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5 왔노라
‘어라? 어쩌다 군국과 전면전을 하게 되었을까요? 저는 그냥 스카우트를 하려고 접촉했을 뿐인데…?’
얼떨결에 결정된 전면전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레지스탕스에게 중요 정보를 건넨 회귀자도 회귀자였지만, 공격을 준비하라고 단호한 명령을 내린 공주 역시도 얼떨떨하기만 했다.
어쨌건, 해야 할 일은 누군가 해야 하는 법.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공주가 수호기사를 향해 명령했다.
“경. 명령이에요. 레지스탕스에 이 소식을 전하고, 전력을 갖춰서 움직여줄 사람이 필요해요.”
“네.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왜 저에게?”
당연히, 그보고 하라는 뜻이다. 그 말 속에 담긴 뜻을 알아챈 수호기사의 표정이 급변했다.
수호기사 란데마이어 경은 레지스탕스에서 가장 젊고 강력한 기사. 저항군을 움직이는 것은 그의 일이다. 아무런 문제도 없다.
다만, 그는 지휘관인 동시에 동시에 공주의 수호기사이기도 하다.
레지스탕스 최강이라는 수호기사 역시도 몸은 하나이니, 한쪽의 일에 충실해지면 필연적으로 다른 쪽 일에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하시라고요.”
호위 대상인 공주가 그녀의 호위를 중단하고, 되돌아가 병력을 이끌고 오라 명령하고 있었다. 수호기사가 다급히 말했다.
“안 됩니다, 공주님!”
“몇 번 생각해보건대, 아무래도 이 방법밖엔 없어요.”
“여기에는 육장성도 있습니다!”
“스스로 붙잡힌 하멜른의 마지막 졸업생이에요. 보세요. 시아티에게 꼼짝을 못하잖아요? 시아티가 안전한 만큼 저도 안전해요.”
“시아티는 넓은 평원에 혼자 있어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불태울 게 없으면 자기 자신을 태울 녀석이니까! 차라리 제가 남을 테니, 레지스탕스를 공주님께서 지휘해주십시오! 공주님께서는 그들의 주인이지 않습니까!”
공주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전혀 아니었다. 공주에게는 주인의식도 없고 그들의 위에 군림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그 자리를 떠맡은 이유는 의무감 때문이며, 그녀의 역할도 얼굴과 혈통을 내세워 사람을 모을 상징에 불과하다.
공주는 제물이었다.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부정하고자 잔당들이 장작 삼아 찾아낸 제물.
공주가 자조적으로 말했다.
“얼굴마담이죠. 왕국의 상징이기도 하고, 값비싼 제물이기도 하고. 어쨌건 타 세력과의 교섭이 제게 주어진 유일한 역할이니, 전 제 역할을 할 장소에 있어야죠.”
“제물이라뇨! 어떤 무도한 이가 그딴 망발을 해댑니까?! 말씀만 해주십시오. 당장 극형에 처하겠습니다!”
“전데요. 어떤 극형에 처해줄래요?”
“아까 한 말은 취소입니다! 공주님, 재고해주십시오!”
수호기사는 완고했다. 당연한 일이다. 왕가의 마지막 후예이자, 애지중지 지켜야 할 공주를 사상 최악의 범죄자들 속에 놔두고 간다니?
지치고 닳은 다른 레지스탕스는 몰라도, 그가 왕가를 향해 가진 충성심은 진짜였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을 홀로 둘 수는 없습니다! 하물며 머지않아 전투가 일어날 최전선에선!”
일시적인 연합이라고 해도 그렇다. 첩자를 통해 그들이 생각보다 위험하지는 않다는 정보는 접했지만, 그건 사령부를 습격하기 전의 일이다.
고작 다섯의 인원이서 사령부를 습격하려는 이들은 지극히 위험한 존재다.
성품이 나쁘단 게 아니라, 비상식적인 힘을 가지고 비정상적인 선택을 할 의지가 있다는 점에서.
연이은 반대에 공주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될 것 같네요.”
“송구합니다만, 나쁜 말을 하셔도 제 선택에는 변함이 없을 겁니다.”
수호기사는 굳센 의지로 공주의 투정이나 화를 다 받아내겠다고 결심했다.
공주가 한 마디를 꺼내기 전까지는.
“오빠. 장난해?”
몇 년 만에 들어보는 호칭이었으나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이 앞서 들었다. 수호기사가 흠칫 몸을 떠는 동안, 공주는 위장 신분이었을 때의 기억을 끌어모아 외쳤다.
“아니면 어쩔까요? 여기에도 최소한 한 명은 있어야 하잖아요? 우리는 군국이 아니에요. 통신병이 없다고요. 본거지를 떠야 하니까 대백벽도 못 쓰면 누가 연락하고 어떻게 교섭해요?”
“그, 그건. 시아티가 있는데 굳이 공주님께서 하실 필요가.”
“참 좋겠네요! 시아티에게 교섭을 맡기면, 어느 순간 전병력을 이끌고 사령부에 돌격하는 우리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분명히 그렇긴 하지만.”
“차라리 오빠가 여기 있고 내가 본거지로 갈까요? 철모르는 얼굴마담이 거기서 사람들 이끌면 퍽이나 말 잘 듣겠다.”
“잠깐만, 기다려주십시.”
“한시가 촉박하다고 했죠! 빨리 안 가요?!”
공주가 냅다 소리치자, 수호기사는 그 서슬 퍼런 기색에 찔끔해서 물러났다. 기사로서는 충직할지 몰라도 여동생 모드로 들어간 공주를 이길 순 없었다.
수호기사는 공주의 기세에 밀려 컨테이너 입구까지 밀려났다. 지금도 메타컨베이어 벨트는 시시각각 이동하고 있다. 움직일 거라면 빨리 움직이는 편이 좋았다.
그는 컨테이너 입구를 열고 나가기 직전, 잠시 머뭇거리며 공주에게 강조했다.
“…셀피는 놔두고 갈 테니까, 여차할 때는 셀피에 올라타 몸을 빼십시오. 셀피는 천 리를 가는 백마이니 누구도 따라잡지 못할 겁니다. 몸단장은 시아티를 시키시고, 여분의 의복 패킷은 여기….”
“가라고!”
수호기사는 걱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눈으로 공주를 바라보다가,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려 컨테이너 밖으로 나섰다. 그는 잽싸게 주위를 살피고는 벨트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아마 병력을 모아서 금방 따라붙겠지.
‘…갔죠? 후우, 다행이에요. ’
그의 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화난 표정을 짓고 있던 공주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풀었다. 그때, 회귀자가 그녀 뒤로 성큼 다가갔다.
“잠깐만. 공주. 우리를 따라오게?”
거리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갑작스러운 접근에 공주가 바짝 긴장해서 등을 꼿꼿이 세웠다.
“네, 네엣!”
“우리는 지금 놀러 가는 거 아닌데.”
회귀자가 싸늘하게 지적하자 공주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공주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첩자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제가 있는 편이 나을 거예요. 저는 기사들이 하기에는 너무 좀스러운, 이런저런 교섭을 도맡아 했으니까요.”
“죽을 수도 있는데?”
“저도 레지스탕스에요. 각오는 되어있어요. 그리고… 따로 원하는 것도 있고요.”
“원하는 게 뭐야?”
공주가 잠시 말하기를 주저했다. 그렇지만 사령부 공격이 확실해진 이상, 지금 공주를 도울 수 있는 건 회귀자밖에 없었다.
‘기사님께서는 우리에게 귀중한 정보를 주셨죠. 여기서 제 속내를 숨기는 건 배은망덕한 일. 방해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사실대로 말하는 편이 낫겠죠…!’
“저는… 사령부와 만나고 싶어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공주가 가슴 앞에 양손을 모으고는 담담히 고백했다.
“여기서 하는 말이지만, 저는 군국이 사악하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란디오모르 왕가는 천운의 혈통. 천운을 타고났으면서 백성에게 끌어 내려진… 왕국은 이미 실패한 나라였어요.”
레지스탕스이자 왕국의 공주, 그리고 천운을 타고난 공주는 레지스탕스 안에서는 차마 말하지 못했던 진심을 토로했다. 왜 하필 대상이 회귀자인지는… 의외지만. 어쨌든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전 회차에서 인연이 있어서 그런지, 공주의 은밀한 속내에 충분히 공감했으니까.
회귀자도 공주와 비슷한 생각이기도 했고.
회귀자가 피식 웃었다.
“공주가 할 말은 아니네.”
“저만이 할 수 있는 말이죠. 그게 왕가의 의무가 아닐까요.”
“그래서, 어쩌게? 사령부에게 투항이라도 하게?”
“…그럴 수는 없죠. 해줄 것 같지도 않고. 저 같은 경우,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군국의 위협이니까… 제 생각 여부와는 상관없이, 저와 군국은 같은 편이 되지 못해요.”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공주는 쓸쓸함을 억눌러 삼키고는 다시 말했다.
“하지만 저는 몰라도, 군국은 더 나은 나라가 될 수 있어요. 억누르고 핍박하고 착취하기보다, 모두가 함께 나아가는 이상적인 나라가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사령부는 억지로 눈을 돌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물어보고 싶어요.”
“만나면 십중팔구 죽을 텐데.”
“에헤헤. 공주로 태어난 순간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요, 뭐.”
공주는 멋쩍게 웃었다. 체념의 미소였다.
“협력에 대한 대가로 해주셔도 좋아요. 아니라면 그냥 저를 첩자 삼아서 먼저 잠입시킨다고 생각하셔도 돼요. 혹, 사령부를 공격하기 전에… 제가 잠시 그들과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공주가 양손을 모으고는 간절히 부탁해왔다. 애처롭고도 처량해서, 티끌만큼이라도 낭만이 있는 남자라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었다.
하지만 회귀자의 낭만은 다 닳아 없어졌고, 심지어 남자도 아니다. 남자의 가슴을 울릴 몸짓 앞에서도 회귀자는 담담했다.
“나도 사령부가 어디 있는지 몰라.”
‘과거에 군국을 무너뜨렸을 때도 사령부와 그 안에서 명령을 내리는 총통은 찾지 못했어. 그 회차가 끝날 때까지. 군국이 멸망하면, 그대로 증발하고는 했지.’
응? 모른다고?
이건 나도 예상 밖이었다. 당연히 위치를 아니까 쳐들어가려는 줄 알았는데, 13회차 동안 군국을 말아먹으면서도 못 찾았다고?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가게?
다행히 회귀자가 그만큼 무대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명령이 어디서 전해지는지는 알아. 아마 거기에 가면… 원하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야. 그쪽이 대화에 응할지는 미지수지만.”
“그곳이 어딘데요?”
“지휘통제소.”
회귀자가 이전 회차의 기억을 회상했다. 내가 명확하게 읽지 못하는 시공간 너머에서, 어렴풋한 이미지가 서서히 그려졌다.
사령부 한구석, 창고 중 일부에는 군인의 출입이 극단적으로 적은 어떤 공간이 있다. 대외적으로 통신병이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작 누가 통신병인지 아무도 모르는 베일에 싸인 공간.
탄탈로스 붕괴 때 보았던, 창문 없는 방과 비슷한 구조물.
회귀자는 그것을 떠올리며, 눈앞의 공주에 조금 더 지치고 나이 든 공주를 겹쳐보았다. 아무래도 과거에 만났던 공주의 모습인 듯했다.
‘저번 회차의 너는 이보단 더 여유가 없었지. 대화…하고는 싶었지만, 동료나 자기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노리지는 않았어. 어디, 이번에는….’
“사령부의 커다란 기지 한구석, 조그만 기지에 사령부의 지령을 전달하는 스물여섯 명의 통신병이 있어. 사령부와 직접 맞닿는 유일한 창구야. 어차피 전략적 목표이기도 하니까… 그곳을 점령한다면, 네가 원하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야.”
이전 회차 동료였던 이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회귀자다. 비교적 부드러운 말투로 친절을 베풀자, 공주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감사합니다!”
‘역시, 좋은 분이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