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55화 (255/384)

EP.255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4

공주는 이제 왕이 될 수 없고, 이 나라는 왕국이 아니다. 군인이 다스리며 총과 칼로 평화를 강요하는 군국이다. 사령부의 명령 아래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이곳에서 그 어떤 인간도 책임감을 느끼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를 만든 원흉, 그란디오모르 왕과 왕비의 유일한 자손인 공주는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레지스탕스가 된 왕국의 잔당은 물론, 이 나라의 국민 전체를 향해서.

내 말을 농담으로 들을 법도 했지만, 공주는 진담으로 듣고는 냉큼 부정했다.

“저를 자꾸 시험하려고 들지 마세요. 저런 곳은 없어져야 해요! 상대가 비록 죄인이라고 해도, 영원히 고통을 주는 지옥은 현실에 있어선 안 돼요!”

“왕도 아니면서 백성의 삶에 관심이 많으시네요.”

“그딴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저 도리를 따를 뿐이에요! 애초에 휴이 님도 저 안의 모습을 보고 분개하시지 않으셨나요!”

“아, 저는 그 부분이 화가 난 게 아니에요.”

야만이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 문명은 할 수 없는 것을 정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살인은 기본이고, 도둑질이나 협박, 사기나 선동, 배교와 반란 등등. 가끔 몇 가지가 빠질 때도 있고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금기가 들어갈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문명이란 인간에게서 무언가를 거세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야만적이냐 문명적이냐 묻는다면, 어감은 별로 안 좋지만 분명히 야만적이겠지. 저지를 수 있는 범죄는 다 저지르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나는 개인이고, 일개 인간이 끼칠 수 있는 영향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악영향을 끼쳤더라고 해도 붙잡아 처벌하면 그만.

나는 실제로 처벌당하기까지 했으니 완벽한 예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군국은?

“대의를 위해, 나라를 위해 별 해괴한 구실을 다 갖다 붙이면서 막되게 행동하는 녀석들은 있었어요. 하지만 어쨌든 그들의 행동을 옹호하기 위해 같다 붙인 거란 말이죠. 그에 비해, 이건 진짜거든요. 나라의 이름으로 행했고, 나라를 위해서 한 행동이에요. 심지어 나라가 직접 시킨 듯한 기분도 들죠.”

국민을 착취하는 노역장을 만든다. 다 국가를 위해서다.

엄정한 법으로 모두를 다스린다. 전부 국가를 위해서다.

온갖 발명품을 만들고 그것을 널리 퍼뜨리나, 그게 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안다.

생체 단말을 꿰뚫은 갈고리.

의복 패킷으로 만든 구속복.

신체를 대가로 시전하는 제식 마법.

오직 영양만 보존하는 압축 통조림.

맛이나 행복은 애당초 고려하지 않은 키메라 콩.

스스로 돌아가는 탓에 인간을 거기에 맞추어야 하는 우레바퀴.

피, 땀, 시체로 일궈내고 인간을 윤활유로 써서 움직이는 메타컨베이어 벨트.

군국이 특히 악랄하게 사용하는 것도 있지만, 그 7대 발명품 모두 인간을 향한 애정이 결핍되어 있다. 모든 것을 걸러내고 남은 것은 유용성 하나.

공주도 내 말을 긍정했다.

“맞아요. 다른 나라도 그렇지만, 군국은 그 정도가 특히 심해요. 그나마 다행인 건, 처벌이 가혹해서 그 와중에 중간에서 착복하는 이들이 없다는 것 정도….”

“네. 특히 그렇죠. 군국은 군국을 제외한 다른 누군가가 죄를 짓는 것을 두고 보지 않아요. 군국에서 죄를 저지를 수 있는 건 오직 군국뿐이니까.”

“…네? 죄요?”

“군국에는 여유가 있어요. 부나 행복, 시간이나 자부심을 나누어 줄 잉여자원이 분명히 있단 말이에요. 그러나 군국은 그것을 절대 나누지 않고 끊임없이 비축해요.”

공주는 아까 나에게 발끈했던 사실조차 잊은 채로 내 말에 집중했다.

“…그렇다면, 휴이 님은. 그 모든 것을 손에 거머쥐며 이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막후의 권력자를 향해 화가 나신 거군요?”

“글쎄요? 그가 누군지도, 어디 있는지도 알려지지 않고, 존재여부조차 불명확한데 어떻게 화를 낼 수 있겠어요?”

“아, 죄송해요. 표현을 바꿀게요. 휴이 님은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 그 존재를 찾고 싶으신 거죠?”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이, 공주는 손을 말아쥐고 손바닥을 쳤다. 방금 전까지 나에게 따박따박 대꾸했던 기세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충은요. 하지만 몇 개월 군국을 떠돌아다니고, 수도에서 몇 년 살았는데도 지금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단 말이죠.”

독심술사인 내 ‘발견’은 차원을 달리한다. 만일 그가 정체와 신분을 속이고 하층민인 척 평화롭게 살고 있었어도, 마음을 읽는 나와 마주친다면 즉각 정체가 드러난다.

만일 어딘가 비밀스러운 기지에서 은둔하고 있어도, 단 한 번이라도 바깥에 나왔다면. 그러다 우연히 나와 마주쳤다면. 먼발치에서 내가 흘겨보기만 해도 전부 알아냈을 것이다.

꼭 그런 막후의 지배자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권력자는 필연적으로 수많은 이들과 관계될 수밖에 없다. 그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거나 접촉한 존재가 있다면. 나는 실 끄트머리를 붙잡고는 찬찬히 그것을 풀어나갔을 거다.

…뭐, 결국 찾지 못했고. 목숨을 걸 정도까지 대단한 목표는 아니라서 느긋하게 하고 있었지만.

“그래서… 아까와 같은 질문으로 저를 시험하신 거군요.”

“네?”

시험? 웬 시험. 나는 문제 풀기의 달인이지 문제 내기에는 젬병이다. 상대방이 아는 내용은 전부 알지만, 상대방이 모르는 내용을 떠올리지도 못하는 나는 문제를 낼 때 있어서 밑천이 잘 드러난단 말이야.

내가 솔직하게 반문했을 때, 공주는 무슨 말이냐는 듯 내게 물었다.

“레지스탕스인 제가 그 ‘누군가’를 마주치면 어떻게 행동할지 몰랐으니까. 제련소의 존재가 레지스탕스 입장에서는 더 좋지 않냐는 식으로 저를 테스트하셨던 거잖아요.”

‘하긴. 셰이 공의 동료가 그토록 무정한 말을 할 리가 없죠. 저는 또 괜히 그걸 진심으로 받아들여서는! 예리엔 그란디오모르, 더 정진하세요!’

이걸 이렇게 받아들이네. 이 공주는 사람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보는데.

하긴, 귀머거리는 귀가 안 들릴 뿐인데 말을 하지 못하고, 장님은 색이 무엇인지 표현할 수 없다. 인지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무(無)감각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적의에 노출된 적 없는 공주는 적의를 조심하는 법도 배우지 못했다. 태생적으로 위기감이 결여된 정신적 장애인인 것이다.

아니, 천치라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하려나. 천치 같으니.

“눈치가 빠르시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오해다. 원래 나는 공주에게 호기심을 불어넣으려고 하려 했으니까.

이렇게 호기심을 불어넣어야, 나중에 사령부에 잠입할 때 보다 적극적으로 되지 않겠는가.

공주는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세요. 저는 눈앞의 광경에 놀라서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휴이 님은 닥친 일에 매몰되지 않고 이후의 일까지 바라보고 있으셨군요…. 제 부족함을 용서해주시길 바라요. 도움이 되지 못할망정 큰소리나 치다니.”

아니다. 아마 공주는 엄청나게 큰 도움이 될 거다.

아무도 적의를 품지 못하는 권능. 자기 머리에 톱니바퀴를 박아넣은 미친놈 하나가 그녀를 죽일 뻔한 바람에 빛이 좀 바랬지만, 그 더럽게 사기적인 능력을 가만히 썩히고 둘 수는 없지.

그리고.

“뭐, 됐어요. 그것도 결국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가야 할 수 있는 이야기니까.”

“네? 무사히 빠져나가다니요?”

‘여기서 할 일은 전부 끝나지 않았나요? 제련소를 무너뜨리고 사령부로 향하면… 어, 잠깐만? 무너뜨려…?’

알아차렸군.

여기는 함정이다. 그 함정 중에서도 특히 질이 나쁜 종류다.

힘이나 물리력이 아닌, 딜레마 속에 우리를 가두기 때문에.

공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어떻게? 어떻게 무너뜨리죠? 흉악범을 다 죽여야 할까요, 아니면 노역자를 해방시켜야 할까요? 누가, 어떻게 결정하죠?’

제련소 안에서는 알아차리기 힘들다. 왜냐면 그들은 고민하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대본 안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무대 밖의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그렇기에 나와 공주는 빠져나올 필요가 있었다.

나는 공주에게 설명했다.

“연금강 제련소는 진짜 중요한 시설이에요. 사실, 어떤 의미로는 사령부 이상으로 지켜내야 할 목표물이죠.”

비록 연금강이 재고 많은 자원이라지만 무한하지는 않다. 그리고 연금강처럼 온갖 곳에 소모되는 자원은 무한해도 부족한 법이다.

여기서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군국에 존재하는 그 어떤 계획이든 그대로 늦춰진다. 기계처럼 딱딱 돌아가는 군국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게 굴러가야 하는 톱니바퀴가 느려지는 건 절대 원하지 않겠지.

“그래서 군국은 여기에다가 함정을 팠어요. 우리는 멋들어지게 걸리고 말았죠.”

그러니까, 여기서 막는 거다. 영궤라는 강력한 전력을 투입해서라도.

…사실 내가 알아챈 게 아니라, 영궤의 생각을 읽고 뒤늦게 깨달은 거지만! 이 나도 그 대본을 읽고 어라, 이게 큰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아무런 병력도 없었어요! 오기 전에 셰이 공이 확인했잖아요!”

“그러니까 함정인 거죠. 아무도 없으면 안 되는 곳에 코빼기 하나 비치지 않았으니까. 군단조차 소모품으로 보는 군국이라면, 일초지적밖에 되지 않더라도 발목을 잡을 지연 부대가 있었어야 해요. 아무리 지금이 티르의 시간인 밤이라고 해도요.”

실제로 낮에는 지연부대가 도로를 끊고 멀리서 포격을 가했다. 몇 초 지연시키진 못했지만 어쨌건 그게 군국의 방식이다.

공주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 그렇다면. 어떻게 된 거죠? 총사님이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 건가요…?”

“아니요. 리아의 제안은 옳았죠. 덕분에 저들은 압도적인 병력과 화력으로 우리를 찍어누르는 대신, 조잡한 함정 속에 우리를 가두려고 애쓰게 되었으니까요.”

히스토리아의 전략은 지극히 군국스럽다. 행적을 숨기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시설을 골라 선제타격하자는 효율적인 전략이다.

단지, 효율적인만큼 읽히기 쉬웠다. 자동마차 조립 공장을 부수러 방향을 튼 순간 군국도 다음 목표를 어렵잖게 예상했으리라.

그리고 뭣보다 공주, 우리를 함정에 빠뜨린 건 네 동료인 캐러팔드…로부터 정보를 캐낸 영궤 지크흐룬드거든? 어딜 책임전가를 해.

내가 독심술을 쓴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어서 입 다물고 있지, 문책했다면 가장 먼저 네가 심판대에 올랐을 거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이곳은 무대에요. 제련소의 입구부터 최심부까지 가며 노역자가 처한 끔찍한 참상을 눈앞에 관람시켜주는 루트. 그 과정 자체가 일행에게 더욱 큰 고민을 안겨줄 거예요. 다 죽여야 할지, 풀어줘야 할지, 아니면 놔둬야 할지. 리아랑 셰이 씨가 의견충돌을 내고, 티르랑 시아티가 거들어서 혼란스러워질걸요.”

히스토리아는 나름 군국의 장성이다. 자신을 따르는 부하에게 죽음을 명령할 권한이 있는 그녀는 흉악범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회귀자는 후일 넘칠 죄악을 막기 위해서 움직이는 중이다. 그런 그녀에게, 무력한 수많은 노역자를 단숨에 죽이자고 해도 곧바로 수긍할 수 없다.

시아티는 군국에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노역자를 전부 풀어주는 쪽을 선호할 이다. 그게 더 큰 혼란을 부추길 테니까.

그에 비해, 생사에 초연한 티르는 다 시귀로 만든다는 선택지까지 제공할 위인이다.

지크흐룬드가 참모인 나와 갈등 자체를 없앨 수 있는 공주를 떼어놓고자 한 것도 혼란을 부추기기 위해서겠지.

그렇게 시간을 끈 뒤에, 우리가 행동을 취하기 직전. 포위하여 일소할 셈이다.

“정말, 그럴지도 몰라요! 어떻게 하죠?”

충분히 가능성을 짚은 공주는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말했다.

“아니! 휴이 님은 그 모든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 왜 바깥으로 나오신 거죠…?!”

“왜냐면, 준비된 무대를 망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대 바깥으로부터의 침입이거든요.”

“네에?!”

마술과 연극. 이 둘은 모두 관객을 위한 무대를 준비한다. 서로 연기가 필요하다는 점 역시 공통점이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장르의 의무.

연극은 결국 모두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지만, 마술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나야 한다. 그 다른 방향성의 온갖 차이를 낳는다.

슬슬 끝이 보인다. 군국 국경까지 이어질 것만 같았던 콘크리트 외벽도 다 끝나가고, 우리는 제련소 입구의 반대편에 와 있었다.

거기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자동마차를 멈추었다.

“제련소는 문이 없는 건물. 따라서, 입구로부터 가장 먼 이쪽이 바로 최심부죠.”

제련소에는 문이 없다. 벽은 매끈한 피부처럼 계속 늘어져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쪽문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공주가 의아해했다.

“어째서 쪽문조차 만들지 않았을까요? 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대신 건물이 구역별로 분리되어 있었죠? 격벽으로 분리하려고 했나 봐요.”

“그랬다간 불 난 구역 사람들은 도망칠 곳 없을 텐데요?”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은 그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나 보죠.”

공주는 내 대답에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공주를 놔두고 훌쩍 자동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벽 한구석으로 걸어가며 나는 카드를 한 장 꺼내고 훌쩍 뒤집었다. 내가 제일 애용하는 도구, 다이아몬드 1 꼬챙이는 여전한 감각으로 나를 반겼다.

“오랜만이다. 내 친구. 많이 그리웠지?”

“멍! 그립진 않아! 오래 봐와서! 그래도 반가워!”

친구를 불렀다고 모든 인간의 친구가 오네. 나는 뒤따라오는 아지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너는 가서 나비나 가져와. 할 일이 있다.”

“멍!”

아지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비 상자를 챙기러 떠났다. 나는 그동안 꼬챙이를 양손으로 잡고는 회색 콘크리트 벽을 향해 겨누었다.

“흡!”

온 힘을 다한 찌르기. 양손을 모아서 힘껏 내지른 꼬챙이가 콘크리트 벽을 세차게 파고들었다.

…한 1cm 정도.

“역시 콘크리트. 내 힘으로는 꿈쩍도 안 하는군.”

그렇지만 이럴 때를 위해서 대지술이 있지. 무저갱 아래 갇혀있던 바람에 신성력으로 오해받았던 기술이.

꼬챙이를 세게 그었다. 매끈한 회색 벽에 자그맣지만 배덕적인 흠집이 난다. 역사적인 유산에 남긴 낙서 같은, 비가역적이기에 더 해보고 싶어지는 흔적을 새겼다.

“끄응, 이것도 꽤 힘드네….”

나는 꼬챙이를 동그랗게 움직여 폐곡선을 이룬 뒤, 땀방울을 훔치며 한숨을 내쉬었다. 파헤쳐진 콘크리트에서 먼지가 피어오른다.

자, 일할 시간이다. 손을 벽에다 대고, 깊게 심호흡하며, 정신을 집중한다. 아득하고 광대한 땅과 그 위에 기어다니는 하찮은 내 존재를 상기하며 대지술을 썼다.

끼기긱.

꼬챙이로 구분해둔 땅이, 손으로 밀자 단순히 얹혀 있던 것처럼 그대로 밀려났다.

대지는 언제나 그대로이며 영원할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떠오르고, 가라앉고, 부딪히다가 피부가 일어나기도 하는. 그녀의 신체(神體)는 인간의 신체(身體)처럼 변동하는 물질이다.

대지모신도 인간처럼, 피부 아래에서 뜨겁게 맥동하는 새빨간 액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지라 생각하는 그건 사실 그 핏물 위에 얹어진 판(板)에 불과하며, 판은 용암의 혈류를 따라 흐르거나 움직이다가 서로 부딪히며 솟아나기도 한다.

…우리가 산이라고 부르며 우러러보는 게, 대지모신의 입장에선 고작 피부가 튼 것에 불과하다니.

이러니까 마신(魔神)이 될 만하지.

“고작 꼬챙이 따위로 벽을 매끄럽게 잘라내시다니…!”

‘휴이 님도 힘을 보일 기회만 없었을 뿐, 사실 검술의 달인이셨군요! 기공이 경지에 이르렀는지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어요!’

와중에 공주는 입을 틀어막고 놀라고 있다. 내가 기공으로 콘크리트 내부를 파고들어 베어낸 줄 아는 것이다.

어떻게 보는 눈도 없냐. 대지술이잖아. 내 기공이 침투경을 가볍게 쓰는 경지라면 내가 이러고 있겠니?

양손으로 벽을 한껏 더 밀자 잘려나간 조각이 건물 안쪽으로 밀려나 쑥 떨어졌다. 묵직한 소리가 건너편에서 들리고,  동그랗게 난 구멍으로 새카만 어둠이 보였다.

좋아. 여기는 준비 됐고.

“냐하앙…. 놔, 놔라냐. 냐는, 냐는 움직이지 않을 거다냐….”

“멍! 안 돼! 일할 시간! 일 없어, 밥 없어!”

아지는 노동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나비의 뒷목을 물고는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나비가 발톱을 세워 땅에 박고 버티려고 했지만, 아지의 힘 앞에서 나비의 발톱은 땅을 파헤치는 쟁기 수준의 저항밖에 못 했다.

발톱은 여전히 날카롭다. 부수는 데는 차고 넘치겠지.

“준비가 끝났군요.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까, 아지와 나비를 데리고 따라 들어오세요.”

“네…!”

‘절묘한 계획이 있으신 모양이에요! 제가 힘이 된다면, 기꺼이 돕도록 할게요!’

공주가 주먹을 불끈 쥐고는, 구멍을 넘어가는 내 모습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후후, 좋다. 네가 나를 대단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내 계획을 더 따라올 테니까….

어라. 그런데 벽이 생각보다 두껍네. 거의 터널 수준인데. 이러면 구멍이 좀 작은 거 아닌가…. 앗.

“이런, 꼈네요! 공주님, 좀 밀어주실래요?”

‘…계획이, 있으시겠죠?’

벌써 의심하는 거야? 이왕 믿을 거라면 더 팍팍 믿어주라! 유통기한이 너무 짧은 거 아니냐고!

“멍! 밀어! 영, 차! 영, 차!”

“너 말고! 너 말고! 악! 발톱 세우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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