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7 화해를 주선하는 자가 배신자
육장성 지크흐룬드는 우리의 적이다. 실제로도 그래서 죽어라 싸웠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나는 그의 자아를 지우고 힐데라는 새로운 자아를 정해주었다. 힐데를 군국으로 이끈 ‘그녀’ 대신 존재의 관측자를 자처했다. 덕분에 우리는 성공적으로 육장성 지크흐룬드를 격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아티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는 조금 다르게 보였나 보다.
“왜 그를 살려뒀어?”
“살려준다니, 말이 이상한데? 저쪽이 우리를 살려준 거야. 총 든 히스토리아와 호각을 이뤘는데 우리가 어떻게 죽여?”
“거짓말! 너는 그를 자유롭게 다뤘어. 분명 죽일 수 있었어!”
“분명 내가 힐데를 꽤 크게 바꿔놓은 건 맞지만, 내가 죽으란다고 죽진 않아. 나는 따지고 보면 저 자아의 부모나 마찬가지인데. 부모가 명령한다고 해서 자식이 자살하지는 않잖아?”
“죽일 수 있었어, 없었어? 네 입으로 확실하게 말해 봐!”
아이고. 그런 식으로 말해버리면 할 말이 없네.
생명의 본능을 거스를 수는 없지. 내가 죽으라고 명령한다고 자살하진 않는다.
그래도 죽음으로 유도할 수는 있을 거다. 나에게는 티르도 있고 회귀자도 있다. 그들을 이용해 차도살인을 벌일 수도 있고, 혹은 약화시킨 다음에 어찌저찌 함정에 빠뜨려 죽일 수도 있지.
하지만 하지 않았다.
“왜 그를 그냥 보냈어? 그는 캐러팔드를 죽였고, 지금껏 수많은 이들을 고문하고 심문해왔어. 이 군국의 중추… 가장 군국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뭐, 그럴지도.”
“하지만 너는 태연하게 대했어. 잘 가라고 인사까지 하면서! 너에게 친구란 무슨 존재야? 하멜른에서 있었던 일은 벌써 잊은 거야?”
“아니. 그건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때 일은 나한테도 좀 세게 와서.
“그런데 왜!”
시아티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소원을 이루어준다며?! 너를 포함한 우리들의 원수를 갚아주려는 거 아니야?! 그런데 왜. 캐러팔드를 죽인 원수를 가만히 두는 거야?! 애초에 너, 군국에 복수할 마음은 있어?”
“물론이야. 그리고 지금, 나만큼 확실하게 복수하는 사람 또 없을걸.”
“네가? 기껏 손에 넣은 적도 그냥 살려 보내는 네가 군국에 복수를? 너는 내 소원이 뭔지 알 거 아니야!”
알지. 시아티, 네 소망은 군국을 부수는 거잖아.
나는 예언으로 얻을 정보를 맹신하지 않지만, 회귀자의 회상에 따르면 레지스탕스가 세운 나라는 그냥 시궁창이 된대. 뭐, 그럴 수 있지. 애초에 너는 군국을 망가뜨리고 싶은 거지, 딱히 나라를 세우고 싶다는 마음은 없으니.
심지어 옆에 있는 공주는 오히려 군국이 유지되었으면 하고…. 참, 남의 마음 읽는 것도 못 할 짓이야.
내가 말했다.
“시아티. 군국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게 뭔지 알아?”
시아티는 즉답했다.
“의지.”
“틀렸어.”
“그러면? 힘이라고 말하려고? 그건 당연해! 하지만 힘이 있어도 의지가 없다면…!”
“틀렸어, 힘도 아니야. 군국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필요한 건 바로 군국이야.”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이었다. 군국에 복수하기 위해서는 군국이 필요하다. 복수할 대상이 없다면 복수는 애초에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아티는 내 대답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이어 말했다.
“하지만 너에게는 아직 군국이 없어. 너는 군국이 뭔지 모르고 있잖아. 뭔지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서 복수하려고?”
다시 분노를 되찾은 시아티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군국을 왜 몰라? 우리는 지금 군국의 중심에 서 있어!”
“그러면? 이 제련소 군국이니, 이 제련소에 복수할 거야? 하나하나 부수어서 다시 땅으로 돌려보내야 만족할 거야?”
말을 하며 나는 부러진 철근 하나를 집어 들었다. 2레벨, 가구용 연금강. 무겁지만 코스트가 낮고 견고해서 애용된다. 나는 철근을 살짝 던졌다가 잡았다.
“이 제련소에서 나온 결과물은 군국 곳곳으로 흘러가. 시민이 쓰는 가구든, 아니면 군인이 사람을 죽일 때 쓰는 무기든. 다 이 노역장에서 나온 결과물을 갖고 가공하는 거야. 그렇다면, 군국제 연금강을 쓰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야?”
“…집어치워. 복수 따윈 의미 없다고 말할 거라면!”
“전혀. 나는 오히려 네 복수를 도와주려는 거야.”
군국의 체계는 단순하고 알기 쉽다. 그러나 아주 특정 부분만은 꼭꼭 숨겨져, 바깥에 있는 사람은 물론이고 육장성까지 그 전말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힐데의 생각을 읽으며 딱 하나. 단서를 찾았다. ‘그녀’. 이 군국을 만든… 혹은 이룬… 어떤 존재.
문제는, 내가 결국 ‘그녀’를 찾아낼 수 있냐 없냐. 이제 그것뿐인데.
해보기 전에는 모르지. 나는 예언자가 아니니까.
그렇기에 해야 한다.
“나는 이제 ‘군국’을 보러 갈 예정이거든. 원한다면 따라와. 너에게 이 나라를 보여줄게. 그 이후라면, 너는 진정한 의미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될 거야. 네 바람대로.”
잠시 말없이 시선만 오간다. 시아티는 나를 노려보고 있다. 거기에는 아직도 증오할 곳을 찾는 피해자의 시선만이 남아있다.
히스토리아에게 덧없는 원망을 쏟아내곤 했던 시아티가 새로이 발견한, 히스토리아보다도 훨씬 악질적인 방관자. 그러면서도 죄책감 하나 없는 내 모습에, 시아티는 뜬금없이 한번 물었다.
“하나만 말해. 숨기지 말고.”
“나는 언제나 솔직해. 뭘?”
“너는 니콜라스가 우리를 죽이려 하던 걸 알고 있었어?”
아, 그거. 사실이지.
흠. 그래도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면 좀 분위기가 이상해지겠지? 그러니까.
“응. 알고 있었어.”
“그렇구나.”
담담하게 중얼거린 시아티는, 잠깐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순식간에 손을 꺼냈다.
분위기가 험악해진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손을 쓸 거라고 생각지 못한 히스토리아가 경악했다.
“시아티, 멈춰…!”
그러나 나는 생각을 읽고 있다. 시아티가 흑마술을 쓰려고 하는 것도, 그 대상이 내 팔이라는 사실 역시도 미리 안다.
시아티의 움직임에 따라서 나도 움직였다. 그녀가 의수로 왼손 검지를 잡고,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위로 꺾는 모습이 망막에 비친다. 호두까기 인형 장치 비슷한 것을 내장한 강철 의수는 질투라도 하듯 뼈와 살로 된 손가락을 손쉽게 부러뜨렸다.
으득. 어두운 마력이 내 손가락을 맴돈다. 그러나 내 팔은 꺾이지 않았다.
왜냐면.
“아오, 씁. 더럽게 아프네.”
“휴이! 손가락!”
내 팔이 꺾이기 전. 내가 먼저 내 손가락을 꺾었기 때문이다.
흑마술은 같은 것을 같도록 강제하는 힘. 그렇지만 시아티는 외팔이다. 외팔이의 손가락과 쌍팔이의 손가락이 온전히 같을 수는 없다.
시아티는 그 속성을 이용, 자기 손가락에 더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 덕분에 시아티는 손가락으로 포신이나 팔처럼 더 크고 긴 것도 꺾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흑마술의 본질은 결국 같은 것을 같게. 나는 시아티의 흑마술이 실행되기 전, 스스로 손가락을 꺾어서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흑마술을 속였다.
더럽게 아파서 눈물이 핑 돈다. 빌어먹을, 팔이 꺾이지 않기 위해서라지만, 내 손가락을 스스로 꺾어야 한다니.
나는 관절부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손가락을 다시 맞추며 중얼거렸다.
“흑마술 쓰는 것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어떻게 자기 손가락 꺾는데 망설임이 하나도 없냐? 늦을 뻔했잖아.”
“…괴물 자식. 흑마술까지 써?”
“괴물? 내 흑마술은 진짜 약해. 주먹질보다도 약한 게 내 흑마술인데. 뭐가 괴물이야?”
내가 감기공을 대성했다면 몸으로 버텼지 굳이 이럴 필요도 없었을 텐데. 사람이 튼튼하지 못하면 온갖 잡기술에 매달려야 한다니. 한탄이 나온다.
아, 잠깐만. 시아티. 너, 혹시 1절 더하려는 거 아니지?
“마지막 한 발은 아껴, 시아티. 쏘아지지 않은 탄환이 무서운 거지, 쏘고 남은 잔해는 처량할 뿐이야. 마지막 하나마저 없으면 이 뒤로 너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남지 않아.”
“웃기지 마! 그 모든 일을 방관한 네가! 나한테 뭐라 할 자격 없어!”
시아티는 씩씩거리며 다음 손가락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지켜보는 눈동자가 많았다.
히스토리아가 단숨에 뛰어들어 시아티의 손을 낚아챘다. 마지막 순간에 방해받은 시아티는 원망을 가득 담아 말했다.
“…히스토리아. 멈추지 마. 틀림없어. 저건, 우리를 이렇게 만든 원흉이야.”
“진정해. 너무 흥분했어.”
“너무 흥분? 반대로 말할게! 너는 저게 정상으로 보여?!”
시아티는 부러진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피멍으로 얼룩진 손가락이 힘없이 흔들린다. 아플 텐데, 여전히 악에 받친 채로 나를 규탄한다.
“두려워하지도 않아. 슬퍼하지도 않아! 하멜른에서 조난당했을 때도, 캐러팔드가 죽었다는 걸 알았을 때도! 분노하지 않고 태연하게 육장성을 놓아버리고! 그게 정상이야?!”
히스토리아는 그래도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 혹여나 또 부러뜨릴까, 그녀는 손가락을 더 꽉 잡았다. 시아티는 떼쓰는 아이처럼 소리쳤다.
“네가 휴이를 아무리 지켜도 아무런 보람도 없을 거야. 그는 너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으니. 아무것도 보답하지 않을 거니까!”
메시지는 메신저에 따라 달라진다. 시아티의 말은 분명한 사실이고 히스토리아의 가슴을 후벼 팔 정도로 날카롭다. 그러나 하필, 그 무기를 쥐고 휘두른 자가 시아티였다.
“보답이 없는 건….”
그녀가 육장성으로 있으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나에 비해 가장 많이 신경을 썼던 존재가 시아티였다. 그러나 계속 엇나가기만 하는 시아티를 보며 히스토리아도 괴로워했다.
그러니까, 보답이 없는 건 시아티가 더하면 더했지.
“너도 마찬가지야, 시아티.”
오른팔은 없어도 양심은 어느 정도 남아있었는지, 시아티는 입을 다물었다. 히스토리아는 초연한 얼굴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결국 시아티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히스토리아 때문에 참는 거다. 시아티는 여전히 나를 향한 격렬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흠. 좋은 자질을 가졌네. 수틀리면 육장성이든 나든 상관없이 곧장 팔을 분지르려고 들고.
이거지.
“대신이라고 하기 뭣하지만 선물이야. 나를 따라오면 너에게 군국을 줄게.”
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공주와 시아티, 히스토리아, 그리고 짐승 두 마리까지. 딱 좋은 멤버다. 전력으로는 살짝 불안하지만, 티르나 회귀자가 여기서 드러날 사실을 알게 되면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티르와 회귀자는 의외로 잘 맞는 면이 있지만, 딱 하나의 주제에는 상반된 의견을 갖고 있으니까.
기껏 군국을 줬는데 군국이 없어져버리면 안 되잖아.
좋아. 결정. 이대로 간다.
“여러분. 저는 이제 사령부로 갈 겁니다. 안전 보장은 없고, 강요하지도 않겠습니다. 단, 성공할 시 여러분께 군국을 드립니다. 어쩌면, 그건 애타게 찾던 복수의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시아티의 바람. 복수를 이루려면 군국이 무엇인지 알아야지. 이 여행의 끝에서, 군국은 그 모습을 드러낼 거다.
“어쩌면, 철혈의 체제에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이상적인 나라가 될 수도 있고.”
이번에는 공주가 움찔거렸다. 왕국과 군국 사이 애매한 위치에서 갈등하는 공주에게, 군국은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었다.
“혹은 누군가를 위해, 머무를 공간이 될 수도 있고요.”
히스토리아의 반응은 없었다. 하긴. 히스토리아는 이미 한 번 육장성이 되어 공간을 마련해뒀지. 다만 나와 시아티가 거기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을 뿐.
“강요는 하지 않습니다. 단, 저와 함께 갈 사람은 제 곁으로 오세요.”
여기 있는 모두에게는 찾아갈 이유가 있다. 다들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가장 먼저 다가온 건.
언제나처럼 슬그머니 다가온 아지였다.
“멍!”
“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아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