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4 상상 속의 총알
타국에서 온 지크흐룬드가 왜 군국에 충성할까?
이 나라가 마음에 들어서? 이런 속 보이는 말을 하는 사람 있으면 사기꾼이거나, 옆에 공안이 감시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왕국에 살던 사람은 되어야 상대적으로 선녀처럼 보이지, 신비도 없고 놀거리도 없는 이 나라 어디가 마음에 든다고.
돈을 많이 줘서? 이 미친 나라는 최강자인 육장성도 떵떵거리면서 살지 못하는 극단적인 구조를 가진다. 상위 1%가 부의 1%를 점유하는, 피라미드보다는 오벨리스크 구조에 가까운 대단히 정직한 나라인 것이다. 자금 대부분은 군국이 직접 운용하며, 돈을 쏟아부어 무기를 만들어줄지언정 개인 재산은 좁쌀만큼 준다. 모아봤자 쓸 곳도 없다는 점도 한몫한다.
그런 망할 나라에서 지크흐룬드가 충성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녀’가 그를 찾았기 때문이다.
그의 기억 속의 ‘그녀’는, 내가 직접 읽은 게 아니라 잘은 모르지만, 정체를 숨긴 지크흐룬드를 찾아냈다.
오랜 도피 생활 끝에 원래의 자기 자신이 누군지, 어떤 모습인지 잃고 헤매던 지크흐룬드는 그녀를 자아의 닻으로 삼아서 자신을 이루었다.
그녀는 특별하다. 하지만 유일하지는 않다.
왜냐면, 나도 그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아까도, 지금도. 똑같이 꾸며낸 얼굴이잖아요? 심지어 이번 건 정도가 더해. 아까는 최소한 사람의 얼굴이었지, 지금은 만들다 귀찮아서 내던진 조각상 같잖아. 그걸 당신으로 삼아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다니? 나는 나다. 네가 뭘 알고.”
“저는 모르니까 알려달라는 거예요. 당신의 진짜 얼굴을… 아니, 진짜 당신이 누군지 말이죠.”
진짜. 그 단어가 나오자 지크흐룬드는 무기질적인 표정을 보였다. 평정을 가장하기 위해 일부러 꾸며냈다기보다는 무언가를 꾸며내기 전 힘을 잔뜩 준 준비 자세처럼 보였다.
“내가 누군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나는 육장성 지크흐룬드이며, 모습을 바꾸는 건 내가 가진 강력한 특기다. 그 자체가 나를 의미하니. 나를 구분하기 위한 다른 특징이 필요하지 않아.”
“뭔 말이에요. 여기서 당신이 당신이라는 거 누가 몰라요? 저는 특징이 아니라, 자격 때문에 묻는 건데요.”
자기 자신을 잃을지도 모르는 불안감에, 지크흐룬드는 자기를 알아보던 ‘그녀’를 닻으로 삼아 그녀를 위해 일했다.
그렇다면 그를 흔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닻을 제거해야지.
“저는 사람들의 소원을, 바람을 듣고 행동해요. 예언자와는 결이 다르죠. 그들은 답이 정해진 미래를 보고 상황을 바꿔버리지만, 저는 주어진 상황에서 그들이 바라는 것을 얻게 하죠.”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어. 내가 보기에는 똑같아 보이는데.”
“다르죠. 그들의 소망은 진짜니까요. 진짜 인생. 태어나면서부터 유일하게 주어져,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할 필요도, 여유도 없이 치열하게 살아간 이들의 욕망이었어요. 저는 그 바람을 들어준 거고.”
진짜. 가짜. 진짜. 타고난 연기자인 지크흐룬드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독심술사인 나는 진짜와 가짜를 언급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감정을 읽었다.
닻이 좀 가볍네. 건드릴 때마다 들썩거리고. 이래서야 고정되겠나.
“그런데 당신은 만든 얼굴에 만든 신분으로, 군국의 명령에만 따르고 있네요. 이게 당신이 찾은 진짜 당신이에요?”
“너….”
나는 그의 마음속 닻을 움켜쥔 뒤, 웃는 얼굴로 그것을 빼냈다.
“그냥 도구잖아요? 요즘은 도구에게도 생애라는 단어를 써주나 봐요?”
“…하찮은 도발. 다짜고짜 할 말이 궁해진 모양이지?”
‘도발이다. 여기서 말려들어서는 안 돼. 바람을 읽는다고? 그 역시 예언의 일종이겠지. 시아티와 히스토리아의 증오와 의심을 이용해서, 그를 몰아넣어야.’
그는 내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군국의 최심부까지 도착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이 모든 게 우연 혹은 행운이라고 쉽게 받아넘기지 않는다. 뭐든지 의심하고 경계하며 사소한 것까지 파고든다. 아마 오랜 시간 쫓긴 덕분에 생겨난 성격이겠지.
그러나 의심이 너무 지나친 덕분에, 그는 내 능력을 완벽히 믿었다.
“아까 말했죠? 저는 바람을 읽는다고.”
“…뭐?”
“잃어버린 당신 모습을 되찾고 싶잖아요.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요?”
존재의 닻은 항구가 아니다. 그는 망망대해에서 조난을 겪은 표류선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지크흐룬드라는 자아마저도 사실 꾸며낸 거에 불과하다는 거지.
“지크흐룬드 역할을 하면 할수록 당신의 원래 모습에서 멀어질 텐데? 가짜 임무. 가짜 삶. 가짜 얼굴. 육장성으로서의 목표까지 지크흐룬드라는 역할에 충실한 것일 뿐 당신의 자신의 바람은 아니야. 도대체… 리아! 나를 지켜!”
가타부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순간, 존재를 위협받은 지크흐룬드는 땅을 박차고는 나를 향해 달려왔다.
이유는 없다. 누군가 칼로 자신을 찌르려고 할 때 저항하는 건 정당하며 자연스러운 이치다. 지크흐룬드는 자아를 공격하는 나를 배격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고 들었다.
그러나 내 앞에는 히스토리아가 있다.
“떠맡기기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히스토리아가 제때 반응했다. 내가 싸움의 여파에 휘말려 다칠 것을 걱정한 그녀는 두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는 지크흐룬드와 맞섰다. 한쪽 다리를 단단히 고정하고, 달려드는 지크흐룬드를 낚아채는 듯한 발차기를 날렸다.
콰아아아앙.
재난에 가까운 충돌이었다. 폭발음이 들리고 부서진 바닥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히스토리아의 기공, 폭사경은 밀어내는 성질을 가진다.
다루기는 까다롭지만 대충 쓰기는 쉬운 종류의 기공. 히스토리아는 그것을 아낌없이 뿌려댔다. 어마어마한 기공을 가진 두 육장성의 충돌은 마주 구르는 고무공끼리의 충돌과 비슷한 결과를 낳았다. 둘은 거울처럼 서로 멀어지며 땅을 주르륵 미끄러졌다.
“휴이! 조심해!”
한 번의 격돌에서 그의 목표를 깨달은 히스토리아가 외쳤다.
“그는 너를 노리고 있어!”
직후 지크흐룬드가 다시 돌격했다. 히스토리아가 아닌, 바로 나를 향해.
의도를 숨길 생각도 없이 곧장 나를 노린다. 다급히 달려온 히스토리아가 그의 앞을 가로막고는 양팔을 당겼다.
폭사경, 폭쇄.
푸르스름한 기공이 모든 것을 밀쳐냈다. 기공량만큼은 육장성 상위급인 히스토리아가 쓰는 폭발. 지크흐룬드조차도 정면으로는 막아내지 못한다. 그는 대신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유술의 기본은 흘려보내는 것. 그는 흐름에 거스르는 대신 빈틈을 파고들었다. 역풍을 앞에 두고도 꺾이지 않는 배처럼, 그는 한걸음 한걸음 차분하게 나아갔다.
‘그도 전투의 달인이야. 싸워서 이길지 질지는 모르지만, 휴이를 지킬 수는 없어.’
상대의 격을 파악한 히스토리아는 다급히 나를 보고 외쳤다.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대로 히스토리아의 등 뒤에 찰싹 붙었다. 갑작스런 접촉에 히스토리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뭘 하는 거야?!”
“여기서 안전한 곳은 네 등 뒤밖에 없어. 잘 부탁해.”
“위험해! 기공의 여파도 무시할 수 없어!”
“여파에 휩쓸리는 게 죽는 것보단 낫지. 우왓! 리아, 앞!”
히스토리아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이 쭉 내밀어졌다. 긴 손가락이 내 옷자락을 낚아채려는 순간, 히스토리아가 그것을 눈치채고는 오른팔로 지크흐룬드의 팔을 휘감았다.
그 순간 지크흐룬드가 미끄러지듯 히스토리아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무릎을 깊숙이 집어넣고 팔을 꺾는 것으로 지크흐룬드는 단번에 히스토리아의 무게중심을 뒤흔들었다.
‘유술?! 위험해. 아래쪽을 빼앗겼어…!’
나약한 자들 사이에서는 위쪽을 점하는 게 더 유리하다고들 한다. 힘에 내리찍는 무게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공을 익힌 자들에게는 반대다. 고작 무게 따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공으로 밀어내는 힘이 당기는 힘보다 강하기에, 아래쪽을 빼앗기면 발이 땅과 떨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무주공산이다.
‘위험…해…!’
하물며 히스토리아의 기공은 폭사경. 반발에는 강하지만 흡착에는 손색이 있다. 아래쪽에서 밀어내는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히스토리아의 몸이 들썩거렸다.
물론, 아래쪽을 점한다고 바로 승부가 결정되지는 않는다. 다만 히스토리아는 지금 혼자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휴이가!’
지크흐룬드는 히스토리아를 치우고 나를 노릴 셈이었으니까. 히스토리아가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한계는 더 빨리 찾아왔다.
“안…!”
후우웅. 히스토리아의 몸이 퉁 튕겨 오르고, 방해물을 치운 지크흐룬드는 곧장 그 뒤에 있던 나를 노리고 맹렬한 일권을 뻗었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제어실 안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빗나갔다. 왜냐면 나는 히스토리아의 등에 꼭 매달려, 나란히 날아가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후우. 꽉 잡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날아갈 때 냅다 업힌 보람이 있어.
히스토리아의 등에 착 달라붙은 나는 해방감을 느끼며 외쳤다.
“아하하하! 꼴사나우시네요! 정곡을 찔렸나요? 그럴 수밖에! 제가 읽은 당신의 바람은 하나같이 가짜였으니까요!”
“휴이! 그를 자극하지 않는 편이…!”
“이미 늦었어! 여기까지 왔으면 끝까지 가야지!”
공중에서도 용케 균형을 잡은 히스토리아는 벽을 뒤덮은 철조망에 발을 걸고는 똑바로 섰다. 물론 나를 뒤로 매단 채로.
이렇게 있으니까 내가 엎드린 꼴이 돼서 은근히 편하네. 나는 아래쪽에서 우리를 올려다보는 지크흐룬드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미안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뭐라 할 자격이 없어! 내가 관조하는 입장에서 인간의 바람을 들어주더라도 그건 진짜야. 진짜 내가, 진짜 나로서. 진짜 삶을 가지고 치열하게 사는 인간의 바람을 들었어! 필요할 때마다 얼굴을, 이름을, 신분을 버리고 갈아엎은 당신이랑은 다르다고!”
독심술사의 도발을 맛봐라. 약한 곳만 후벼 파주마. 내 도발에 지크흐룬드는 곧장 이쪽 벽을 향해 뛰어왔다.
정작 싸우는 히스토리아는 졸지에 둘 사이에 끼인 꼴이 되어 곤란해했다.
“휴이! 도발이 과해!”
“이제 어쩔 수 없다니까! 호랑이 등에 탄 격이야!”
“1:1로도 승산을 장담 못 하는데, 너를 등에 멘 채 싸울 수는 없어…! 무기가 없다면 더더욱….”
“무기가 필요해?”
무기라면 당장 쓸 수 있는 게 있지.
소매에서 다이아몬드 카드 한 장을 꺼냈다. 생체 단말을 경유하여 연금변환을 한 뒤, 지크흐룬드에게 보이지 않게 히스토리아의 어깨에 살짝 걸쳤다. 히스토리아는 보지도 않고 그 묵직한 촉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총?”
“내가 썼던 연금 무기야. 탄환은 넣어놨어.”
히스토리아가 총을 받아쥐고는, 자연스럽게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고 한 번 빙글 돌렸다. 총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녀는 그것만으로 리볼버의 구조와 잔탄 개수를 파악했다.
그리고 화를 냈다.
“세 발밖에 없잖아!”
“채워 넣을 짬이 없었단 말이야.”
“아무렴 그래도 그렇지, 총알 세 발로 어떻게…! 하필 또 세 발이야?!”
‘영점잡이는 총탄 세 발로 영점을 잡는 기술이야. 쓰려면 최소한 네 발은 있어야 하는데!’
“쉿! 지크흐룬드는 세 발인지 몰라! 모르면 여섯 발이나 세 발이나 마찬가지야! 상상 속의 총알이 그를 견제할 거라고!”
“퍽이나…!”
그래도 뾰족한 수가 없었기에 히스토리아는 총을 받아들고는 소매 아래에 숨겼다. 이런 잡기술은 가르쳐준 적 없는데. 옛날에 카드놀이 할 때 했던 장난질이 꽤 기억에 남았나 보다.
그러다 문득 히스토리아는 리볼버의 손잡이를 긴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 총. 휴이가 나에게 총을 써보라고 권했을 때 줬던 거와 같은 종류네…. 기억이나 하려는지는 몰라도.’
“일단 해볼게. 어디 안전한 곳으로 피해있…. 아니. 내려가기 전까진 꽉 잡아!”
말을 끝마치고 히스토리아는 격자로 된 철조망이 계단이라도 되는 양 단숨에 뛰어 내려갔다. 땅에 떨어지기 직전 그녀는 살짝 감속했고, 나는 그 틈에 벽에 떨어질락 말락 붙은 철조망을 잡고는 바닥으로 뛰었다.
땅을 구르는 건 익숙하지만 등 근육이 뻐근해지는 건 익숙해지기 싫다. 내가 주춤거리며 일어날 무렵, 지크흐룬드의 앞을 다시 히스토리아가 막아서는 광경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