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4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15
시아티는 군국을 증오한다. 하지만 군국의 모든 것을 증오하지는 않는다.
군국의 시민, 군국의 학생, 군국의 시설, 군국의 강철. 평범하고 무고한 이들은 시아티의 분노를 일으키는 대상이 아니다.
물론, 세상에는 그런 무차별적인 증오를 가진 사람이 있기는 하다. 성황청을 증오하는 티르나, 흡혈귀를 증오하는 이단심문관처럼 이분법의 세상에 있는 이들처럼.
하지만 친구들의 죽음으로 분노를 각성한 시아티는 그렇지 않다.
“…웃기지 마! 그 당시 없었다고 해도!”
“해도?”
“그래도….”
책임이 있다고, 죄가 있다고 외칠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으니까.
시아티가 시대의 폭력을 받아서 태어난 괴물이라고 해도, 그 변명은 더욱 뒤에 태어난 이들의 앞에서는 흐려진다.
“뭔데…!”
IA로부터 고개를 돌린 시아티는 에이비 대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는 난폭한 기세로 에이비 대위의 어깨를 움켜잡았으나, 기세에 비해 실린 힘은 미약했다. 시점에 따라서는 시아티가 대위에게 매달린 것처럼 보였다.
“너!”
시아티는 노력했다. 눈앞의 대위를 증오하기 위해서 온갖 어두컴컴한 기억을 꺼냈다. 죽어가는 친구들. 찬란한 가능성을 가진 앳된 얼굴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모습. 와중에 홀로 살아남아, 분노를 되새기던 과거.
그러나 눈앞의 소녀 역시 그녀의 기억 속 친구들 못지않게 앳되었다. 분노가 차츰 기세를 잃었다.
“너는… 몇 살이야?”
『20세입니다.』
하멜른이 6년 전 일. 아주 간단한 계산에 의해, 그때 고작 열넷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너무 쉬운 계산이었다. 시아티도 순식간에 끝낼 만큼.
시아티는 무너질 듯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에이비 대위의 앳된 얼굴과 가냘픈 어깨를 보고는 흠칫거리며 거칠게 손을 떼어냈다. 의수는 그녀의 뜻대로 움직였으나, 손가락이 부러진 왼손은 그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손을 떼어내는 데에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아, 아아아. 왜, 왜.”
비틀비틀 물러난 시아티는 의수로 얼굴을 감싸며 흐느꼈다.
“왜, 마음껏 미워하게도 해주지 않는 거야…!”
복수할 대상을 잃어버렸으니, 이제 그녀는 복수할 필요가 없다.
시아티의 바람은 여기서 끝났다.
“너희가 잘못했잖아…! 너희가 날 이렇게 만들었잖아. 너희 때문이잖아! 군국이 나에게 이러지만 않았어도, 나는, 나는…!”
공주는 삶의 의미를 잃고 절규하는 친구를 보며 안타깝게 중얼거렸다.
“시아티….”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면, 그 대가라도 치르라고! 내 분노라도 받아내라는 말이야! 다 가져갔으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잖아…! 너희는 죽어 마땅한 놈들이어야 하잖아! 그런데…!”
부러진 손가락이 흔들거린다. 남은 건 엄지 하나. 그렇게 군국을 찾았는데, 아끼고 아낀 이 엄지손가락을 꺾을 수 없다.
“나는… 못해….”
“괜찮아요!”
복수만을 위해 살아온 지난 세월은 부정당했건만, 그래도 그 시간 동안이 아예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친구의 절규를 들은 공주가 시아티의 어깨를 감싸 안고 위로했다.
“굳이 자기를 갉아먹으며 계속 복수하지 않아도 돼요! 복수를 포기해요, 시아티.”
레지스탕스의 수장답지 않은 말이다. 그러나 어쨌든, 공주는 진심을 다해 시아티를 계속 다독였다.
“왕이 없는 나라. 그 나라는 분명 그리 나쁘지 않을 거예요. 나쁜 왕이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요. 여기 있는 이분들은 다정하진 않겠지만 잔인하지도 않겠죠. 혹독하고 냉정하겠지만 폭군이 되지는 않아요.”
“무슨… 상관이야. 하멜른에서 죽은 아이들은….”
“저도 군국이 조금 더 다정해졌으면 좋겠어요. 진심이에요. 하지만, 왕이 있는 것보다는 나아요. 만일 이것이 어떤 왕이 내린 명령이었다면 우리는 그를 처단해야 했을 것이고, 왕국의 역사가 또 되풀이되었겠죠.”
‘차라리 다행이에요. 저는 이들의 증오를 외면하지 못했지만, 시아티가 증오를 버린다면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요. 군국에 왕과 같은 존재가 없다면 조금 안심이에요. 그들은 냉혹할지언정 절대 폭군이 되지는 못할 테니까.’
증오할 대상을 잃어버린 친구가 있다면 기뻐해야 할까, 아니면 슬퍼해야 할까. 공주는 확연히 전자 쪽이었다.
레지스탕스의 수장이었던 공주는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마음을 드디어 고백했다.
“반복되는 역사의 쳇바퀴에서 맴돌 바에야, 이쪽이 나아요. 휴이 님도 그게 무의미함을 알고 시아티를 여기로 이끌었을….”
“네? 전혀 아닌데요.”
이렇게 끝내서야 바람을 이루어줬다고 할 수 없지.
바람은 욕망이다. 욕망이란 죄다. 세상으로부터, 혹은 타인으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아오는 거다.
군국은 인간으로부터 그것을 앗아가려고 하고 있다.
“그게 군국의 존재의의죠. 누구도 죄를 짓지 못하게 만든 나라. 누구도 바람을 이룰 수 없는 나라. 혹은, 정해진 바람 말고는 가질 수 없는 나라. 미안하지만, 저에게는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네요.”
“네? 휴이 님은, 그러면….”
“시아티의 바람은 제가 이어받죠. 군국을 망가뜨릴게요.”
토끼눈을 한 공주를 두고 나는 성큼성큼 에이비 대위에게 향했다. 공주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잠깐만요! 휴이 님! 뭘 하실 생각이신가요!”
“망가뜨리려고요. 다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네?!”
진심이다.
군국, 이 빌어먹을 나라는 너무 꽉 막혔다. 할 수 없는 일이 가득하여 바람조차도 제대로 갖지 못한다. 오죽하면 내가 바람을 찾으러 돌아다녀도 찾을 수가 없을 정도다.
3레벨 시민이 되고 싶다.
시간을 되돌려서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싶다.
내일은 무언가 색다른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혹은, 차라리 이 세상에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그건 내가 줄 수 없는 것들.
나에게 바람을 들려준 사람은 과거 왕국 시절에 살던 이들이 전부였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게 야만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정하는 게 문명. 나라인 군국은 견고한 문명을 꿈꾸었지만, 저는 군국의 바람은 들어줄 수 없는걸요.”
군국은 인간이 아니니까. 도리어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지.
“자. 야만의 시간이에요. 저는 군국을 무너뜨릴게요.”
‘군국을 무너뜨려요? 어떻게? 여기는 통신병밖에….’
공주는 황급히 뒤쪽을 바라보았다. IA와 에이비 대위. 그리고 아직 열리지 않은 다른 강철 문. 그 안에 있을 통신병들을 보고는 내 의도를 지레짐작했다.
‘통신병, 저들은 군국의 중추에요…! 만일 군국을 무너뜨리겠다면, 휴이 님, 설마!’
안색이 창백해진 공주가 급히 외쳤다.
“아무리 그래도! 무저항인 소녀를 해치겠다니…! 그런 건 남자답지 않아요! 셰이 공이 이 광경을 보면 실망할 거예요!”
“아하하하. 공주님은 커다란 착각을 하고 계시는데, 셰이 씨는 그렇게 착하지 않아요. 따지자면 악당에 가까운 쪽이죠. 왜 셰이 씨가, 이 시설을 콕 집어서 부수어야 한다고 말했겠어요?”
물론, 회귀자도 군국의 구조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알진 못했다. 그러나 통신본부가 군국의 중추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부수려고 했다.
필요하니까. 그게 이유다.
그리고 그녀는 그럴 수 있다.
내가 거침없이 발을 내딛자, 공주는 내게 반발하듯 양팔을 벌리고 나를 가로막았다. 통신병을 지키려는 모양새다.
레지스탕스이면서, 군국의 최고 중요 부품인 통신병을 고치려는 건 아이러니해 보였지만… 사실 공주의 바람을 생각하면 그건 맞는 행동이다.
진짜 아이러니는 다른 거지.
“공주님의 고견은 잘 들었어요. 하지만 아이러니하네요. 공주님은 왕이 없는 나라. 왕이 없어도 되는 나라를 꿈꾸면서….”
나는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공주를 내려다보았다. 공주는 여전히 대항심을 불태우며 나를 마주 보았지만.
“왜 군국의 백성을 책임지려고 하세요? 왜 그들의 왕이 되려고 하는 거예요? 역시, 피는 못 속이나?”
정곡을 찔린 공주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실소 비슷한 것을 흘렸다.
이 나라 만백성에 책임감을 느끼고, 더 나은 선택지를 고른다. 설사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이 존재하더라도 감수하고….
뭐야, 그거. 제왕의 폭력이잖아.
“괜찮아요. 누구나 한 번쯤 왕이 되는 꿈을 꾸곤 하죠! 저는 공주님의 바람도 긍정해요. 아니! 오히려 더 좋아요! 이 정도는 되어야지!”
“저, 전…!”
역시, 왕국 출신들 바람이 거창해서 듣는 맛이 있다니까. 왕국이 좋은 나라는 아니었어도, 최소한 꿈과 희망은 넘쳤지.
본심을 들키고 삐걱거리는 공주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공주는 나를 붙잡을 생각도 못 한 채로 주저앉았다. 귀신을 본 것 같은 황망한 눈길만이 내 뒷모습을 쫓았다.
자, 시작하려면 일단 통신병을 저 골방에서 끄집어야겠지? 하지만 강철 문은 따는 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데.
“아지야. 저기 있는 문을 하나하나 부수면서 안에 있는 사람을 해방시켜줄래?”
“멍?”
“아니다.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나는 히스토리아에게 종이 공을 건네며 말했다.
“리아. 이거 줄 테니까, 저기 있는 통신병들 다 해방해줄래?”
“….”
의심스러운 눈길이 나를 향한다. 뭐, 혹여나 내가 통신병을 다 죽이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거야?
그럴 리 없잖아. 그 방법은 너무 쉽다고.
“부탁이야. 그들을 죽이려는 건 아니니까. 한 번만 도와줘.”
“…믿을게.”
히스토리아는 내 부탁을 충실히 따라줬다. 말없이 강철 문에 다가간 히스토리아가 힘을 줄 때마다 강판이 찌그러지는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히스토리아의 기공 앞에서는 3레벨 연금강도 무색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강철은 강철이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종이 공을 준 건 아지를 써서 부수라는 뜻이었는데. 그냥 자기가 부수네. 뭐, 힘이 있으면 방법은 자유니까.
어깨를 으쓱한 나는 에이비 대위에게 다가갔다. 나팔꽃 줄기에 묶인 채였지만 보이지 않는 척, 태연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에이비 대위. 오랜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