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70화 (270/384)

EP.270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11

전투를 앞둔 사령부는 분주했다. 본래 하던 전쟁 준비와 더불어, 연금강 제련소까지 진군한 적성존재에 대한 대응까지. 오밤중에도 기지 전체가 곰이 들쑤신 벌통처럼 분주하게 움직였다.

특히, 그들의 골머리를 앓게 한 건 탈출한 노역자들이었다.

내가 풀어놓은 노역자들은 충분한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신원 미상의 노역자들이 작전구역을 대놓고 활보하는 건 통신병과 참모들의 정신적인 비명을 불러일으켰다. 차라리 다 죽여버렸으면 몸이야 편했겠지만, 숫자가 너무 많은 데다가 하필 보충하기 힘든 제련소의 노역자들도 섞여 있어서 그러지도 못했다.

그러는 와중 출입구로 군용 자동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병사들은 암구호를 물었고, 여장교 제복을 입은 연분홍빛 머리 소녀가 대답하며 자동마차에서 내렸다.

뻣뻣한 군복을 입은 공주가 옷만큼이나 뻣뻣하게 움직인다. 지위를 나타내는 견장도, 가슴팍에 달린 훈장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동글동글하고 순한 인상에 부드러운 연분홍빛 머리카락을 갖고선 군복을 입으니 뭐라 형용하기 힘든 위화감이 느껴진다.

공주는 잔뜩 힘이 들어간 자세로 경례했다.

“추, 충성. 공공안전부 소속 나탈리아 중위입니다! 극비 임무를 수행중입니다!”

말도 더듬고 경례도 어설프다. 어린아이가 필사적으로 따라하는 것 같다. 경비가 조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구금해도 될 정도로.

그렇지만 상대는 그럴 의지를 내지 못했다. 견장을 보고 신분을 확인한 장교는 눈가를 좁히며 물었다.

“공공안전부라… 연금인장은 있겠지?”

“저, 여기 있어요.”

“체크, 리…. 음. 확인 완료. 중위. 이건 어디까지나 본관의 임무니까 괘념치 말게….”

첫 번째. 상대가 하늘에 매달린 별도 떨어뜨린다는 공공안전부 소속이라는 게 그의 의지를 깎아 먹는 요소였으며.

“절대 기밀을 파헤치는 건 아닐세…. 준전시상황에 필요한 절차라 어쩔 수 없다네…. 중위는 지금 어디로 향하는 것이고, 뒤에 탄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적성존재와 접촉한 노역자입니다. 지크흐룬드 국장님께서 명령한 바, 더욱 상세하게 심문하기 위해서 공공안전부로 호송하는 중이에요!”

“국장님께서…?”

두 번째는, 그녀가 그란디오모르 왕가의 말예라는 점이다.

장교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도 그다지 수상쩍거나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의심이란 낯선 것에 대한 적대감에서 시작된다. 왕가의 권능은 그런 사소한 의심마저 지워버린다.

먼 옛날부터 시작되어, 가장 강력하지는 않았으나 가장 오래 살아남은 군주의 권능은 이런 사소한 곳에서도 발휘되었다.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네. 지나가게. 다음… 어이! 정지! 들어오기 전에 소속을 밝혀!”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통과했다. 공주는 고개를 꾸벅 숙이려다가 다급히 경례로 바꾸고는, 허둥지둥 자동마차에 올라탔다.

군인들이 길을 비켜주고, 군용 자동마차는 느릿하게 기지 안쪽을 향해 나아갔다. 공주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자리에 앉았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완벽했어요!”

식은땀을 줄줄 흘리던 공주는 모자를 벗으면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요….”

“그 깐깐하다는 군국 장교를 수월하게 속여넘기시다니. 제법이잖아요? 앞으로도 또 부탁드려요!”

“아뇨…. 못해요. 그저, 저를 별달리 의심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일이라고요….”

“그럴 수밖에요. 힐데가 두고 갔던 공안부의 연금인장도 있고. 공주님의 능력도 있고.”

그리고 생각을 읽어서 알아낸 암구호도 있었지. 절차적으로만 따지면 걸릴 요소가 없다.

물론 그것만이 끝은 아니겠지만.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겠죠. 우리가 무사히 통과한 데는 사령부의 의지가 있었을 거예요.”

“사령부의 의지? 그들이 저희를 묵인했다는 건가요?”

“네. 만일, 통신병이 어떤 적성존재가 사령부 기지를 향하고 있음을 알리고, 모든 장교들에게 우리 인상착의를 전하며 경고한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걸렸겠죠.”

티르와 회귀자가 있었다면 이 정도로 미온적인 대응을 하지는 않았겠지. 그 둘은 너무 유명하고, 군국도 그 힘을 경계해서 미리 경고하고 대응책을 마련했을 테니까.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물론 히스토리아는 강력하지만, 그녀의 힘은 일개 개인의 범주다. 거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군국에 충성하는 참군인이기도 했다. 사령부가 하멜른에서의 일을 파악하고 있다면, 히스토리아가 군국을 증오하기보다는 그저 나와 시아티를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내가 저쪽이 어떻게 나올지는 잘 알 수는 없지만, 군국의 이념만은 잘 알고 있다.

군국은 합리적이다.

나라와 나라와의 전쟁도 아니고, 고작 몇 불온한 개인의 습격에 나라가 휩쓸리고 있다. 거기다 히스토리아가 이쪽에 붙고 힐데까지 전력에서 이탈한 지금, 군국은 그 어느 때보다 연약해진 상태.

만날 이유가 없다면 있게 만들어주면 된다. 역시, 말로 해결을 보려고 해도 일단 힘으로 시작해야 한다니까.

가능한 인적 없는 도로로 향하며 나는 모두의 입을 단속했다.

“자. 일단 맞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 건 맞지만, 그래도 긴장은 해두세요. 이곳은 군국의 사령부. 바깥에선 그렇게 보기 힘든 장성이 발에 채이는 곳이에요. 육장성도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니 조심….”

『관제 관측 완료. 구현율 97.4%.』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지가 호랑인 줄 알아.”

어둠 속에서 빛무리가 한 점으로 뭉쳤다. 사령부의 희미한 전조등을 빛 바라게 하는 성광이 인간의 형체를 이루며 섰다. 그러고 있으니 꼭 빛으로 된 그림자처럼 보였다.

눌러 쓴 투구, 빛이 나는 탓에 크기를 가늠하기 힘든 몸체. 가늘고 긴 빛의 검.

천통 에이메데르. 군국의 수호천사.

그리고 어쩌면…. 사령부의 화신 그 자체일지도 모르는 존재.

“다들 물러나!”

누구보다도 먼저 그 존재감을 눈치챈 히스토리아는 몸의 전면을 그쪽으로 향해, 혹시나 에이메데르가 우리를 공격할 때를 대비했다.

그렇지만 에이메데르는 빛으로 된 칼을 우리에게 겨누지 않았다. 대신, 물끄러미 우리를 쳐다보았다.

눈부신 얼굴에서 검은 입이 열렸다.

『안내하겠다. 따라라.』

그리고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땅 위를 미끄러져 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당연히 따를 거라는 듯이.

그러나 천사는 인간의 마음을 모르는 모양이다. 어릴 적부터 낯선 사람은 따라가지 말라고 교육받는 우리는 에이메데르의 지시에 불응했다.

히스토리아가 날을 세운 채로 물었다.

“안내? 어디로?”

에이메데르의 몸이 삐걱거리며 멈췄다. 우리의 반응을 예상치 못한 모양이다. 순백의 천사는 다시 몸을 돌려서 의지를 전했다.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협상을 위해서가 아닌가?』

“협상이라고 하긴 그렇고. 대화?”

『그에 응하겠다. 단, 이 기체는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이 부족하다. 따라서.』

오직 정보만을 제공하기 위한 간결한 말투에,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육신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과 꽤 닮았다.

예상대로 말이지.

“한마디로 말해서 회담 장소까지 안내한다는 거죠? 시원시원해서 좋네요. 가시죠.”

『수용했다면 다시 안내하겠다. 따라라.』

에이메데르는 다시 몸을 돌려서 어디로인가로 향했다.

지금까지 에이메데르는 문답무용으로 칼을 휘두르는 괴물에 가까운 존재였다. 생명으로서의 기척도 없고, 손속에도 자비가 없으며, 힘은 잠깐이나마 티르와 맞설 정도로 강하다. 그런 괴물같은 천사가 태연하게 나타나서는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고 있으니 대단히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공주도, 시아티도, 히스토리아도 어찌할 줄 모르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단, 한 마리는 예외였다.

“냐아아….”

눈을 빛내며 에이메데르의 뒤를 노리는 나비가.

저 미친 게 뭐 하는 거야? 회담 전에 파토 나게 생겼네. 당장 막아… 아니, 내가 잡으면 위험하니까.

“아지야, 잡아! 꽉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해!”

“멍!”

“냐하학!”

아직은 때가 아니야, 아직은. 저쪽에서 공격할 때를 대비해서 데리고 온 거긴 하지만!

바둥거리는 나비를 뒷좌석에 쳐박은 채 우리는 자동마차를 몰고 천사의 뒤를 따랐다.

땅 위를 미끄러지는 천사는 상당히 빠르고 민첩했다. 빛으로 만들어져서일까, 관성이라는 개념이 없는 듯 속도를 유지한 채 방향을 바꾸기까지 했다. 잠깐만이라도 눈을 떼면 시야 밖으로 사라질 것 같았다.

우리는 허겁지겁 포탄이 가득 쌓인 무기고를 지나, 식자재를 쌓아둔 컨테이너에서 오른쪽으로 한 번 돌고, 공병대의 장비들이 무수히 쌓인 외곽 쪽을 크게 돌며 천사의 뒤를 따랐다. 신성의 상징인 천사가 강철과 콘크리트로 가득한 땅을 활보하는 모습은 꼭 어울리지 않는 두 그림을 합쳐놓은 듯했다.

“…뭔가, 이상해요.”

그렇게 나아가던 도중, 문득 공주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왜… 사령부 기지에, 아무도 보이지 않죠?”

체감상 반나절은 지난 것 같지만, 우리가 에이메데르를 따라간 건 고작 10분 남짓.

그러나 이곳은 사령부 기지다. 발에 치이는 돌멩이보다도 장교의 수가 많다는, 군국의 전력이 상주하는 군사적 수도인 것이다.

거기에는 굴러다니는 돌멩이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는 의미마저 포함된다. 아무리 위장했다고 한들 이토록 수월하게 지나다닐 수 없다….

누군가가 계획하지 않았다면.

나는 곁눈질로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사령부에서 우리와 만나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모양이네요. 사람들을 물리고 있어요. 들어봐요. 저 너머만 하더라도 군인들 일하는 목소리로 소란스럽잖아요?”

“어째서죠? 우리는 소수잖아요? 저쪽도 잔뜩 모여서 압박하는 편이 더 좋지 않나요?”

“꼭 그렇지는 않죠. 지금, 군국은 테러범과 협상하기 직전이에요. 나라 된 입장에서 일개 군인에게 굴욕적인 협상 과정을 내보이는 건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으니까요.”

군국은 합리적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그러리라 믿지 않는다. 그러니까 장교든 장성이든 정보를 제한하고 행동을 통제하는 거고.

수긍한 공주는 새로운 의문을 떠올렸다.

“어떻게 우리가 가는 길목만 정확히 사람을 물릴 수 있었을까요?”

“통신병을 쓴 거겠지.”

그 대답은 히스토리아가 했다.

“군인은 사령부의 명령에 절대복종하고, 통신병은 사령부의 명령을 전하지. 아마도 우리가 가는 이 동선… 이곳으로는 향하지 않도록 통신병들이 접근하는 군인을 향해 일일이 지시를 내리고 있을 거야.”

“아아. 맞아요. 통신병이 있었죠…. 그렇다면 통신병이 사령부인가요?”

“신관이 신의 말씀을 대신 전한다고, 신관이 곧 신이라 말하지는 않지.”

“그렇지만 사령부는 신이 아니잖아요? 누군가 통신병을 장악하거나, 혹은 통신병이 제 욕심 때문에 사령부의 뜻을 호도할 수 있잖아요? 어째서 아무도 그런 의심을 하지 않죠?”

맹점을 정확하게 짚는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히스토리아는 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었다.

“통신병은 그러지 않아. 아니, 못해. 그들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네? 통신병은 존재하잖아요?”

“아무도 그들을 본 적 없어. 가끔 파견 나가는 통신병을 안내했다는 이들은 있지만,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해. 눈앞에 나타나지도 않는 이들이 무슨 욕심을 갖겠어.”

신관이 타락한 예는 너무 많아서 세기 힘들 정도다. 신관은 매일같이 신도와 접하고 그들로부터 믿음과 성금을 뜯어내고 있으니, 욕심만 가진다면 해악을 끼칠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통신병은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는다. 인세와는 완전히 격리된 세상에서, 오직 골렘을 통해 제한된 의사소통을 한다.

이쯤 되면 신관도 아니고, 그냥 신의 나팔수다. 목소리를 전하기 위한 도구 그 자체.

“통신병이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고요? 육장성이신 총사님도 모르세요?”

공주의 물음에 히스토리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래…. 육장성인 나도.”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는지, 히스토리아는 고개를 홱 돌리고 입을 다물었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몰라. 친구를 도우려고 군국에 충성했지만, 친구도 군국도 어느 쪽도 알지 못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이용당하기만 할 뿐인, 잘 드는 도구일까.’

한때 사령부에 몸담았던 히스토리아는 회의를 느끼며 지나가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불편한 침묵 속에서 자동마차가 굴러가고.

『도착했다.』

이윽고, 에이메데르는 커다란 벽 아래 섰다.

이음매 없는 매끈한 벽이었다. 창문도, 문도, 심지어는 조그만 환풍구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건물보다는 상자가 더 어울릴 법한 외견이다.

본 적 있다. 탄탈로스가 땅을 뒤집어 놓았을 때, 땅속에서 튀어나온 찌그러진 작은 강철 상자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그거보다는 몇 배 더 크다는 것만 달랐다.

에이메데르는 흰 칼을 들어 올리고는, 벽을 향해 아무런 주저 없이 찔렀다.

히스토리아는 에이메데르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틈이 있었네. 아주 미세한. 저 안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칼날을 집어넣었어.’

이음매가 없다는 건 내 착각이었다. 보이지도 않을 미세한 틈 사이로 순백의 검이 파고들었다. 내가 보기에는 벽을 아예 관통한 것처럼 보이지만, 히스토리아는 예리한 눈으로 그 틈새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덕분에 나도 생각을 읽고 그 사실을 알았다. 휴, 아는 척했으면 부끄러울 뻔.

“벽, 벽을 잘라내고 있어요! 강철로 된 벽을 두부 자르듯이!”

어허. 여기 또 보는 눈이 별로인 사람이 있네. 쯧쯧. 우매한 너의 눈을 뜨이게 해주마.

“저기, 벽 사이에 미세한 틈이 있어요. 저 틈으로 빛의 검을 찔러넣은 거예요.”

“네? 틈이요? 어어, 있는 것 같기도…?”

상자 틈새에 칼을 집어넣을 이유는 하나뿐이지. 문을 따려고.

히스토리아는 그 틈밖에 보지 못했지만, 지금껏 금고 같은 걸 몇 번이고 털어본 나는 이 건물의 구조까지 대강 예측했다.

“빛 정도나 되어야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 아마 거기에 잠금쇠가 있겠죠. 저 빛의 칼로 안쪽의 잠금쇠를 풀어서 문을 열 거예요.”

내 말대로, 에이메데르는 틈새에 찔러넣은 검을 위로 올렸다. 철컥하고 무언가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직후 벽에 나 있던 미세한 틈에서 빛이 쏟아져나왔다.

그그그극.

굳게 닫힌 벽이 갈라졌다. 감겨있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벽면을 따라 울리고, 네모난 문이 안쪽으로 쑥 들어갔다.

열쇠의 역할을 다한 에이메데르는 가만히 서있었다. 생명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미동조차 없이, 수백 년 그 자리를 지켜온 무생물처럼.

그래. 에이메데르가 열쇠였구나. 부수지 않으면 결코 들어갈 수 없는 창문 없는 방. 통신병은 그곳에 어떻게 들어가고 어떻게 잠그나 했더니….

“그리고, 빛으로 된 검을 쓰는 존재가 에이메데르 말고 또 있지는 않겠죠. 군국의 천사인 에이메데르만 열 수 있는 문. 그 뜻은 무엇일까요?”

“이 안에 있는 이들이, 에이메데르를 부르거나 혹은 제어하는 이들이라는 뜻…?”

정답이다. 공주는 질문을 던질 가치가 있는 상대라니까.

에이메데르가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라.』

“다 들어가도 돼요?”

『상관없다.』

그리고 자기가 마치 문이 된 것처럼, 몸을 비스듬히 틀어서 우리가 지나갈 구멍을 터줬다. 나는 아직까지 에이메데르를 향해 손을 뻗는 나비와 그런 나비를 두 팔로 꼭 안은 아지를 먼저 들여보낸 뒤, 공주와 시아티를 향해 손짓했다.

언제 사고칠 지 모르는 두 짐승을 들여보낸 뒤, 나도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갔다. 군국의 가장 큰 비밀 중 하나가, 나에게 스스로 그 안쪽을 보여주는 거다.

그렇게 좁은 틈을 통과하여 선 나는 기이한 공간과 마주했다.

종이가 들어찬 커다란 원탁이 있었다. 탁자 위에는 종이가 수도 없이 늘어져 있고, 사방의 벽은 책을 찢어서 벽지로 삼은 것처럼 보였다. 자그만 글자가 수도 없이 적혀 있었는데 하나같이 군국의 기밀 정보가 담긴 서류였다.

잔뜩 쌓인 서류. 그 안에 담긴 수많은 정보. 그 자체로는 무질서한 글자의 나열이지만, 관련된 지식을 가진 누군가가 본다면 엄청난 가치가 생긴다.

그리고 그 가치를 만들어내는 존재들은.

『에이 호출. 연금강 제련소의 파괴 건으로 보급 물자량 조정 요망.』

『재고량 89,400유닛. 예상 유지 기간 38일. 그 후 재고 완전 소진.』

『증산량 요구치 3,200. 현 상태 달성 가능성 0.72%』

『이에 대해 가치 판단이 필요하다. 회의 안건으로.』

수십 개의 통신용 마도골렘이다.

꼭 장난감 나라에 온 것 같다. 용적률을 높히기 위해서일까? 여기 있는 마도골렘은 전부 소형 혹은 초소형이다. 손바닥만 한 골렘도 있으며, 가장 큰 것도 허리춤을 넘어오지 않는다.

가지각색의 소형 마도골렘이 사방팔방을 바쁘게 돌아다니면서 글자를 읽고 받아쓰고 있다. 손가락을 용케 놀려 글씨를 쓰는 골렘도 있고, 골렘용 타자기에다가 하나하나 쳐대는 골렘도 있고, 확성기에다가 머리를 대고 무어라 소리치는 골렘도 있다. 골렘은 하나도 인간을 닮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욱 동화적이고 아기자기했다.

장난감을 발견한 나비가 달려들려는 것을 아지가 필사적으로 막았다. 그래. 짐승의 왕은 둘이 필요하다니까. 난리를 피울 나비랑 나비가 흥분했을 때 그걸 저지할 아지.

두 짐승이 땅을 구르는 동안 나는 저편 벽에 난 문을 발견했다.

강철로 된 문이 동일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다. 간격은 좁다. 내가 양팔을 뻗으면 한쪽 문에서 다음쪽 문까지 닿겠다. 그런 문이 하나, 둘… 스물여섯.

문을 자주 사용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문앞에 종이가 가득 쌓여있을 리 없으니까.

나는 연달아 난 문 위쪽, 작은 명패에 쓰인 글자를 읽었다.

『이너서클 사령부 직속 통신본부. 모듈 아이(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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