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57화 (257/384)

EP.257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6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여러분이 도착하기 전에 끝내고 싶었는데.”

진심이다. 원래 이들이 오기 전 모든 준비를 끝내놓고 맞이하려고 했다.

외벽을 뚫고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독심술로 미리 안쪽을 살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내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렇게 텅 빈 제어실에 침투한 나는, 이내 커다란 문제에 봉착했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마음을 읽을 사람이 없으니, 눈앞에 놓인 수많은 기계장치를 보고도 구조를 알 수가 없었다.

망할 독심술. 독심술이라고 진짜 사람 마음밖에 못 읽네. 사람 마음도 읽는데 이깟 기계장치를 못 읽어?

도와줄 사람이 있나 살펴봤지만, 여기에서는 공주도 쓸모없긴 마찬가지. 아지와 나비를 써서 무차별 파괴할까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건 최후의 수단.

어쩔 수 없이 나는 '캐러팔드'를 기다렸다. 그가 여기 도착한다면, 그의 생각을 읽어서 말살 장치가 무엇인지 알아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캐러팔드'가 도착했다.

“못 버티겠다더니, 왜 다시 돌아왔어?”

“혹시나 여러분이 제련소를 어떻게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할까 봐 걱정되어서요. 셰이 씨,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죠?”

정곡을 찔린 회귀자가 움찔했다. 나는 대놓고 혀를 찼다.

부끄럽다, 부끄러워. 아무리 '캐러팔드'가 뒤에서 조종했다지만 진짜로 휘둘리면 어떻게 해. 이래서야 회귀자라고 하겠나.

“…으, 응. 그래도 거의 났어. 좀만 기다리면 다 해결할 수 있.”

“뭐, 괜찮아요. 그러기 위해 제가 온 거니까요.”

뒷짐을 진 채 제어실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었다. 낯선 분위기에 다들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는 동안, 나는 빠르게 ‘캐러팔드’의 생각을 읽었다.

‘최악이군. 무대가 내 손을 떠났어. 흐름이 저쪽으로 넘어갔다.’

낯선 흐름에 ‘캐러팔드’가 대처하는 방법은, 진부한 반응으로 존재감을 지우고 흐름에 편승하는 것이었다.

억지로 존재감을 내보였다간 우리가 의심할 테니까…도 이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그는 천생이 연기자이며, 연출가다. 잘 짜인 무대는 가끔 만든 이의 손에서 벗어나기 마련. 천생 연기자인 그는, 연극이 대본을 초월하려는 그 순간을 방해하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과병도 그렇고, 영궤도 그렇고. 육장성이란 것들은 다 정상이 아니구만. 군국은 이딴 녀석들을 어떻게 모았는지.

어쨌든.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이 흐름이 끝나지 않는 한, 그러니까 내 대사가 유의미하게 계속되는 한 지켜볼 거라는 뜻이지?

좋아. 받아주마.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우뚝 솟은 강철막대 위에 손을 살짝 걸치며 말했다.

“셰이 씨에겐 경천동지할 힘이 있어요. 굳이 말살 장치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이곳 모두를 쉽게 죽일 수 있죠. 천앵과 지잔을 휘두르기만 한다면 이 건물째로 땅 아래 파묻을 수 있으니까요.”

“그딴 짓 안 해!”

“네. 알아요. 셰이 씨는 그것이 가능하기에 도리어 이들을 죽이는 데 회의적이죠. 장치를 쓰든, 아니면 힘을 쓰든 어차피 마음먹기에 달린 일. 한 번 선을 넘어버리면, 앞으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계속 넘나들까 봐.”

히스토리아는 그 이야기를 듣고 흠칫거렸다. 약간이지만 회귀자의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회귀자가 회귀한다는 사실은 모르겠지만, 어쨌건 그녀의 양손에는 말 그대로 경천동지할 힘이 잠들어 있다. 만일 선을 넘어버린 회귀자가 힘을 마구잡이로 쓴다면? 그 여파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역사서에 한 획을 긋는 끔찍한 살육이 벌어질 것이다.

“갖고 있으면 약간 불편하지만, 한 번 버리면 다시는 얻지 못할 소중한 정의죠.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셰이 씨가 가진 그것이 참 소중하다고 생각해요.”

그나저나 이 강철 막대는 말살 장치가 아닌가? 손으로 잡았는데도 '캐러팔드'가 아무런 반응을 안 보이잖아.

저 페르소나. 읽기 살짝 귀찮네. 악질적인 서술 트릭으로 가득 찬 책을 읽는 기분이야.

어쨌건, 이건 말살 장치가 아닌 듯하니. 나는 입 발린 말을 계속하며 빨간 손잡이가 달린 레버가 있는 곳까지 움직였다.

“하지만 셰이 씨, 리아는 지금 입장이 달라요. 리아는 이미 선을 넘어버린 걸요. 군국에서 자라 군국에서 힘과 권력을 차지한 리아는 지금, 군국에서 손에 넣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리 편이 되기로 했어요.”

나는 빨간 손잡이 위로 자연스럽게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리아는 군국의 육장성이에요.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재능을 갈고닦았죠. 하지만, 리아가 육장성이 된 이유는 군국에 충성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휴이. 그만….”

어어, 끼어들지 마. 내 대사가 끊기면 '캐러팔드'가 지크흐룬드로 돌아올지도 몰라.

한층 목소리를 높여 히스토리아의 말을 가렸다.

“엇나간 친구들. 한때 동거동락하던 동기들. 군국에게 버림받고 레지스탕스에 투신한 하멜른의 아이들. 생사조차 묘연해진 저까지. 군국에는 우리가 있을 자리가 없죠. 그래서 리아는 장성이 되었어요. 장성급이 되어야 부관을 임명할 수 있게 되니까.”

“너….”

“하지만 친구들이 하나같이 제멋대로인 바람에, 리아는 결국 애써서 이룩한 육장성 자리를 내버리고 이쪽에 붙게 되었죠. 이미 모든 선을 넘은 거예요. 따라서 리아는 모든 작전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둬야 해요. 이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니까.”

회귀자는 이제야 조금 이해했는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다시 히스토리아를 보았다.

“아아. 네가 그래서 그랬구나. 왠지.”

‘전쟁에 패하고 신왕국이 들어서든, 레지스탕스가 봉기에 성공해 공화국이 들어서든 한 자리 차지하더니. 결국 자리를 차지하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구나…. 좋아. 이건 다음 회차에 써먹을 수 있겠는데.’

“시끄러워! 너야말로, 어중간한 각오로 일을 망치지 마. 일이 잘못되었다간 봐. 나는 휴이와 시아티만 데리고 전속력으로 도망칠 거니까!”

속내를 들춰서 미안, 히스토리아. 하지만 유의미한 대사를 하지 않으면 '캐러팔드'가 나를 기다리지 않을 거라서. 어쩔 수 없었어.

그나저나 이 빨간 손잡이도 아닌가. 도대체 뭐가 말살 장치야? 혹시 이건가? 어디, 옆으로 한 걸음 더….

‘…이 흐름, 위험하군. 지금 이 무대, 이 대사. 그리고 지금 그가 밟고 선 그것까지. 그가 노리는 건!’

빙고. 이거였구나.

나는 미소를 지으며 발을 세게 굴렀다. 그러자 네모난 판이 열리고, 그 안쪽에서 부자연스럽게 커다란 톱니바퀴가 천천히 솟아올랐다. 크기가 상당히 커서, 마치 거대한 배를 조종하는 키처럼 보였다.

하긴, 말살 장치 같은 흉악한 게 실수로라도 건드릴 위치에 있으면 안 되지.

“결국, 셰이 씨나 리아. 둘 중 그 누구도 나쁘지 않아요. 이 일에 고민하고 책임감을 느껴야 할만큼 잘못되지는 않았단 말이죠. 하지만, 어떻게 책임감을 안 느낄 수 있나요. 아무리 죄인이라고 한들 이토록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려있는데.”

“네 말대로야. 우리가 굳이 다툴 필요는 없지.”

‘쳇. 또 도움을 받아버렸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녀석이 있으면 편리해. 총사의 건도 그렇고, 티르칸쟈카의 건도 그렇고. 다음 회차에서도 데리고 다녀야겠는걸.’

회귀자는 내가 둘의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반만 맞았다.

나는 너희 싸움을 막기 위해 온 게 아니라.

“그런데 생각해보면 좀 억울하지 않아요? 제련소의 모든 인간을 죽일 장치를 만든 건 군국인데. 왜 우리가 고민해야 할까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양손으로 톱니바퀴의 요철을 붙잡았다. 이 거대한 공장의 일부인 것만 같은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톱니바퀴, 장치, 그리고 내가 한 말.

회귀자는 내가 뭘 하려는 건지 직감적으로 깨닫고는 외쳤다.

“잠깐만! 너, 설마!”

“딜레마랍시고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놓고 판단을 강요하는 거. 좀 건방지죠? 군국이 만든 건 환경이고 우리가 하면 딜레마에요? 웃기네! 군국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야? 나라라고 해도 마찬가지지!”

마지막 한 마디는 악에 받친 외침이 되었다. 나는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 온힘을 다해 톱니바퀴를 돌렸다. 만들어진 이후 단 한번도 쓰인 적 없던 장치가 천천히 움직였다.

말살 장치라는 이름을 가진, 이 제련소의 모든 노역자를 죽음으로 이끌 장치를.

“전쟁을 치르기 위해 흉악범을 구할지, 아니면 정의롭게 사형을 집행할지! 군국, 네가 고민할 때다!”

제련소 어딘가.

갈고리에 꿰인 채 걷고 있던 한 노역자는 커다랗게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방금 전 주어진 업무를 끝마치고 녹초가 된 상태다. 레일을 따라 움직이는 쇠사슬은 이제 그를 휴게실로 인도해야 했다. 거기서 그는 마력이 회복되기 전까지 꿀같은 휴식을 취할 것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지금 쇠사슬은 그를 휴게실이 아닌 어떤 낯선 곳으로 이끌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레일이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수십 번 확인한 끝에 확신했다.

평소와 뭔가 다르다.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길하게 다가올 이질감은, 그에게 있어 희망이었다.

산 정상에서는 어디를 향해 걷든 내리막이다.

마찬가지로, 연금강 제련소의 일상은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다. 그러니, 이 일상에서 벗어난다면 그만큼 좋아진다는 뜻이 아닌가.

혹여나 무언가 오류가 생긴 게 아닐까? 아까 낯선 이들이 이곳에 들어왔던데, 뭘 잘못 건드린 게 아닐까? 당장 감독관들이 뛰어와서 그를 다시 잡아가는 게 아닐까?

그는 간신이 얻은 이 평화가 사라질까 봐, 좋아하는 기색을 애써 숨기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쇠사슬의 인도를 따랐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쇠사슬이 그를 잡아 끄는 장소는… 연금강을 녹여내는 고로. 마법의 화염이 강철을 녹여내는 연옥 한가운데라는 것을.

마력을 쓰기 위해선 살아있는 인간이 필요하다.

달리 말해, 살아있는 인간을 쓰면 마력을 얻을 수 있다.

인간을 녹여 만든 강철은, 평범한 것보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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