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66화 (266/384)

EP.266 얼굴 없었던 인간

“이번에는 여자로 하죠. 새로운 자신이 되고 싶어하는 건 알겠지만, 원래 몸에 맞추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너, 어, 어….”

일반인이 보기에는 너무 빠르고 격렬한 싸움이라 잘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그와 히스토리아의 싸움은 점차 잦아드는 중이었다. 공기가 달아오르며 피가 튀는 격렬한 싸움은 점차 상투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둘은 마치 서로 합을 나누듯 공수를 교대했다.

“체형은 가능한 줄이죠. 크기를 늘리긴 쉽지만 줄이기는 어려우니. 줄이고 줄인 편이 유일성을 보장하기에는 좋잖아요. 마침 지크흐룬드도 마른 체형이었으니까 그게 더 낫겠죠?”

“그만….”

“얼굴은 어릴 적 모습으로. 아, 기억이 안 나신다 그랬나. 그건 참 문제이긴 한데.”

얼굴을 그려줄 수도 없고, 그렸다고 해서 그게 맞는 얼굴인지는 모른다. 그의 얼굴은 오래전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라면서 신체가 바뀐다. 얼굴도 마찬가지. 어떤 삶을 살아왔냐에 따라 나이테처럼 육체에 흔적이 새겨지며, 그건 인상이라는 이름으로 자국을 만든다.

하지만 얼굴을 매일같이 바꿔가던 그에게는 인상이 형성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의 얼굴은 빛바랜 추억으로라도 남아있지만, 아무리 될성부른 잎이라도 떡잎만 보고 미래 어떤 모습이 될지 알 수는 없다.

애초에 그의 소망은 원래 얼굴을 되찾는 게 아니라,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기준을 잡는 거다. 기준이 될 외견으로 취향껏 대충 정해줘도 되지만…. 너무 대강 잡으면 성의가 없잖아?

“이럴 때는 신비의 힘을 빌리죠. 당신의 자아에 닻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준이 될 등대를 마련해줄게요.”

“너… 피리 부는 사나이… 도대체, 정체가 뭐야?”

“지금 그게 중요한가요? 제가 당신의 바람을 들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얼굴을 여기서 그려봤자 안 닮았을 테고. 그렇다고 하나하나 가르쳐주기에는 아직 할 일이 남아있으니. 뒷일은 떠넘기는 거로.

“이 제련소 어딘가에 있는 셰이 씨를 찾아요. 그 사람에게는 운명을 보는 눈이 있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나요?”

회귀자의 운명안이라면, 어쩌면 도달했을지도 모르는 운명을 관측할 수 있겠지. 회귀자가 가진 아가르타의 가면이라면 그 얼굴을 재현할 수 있을 터다. 거기까지 해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보다 보물을 얼마나 모아댄 거야. 좀 나누면서 살았으면.

“그가….”

“당연히, 순순히 힘을 써주지 않겠죠. 대신 저희를 파세요. 우리가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교환 조건으로 해달라고 하면 해줄 거예요.”

회귀자는 지크흐룬드의 능력과 정체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아할 테니까.

나처럼 친절한 램프의 요정이 또 있을까? 소원에 대한 명확한 문제인식과 확실하고 깔끔한 해결책까지 제시해주고. 이야, 세상 모든 소원을 내가 들어줬다면 악마와의 계약이나 원숭이손 같은 이야기는 없었을 텐데.

지크흐룬드, 아니, 타인으로 변신하기 위해 예비한 그 몸마저도 서서히 모양을 잃어갔다. 근육과 뼈에 가득 들어찼던 기공이 빠져나가며 그의 몸이 점차 줄어들었다.

몸을 불리기는 쉽지만 줄이기는 어렵다. 늘리는 거야 덧붙이거나 부풀리면 그만이지만, 거기서 줄이는 건 상실 혹은 억압을 의미하니까.

“으, 으, 아….”

몸이 변하자 생체 단말에 맞추어뒀던 옷자락이 늘어진다. 반 뼘이 남는 소매에, 입에 가득 넣었던 고형물이 빠진 듯 갸름한 턱이 드러난다. 말랐다기보다는 바람 빠진 풍선 같다.

뼈와 근육에다가 직접 기공을 불어넣어, 몸의 구조를 몇 번이고 건든 반동이다. 볼품없는 모습으로 변한 그는 죄책감과 고통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안…돼. 그녀를 배신할 수는 없어….”

“그녀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배신이라니요? 당신이 당신의 바람을 이루는 게 어째서 그녀에 대한 배신이 되는 거죠? 어차피 능력을 들켰겠다, 그 김에 새로운 얼굴과 이름으로 살아가려는 것뿐인데!”

‘지크흐룬드’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정신을 다잡았다. 자아의 닻은 거의 뽑히기 직전이었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의심이 나에게로 향했다.

과연 나를 믿어선 되는가?

‘말도 안 돼. 인간이 가장 바라마지 않던 소망을 알고, 그것을 들어준다고? 말이 소망을 들어주는 거지, 한 인간을, 가장 저열하고 추잡한 밑바닥을 파헤치는 일! 위험해…!’

나의 제안이 아니라, 나라는 인간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나의 인간 맞춤형 제안에는 도저히 흠잡을 만한 구석이 없으니까 방향을 돌리고 있다.

‘예언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인간에게 반강제적으로 희생을 강요해. 그에 비해, 이 자의 힘은 정반대. 우리가 하여금 마음껏 죄를 저지르게 해. 성황청의 대척점에 있는 힘…! 그런 어마어마한 능력을 지녔으면서, 아무런 신비도 없는 군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단 말이야?’

날카로운 신경에 타고난 관찰력. 그리고 사소한 것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는 편집증적인 성격까지.

오랜 도피 생활로 단련된 의심이 나의 제안을 뿌리치려고 했다.

‘믿기 힘들지만, 만일 그의 능력을 믿는다고 해도…!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더 위험해. 악마의 계약이 될지도 몰라.’

쯧. 이럴 줄 알고, 의심하지 말라고 슬쩍 힌트도 줬는데. 대놓고 말하기에는 좀 비밀스럽단 말이야.

어디, 다시 한번. 나는 그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동방 박사의 선물입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

성경에서 쓰는 관용구다. 최초의 예언자, 처음의 성녀를 찾아냈던 동방 박사들. 그들은 사라졌지만, 예언이나 계시를 찾아다니는 이들이 기연을 만날 때 동방 박사의 인도라 부르곤 했다.

비록 도피생활이 길었을지언정, 그를 이루는 근간은 연기다. 그는 낯선 부름에서 옛 기억을 끄집어냈다.

‘성경 연극에서 자주 나오던 역할. 주인공에게 특별한 만남을 선물하는, 무대 장치로서의 존재. 맞아. 전부….’

그래. 깨달았구나. 직업으로서 누구보다 많은 이야기를 접하고, 직접 그 배역을 연구하고 연기했던 그라면 스스로 깨닫겠지.

‘지나가던 선비. 떠돌이 용병, 은둔 현자. 탁발승. 길손. 이 모두… 이름이 주어지지 않은 엑스트라. 누군지 알 필요도, 알 수도 없는 불특정 다수를 지칭해. 그렇다면, 이 모두를 부른 그는.’

데구루루 굴러간 그의 생각이 어딘가에 툭 걸려 멈췄다. 그는 떨리는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연달아 가해진 마음의 충격 때문일까. 그는 격하게 호흡을 헐떡거렸다. 충혈된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린다.

이야. 평생의 소원을 이루어서 감격했구나. 새삼스럽게도 나 역시 보람을 느끼며 다음 항목을 고민했다.

“아. 이름도 정해야죠. 앞으로 반평생을 함께할 이름은 중요하니까. 뭐가 좋을까….”

지크흐룬드라는 이름은 고대 영웅의 서사시에서 따온 것이지. 그런 방식으로 이름을 지어도 기억에 오래 남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본명만 하겠어.

무엇이든 상관없는 수많은 이름 중에서, 굳이 옛 이름을 하나를 끄집어내어 붙였다.

“어때요, 힐데? 제 제안을 받아들이실 준비가 되었나요?”

“그… 이름을…. 어떻게.”

예명과 마찬가지로, 기녀에게는 기루에서만 쓰는 기명(妓名)이 있다. 기루를 떠나면서 그 이름까지 버렸지만, 나는 기어코 그가 버린 것을 주워서 다시 갖다 붙였다.

반짝거리기에 한번 사라졌던 것. 그것을 그러모아 등대를 만들었으니. 이번 자아는 버리긴 정말 아까울 거야.

“…나는, 힐데.”

'그녀'의 직속 호위병력이자, 군국 공공안전부의 수장인 지크흐룬드는 사라졌다. 대신 먼 옛날에 버렸던 새로운 자아가 그 몸을 차지했다.

힐데는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이제 그녀는 지크흐룬드라는 자아를 버렸기에, 우리와 싸우면서까지 제련소를 지킬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동시에 그녀의 관측자인 나를 공격할 수도 없다.

힐데가 고개를 숙이고는 웅얼거렸다.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대충 고맙다는 뜻이겠지.

“뭘요. 천만에요. 어차피 셰이 씨에게 부탁하는 건 당신이니까 당신 하기 마련이에요. 첫 번째 일. 얼굴까지 되찾고, 새로운 인생을 살기를 바랄게요.”

나는 얼른 가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었다. 힐데는 낯선 침입자를 마주한 짐승처럼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이윽고 몸을 홱 돌려서 사라졌다.

힐데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곳을 노려보던 나는, 그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 죽을 뻔했네. 간신히 격퇴했어.”

파고들 구석이 있어서 다행이야.

솔직히 말해서 진짜 위험했다. 만일 티르나 회귀자가 있던 장소에서 힐데가 이간질을 시도했다면, 독심술의 존재를 밝히지 않고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회귀자나 티르는 예언의 건은 허투루 넘기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내가 직접 처리하자니, 육장성은 너무 강하다. 내가 입을 털기 전에 꽁꽁 묶여서 심문실에 가 탈탈 털렸겠지.

적이 있다면 가타부타 군말 없이 전투를 수행하는 진정한 군인, 히스토리아가 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새삼스럽게 우정이 다시 차오르는 것 같다.

“수고했어, 리아. 진짜로, 덕분에 살았어.”

격퇴는 내가 했지만 그것도 히스토리아라는 든든한 방벽이 있기에 가능했던 일. 따지자면 히스토리아는 총신이고 나는 총알이었다. 둘 중 누가 더 활약했는지 굳이 따질 필요는 없겠지. 절대 내가 한 일이 더 적은 것 같아서는 아니고.

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데 마침 시아티가 주춤거리며 일어났다. 공주가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으나, 시아티는 공주를 뿌리치고는 나를 향해 다가왔다.

뭐야. 너 왜 눈을 그렇게 떠? 무섭게시리….

아, 맞다. 아까 당했던 이간질. 아직 다 해결된 게 아니었구나.

“휴이. 너는 누구 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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