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7 이겼노라
센트럴 기착지에서 짐을 옮기며 살아가는 1레벨 시민 브렌에게는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레지스탕스라는 사실이었다.
군국은 실패자들에게 가혹하다…기보다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시민등록만 마친 채로 방목된 그들에게 남은 일생은 평생 노역하다가 죽는 게 전부. 지능이 부족해 중등학교도 가지 못하는 브렌이었으나, 그의 미래는 그조차 쉽게 알 정도로 뻔했다.
브렌의 앞에는 톱니바퀴의 삶이 주어졌다. 톱니바퀴가 그러하듯, 브렌은 무언가 의구심도 느끼지 못하고 굴러갔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 그것이 사실 허상이라고 믿는 것조차 허용하는 상당한 자유의지다.
어제와 똑같은 일상이 내일도 반복된다. 이 가설은 브렌이 지금까지 살아온 나날에 의해 귀납적으로 증명되었다. 어제는 재미가 없었고 그다지 기쁜 일도 없었기에 내일도 그러할 것이 분명했다. 브렌은 절망 이상의 무기력함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하지만 그런 그의 삶에 변화가 생겼다. 계기는 한 낯선 방문자였다.
맥주 한 병을 들고 찾아온 젊은 방문자는 그와 대작하여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년은 유쾌했고, 그 때문에 브렌의 기분도 점차 좋아졌다. 얼큰하게 취한 청년이 철없이 군국 욕을 시작할 때도 브렌은 낄낄 웃으면서 맞장구를 칠 뿐이었다.
그날 이후 브렌은 레지스탕스가 되었다.
이유는 소급되었다. 레지스탕스가 된 이후 그의 삶은 흥미진진해졌다. 어떤 숭고한 지령이 떨어질지, 그가 얼마나 멋있게 그 지령을 해낼 수 있을지 상상하기만 해도 신이 났다. 혹시 공안이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적절한 긴장감까지 포함하여 브렌은 보람을 느꼈다.
최소한, 내일이 어제 같지는 않았으니까.
레지스탕스가 되고 그의 인생이 달라졌다. 하루하루가 보람찼다. 보람찼다.
그가 엄청나게 철두철미하고 주의 깊은 성격은 아니었으나, 지금까지 레지스탕스로 살아오면서 군국의 감시망에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직 그 어떤 지령도 내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너무 열심히 일한 나머지 감독관의 평가가 좋아졌다… 그래 봐야 변하는 건 없었지만.
하지만 그는 위대한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레지스탕스의 편에 서서 움직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 하루를 위해 지금까지 살아왔으니까.
그런 그가 오늘도 힘차게 일을 해내던 무렵이었다. 저쪽에서 젊은 노역자 한 명이 다가왔다. 약간 어두운 낯빛을 한 청년이 그의 어깨를 짚으며 속삭였다.
“브렌 씨. 지령입니다.”
그날이 왔다. 브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짧고 간결하며 시간에 쫓기는 촉박한 브리핑이었다.
목표는 사령부 타격. 개시는 센트럴 기착지 도착 직후. 회귀자는 모두를 모아놓고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사령부로 향하는 길에는 검문소를 비롯한 주둔군 부대가 쫙 깔려있어. 검문 역시 철저하지. 여기서부터는 숨어드는 건 불가능해.”
강행돌파. 회귀자가 내세운 방법은 실로 쉽고 단순했다.
“일단 대외적으로는 레지스탕스의 습격으로 포장할 거야. 센트럴 기착지, 거기에서 나는 관리소장을 비롯한 다른 고위 관리직들을 제압할게. 다른 사람들은 일단 사령부로 가. 금방 정리하고 따라갈 테니까.”
센트럴 기착지는 사령부와 직접 연결되는, 메타컨베이어 벨트를 통틀어서도 가장 거대한 기착지. 장성이 상주하여 지키고 있는 최고 중요시설이며, 비상시 근방에 위치한 세 개의 부대에서 정예병력이 파견된다. 그런 곳을 단숨에 제압하겠다는 회귀자의 말은 너무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회귀자의 힘은 만능에 가깝다. 극의에 다다르지는 못했지만, 다채로운 수단과 그것을 극성에 가깝게 휘두르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할 수 있겠어요?”
“맡겨 둬.”
작심한 회귀자가 초래한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비상! 비상! 적습이다!”
“모두 도망쳐어어어엇!”
그들이 한 컨테이너를 연 순간, 그 안에서 새하얀 연기가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회귀자가 만들어낸 구름이었다.
풍운우로 상설뇌전.
천앵의 본질은 압축공간, 그 안에는 하늘에서만 존재하는 구름과 바람을 담을 수 있다. 회귀자는 컨테이너 하나를 비우고는 몇 시간 동안 그 안에서 힘을 축적했다. 그리고 단숨에 해방했다.
센트럴 기착지에 국지적인 적란운이 드리워졌다. 평범한 적란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면 바로 위에서부터 탑처럼 쌓여있다는 점이다. 한치 앖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칠색안을 킨 회귀자만이 성큼성큼 걸었다.
순간적으로 지휘계통이 마비되었다.
“와아아아아아! 레지스탕스다! 레지스탕스의 습격이다아아아!”
“모두 도망쳐! 이러다 다 죽어!”
“위험해! 피가 빨려서 흡혈귀가 되어버렷!”
당황한 노역자들, 그 사이에서 혼란을 부추기는 레지스탕스. 긴급히 대처하려는 군인과 감독관들이 섞여 다시 없을 혼돈이 일어났다. 소리라도 잘 들렸으면 모르나, 이곳은 기착지. 커다란 크레인과 수많은 노역자들이 각기 다른 소음을 낸다. 소리는 열 걸음도 가지 못하고 구름 속에 묻혔다.
“안되겠어! 소장님을 모셔와!”
가장 성실하고 뛰어난 군인들은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상급자를 찾아갔다. 센트럴 기착지의 관리소장은 장성. 장성이라면 이 혼란을 정리하고 모두를 이끌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군국이 장성으로 인정하는 조건은 전투 유지력이다. 모두의 위에 서야 하는 장군은 쉽게 죽어선 안 된다. 마지막까서 살아남아 군인을 이끌어야 한다.
그렇기에 장성은 전부 감기공을 익혀 전신을 강화할 수 있는 강자. 체내에 일심을 바로세워 언제나 일정한 상태를 유지한다. 그야말로 전쟁기계.
군인들은 다급히 관리소장에게 달려가, 혼란에 빠진 그들을 지휘해달라 요청하려고 했다.
“소장님! 지휘를…!”
그러나 사명감을 지닌 그들이 소장실을 방문했을 땐, 관리소장은 이미 기절한 채 회귀자의 발아래 깔린 상태였다.
격한 전투를 끝마치고 호흡을 고르던 회귀자는 낯선 손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녕.”
“너, 너는 누구냐…! 악!”
지금이다. 문 뒤에 숨어있던 나는 몽둥이를 휘둘러 그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상급보급관 케테른 상사는 변변찮은 저항도 못 하고 쓰러졌다.
나는 벌벌 떨면서 수많은 피를 머금은 몽둥이를 내려놓았다.
“으아아. 저는 비전투요원인데 도대체 왜 여기에서 일하는 건데요….”
“비전투요원 치고는 제법 잘 싸우는데.”
“그야 저는 잔챙이만 골라서, 뒤치기로 쓰러뜨렸으니까요! 그나저나 왜 저를 콕 집어서 데려온 거예요? 싸움이라면 더 익숙한 사람이 많잖아요!”
회귀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직 낮이니까 티르칸쟈카의 힘은 아끼는 게 좋고. 개의 왕이나 고양이의 왕은 뜻대로 잘 안 움직여주고. 그렇다면 다음 가는 네가 제격이잖아?”
“다음가다니! 저처럼 평범한 잡범에게는 너무 위험한 일이라고요!”
“…네가 아직 뭘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평범하다고 해줄 테니까. 뭐 특이사항은 없어?”
“아, 맞다. 아까 오면서 금고를 하나 봤는데. 털 시간은 없겠죠?”
“안내해. 포켓에 통째로 집어넣게.”
이 와중에도 회귀자는 파밍까지 꼼꼼하게 끝마쳤다. 5레벨 연금강으로 만들어진 금고는 금고째로 회귀자의 공간 금고, 포켓 속으로 쏙 들어갔다.
포켓이라는 저거, 진짜 사기 아이템이야. 어쩌면 천앵이나 지잔보다도 사기적일지도.
‘…싸움에 익숙해. 분명 강력한 힘을 보인 적은 없는데, 같이 싸우면 묘하게 편하단 말이지. 거슬리지도 않고, 꼼꼼하고. 적의 허점을 잘 짚는달까. 앞으로도 자주 써먹자.’
써먹지 마! 나는 아껴달라고! 톡 치면 죽는 개복치처럼 생각하란 말이야!
대강 정리를 끝낸 나와 회귀자는 기착지 사무소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밖은 혼란스러운 상태였지만, 그중에서 약간 정돈된 움직임이 있었다. 기착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탈출하려는 레지스탕스의 무리였다.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청년이 있었다. 노역자인 듯한 몰골이면서도 장교인 듯 여유로운 태도의 그는 자연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나는 그가 누군지 깨달았다.
바람을 잘 읽던 첸토. 하멜른의 생존자. 그 많은 아이 중 몇 안 되는,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의지를 갖고 강바닥을 아득바득 헤쳐나간 한 명이었다.
무슨 일을 하나 했더니, 레지스탕스에서 조력자를 찾아다니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직간접적인 수많은 내부 협력자를 만드는 침투조의 중책을 맡은 것이었다. 한때 장교를 꿈꾸었던 이가 레지스탕스 전도사라니. 이것도 출세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타락이라고 해야 하나.
그는 비전투원 레지스탕스를 이끌고, 기착지에 미리 봐둔 협력자들과 합류해서 벨트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북부는 전화에 휩싸이게 될 터. 본거지를 떠나야 하는 레지스탕스가 단시간에 도망칠 방법은 메타컨베이어 벨트뿐이다.
저들은 도망치지만 군국은 그들을 쫓지 못할 것이다. 저들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을 테니까.
마침 회귀자가 또다른 기척을 알아차리고는 말했다.
“온다. 인근 부대의 병력들이야.”
“좋아요. 우리도 이제 물러나죠! 우리가 사령부 쪽으로 남하하면 저들은 우리를 쫓을 거예요!”
“그냥 물러나? 좀 아쉬운데.”
회귀자는 천앵과 지잔을 교차해서 들었다. 두 칼날을 한 점에서 맞댄 회귀자는 뭉툭한 칼날을 연마하는 것처럼 천앵의 칼날을 지잔의 몸체 위로 스윽 밀었다. 그러자 두 칼날이 맞닿는 부분에서 조금 특별한 마찰이 일어났다.
본래 칼날과 칼날을 서로 문대면 금속이 부스러지며 불똥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하늘의 검과 땅의 검끼리 마찰하면?
나는 모른다. 하늘의 검이랑 땅의 검을 처음 봤기 때문에.
하지만 하늘과 땅이 마찰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는지, 배워서 알고 있다.
천신의 노성. 벼락이다.
빠지지지직.
두 보검의 말단에서 엄청난 양의 벼락이 쏟아져나왔다. 이 거리에서도 온몸에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진다. 허공에 샛노란 균열이 생기고, 그 틈에서 수도꼭지가 틀어진 것처럼 벼락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렇게 스며 나온 벼락은 사방을 가득 메운 구름으로 스며들었다. 회귀자가 땅 위에 불러일으킨 구름이 점차 어두워지며 불길하게 트림했다. 마른 하늘에서도 벼락은 치지만, 원래 땅이 있어야 벼락이 완전해지는 법.
꿈틀거리는 번개를 손에 쥔 회귀자가 전능감에 취해 중얼거렸다.
“천지검곤. 벼락쓸기.”
“필살기 이름을 자기 입으로 말하네. 속성부터 공격 형식까지 설명해주면 다 피하지 않을까요?”
“시, 시끄러워! 위력이 약하고 동작이 커서 감 좋은 강자에게는 잘 안 먹혀!”
“아하. 강약약강인 기술이라는 거구나.”
“광범위 기술이라고!”
겉멋이야 어쨌든. 회귀자의 검술은 보검을 매개로 자기 마법까지 더해서 휘두르는 마검.
회귀자가 힘차게 지잔을 끌어당기자, 줄기줄기 파고드는 수십 가닥의 벼락이 거대한 손아귀처럼 땅을 긁으며 휘둘러졌다.
“끄아아아악!”
“거허어어억….”
땅이 통째로 뒤집어지며 그 지역에 있던 병사들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쓰러졌다. 군국은 이제 적을 공격하는 동시에 부상자 처리도 해야 할 것이었다.
뒤집어진 땅, 벼락이 번쩍이는 구름, 그 안에서 감전되어 쓰러진 인간들. 나는 일개 인간이 일으켰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참상을 눈애 담았다.
“…셰이 씨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기착지에 별거 없는 건지 인지부조화가 오네요. 사령부도 이만큼 쉬웠으면 좋겠는데.”
“육장성이랑 장성만 조심하면 돼. 지금 꽤 많은 숫자가 바깥에 나가있으니 별 차이 없을걸.”
“뭐, 싸우는 건 셰이 씨니까요. 강약약강 기술만 잘 써도 셰이 씨보다 약한 이들은 다 쓰러뜨리겠네요! 힘내요!”
“광범위 기술이라고 했지! 너야말로 슬슬 제대로 싸워! 언제까지 설렁설렁 할 거야?!”
나는 이미 전력을 다하는 중이거든. 사람 보는 눈을 키워!
대충 보니 이미 기착지에는 군인 혹은 경련하는 부상자밖에 남지 않았다. 노역자들은 대부분 도망쳤고, 레지스탕스는 벨트 위에 몸을 싣고 떠난 모양이었다.
적을 찾기도 힘들 지경에 이른 그때, 저편에서 기착지를 지원하려고 온 병단이 나타났다. 장비를 고루 갖춘 전쟁용 부대였다.
“자, 이제 진짜 빠지자. 너무 신을 내서 기력을 낭비했다간 낭패니까.”
“신이 났다는 자각도 있고, 낭비라는 자각은 있었네요. 알면서 그랬다니 벌써 낭패인데요?”
“쫑알쫑알 시끄럽긴! 됐으니까 내 손을 잡아! 마도병단이 요격하면 귀찮아지니까 그 전에 전속력으로 날아갈게!”
“잠깐만요. 날아가는데 왜 손을 잡아야 하죠? 설마, 아니죠? 셰이 씨 손에 매달려서 날아가는 거어어어어어언!”
거기다 하필 한손이야! 나는 철봉에 매달릴 때도 한손으로는 안 매달리는데!
회귀자의 손에 매달린 나는 앞뒤로 대롱대롱 흔들리며, 한 손 매달리기 신기록을 갱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