끙끙거리는 자신이야말로 그 적임자라고.

이리 살아남아서 아무것도 되지 않을 거, 차라리 죽어서 군국에게 조금이나마 피해를 주고 싶다고.

반쯤은 진심으로, 반쯤은 자포자기로 웃으며 그리 말했다.

친구들의 만류를 뿌리치기 위한 변명이었다.

그러나.

거듭된 고난으로 하나 된 아이들에게, 삶을 포기해도 되는 거창한 명분은 너무나 달콤한 것이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나 그녀의 말은 아이들의 가슴에 닿았다.

버림받은 그들에게 이미 삶을 포기할 이유는 충분했을 터. 다만, 몸에 각인된 생명으로서의 본능이 그것을 붙잡고 있었으나.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목숨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곤 한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버릴 수 있다…는, 군국의 혹독한 가르침 역시 그 일부다.

그것은 거꾸로 군국을 향했다.

친구를 위해.

살아남을 이들을 위해.

증오스러운 나라를 괴롭히기 위해.

팔짱을 끼고 강바닥을 걷던 아이들은, 하나하나, 팔과 어깨에서 힘을 풀고. 다음 다리를 내딛는 대신 디딘 발을 뗐다.

서로를 지탱하던 사슬은 가닥가닥 끊겨 강물에 흘러내려갔다.

아니, 어쩌면. 보이지 않는 강력한 사슬이 그들을 전부 얽매고 끌고 간 것일지도.

마침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 하류까지 내려왔던 히스토리아는,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떠내려가는 아이들을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힘도, 군국의 딸조차도 살기를 포기한 목숨을 붙잡아둘 수는 없다.

눈앞의 끔찍한 참상 속에서, 히스토리아가 직접 헤엄쳐가며 구한 목숨은… 얄궂게도. 가장 먼저 흘러갔던 시아티를 비롯한 몇 명뿐.

그들은 죽더라도 군국을 죽이겠다 맹세하며 레지스탕스에 투신했다.

구세력의 잔당이 아닌, 군국에서 나고 자란 진정한 레지스탕스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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