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60화 (260/384)

EP.260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9

수많은 실패를 반추해온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군국은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존중한다. 통신병이 있다곤 하지만 그들은 정보를 제공하고 전략목표를 제시할 뿐 지휘에 끼어들지는 않는다.

현장에는 현장에서만 얻을 수 있는 단서가 있다. 통신병이 아무리 빠르게 판단한다고 하더라도 그 직감을 뛰어넘진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토루크 대장은 훌륭한 지휘관이었다. 나비, 회귀자, 티르의 협공에 에이메데르가 소멸한 순간 판단을 끝냈으니까.

“네 제안을 수용하겠다. 다만, 우리에게도 너희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

저쪽에서 절대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유사 항복 선언이었다. 나는 원활한 협상을 위해 그 점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인질을 원하시는군요? 하지만 저희도 바보는 아닌지라 인질을 보내드릴 수는 없고, 대신 전력을 다한 협력을 약속드리죠.”

“무엇이지?”

“여기 있는 이들을 다 구할 때까지, 잠시 진격을 멈추고 구조 활동에 전념하기로 할게요.”

‘진격을 멈춰? 그렇다면야 결과적으로 이들의 발을 묶는 셈이니 더할 나위 없지만. 저들이 과연 이 내용을 받아들일까?’

아마 그럴걸. 회귀자는 노역자를 다 죽이는 데 부정적인 입장이고, 히스토리아의 목적은 제련소를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전투를 회피하는 거니까.

티르야 뭐, 그냥 어울려주는 거고.

마침 성공적으로 에이메데르를 소멸시킨 회귀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서슴없이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제멋대로 무슨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는 거야?”

“협상이죠. 어쨌든 이곳은 군국의 시설이고, 노역자를 살리려면 손이 하나라도 귀하니까요.”

“뭐어? 말살 장치는 네가 작동시킨 거잖아!”

“저는 딱히 그들을 죽이려고 한 게 아닌데요? 그건 저희가 안전해지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어요. 보세요. 만일 제가 장치를 작동시키지 않았다면, 저들이 우리 말을 듣는 척이라도 했을까요?”

회귀자는 토루크 대장과 그들이 이끌고 온 병력을 보았다. 대단한 숫자는 아니었다. 훌륭한 지휘관답게, 그는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한 순간 이미 병력을 나눠서 제련소 곳곳으로 흩어놓은 상태였다. 혹여나 전투가 끝나면 곧장 피해 복구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책사? 아니, 책사라고 하기보단 조금 더 극적인… 사기꾼 같긴 한데.’

나는 은근히 말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재난을 앞에 두고, 적과 힘을 합쳐 사람을 구한다. 아름답고도 인간적인 결말이네요. 우리, 해피앤딩을 위해 힘을 내볼까요?”

“칫, 결과적으로는 군국을 돕는 셈이잖아.”

“아니요. 조금 다르죠. 셰이 씨, 노역자를 구하기 위해선, 노역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장치를 부숴야 한다고요? 셰이 씨가 바라던 대로.”

회귀자는 내 말뜻을 깨닫고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어?”

“네! 제련소의 시설을 마음껏 부술 기회에요. 심지어 군국의 세심한 안내까지 받으면서요!”

한마디로 회귀자가 바라던 인명피해 없는 파괴 행위가 용인된다는 뜻이다. 제련소의 시설을 하나하나 처참하게 부숴버린다면 노역자들은 남아있을지언정 당장 제련소를 운용하지 못하리라.

상황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톱니바퀴와는 달리, 인간은 서로 너무 다르기에 절대로 맞아떨어질 수 없다. 사상도, 목적도, 능력도 각자 다르니 어딘가에서는 어긋나는 게 필연적이다.

그러나 내가 조율한 이 상황은 모든 인간이 착착 맞아떨어진다. 회귀자는 반쯤 전율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휴즈. 도대체 어디까지 예측하고 있는 거지…?’

어라. 예측이 아닌데.

‘함정이라는 걸 깨닫고 우리를 앞질렀어. 준비된 함정을 망가뜨리고, 제련소를 완전히 파괴할 계획도 세웠어. 와중에… 내가 바라던 대로 불필요한 희생을 피했고, 총사가 바라던 대로 군국과의 전투도 없앴지. 이건…. 예언자도 할 수 없는 일인데….’

군국의 의중을 정확히 짚고, 그들이 할 행동을 예측하고, 그것을 확신하면서 계획 하나하나를 받아칠 작전을 짠다…면 얼마나 좋을까. 역사 속 유명한 책사와 비견될 재능이다.

하지만 실상은, 이 모든 작전을 짠 영궤의 생각을 읽고, 문제를 풀 듯 하나하나 없앴을 뿐.

나는 천재가 아니라, 답지를 미리 보고 온 사기꾼이다. 애석하게도 말이지.

‘…어쩌면, 정말.’

회귀자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한시가 급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주저하는 시간이 곧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땅에 떨어뜨린 지잔을 다시 챙겨 들며, 회귀자는 나를 향해 작게 한마디를 남겼다.

“어쨌든, 도움이 됐어. 고마워.”

회귀자는 성큼성큼 토루크 대장과 그의 병력에게로 향했다. 회귀자가 다가가자, 병력들이 잔뜩 긴장하면서 그녀를 포위하듯이 움직였다. 회귀자는 짜증스레 칼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쓸데없는 짓 말고 앞장서! 시간이 없잖아!”

회귀자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본 장교 하나가 불만스럽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제길. 이딴 게 곁에 있으면 우리가 인질인 셈이잖아.”

“진짜 인질로 취급하기 전에 빨리 움직이시지!”

회귀자가 그들을 이끌고 걸어가는 동안, 나는 뒤로 몰래 티르를 불렀다. 티르는 내 손짓을 보고 느긋하게 다가왔다.

[덕분에 피부가 그을리는 일은 피했구나. 네 기지가 아니었다면 새카맣게 탄 몰골을 보일 뻔했다. 제법 감각적인 선물이지 않느냐.]

허세를 부리긴. 양으로 밀어붙인 군국의 인공조명에 꽤 놀랐으면서.

햇빛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하긴 하지만, 빛의 밀도만큼은 태양을 넘어섰다. 만일 그 빛을 정면으로 받았다면 티르라도 잠시간 전투불능이 되었을 것이다.

빛 속의 흡혈귀는 비유하자면 물에 빠진 인간. 움직일 때마다 어마어마한 압력을 받고 힘도 안 들어간다.

뭐, 그래도 어떻게든 탈출할 수는 있었을 거다. 어둠으로 빛에 저항할 수도 있고, 고작 30m만 한쪽으로 이동하면 벽을 부수고 나갈 수 있으니까. 단, 그때쯤이면 우리가 다 죽었겠지.

어라. 사실 나, 티르보다는 나 자신을 지킨 셈이네.

나는 머쓱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뭘요. 아, 다 쓰셨으면 그 천은 돌려주실래요?”

내 정당한 반환 요구에, 아직까지 내 다이아몬드 퀸을 어깨에 두르고 있던 티르는 흠칫거리며 옷깃을 여몄다.

[…선물이 아니었던 것이냐?]

“드린다는 말은 안 했잖아요? 비싼 거예요. 돌려주세요.”

[낭만이라고는 쥐뿔도 찾아볼 수가 없구나. 어찌 사내 된 자가 한 번 건넨 손수건을 도리어 뺏느냔 말이냐?]

“언제 적 이야기에요? 요즘에는 헤어질 때 자기가 준 선물 내놓으라는 사람도 많아요.”

[말세구나!]

“말세가 제 물건 돌려달라는 요구 때문에 일어날 일은 아닐 거 같은데요.”

티르는 너무 점잖은 편이라 내가 끈덕지게 달라고 요구하니 마지못해 두르고 있던 천의 여왕을 건넸다. 이게 얼마짜리인데 그냥 줄 수는 없지. 나는 다시 천의 여왕을 카드로 바꾼 뒤 품속에 넣었다.

그러나 티르는 뒤끝도 있었다. 못내 불만이었는지 그 와중에도 계속 투덜거렸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구나! 체면이란 게 없지 않고서야 어찌!]

“아하하. 쓸 데가 있어서 그래요. 그리고 티르. 부탁이 있는데.”

[낯짝이 두껍다 못해 바늘로 찔러도 티도 안 나겠구나. 요즈음은 한 번 주었던 것을 배알도 없이 빼앗는 게 부탁하는 자의 태도더냐?]

줬다 빼앗는 건 쪼잔해 보여서 나도 싫어. 하지만 애초에 천의 여왕은 나에게도 귀중한 도구라고. 팔면 집 한 채가 뚝 떨어지는 고가품을 줄 수는 없잖아.

그리고 자꾸 내가 뭔가 주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말이야.

“티르는 저보다 연상에 돈도 많잖아요. 심지어 나라도 하나 만들어봤고! 그런데 소시민으로 어렵사리 살아가는 제 몇 안 남은 재산마저도 빼앗으려고 하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벼룩의 간을 빼 드셔야죠!”

[내 너에게 베푸는 것을 아까워하겠느냐? 성의를 먼저 보여야 내 보답으로 보물이든 금이든 내어주지 않겠느냐.]

“아, 맞다. 예전에 강의 수업료나 마사지 대금으로 금이나 보물 준다면서 정작 쓸모있는 건 하나도 못 주셨지 않나요? 저는 시조 티르칸쟈카의 이름값을 믿고 기다렸는데, 그걸 언제 받을 수 있을까요?”

[…이 건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사안이 급하니 네 부탁이나 들어보자꾸나.]

쳇. 제법이잖아. 한창 급하다는 점을 이용해서 불리한 대답을 회피하다니. 나라를 세워본 경력이 있어서 그런지 어딘가의 회귀자보단 말을 잘하네.

나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추고 티르에게 속삭였다.

“이들이 노역자를 살려주면, 분명 그때 노역자들이 잠깐 구속에서 풀려날 거예요. 티르는 그들을 돕는 척하면서, 노역자들이 풀려났을 그때.”

[그때?]

“어둠으로 눈을 가린 뒤, 몰래 제련소 밖까지 빼내 주세요. 사방팔방으로 흩어져서, 앞으로 도착할 군국의 병력이 새로이 고민하도록.”

내가 한 부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은 티르도 역시나 목소리를 낮추고는 대답했다.

[그리하여도 괜찮으냐? 여기 있는 인간들은 전부 극악무도한 죄인이라고 들었다. 그들을 세상에 내보낸다면 여러 문제가 생길 터인데.]

“알 반가요? 저한테 저지르지만 않았으면 상관없어요.”

[법이고 정의고. 그에 티끌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가 심히 불량스럽구나.]

“실망하셨나요?”

티르는 고개를 젓고는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같은 진흙탕에 몸을 담근 공범자를 보듯, 동질감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전혀. 아니, 도리어 더욱 마음에 들었다.]

티르에게 있어, 이 제련소는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끔찍한 공간이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흔히 있었던, 그저 인간을 효율적으로 소모하는 방법 중 가장 선진적인 것일 뿐이다.

천 년을 살아온 흡혈귀의 여왕에게 현대의 도덕에 대해 논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겠지.

[잠깐 기다려보거라. 그러면 그동안 너는 무엇을 할 셈이냐?]

“저요? 제가 일해봤자 아무런 도움도 안 될 테고, 괜히 나댔다가 인질이라도 되면 리아나 티르의 방해가 될 테니. 여기서 가만히 지켜지고 있을게요.”

[그래. 그 편이 좋아 보이는구나.]

“좋아요. 티르, 그러면 저 노역자를 해방하러 가주세요. 정의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티르는 피식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네 부탁을 들어주마.]

그리고 티르 역시도 어둠을 몰고는 제어실을 떠났다. 멀어지는 그녀의 그림자 속에서 수십 개의 흑기사가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흡혈귀가 사람을 구한다, 라… 흔한 일이지.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인 종족은 같은 인간이지만, 가장 많은 인간을 살린 종족은 놀랍게도 흡혈귀가 된 인간이니까.

뭐.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나는 쭉 기지개를 피며 몸을 돌렸다. 한쪽에서는 아지가 철조망에 걸려 바둥거리고, 나비는 신이 나서는 떨어진 조명을 하나하나 확인사살하고 있었다. 잔광이 유리조각처럼 반짝이는 조명은 가까운 미래에 나비의 발자국이 될 예정이었다.

한쪽 저편에서는 히스토리아가 시아티와 공주에게 그동안 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시아티는 이를 악물고 있고, 공주는 갑작스레 변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네? 네? 잠깐만요. 캐러팔드가… 배신을 했다고요? 함정을 작동시키는 바람에, 셰이 공이 그를 베었어요…?”

“내막은 몰라. 그가 진짜 캐러팔드일지, 아니면 변장한 누군가인지. 어쨌든 그의 신변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분명하지.”

“믿을 수 없어요. 그는 분명, 우리를 배신할 사람은 아닌데….”

“사람이니까,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거야.”

공주는 잔뜩 움츠러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명이 깨지긴 했지만 여전히 밝은 편이었고, 그래서 제어실은 여전히 안쪽이 훤히 보였다.

“…그런데.”

제어실 곳곳을 둘러보던 공주는, 곧 의아한 듯이 물었다.

“캐러팔드는 어디에 있죠?”

히스토리아는 흠칫거리며 고개를 팩 돌렸다. 그녀가 시선을 향한 곳은 방금 전 캐러팔드가 피를 쏟으며 쓰러졌던 장소였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마른 핏자국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히스토리아는 잔뜩 긴장을 끌어올린 채로 팔을 뻗었다.

“…아무래도, 캐러팔드는 진짜가 아니었던 모양이네.”

“어, 그러면 다행이네요! 캐러팔드는 역시 우리를 배신한 게 아니었군요!”

철없이 대답하는 공주를 향해, 히스토리아는 경멸을 섞은 눈빛으로 일갈했다.

“불행이지. 그로 변장했다는 건 그의 정체가 이미 발각되었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캐러팔드는 끔찍한 고문을 받다가 모든 정보를 토해내고 처형당했을 테니까.”

“네, 네에?”

“하지만, 나와 그쪽 꼬마의 감각을 속이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 그거. 기막힌 연기였지.

지크흐룬드의 연기는 신비로운 무언가가 아니다. 그는 진짜 연기자이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 기예를 갈고 닦았다. 순수한 기술의 영역이기에, 회귀자도 히스토리아도 전부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그중 가장 큰 능력은 바로 육체에 기공을 불어넣는 감 기공. 이치 끝자락에 간신히 닿은 그의 기공은, 몸의 반응을 원하는 대로 꾸며낼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존재로 변신하는 것도 가능하다.

“냐?”

파직.

조명을 깨뜨리며 즐거움을 찾던 나비가 묘한 반응을 느끼고 앞발을 들었다. 뭔가 잘못된 조명인지, 나비가 앞발을 뗀 순간 거기서 커다란 폭발음이 들렸다.

“냐하하학!”

폭죽같은 빛이 펑펑 터지며 반짝이는 먼지가 흩날렸다. 순간적으로 반응한 히스토리아가 기공으로 바람을 폭발시켜 그것을 상쇄하고, 아지와 나비가 깜짝 놀라서 사방팔방으로 짖어댔다.

순식간에 벌어진 혼란 속에서 히스토리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다들 뭉쳐! 흩어지지 말고!”

히스토리아는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마침 그녀의 눈앞으로 누군가가 걸어나왔기 때문이다. 나른한 눈동자에 땋은 머리카락을 지닌, 장신의 여장군이 눈을 부릅 뜬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히스토리아와 똑같이 생긴 사람, 아니, 히스토리아 그 자체인 것만 같았다. 나름 알고 지냈던 시아티도, 공주도 거울처럼 똑 닮은 둘을 보고는 경악했다.

“총사님이… 둘?!”

자기와 똑같은 사람을 발견한 히스토리아는 경악하느라 시간을 소모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간격을 둔 채 그들은 동시에 움직였다. 한쪽 히스토리아가 긴 다리를 쭉 뻗었다. ‘히스토리아’는 부드럽게 흘려보내며 무릎과 팔꿈치로 감싸 다리를 꺾으려고 들었다. 발차기가 허공에서 급격하게 방향을 틀고, 그에 맞서 팔과 다리가 어지럽게 움직인다.

콰광. 히스토리아의 기공, 폭사경이 폭발하며 둘의 신형이 주르륵 밀려났다. ‘히스토리아’가 급히 내게 손을 뻗으며 외쳤다.

“휴이! 위험해! 내 뒤에 숨…!”

“숨을 수는 없지. 네가 가짜잖아.”

공주를 그대로 놔둔 나는 냅다 히스토리아와 가까운 쪽으로 도망갔다. 내가 멀어지고, 헛되이 내밀어진 손이 몇 번 쥐였다 펴졌다.

이번에도 자신을 거부하고 도망간 나를 향해, ‘히스토리아’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어, 어떻게….”

표정 연기를 해봤자 어림도 없다. 연기에서 가장 쉽게 벗어나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이 모든 게 연기라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다.

‘히스토리아’는 내가 단순히 떠본 게 아니라, 진짜로 간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히스토리아’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순수한 호기심과 의아함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히스토리아’의 얼굴을 한 지크흐룬드는 의문을 표했다.

“내가 가짜라는 걸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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