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56화 (256/384)

EP.256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5

최심부 제어실에 들어서기 직전까지도 회귀자와 히스토리아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녀들이 아니라 그 누가 와도 비슷한 고민에 빠졌을 것이다.

회귀자는 지금껏 몇 번이고 반복했는지 모를 대사를 외쳤다.

“무턱이고 다 죽이는 게 능사는 아니라니까!”

히스토리아 역시도 비슷한 논조로 반박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 왜, 무력한 상대는 못 죽이겠니? 그들이 일어서서 결투해야만 죽일 수 있어? 기사 나부랭이 나셨네.”

“아니, 결국 미뤄뒀던 사형이 어쨌든. 그딴 짓거리가 좋게 돌아갈 리 없잖아. 연금강 제련소를 싹 털어버리면 결국 나중에는 무고한 사람까지 잡아 오게 된다니까?”

“기사가 아니라 예언자였어? 미래라도 보고 왔니?”

“응… 아니! 그런 단순한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전투로 이어지지 않기에 끝나지 않을 다툼이었다. 정의도 정답도 없는 문제 앞에서 둘은 갖은 논쟁을 펼쳤으나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캐러팔드’는 당황해하며 긴 복도 끝에 있는 철문을 가리켰다.

“저기, 저곳이 최심부 제어실입니다, 만….”

으르렁거리는 둘 사이에 끼어들려는 캐러팔드를, 시아티가 그의 팔을 당겨 제지했다.

“캐러팔드. 일단 물러나.”

“내가 끼어들 공간이 아닌 것 같아. 이거 어쩌지? 공주님이 계셨어야 했나?”

“…계셨어도 별 차이 없었을걸. 이들은 공주님의 명령을 듣는 사람이 아니니까.”

“이거 곤란한데.”

‘캐러팔드’는 난처한 얼굴을 하면서 내심 웃었다.

연금강 제련소는 군국의 군인조차도 잔혹함에 혀를 내두르는 시설이다. 쇠사슬에 꿰인 채 이동하는 사람들이 그나마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그 끔찍함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 건물에서 그들이 본 건, 작은 우리에 갇힌 채로 비명을 지르는 죄수들이었다. 왼팔을 밖으로 내뻗은 그들의 생체 단말에는 깔때기가 달려있었다.

녹아내린 연금강이 깔때기 위로 떨어진다. 방울져 떨어지지만 소리는 돌멩이 못지않게 둔탁하다. 그러면 녹은 철은 몸으로 퍼져나가서 마력을 잔뜩 흡수하고는, 한 바퀴 돌아 생체 단말로 돌아온다. 강철의 열매가 그의 팔목에 맺힌다.

죄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빠르게 떼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점차 무거워지는 무게에 팔이 꺾이니까.

그렇게 레일에 떨어진 연금강은 어디론가로 실려간다.

위 과정은 그날 치 노역시간이 다할 때까지 기계적으로 반복된다.

'거기! 살려줘! 제발, 뭐든지 할게!'

'푸, 풀어주세요! 앞으로는 절대로 죄를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착하게 살게요!'

구해달라는 아우성이 몰아치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일행은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그러면 도와달라는 호소는 저주로 바뀌어서 쏟아진다. 회귀자와 히스토리아는 그 모든 지옥을 뒤로 한 채 최심부 제어실에 도달했다.

고작 그런 거로 마음의 상처를 입을 만큼 그들이 나약하진 않다. 다만, 고민할 이유는 충분히 되었다.

“뭣보다. 이런 방식으로 한 번 죗값을 치른 이들이잖아. 여기서 우리 멋대로 죽여버리면 좀 그래.”

“군국을 향해 테러를 저지르는 주제에 별 이유가 다 필요하네. 네 억지를 들어주느라 휴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안 봐도 훤해.”

“그 자식 이야기는 갑자기 왜 나와? 아무런 관계 없잖아!”

이들은 알까.

그들에게 보여준 모든 광경은, 사실 ‘캐러팔드’를 연기하는 지크흐룬드가 절묘하게 설계한 것임을.

남몰래 반응을 살핀다. 시선을 향하지 않고 감정을 읽는 건 그의 특기다.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을 구분한 뒤, 한쪽의 반응이 약해진다 싶으면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새로이 루트를 짠다.

결국, 둘의 의견은 완전히 갈라져 서로 대립하게 된다.

‘갈등, 대립, 그리고 고뇌. 완벽한 이야기야. 역시, 그 어떤 호화로운 무대도, 대단한 관객을 모신 극장도. 이 드넓은 세상을 배경으로 짠 무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

‘캐러팔드’는 잠시 그의 아주 예전 모습을 떠올렸다.

제국의 제후국은 말만 제후국이지 사실상 식민지나 다름이 없었다. 식량, 재산, 문화, 사람까지. 제후국은 제국에게 공물을 바치며 명맥을 유지해야 했다.

제국에 바칠 공물 중 가장 주목받은 것이 바로 문화적 자산이었다. 별다른 비용이 들지 않으면서, 제국 고위층의 허영심을 잔뜩 채워주며, 고유한 특색을 가진 문화야말로 제후국의 으뜸 가는 공물이었다.

특히 근래 가장 화제가 되는 건 바로 극(劇). 제후국은 공물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나라에서 직접 극단을 운영하곤 했다.

극단에서 가장 중요한 건, 당연하게도 배우다.

온갖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능력이 필요하다. 뛰어난 암기력, 대상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관찰력, 무대 위에서 영웅담을 재현할 정도의 신체능력, 익힌 지식을 써먹는 응용력 등등.

영궤라 불리기 전 그는 어디 내놔도 꿀릴 것 없는 배우였다.

‘하나, 제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제후국에서는 정작 현실을 비출 수 없었지. 나는 무대 위에서만 살아있던 반송장이었다.’

제국에서 온 관리는 대놓고 뇌물을 받는다. 그러나 누구도 그에 대해 비판하지 못한다. 오히려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뇌물도 뇌물이 아니라 포장해야 하는 처지다.

지크흐룬드는 그 사실이 ‘우스웠다’.

부당하다거나 억울하다거나. 권력 앞에서 울분을 삼킨다거나 하는 저항심은 하나도 없다.

그저 우스웠을 뿐.

부끄럽다면 뇌물을 받지 않으면 된다. 재물이 고프다면 기뻐하며 그것을 취하면 된다.

하나, 겉으로는 고고한 척 잘난 척하며 뒤로는 온갖 접대를 받는 그의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지크흐룬드는 그를 한껏 비꼬았다. 좀스러운 수염을 매달고 우스꽝스러운 연기로 그를 만인의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해학적인 본성을 표출한 것이었으나, 그 결과는 참담했다.

‘아하하핫! 그때의 나는 몰랐겠지! 덕분에 세상을 떠돌아다녀야 할 운명이 되리라곤.’

오랜 배우 생활은 큰 도움이 되었다. 제국에서 쫓아온 무시무시한 추적자를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연기한 덕분에 위기를 몇 차례 넘기기도 했다.

얼굴을 꾸미고. 거주지를 옮기고. 옷을 고치고. 태도를 바꾸고. 인연도 전부 갈아엎으며.

진짜 자신이 누구였는지 다 잊어갈 무렵.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찾아왔다.

‘새로 태어난 나라에서 부정(不正)을 없애고 싶으니까 힘을 빌려달라고! 아하하핫! 말이 되는 소리를. 나는, 딱히 청렴결백을 좋아하진 않는데!’

하지만 지크흐룬드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랜 추격 세월 끝에 지쳐있던 그로선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신상의 위협도 위협이었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자아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지크흐룬드는 타고난 배우였기에, 수십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자기 자신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덮어썼다. 너무나도 대단한 연기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났으나, 정체성을 자주 바꾼 나머지 이제는 원래 자신이 무엇인지 잘 떠오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수십 개의 인격 중 하나가 아닌, 그 모두의 총칭인 ‘자신’을 찾아온 ‘그녀’는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 하나의 닻이었다.

‘아차차! 또 까먹을라. 집중하자. 집중한다. 잊지 않는다. 나는 캐러팔드, 로 분장한 영궤 지크흐룬드.’

마음을 다스린 ‘캐러팔드’는 다시 마음속으로 상을 그렸다. 평범한 체격, 평범한 골격. 아무런 특징도 특별한 인상도 없는, 도화지 같은 남자의 얼굴. ‘캐러팔드’의 연기가 끝나면 돌아가야 할 지크흐룬드의 몸.

수많은 인격과 신분 사이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만든 자아의 닻.

다시 연기를 시작한 지크흐룬드는 즐거이 눈앞의 배우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만든 다툼이 점차 고조되어가고 있다.

본래 이럴 때는 제삼자의 중재가 필요하기 마련이나, 안타깝게도 여기에는 이들을 중재할 사람이 없다.

그나마 비교적 냉정한 티르가 둘을 재촉했다.

[슬슬 방향을 정해두거라. 아니면 내 직접 휴를 데리고 오겠다. 휴가 없으니 도저히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는구나.]

“칫. 알았어. 어쨌든, 이 시설 자체를 파괴할 생각은 있는 거지? 노역자들의 거취를 결정하기 전에, 일단 다 부수고 생각하자….”

회귀자가 단순하고 폭력적인 결론을 내릴 무렵, 그녀는 건너편에서 인기척을 느끼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표정을 바꾼 회귀자는 날카로운 철문 너머를 노려보며 ‘캐러팔드’에게 물었다.

“잠깐. 안에서 기척이 느껴지는데? 이봐, 안에 경비 병력이라도 있어?”

“…그, 글쎄요. 위급 상황이니 그럴지도 모릅니다. 저도 잘은.”

‘경비 병력? 있을 리가 없다. 이 안에 군국의 병력이 숨어 봐야 별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배역간의 갈등에 끼어드는 잡음이 될 뿐이다. 매복한 병력이 등장하는 장면은 한참 나중인데.’

모두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영문 모를 방해자가 나타난 이상, 이제 서로 다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크흐룬드에게는 달갑지 않게도 말이다.

“들어가자! 내가 먼저 진입할게!”

회귀자가 쌍검을 앞으로 내밀고는 냅다 뛰었다. 건너편 복도까지 단 두 걸음 만에 뛰어간 회귀자는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냅다 강철문을 걷어찼다. 기공을 잔뜩 두른 채 내지른 발길질은 3레벨 연금강 강철문도 사정없이 찌그러뜨렸다.

“누구냐…! 어?”

회귀자는 당장 검을 휘두르려다 말고 우뚝 멈췄다.

복잡한 기계장치와 낯선 소음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철과 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온다. 인간과 달리 기계가 움직이는 데에는 빛이 필요 없는지, 희미한 조명이 내부를 어슴푸레 비추는 최심부 제어실 한복판에 서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나.

아까 이 참상을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던 내가 최심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휴이? 어떻게 여길… 우리를 앞질러 온 거야?”

[휴? 마침 잘 왔구나.]

곧이어 티르, 히스토리아, 그리고 시아티와 ‘캐러팔드’가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내 등장에 다들 놀랐지만 딱 그 정도. 애초에 아군이니 경계할 필요가 전혀 없다.

다만, ‘캐러팔드’만은 불길한 흐름을 느끼고는 몸을 떨었다.

“네가… 왜 거기서 나와?”

‘한 번 퇴장한 배역이 어째서 저기에? 이건 대본에 없는 내용인데…!’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침침한 조명이 나를 감싸고 선 공간에서.

나는 잔뜩 힘을 주고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여러분이 도착하기 전에 끝내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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