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6 강철의 나라와 얼굴 없는 인간들 - 마무리
동조 마법으로 모두가 동조하게 된 통신병. 그들은 고유마도를 통해 같은 것을 느끼고, 같은 정보를 공유한다. 보고 방식을 정해놓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투도 서로 닮아간다.
군국은 결국 인간마저 찍어내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지.
만일 그게 됐다면, 통신병을 굳이 창문 없는 방에 가뒀겠어?
“통신병끼리는 서로 연락할 수 있잖아! 그런데 왜 동료가 사경을 헤매는데도 도와주지 않은 거야?”
도의적인 비난이다. 평생 방 안에 갇혀있다가 처음 직면한 IA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그것은 통신병의 규칙….”
“시끄러워! 일단 급한 사람부터!”
말을 끊으며 눈으로 Y를 재촉하려…했으나 그럴 필요 없다. 이미 Y는 투약하는 중이다. 내가 준 카드를 기울여 하트 9를 자기 입안에 머금은 뒤, Z의 입을 벌리고 안으로 흘려 넣었다.
모두들 잠시 말을 멈추고 둘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못 필사적으로 약을 흘려넣던 Y는, 어느 순간… 크게 경련하더니 실 끊어진 인형처럼 풀썩하고 쓰러졌다.
몇몇 이들이 동요했지만, 그건 대부분 우리 쪽 사람들이었다. 동료 한 명이 쓰러진 그 순간에도 통신병은 태연했다.
“약이라는 건 거짓.”
“독? 혹은 약물?”
“본 모듈에는 적습에 저항할 수단이 없습니다. 왜 굳이 거짓말을?”
“그는 아미텐그라드에서 사기꾼으로 알려졌습니다. 필시, 본 모듈을 기만하기 위함일 터.”
IA를 비롯한 통신병들은 태연했다. 어쩌면 이럴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하고 있었기에, Y가 쓰러졌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서 내 공격의지를 재확인하는 행위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한 명.
“거짓말쟁이!”
오직 X만은 격렬한 분노와 함께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히스토리아가 재빨리 막으려고 다가왔으나, 나는 손으로 그녀를 제지했다.
생각하고 판단하게끔 만들어야 해.
“귀하는… 처음부터 우리를 전부 처리할 생각이었습니까…? 통신병의 정체를 알고도 공격을 계속 감행하려는 것입니까!”
X 혼자 나에게 순수한 분노를 쏟아낸다. 여기서 더 골려줄 수도 있지만, 굳이 일을 복잡하게 꼴 필요는 없지. 나는 순순히 털어놓았다.
“제가 쓴 물약은 하트 9, 거짓 죽음의 약이에요. 일정 시간 동안 마신 사람을 가사 상태에 빠뜨리죠.”
“가사 상태? 어째서 그런 약을….”
“제물이 되었다는 건 자기 심상을 뿌리째 뽑아냈다는 것과 같거든요. 용케 목숨은 부지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죽어버릴 거예요. 그럴 때, 심상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나는 한번 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주마등이라고 하죠? 죽음, 혹은 그에 가까운 쇼크를 받았을 때, 지금까지 겪었던 삶이 한순간 팍 떠오르는 거.”
어떤 장치든, 어디가 걸리면 한 번 작동을 멈췄다가 다시 개시하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된다. 그건 인간도 마찬가지.
죽음, 혹은 그에 가까운 거대한 자극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가면, 잠깐 초기화되었던 이전 신경이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지금까지 만들어놓았던 기억의 흔적을 다시 돌이킨다.
“그러니까 콱. 한 번 죽었다가 다시 깨어나면, 지금까지 살면서 쌓아온 심상이 상당 부분 복구돼요. 약물을 써서라도 그 현상을 일으킬 필요성이 있었어요. 어디, 한 번 확인해보실래요?”
반신반의한 X는 다시 고유마도를 사용했다. Y나 Z와는 달리, 그녀가 소환한 에이메데르는 고작 문을 열었을 뿐이라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비교적 말짱한 고유마도가 그녀와 Y, Z 사이를 이었다.
“…! 동조가…!”
불완전하지만, 서로 이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커다랗게 손상되었던 고유마도 중 일부가 복구되었다.
X는 내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모든 통신병은 그것이 진실임을 알아차렸다. 동조 덕분이다. X는 태도를 바꾸었다.
“…귀하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괜찮아요. 마침 저에게 알맞은 수단이 있었을 뿐인데요, 뭘.”
너희를 후벼팔 수단이 말이야.
나는 속내를 숨기며 X를 향해 우호적인 미소를 보냈다.
“저 둘은 당신이 보살펴주세요. 이곳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사람은 당신이네요.”
X는 내게 고마움을 느끼며 둘을 바로 눕혔다.
군국을 만든 누군가는 꽤 견고한 시스템을 만들었다. 세상과 격리된 통신병들을 이용해 군국을 통치하는 방식. 그건 내 입장에서도 꽤 인상 깊었다.
물론 인상 깊기만 할 뿐이다. 철인이 통치하는 세상. 그건 아주 흔하디흔한 개념이다. 모두가 철인이 되기를 바라고 모두의 위에 섰다.
그걸 통신병으로 메운 군국은 꽤 대단하긴 했지만, 그래도 근본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잘 만들어보았자, 통신병도 인간이라는 것을.
“그보다. 갑자기 화가 나네. 당신! 나보고 기만자라고 했겠다!”
나는 U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서 고개를 들이밀었다. 졸지에 내 주목을 받게 된 U는 흠칫 뒤로 물러났으나, 나는 그보다 빠르게 따라붙어서 윽박질렀다.
“내가 누군지 알고 나를 평가해? 뒷골목에서 사기나 치고 남이나 속이는 사기꾼이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 본관이 습득한 정보로는….”
“습득한 정보? 무슨 정보인지 모르겠지만, 그건 당신이 직접 보고 생각한 거야? 나라는 존재를 당신이 접한 정보로 설명할 수 있어?!”
U는 아무런 반박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통신병치고 드물게도 자기 직업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던 그녀는 조그만 실수에도 치욕스러워했다.
그래. 이거다. 같은 상황을 두고도 느끼는 약간의 차이. 사소한 감정. 인간이 인간이기에, 감정적이고 충동적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약간의 틈.
윽박지르기를 끝낸 나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말했다.
“저는 당신들을 죽이거나 해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애초에,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인간의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내가 말하는 바는 모두가 듣는다. 한 모듈의 통신병은 실시간으로 동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똑같이 들을까?
“군국은 인간을 챙기지 않습니다. 그저 억압하고, 벌하고, 다스리려고 할 뿐. 그들의 치세에는 인정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굶주림에 신음하는 아이를 먹이기 위해 도둑질한 어머니를 흉악범과 같이 가두고,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자기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어도 그게 군국의 사상에 반하면 군홧발로 짓밟죠.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
그리 말하며 천천히 걸어가다가, P의 앞에 도착한 그 즉시 고개를 홱 돌려서 크게 외쳤다.
“좁은 방에 갇힌 채 천천히 죽어가는 통신병도 마찬가지!!”
“꺄앗!”
자극에 특히 민감한 P는 내 외침에 화들짝 놀라서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통신병이 평정심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다 골렘을 통해서 의사소통하기 때문이지, 맨몸으로 있으면 평범한 사람이랑 다를 바 없다.
그녀를 향해 비웃듯이 미소를 날려주고는 옆에 있던 R의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저는 이런 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어요. 우연처럼 찾아오는 기쁨도 없고, 하룻밤 꿈과 같은 사치와 향락도 없고. 누군가를 보고 감동하거나, 혹은 변덕스럽게 마음을 바꾼다거나. 죄를 따지기 전에 그 마음부터 헤아리는. 규칙보다 사람이 우선인. 저는 그런 나라를 원해요!”
“그걸 왜 본관에게….”
“당신은 그런 것을 생각해본 적 없어요? 군법에 의거 죄인을 처벌할 때. 푼돈 따위에 양심을 팔아먹은 녀석과 당장 죽을 것 같은 가족을 치료하기 위해서 잠깐 돈을 빼돌린 이. 같은 죄라고 둘을 똑같이 처벌하는 게 맞아요?”
군국의 통신병 중에서도 판결과 판례를 모으는 R. 그녀라면 조금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겠지. 이렇게 조금씩, 모두에게 다른 한 마디 한 마디를 건넨다. 날카로운 꼬챙이로 틈을 벌릴 때, 좌우로 비집고 흔들게.
“너희들은 틀렸어! 누구에게 이렇게 되라고 배운 건지는 모르지만, 완전히 틀렸다고요! 강철 벽으로 사방을 둘러싸고, 골렘을 통해서만 이야기하고, 자기네들끼리 음습하게 대화한다고 객관적으로 될 것 같아요? 아니야! 그건 방임이고 포기야! 너희가 군국을 움직이는 사령부라면, 생각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돼!”
슬슬 무언가 낌새를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이 모듈의 관리자라고 할 수 있는 IA는 꿋꿋하게 내 말을 자르려고 들었다.
“무의미한 주장입니다. 이보다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귀하의 의견은….”
“닥치고 있어! 방관자인 네 의견 따위는 신경 안 써!”
냅다 뺨을 갈겼다. 또 쓰러진 IA는 아주 잠깐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고유마도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통신병 여러 명을 묶는 타입… 달리 말해, 이걸 학급으로 치면 반장이다. 그녀의 권력은 근거리 한정으로 매우 강력해서 이곳 25명의 모두를 옭아맬 수 있을 정도니까.
그러니까 너의 발언은 허락하지 않는다. 애초에 말도 못 내뱉도록 압박한다.
어때, 속 터져 죽겠지? 그거면 돼.
“말이 너무 많아. 리아, 내가 말할 동안만 저 사람의 입을 막아줘.”
“…굳이 그렇게까지?”
“꼭 필요한 일이야. 네가 하지 않겠다면 그냥 재갈을 채울래.”
재갈보다는 자기가 입을 막는 편이 더 낫다고 여긴 히스토리아는 IA의 뒤로 돌아가서 입을 틀어막았다. 육장성의 구속은 어지간한 구속복보다도 강력했으며, 구속복은 형편상 갖지 못한 지능마저 갖고 있었다.
IA는 이제 꼼짝달싹하지도 못하고 내가 말하는 것을 지켜만 보는 입장이 되었다.
“여러분들은 잘하고 계십니다. 군국이 아직 멀쩡한 걸 보면 그건 틀림없죠. 하지만, 당신들도 인간이고. 언제나 옳지는 않아요.”
손을 들었다. 아까 깨뜨려버린 하트 10의 카드. 원래 붉었어야 하나, 안에 담긴 액체가 다 빠져나온 바람에 창백한 회색의 하트를 가진 카드를 두 손가락으로 집었다.
“예를 들어, 이렇게. 방금 전 망가뜨린 카드를 원래대로 돌려놓는다면….”
그러나 내가 카드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흔들고는 동그랗게 말아 입김을 불자, 카드는 다시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하트를 원래대로 돌려놓은 나는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제가 무슨 수를 썼는지. 저 좁은 방 안에서 평생 살아온 당신들이 알까요?”
논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 몇몇 통신병은 호기심…보다는 관찰욕구 비슷한 것을 느꼈다.
평생 방 안에 갇혀서 지낸 통신병들은 후천적인 관음증 환자이다. 골렘을 통하지 않고서는 강철로 된 상자 안에 갇혀있을 뿐이기에, 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골렘에 접속해서 세상을 본다.
그리고 마술로 속여넘기기 가장 쉬운 건, 마술이란 존재를 처음 접하는 이들이지.
“주목할 이유 없습니다. 그가 속임수를 부린 것이 분명합니다. 신기한 부분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 한 명. S는 통신병들의 호기심을 원천 차단하려고 나섰다.
하지만 방식이 잘못되었다. 속임수라고 주장하는 건 반쯤 마술의 존재를 인정하겠다는 것. 애초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런 주장은 오히려 먹잇감이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