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62화 (262/384)

EP.262 절반의 성공

절반의 성공이다.

나는 지크흐룬드가 스스로 정체와 능력을 밝히게끔 했다. 나에게 어떠한 신비가 있을 거라고 확신한 그는, 정체를 숨기는 게 의미 없다고 판단하고는 우리 앞에서 정체를 드러냈다.

문제는, 그 역시 똑같은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신비는 파헤치기만 해도 상대하기 쉬워진다. 연원, 능력, 약점, 한계. 그것만 파악하면 얼마든지 대책을 세울 수 있어. 시조 티르칸쟈카처럼 말이지.’

신비란 인간의 외부에서 온 것. 그만큼 신비는 강점만큼이나 약점도 뚜렷한 편이다. 그토록 강력한 시조 티르칸쟈카조차도 조명으로 만든 덫에 잠시간 속박되었을 정도니.

혈조술은 그녀 자신의 능력이지만, 그녀가 다루는 어둠은 역사와 업이 만들어낸 신비이기 때문이다.

‘시조의 어둠 속에 숨어있던 신비에 대해 몰랐으니, 군국이 연전연패하는 것도 당연하지. 피리 부는 사나이. 너의 신비를 해체하겠다.’

으음. 하지만… 내 신비는 인간 바깥쪽에서 오는 게 아닌데.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티르와 회귀자는 이 자리에 없다. 죽어가는 노역자들을 구출하는 동시에, 몰래몰래 밖으로 빼내고 있겠지.

여기 있는 면면은… 그 사실을 알려도 별로 크게 해가 되지 않을 거고.

음. 좋아. 어렵겠지만, 이번에는 회귀자와 티르의 도움 없이 해내야겠는걸.

‘신비? 휴이에게?’

잠깐 머뭇거리긴 했지만, 히스토리아의 동요는 짧았다. 그녀는 숙련된 군인이었고 목표를 혼동하지 않았다.

‘예전부터 잡지식이 많았어. 무언가를 물어보면 보통 대답이 나오곤 했지. 그의 말대로일지도 몰라. 그래도 그게 무슨 상관이지? 지금은 휴이의 정체보다, 내 눈앞에 있는 존재의 정체가 더 급해. 아마, 저것의 정체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히스토리아의 얼굴과 몸을 한 상대다.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 몰라도, 변신했다면 만전일 리 없다.

만전이 아닌 상태에서 잠시간 히스토리아와 호각을 겨뤄? 군국에서 그만한 능력을 지닌 존재는 오직 여섯 명뿐. 그중에서도 능력이 온전히 드러난 다른 사람과 달리, 많은 것이 베일에 싸인 사람은 오직 한 명.

“지크흐룬드 공안부장. 당신입니까.”

지크흐룬드가 미소를 지었다.

“알아차리는 게 늦었어, 히스토리아. 너와 합을 나누는 그 순간부터 눈치챘어야지. 역시 너는 첩보전에는 영 젬병이구나.”

“공작과 잠입이 특기이며, 은신술과 박투술에 능하다고 소개했었죠. 은신술 쪽은 거짓말이었군요.”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잖아? 변신술을 쓴다는 사실은 극비야. 감시 대상이 그걸 알아서야 안 되니까. 내가 원하는 건 ”

“그렇다면 지금은?”

“숨기는 의미가 없지.”

지크흐룬드는 히스토리아 너머의 나를 가리켰다.

“저기, 미래를 보는 신비가 눈앞에 있는데. 내가 숨겨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니.”

“이간질을 시도하는 겁니까? 무의미합니다. 지금 상황에서 확인할 수 없는 의심으로 일을 망칠 만큼 무능하진 않아요.”

“너는 그렇겠지.”

이번에 지크흐룬드는 자기 어깨너머를 가리켰다. 히스토리아는 그쪽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럴까?”

그곳에는 시아티가 있었다.

시아티는 지금 그 누구보다도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분명 제련소를 부수느니 마느니 고민하던 사이, 갑자기 캐러팔드가 배신하여 함정을 작동시켰다. 직후 세상이 빛으로 휩싸였다.

시야가 돌아오고 보니, 캐러팔드는 어디로인가 사라졌고 저편에서는 군국의 병력이 들이닥치는 중이었다. 다들 무언가를 하는 동안, 시아티가 할 수 있는 건 안전한 곳에서 공주를 지키는 일뿐.

그러나 상황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시아티라도, 지크흐룬드가 캐러팔드로 변신하자 한 가지 사실만은 깨달았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지크흐룬드라는 것을.

“네가…!”

시아티가 손가락을 들었다. 어두운 마력이 그녀의 손가락을 감쌌다.

작전도 뭣도 없었다. 증오스러운 적에게 똑같은 고통을 느끼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시아티는 왼손의 검지를 쥐었다.

그때였다. 짧은 시간, 지크흐룬드가 ‘캐러팔드’의 어조와 눈빛으로 말했다.

“시아티. 흑마법은 만능이 아니야. 나는 네가 흑마법을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에 구애되기 마련이다. 상대가 적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아직 충분히 익히지 못한 시아티가 멈칫거렸다.

찰나였으나, 지크흐룬드에게는 충분히 길었다. 지크흐룬드가 뛰쳐나가는 방향을 본 히스토리아가 다급히 외쳤다.

“시아티! 뒤로 빠져!”

그러나 말을 끝맺는 순간 이미 지크흐룬드는 시아티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기묘한 체술이었다. 상대와 미리 합을 맞춘 듯한, 물 흐르듯 아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시아티가 눈치채기도 전에 지크흐룬드는 그녀의 등 뒤로 흘러갔다.

시아티가 반응하기도 전, 지크흐룬드는 순식간에 그녀의 팔을 꺾어서 제압했다. 육장성의 기공 앞에서는 강철로 된 의수도 지푸라기나 다를 바 없다. 뼈와 철골이 한 손에 잡혀 같이 삐걱거렸다.

“끄으으으…!”

바둥거리는 시아티를 향해 지크흐룬드가 속삭였다.

“진정해, 시아티.”

“놔아아! 그 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진정해야 캐러팔드의 목숨을 구하지. 네 몇 없는 친구들이 소중하지 않아?”

시아티는 울컥거리며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그녀는 친구들의 죽음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멜른에서 가라앉았던 아이들은 서로의 발목을 잡을 바에야 차라리 자기 손목을 끊어버리겠다 맹세했다고.

하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적과는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눠서도 안 되건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몸이 절로 멈췄다.

그녀는 정말로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외모를 어떻게 따라 했게? 너의 이름과 그의 말버릇, 암구호까지. 그 모든 걸 어떻게 알아냈게?”

“으….”

“당연히, 그를 붙잡아 심문한 끝에 얻은 결과지. 다시 말해, 그의 목숨은 내가 붙잡고 있는 셈이야.”

킥, 하고 짧게 웃은 지크흐룬드는 시아티를 토닥이며, 나와 히스토리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자, 히스토리아. 휴이. 너희들의 소중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나의 지시에 따라주실까.”

소중한 친구에 시아티는 물론 캐러팔드까지 끼어 있다는 건 분명했다. 히스토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인질극을 할 셈입니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지. 하지만 우리도 궁지에 몰린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새가 아니라서.”

“쓸모없습니다. 저희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아요.”

“하지만 들러리라도 떼어내서 나쁠 것 없지. 거기다, 너희라면 설득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나.”

히스토리아를 겨냥한 듯한 발언이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지금 그의 관심은 온전히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 이제는 대놓고 견제야? 진짜 나를 벗겨 먹을 생각이네. 더 무능력한 척은 할 수 없겠는걸.

왜냐면….

“시아티, 히스토리아. 속지 마. 저 말을 믿어선 안 돼.”

“휴이. 냉철하게 생각해봐. 어쩌면 지금이 기회일지도 몰라. 우리가 군국의 턱밑까지 따라온 지금이야말로, 안전을 보장받을 기회…!”

“캐러팔드는 이미 죽었어. 그는 시체를 가지고 인질극을 벌이는 거야.”

지크흐룬드는 함박웃음를 지었다. 꼬인 실타래를 풀어냈을 때, 오랜 시간 뒤쫓던 사냥감을 사로잡았을 때 보이는 통쾌한 미소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시아티의 얼굴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마침 뒤에 있는 지크흐룬드의 얼굴과 대비되어 더욱 돋보였다.

마치 행복의 총량은 정해져 있으며, 두 사람분의 몫을 지크흐룬드가 퍼간 것처럼 보였다.

미안. 그렇지만 여기서 시간을 더 끌릴 수는 없어서.

“군국이 레지스탕스를 살려둘 이유가 없잖아. 레지스탕스는 노역장에 가두지 않아. 노역자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거든. 그러니까 군국은 심문이 끝난 직후 바로 그를 죽였을 거야.”

캐러팔드는 죽었다. 온갖 고문과 심문 끝에, 원하는 정보를 다 얻어낸 끝에 쓸모없어진 그를 처분했다.

시점은 비교적 최근이다. 날짜로 따지면 지선이 탄탈로스에 찾아왔을 때. 사령부는 전쟁을 준비한다며 공안에게 군 시설 감찰을 명령했고, 그 과정에서 공안부는 캐러팔드를 검거했다. 그는 지크흐룬드의 ‘심문’을 받았고….

그게 지크흐룬드의 기억 속에 있는 캐러팔드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니. 캐러팔드는 분명히 죽었다.

시아티는 꼭 내가 그를 죽인 것처럼 노려보며 외쳤다.

“살아있을 수도 있잖아…!”

“아니야. 죽었어. 인간을 순수하게 ‘가두기’ 위한 시설은 비효율적이거든. 노역시키지 못할 바에야 그냥 죽이는 게 군국의 방식이야.”

단정짓는 내 말에 시아티가 발끈해서 외쳤다.

“휴이 너는, 어째서 그걸 확신하는 거야?! 캐러팔드가 죽었으면 좋겠어?”

“현실을 이야기하는 거야. 만일 그가 살아있다고 하더라도, 공안의 심문을 받고 멀쩡할 리 없으니까.”

시아티는 입을 콱 다물었다.

레지스탕스는 저마다 사연을 갖고 찾아간 이들이다. 어지간해서 동료를 팔아넘기지 않는다.

달리 말해, 지크흐룬드가 직접 캐러팔드를 심문해서 자백을 받아냈다면, 캐러팔드의 상태는 어지간하지 않다는 뜻이다.

“…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도대체 어떻게 확신하냐고!”

“왜냐니! 말했잖아. 그에게는 신비가 있다고!”

인질극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지크흐룬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정도 정보로 나를 낚아냈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역시 알고 있어! 그래, 모를 리 없지! 예지냐? 언젠가 밝혀질 미래가 너에게 진실을 속삭였나?”

이제는 숫제 확신이네. 쳇. 아니거든. 내가 진짜 예언자였다면 너 따위한테 걸렸겠어?

“저는 예언자도 아니고,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에게 알려줄 의무는 없죠.”

“알리지 않더라도 상관없어. 그럴수록 불리해지는 건 너니까!”

아, 그래. 그런 이야기도 있었지.

역사가 짧은 군국에서 신비를 다루는 부서는 딱 하나뿐이다. 역사적 사료를 조사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해체하는 신비 해체자들. 내가 군국에서 계속 있었다면, 임관되었을지도 모르는 부서.

그곳의 수장이 지크흐룬드였지. 신비에 취약한 군국에서, 신비를 이용하고 맞서 싸울 힘을 지닌 유일한 육장성.

그는 예언에 대처하는 방법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지크흐룬드는 나 대신, 히스토리아와 시아티를 향해 말했다.

“시아티. 히스토리아. 너희는 원망을 엉뚱한 곳에 쏟아붓고 있다. 어째서 이 나라가 너희의 분노를 감내해야 하지? 바로 너희들의 앞에, 너희를 이 처지로 몰아간 원흉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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