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3 군국을 죽인다, 처음부터 그 생각뿐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도 보따리 내놓으라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배은망덕한 이를 꼬집기 위해 만든 말이나, 물에 빠진 게 자기 의지로 이루어졌을 경우에는 어찌 보면 정당한 항의가 된다.
시아티의 경우가 그랬다. 그녀는 히스토리아 덕분에 목숨을 건졌음에도 속에 담긴 울분을 전부 히스토리아를 향해 쏟아냈다.
욕하고, 저주하고, 투정했다.
그중에서 특히 히스토리아의 가슴을 후벼팠던 것은 상대방을 상처입히기 위해 날카롭게 벼린 말이 아닌, 진심을 담은 읊조림이었다.
‘니콜라스는 우리를 재료로 보았고, 란카르트는 우리를 벌레로 보았어. 그에 반해… 너는, 우리를 패배자로 보았지. 재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 자기에 비하면 한없이 약하고 열등한… 패배한 인간. 킥킥. 그나마 우릴 인간으로 본 건 너 하나뿐이네.’
죽음을 목전에 둔 이는 눈을 감기 전에 진실만을 전한다고 한다.
스스로 죽으려고 했고, 방해받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게 분명한 시아티의 말에는 직접 와닿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평소였다면 얼굴을 마주하고 감히 하지 못할, 뾰족하고 날카로운 말이 히스토리아를 찔렀다.
‘그거 알아? 우리는 니콜라스나 란카르트를 진짜 싫어했어. 하지만 그뿐이야. 마주쳐도 슬쩍 피해가면 되는, 그 정도. 하지만 너한테는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았어. 네가 있으면 내가 인생에서 패배한 것 같아서. 백 명이 모여도 너 하나한테 지는 우리들이 비참해져서.’
생존자 구조에 여념이 없던 히스토리아는 연신 시체만 건져냈다. 히스토리아에게는 학생 전부를 합친 것보다 강한 힘이 있었으나, 그녀에게도 불가능한 일 투성이였다.
흐르는 강을 멈추지 못했다.
목숨을 포기한 아이들을 붙잡지 못했다.
흐릿한 사람 그림자가 흐르는 탁한 강 속에서, 한 소년을 찾아내지 못했다.
건져올린 시체가 쌓였다. 그녀를 돕던 몇몇 사람들조차도 이 참상에 질색하여 쳐다보기만 했다. 흠뻑 젖은 히스토리아가 다시 물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시아티는 뱃속 깊숙이에서 물을 왈칵 뱉어내며 광소했다.
‘하지만, 너는 그래도 다른 녀석들에 비하면 선녀야. 최소한 상처는 입으니까! 고통스러워하니까! 나는 지금 이 일생 그 어느 순간보다,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게 기뻐! 너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더, 더! 네가 우리만큼 아프고 후회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레지스탕스에 투신했다. 군국에 타격을 입히고자 했다.
장교가 된 히스토리아는 남다른 업적을 세우는 도중에도 자기 앞에 나타나는 시아티를 잡지 못했다. 아니, 잡지 않았다.
그녀를 잡거나 죽인다면, 그날 히스토리아가 구한 몇 안 되는 생존자가 사라지니까. 그날의 경악과 비탄을 공유할 사람이 하나 줄어드니까….
…사실, 그저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을 뿐.
그렇게 미루고 미뤄두었던 문제는 결국 히스토리아의 눈앞에 다시 다가왔다.
“휴이. 굉장해! 레지스탕스가 아무리 노력해도 기껏해야 장성을 암살하는 게 최고의 업적이었는데. 너는 심지어 육장성을! 그것도 산 채로 사로잡았어!”
하멜른에서 죽은 아이들은 군국에 복수하고자 하는 그들의 목적을 이뤘다.
니콜라스는 죽고 금기는 노출되었다. 군국의 딸은 회한에 사로잡히고 마장의 후계자로 낙점되었던 란카르트는 군국을 배신했다. 시아티를 비롯한 몇몇 살아남은 아이들은 증오에 불타 레지스탕스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역시, 너는 달라! 하멜른에서 우리를 이끌어준, 피리 부는 사나이는!”
유쾌하게 웃어젖히던 시아티는 나를 향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때, 잘 지냈어?”
“그냥, 잘 지냈어.”
“잘 지냈어? 잘 지냈…다고?”
친구의 안부를 확인했으면 기뻐하는 게 상식이건만, 시아티는 여러모로 비상식적이었다. 웃음기가 가득하던 그녀의 표정이 한순간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잘 지낼 수가 있어? 너잖아? 물에 빠지자고 제안했던 사람이 너잖아? 덕분에, 모두가 스스로 물에 빠져 죽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 대목에서 시아티는 의수로 히스토리아의 어깨를 부러뜨릴 듯 세게 잡았다. 일부러 기공을 두르지 않고 있던 히스토리아는 어깨뼈를 파고드는 손가락에 작게 신음을 흘렸다.
시아티는 그 반응에 신경도 쓰지 않고 고개를 삐걱거렸다.
“이건 아니라고. 군국은 뭔가 이상하다고. 어긋남을 느끼게 한 게 너잖아. 모두를 죽이고, 이 모든 일을 꾸몄으면, 최소하아아안! 너는 잘 지내면 안 되지이이이!”
“나는 죽으라고 한 적 없어.”
“죽으라고 한 적 없으면, 죽은 일이 없어져? 세상이 네 뜻대로 되는 장난감이야? 죽으라고 한 적 없는데 멋대로 죽었으니 책임이 없어? 그렇다면, 이렇게 되어버린 세상은 누구의 책임인데?”
미친 듯이 다그친 시아티는 히스토리아를 놔두고는 비틀거리며 나에게로 향했다.
“아니야, 휴이. 죽기로 한 나는 살았고, 살기로 한 아이들은 죽었어. 분명 그러기로 했는데, 우리는 이 지경이 되었어. 아니, 졸업하기로 했는데, 다 죽었어! 어긋난 거야. 죽어간 아이들은 군국을 저주했지만 여전히 이 빌어먹을 나라는 멀쩡히 서 있지. 뭔가,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러면 아이들의 마음은 다 어디로 간 건데?”
어디로 갔긴. 여기에 있지.
너와 나, 그리고 히스토리아에.
“그들의 죽음으로 살아남은 네가… 어떻게 잘 지낼 수가 있어?”
왜냐하면 나는, 평범하게 살아가야 하니까. 평범 속에 나를 파묻은 채로 평화롭게 살아왔다.
평화롭게 오늘을 지낸 이들은 변함없는 내일을 소망하는 법. 소소한 행복에 만족하는 소시민들 속에서 똑같은 일상을 그리며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그린 내일엔, 오늘 죽은 이들이 들어있지 않다.
이래서 잡범으로 살고 싶었는데.
“잘 지낼 수도 있지. 군국 멸망이, 너처럼 목숨을 걸어서까지 이루고픈 목표는 아니거든.”
“휴이이이이!!”
시아티가 폭주하려던 차, 나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딱히 목숨을 걸 필요가 없으면. 조금은 망가뜨리고 싶을지도.”
그러자 시아티의 얼굴에 빛이 드리워진 듯 활짝 펴졌다. 극적인 변화였다.
그에 반해 히스토리아의 표정은 점차 어두워져 갔다. 결국 히스토리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아티는 내 어깨를 팡팡 두들기며 기뻐했다.
“하긴, 이토록 강력한 아군을 두고, 히스토리아를 포로로 잡았으면 할 건 다 한 거지! 네가 한 일이 우리보다 훨씬 크네! 믿을게, 휴이!”
그러던 도중, 시아티는 느닷없이 내 귀를 잡아당기고는, 호흡이 귓볼에 닿는 거리에서 작게 속삭였다.
“히스토리아는 우유부단하고 미련도 많아. 저번에 내가 폭탄 설치하는 모습 보고도, 애써 나를 무시하고는 폭탄만 가지고 가더라니까? 나도 그럴텐데, 너라면 어떨까? 네가 품에 껴안고 달콤한 말이라도 속삭여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서 너에게 주려고 할 거야. 킥킥. 빨리 시도해봐! 군국을 망가뜨리는데 무기가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잖아?”
키득거리던 시아티는 마침 이쪽을 불편한 듯 지그시 바라보던 티르를 발견했다. 그 순간 시아티의 표정이 변했다.
입가에 묻은 격렬한 감정을 한순간 삼킨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이성이 돌아왔다. 시아티는 한층 고무적인 표정이 되어, 티르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시조 티르칸쟈카. 외람되옵니다만, 일개 인간이 위대한 시조에게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티르는 능숙하게 인사를 받았다.
“허락한다.”
‘제법 예절을 아는 인간이로다. 흐음. 방금 휴에게 보여주었던 태도와는 또 다르구나.’
허락이 떨어지자 시아티는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계약서를 읽듯 무감정하게 말했다.
“제 피나 살, 명예 혹은 목숨. 그 모든 것을 바칠 터이니, 군국을 멸망시켜주실 수 있으십니까? 필요하다면 다른 대가도 구해보이겠습니다.”
정작 그녀의 말에는 정밀하게 재단된 분노만이 가득했지만.
“시아티!”
지금껏 수호기사 뒤에서 살피고만 있던 공주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지금이라도 취소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젓기까지 했다.
티르가 공주 쪽을 흘긋 보고는 대답했다.
“네 뜻은 이해한다. 나 역시, 한 나라를 격렬하게 증오하여 멸망시킨 전적이 있으니. 다만 서로 홀로 온 것이 아닌 만큼, 먼저 네 동료와 말을 나누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에게 했던 것과는 다르게, 시아티는 티르에게 맹목적인 분노를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의 타당한 의견을 받아들이고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지극히 공손한 자세로 나왔다.
“실례했습니다. 머지않아 의견을 정리해서 오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다. 내 당장은 휴가 하자는 대로 따르고 있으니. 그쪽과 이쪽의 협상이 끝나면 어찌해야 할지 가닥이 잡히겠지. 그것을 기다리자꾸나.”
한순간, 시아티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러나 그건 잠시뿐. 충분하다는 듯이 미소짓고는 정중히 허리를 숙여 물러났다.
공주는 짐짓 화난 얼굴로 시아티를 꾸짖었다.
“시아티! 그런 소리를 함부로 하면 어떻게 해요!”
“미안해요, 공주님. 하지만 가장 쉬운 방법이잖아.”
“피, 살, 목숨과 명예를 바치겠다뇨! 군국을 무너뜨려도 영광을 누릴 이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우리는 동지를 위해 싸우는 거예요!”
“영광을 누려요? 너무 먼 미래의 일이네요. 멍청한 나는 잘 모르겠어.”
“시아티!”
마지막 공주와 첫번째 레지스탕스.
둘에게는 이러한 잔소리에 가까운 문답이 서로 익숙한 모양새였다. 공주의 투정을 하나하나 받아준 시아티는 능숙하게 공주를 다독였다.
“공주님. 진정해요. 최소한 공주님이 저보다는 먼저 죽게 하지 않을 테니까.”
“후우. 시아티. 제 말은… 아니, 우리는 손님 된 처지니 나중에 이야기를 나누도록 해요.”
‘다들, 왜 뭐만 하면 목숨을 주겠다 목숨을 바치겠다 이러는 거예요…! 살아있는 편이 더 할 수 있는 게 많은데, 무책임하기는! 멍청이! 바보!’
분이 풀리지 않아 마음속으로 '심한 욕'을 해댄 공주는 시아티 때문에 미루어졌던 인사를 재개했다.
공주가 작게 심호흡했다.
길고 풍성한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호수처럼 맑고 푸른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왕가의 상징은 고귀한 연보랏빛 머리카락이나, 흉조가 있을 때 연분홍빛이 도는 후계가 나타난다고 한다.
왕가에게는 흉한 일이었을지는 몰라도 공주에게는 행운이었다. 왕가가 이 사실을 철저히 숨긴 덕분에 그녀는 몇 차례 위험한 고비를 넘겼으니까.
왕국은 무너졌어도 왕가의 피는 여전한지, 드레스가 잘 어울리는 인형 같은 외모였다. 그러나 그녀는 수수한 의복 패킷 셔츠와 치마를 입고 있어서 목 위아래가 따로 노는 듯한 위화감이 들었다. 그나마 어깨에 걸친 숄 덕분에 최소한의 위엄이 살았다.
위화감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우아함을 뽐내며, 공주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예리엔. 예리엔 그란디오모르. 그란디오모르 왕가의 마지막 혈통이며, 레지스탕스의 대표입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타고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우아한 몸짓. 수줍은 미소.
왕국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잠깐이나마 잊게 만드는 인사.
그러나 이중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경악은커녕 관심을 보이는 이조차 드물었다.
나야 생각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공주였지. 자주 봐서 아는데. 지금은 그때보단 훨씬 순해 보이네. 수호기사랑 친구가 다 살아있어서 그런가.’
‘왕국이 멸망하고, 부흥군이 왕가의 마지막 혈육이라. 흔한 일이구나.’
‘…예상했던 바지만. 이 정보를 넘기면… 내가 직접, 남은 아이들을 죽이는 셈이지. 해야 할까?’
이중 누구도 공주라는 신분에 놀라거나 압도당하지 않았다. 심지어 반가워하지도 않았다.
“멍! 반가워! 반가워! 어? 너, 왕?”
…어떤 사람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답례로 아지에게 꾸벅 인사한 공주는, 곧이어 따라와야 할 반응을 기다리다… 이들의 무심한 눈빛을 읽고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어라? 사실, 저… 이곳에서는 평범한 축에 속하는 걸까요?’
마지막 공주를 영접한 것치고는 미적지근한 반응에, 공주는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 실망했다.
‘앗, 이러면 안 되는데! 겸손해야 해요, 겸손! 저는 일개 레지스탕스! 공주라고 특권을 바라지는 말자고요!’
그리고 자기가 실망했다는 사실에 실망하고는, 얼굴을 도리도리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