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79 축복받은 나라, 저주받은 인간 - 2
『군국의 딸. 군국에서 나고 군국에서 자란, 군국의 미래…. 결국 너마저도.』
압도적인 위광의 천사 앞에서도 히스토리아는 의지가 꺾이지 않았다.
“시정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힘이, 권력이, 명예가 있었다. 그러함에도 모든 것을 저버린 이유가 무엇인가? 무엇이 부족하여 군국을 배신하였는가?』
히스토리아는 망가진 손으로 총을 쥐었다. 그녀도 감기공의 극에 달한 자. 몇 분 만에 어긋난 뼈를 제 위치에 돌려놓았지만, 그래도 원래 상태보다는 대단히 나빴다.
그래서 히스토리아는 망가진 손으로 총을 쥐었다. 싸우기 위해서.
“…친구입니다.”
에이메데르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작 그 때문에?』
“…그리고, 친구가 있을 공간입니다. 군국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힘이 있고, 권한을 가졌으며, 수많은 부하를 거느렸는데도. 책임을 다할 생각을 않고 도망가다니…. 정녕 한없이 어린 아이로다.』
천사의 한탄으로 대화가 끝났다. 행동에 따라 살려줄 법도 하건만, 히스토리아도 에이메데르에게 용서를 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의견이 갈렸으니, 이제 남은 건 싸움밖에 없다. 모두가 이어질 전투를 예상하고 숨을 죽였다.
잡음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 끊어지기 직전의 실처럼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천사의 뒤쪽에 짐승의 눈이 반짝였다.
“냥!”
나비의 기습으로 전투가 열렸다.
짐승인 아지와 나비는 먹지도 못하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군국의 정체와 이념은 확실히 먹지는 못할 것이었다. 나비는 조용하고 어두컴컴한 통신 모듈에 들어오자마자 방에 쫄래쫄래 들어가서는 늘어지게 잠들었다.
그러던 차, 천사의 등장은 너무 요란스러웠다. 나비의 잠을 깨울 만큼.
나는 고통에 신음하면서 중얼거렸다.
“큭, 이걸 위해서 짐승 놈들을 데려왔다고….”
에이메데르는 빛으로 이루어졌다. 나비는 반짝거리며 빠르게 이동하려는 것에는 사냥 본능이 발동한다. 하물며 인간의 육신을 입지 않는 에이메데르는 짐승의 기습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가 에이메데르와 싸웠던 그때처럼….
라고 생각했는데.
『짐승 따위가.』
인간의 육신을 입은 진짜 에이메데르는 나비를 눈치채고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나비의 앞에서 날개가 반짝거린다. 본능에 따라, 나비의 눈이 순간적으로 날개의 첨단을 쫓는다. 벼락처럼 따라간 앞발이 날개를 찢어발기나, 그건 허상이다.
『믿음의 전부라면.』
“냐하아아아악!”
직후 찬란한 빛이 번쩍이며, 나비도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다른 두 장의 날개로 나비를 후려친 탓이다. 빛무리 사이로 피에 젖은 흰 털이 흩뿌려졌다.
『그게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직접 일러주마.』
에이메데르가 공중에서 날개를 접었다. 순간 작은 폭풍이 건물 안에 일고, 에이메데르는 보이지 않는 손잡이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급격하게 움직였다. 에이메데르는 히스토리아의 앞으로 쇄도했다.
나비의 공격 타이밍을 맞춰서 협공하려던 히스토리아는, 나비의 전투 이탈로 천사와 일대일로 대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히스토리아는 육장성. 대인전의 극의에 달한 기공사다. 와중 천사는 아슬아슬하게 대인전의 범주에 들었다.
‘팔과 다리보다 날개가 먼저 움직여. 천사를 움직이는 힘은 날개에서 나와. 확신은 없지만, 확인은 해야 해. 그렇다면, 날개를 피해서.’
천사의 특징을 되새긴 히스토리아가 앞발을 세게 내디디며 몸을 틀었다. 커다란 날개가 그녀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센 풍압이 얼굴을 후려치는 와중에도 히스토리아는 상대를 관찰했다.
‘범위가 너무 넓어. 공격이 하나같이 예리하고 빨라. 접근은 불가능. 그렇다면!’
히스토리아는 판단을 끝마친 즉시 총을 들었다. 한쪽 날개가 세 장이기에 나타나는 틈. 그 실낱같은 틈으로 총구를 밀어 넣고는 전력을 다해 총탄을 쏘았다.
틱.
그렇지만 총탄은 쏘아지지 않았다. 새하얀 깃털이 권총을 비스듬히 파고들었던 것이다.
‘날개뿐만 아니라, 깃털에도…?! 이런!’
『나는 군국 그 자체. 군국의 안에서 에이메데르는 전지(全知)이니.』
에이메데르의 날개가 히스토리아를 뒤덮었다.
매의 날개 끝에 올라탄 파리는 어떤 고난을 겪을까? 이따가 히스토리아에게 물어보면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커다랗게 팽창한 날개가 히스토리아를 튕겨내버렸다.
날개 위를 미끄러지고, 깃털에 긁히고, 폭풍에 휘말리고. 히스토리아는 찰나의 시간 동안 온갖 경험을 겪었다.
“…칫. 저러면 나가리인데.”
군국 육장성, 천통 에이메데르. 그 본모습인 천사의 힘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가장 무서운 건, 저 에이메데르에게는 충분한 지식과 그것을 이용할 지능마저 있다는 점이다.
“냐아! 저거, 이상하다냐! 딱딱하고 뾰족하다냐!”
나비가 땅을 뒹굴며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와중에도 나비가 그렇게 위태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에이메데르가 싸우는 와중에도 나비에게는 치명상을 입히지 않았던 탓이다. 그저 깃털을 갈고리처럼 세워서 털을 쥐어뜯었을 뿐이다.
고통은 느끼되 목숨이 위험하지 않을 정도. 그러면 나비는 흉성을 발휘하지 않는다. 고통과 위협을 느끼고는 그냥 멀리서 힐끔힐끔 지켜보겠지.
“멍….”
그리고 하필 IA의 육신을 입고 강림한 탓에, 내가 준비한 다음 전력인 아지는 지금 내 곁에서 손가락이나 핥고 있다.
이런 쓸모없는 짐승놈들 같으니.
“…멍. 아파하고 있어.”
“나? 맞아. 아파 죽겠더라.”
나는 투덜거리며 하트 카드 두 장을 꺼냈다.
눈에 띄게 다친 곳은 없지만, 순수하게 충격이 너무 크다. 피도 흐르고, 내장도 조금 상했고, 뼈도 욱신거린다.
어디 하나가 아플 때는 거기에 듣는 약을 쓰면 된다. 그렇다면 전신이 아플 때는?
“역시 마취약이지.”
하트 4와 5를 포갠다. 아주 약간의 틈을 두고 떨어진 두 장의 카드를 눕혀서 든다. 톡톡 두들기니 그 사이로 새빨간 액체가 배어나왔다.
하트 4, 죽음. 하트 5, 감각독. 둘을 조합하여 만든 감각을 죽이는 약.
그래. 마취약. 혹은 마약이다.
카드를 조합하여 만든 약. 하트에 담긴 모든 약이 하나같이 단순하고 위험하지만, 그만큼 효과가 강한 것들이다. 나는 카드를 기울여 그것을 내 입으로 흘려보냈다. 짜릿한 첫맛이 순식간에 무미무취로 변한다. 감각이 마비된 탓이다.
반동은 크게 오겠지만, 당장의 위기를 극복하는 게 우선이다. 미래란 살아남은 다음에야 준비할 수 있는 것.
“멍. 너 아냐. 쟤.”
“누구? 저 반짝이?”
“멍.”
지금 쟤 걱정을 할 때냐? 지가 좋다고 생각도 멈추고는 자기 몸을 갖다 바친 놈인데.
“아프겠지. 자기 몸을 제물로 공유 심상의 천사를 불러온 셈이니까. 예상컨대 얼마 못 갈 거야. 한 시간 정도….”
하지만 한 시간이면 나를 찜쪄먹고도 남을 시간이다. 빨리, 천사 셰프의 수제 휴즈 찜이라는 끔찍한 결과물이 세상에 등장하기 전에 대처 방법을 생각해내야 한다.
슬슬 약효가 도는지 고통이 가시고 빈자리에 힘이 차오른다. 몸 안 깊숙이 끓어오르는 이 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진실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손에 든 카드는 사실 깨진 전설의 검이고, 내 '진심'을 발휘한다면 천사 따위는 단번에 갈라버릴 수 있으니까. 에이메데르, 지금까지 잘도 날뛰었겠다. 아예 도륙을 내주마….
‘귀하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몸을 부들부들 떨며 일어서서는, 벽을 붙잡고 흐느끼고 있습니다! 무언가 이상이 생긴 것이라 추측!’
…물론 그럴 리 없지. 조금 전 떠오른 망상은 마취약의 부작용이구나. 세상에는 고통만이 가득하니, 고통을 잊으며 현실도 같이 잊어버리게 되는 거다.
하지만 나는 독심술사. 나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면 객관성을 잃지 않는다. 내 고통이 타인의 생각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감사하며, 나는 흔들거리는 몸을 바로세웠다.
마침 에이비 대위가 달려왔다.
“귀하! 무사합니까?”
“지금은 괜찮아요, 삐 대위.”
이성을 되찾은 김에 주위를 살폈다. 아직 히스토리아는 싸우고 있고. 나비는 천사를 경계하면서도 슬금슬금 저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공주는 시아티가 대피시켰다. 시아티는 아직 엄지가 남아있으니, 여차할 때 도움이 되겠지만… 천사가 흑마술 따위에 걸릴지는 모르겠다.
흠. 절체절명이로군.
“오랜만입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부상은 어떻습니까? 심각하진 않습니까?”
“이제는 안 아파요.”
“다행입니다. 안부는 확인했으니, 이제 현 상황을 보고하겠습니다.”
죽을 뻔했어도 통신병이라는 걸까. 내 안부를 확인한 에이비 대위는 걱정을 담아 나를 살펴보면서도 입으로는 또박또박 정보를 나열하기 시작했다.
“현재, 통신병 유엘이 불러낸 에이메데르는 본관과 타 통신병, 그리고 귀하를 향한 강력한 적의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승산은 0%. 따라서, 본관은 귀하에게 이 장소에서 탈출할 것을 전력으로 제안합니다.”
“탈출? 에이비 대위의 입에서 먼저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실없는 소리 할 시간이 없습니다. 상황은 급박합니다. 히스토리아 소장님이 패배한다면, 유엘의 에이메데르는 곧장 귀하와 본관을 공격할 것입니다.”
말투는 골렘처럼 딱딱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예전과는 다르다.
에이비 대위는 살아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왕이면 나와 함께.
그래. 살아남기 위해서 무엇이든 할 각오. 천사의 명령마저 뿌리치고 도망칠 각오. 나에게는 이게 필요하다.
그것이 없다면, 통신병은 무고하며 무결할 테니까.
나는 이음매 하나 없는 벽을 쾅쾅 두들겼다.
“여기는 문은커녕 창문도 없는데 어떻게 탈출하죠?”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본관의 판단에 따르면, 유엘은 귀하를 향해 커다란 경계심을 가졌다고 추측됩니다. 귀하, 혹여나 유엘을 공격한 적이 있거나 위협할 수단이 있습니까?”
“전혀요. 저는 유엘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 잠깐만요.”
분명히 아까 통신병이 말했다. 에이비, 그녀는 최초의 통신병인 에이와 가장 가까운 통신병이라고.
나도 에이비 대위가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대강 추측했다. 식별명도 가장 앞쪽 순서고, 가진 바 능력도 의외로 대단하다. 지상에서 무저갱 탄탈로스로 의지를 보낼 수 있으니까.
탄탈로스가 변방에 있지만 사소한 시설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태고의 괴물부터 흉악범까지. 군국을 위협하거나 그럴 능력이 있는 괴수들을 가둔 역사적인 무저갱.
그곳을 단독으로 감시하는 존재가 평범할 리 없지. 그래서 나름 줄을 대보려고 했던 건데.
“유엘을 알아요? 그녀가 누구고, 어디에 사는지?”
어쩌면, 에이비 대위는 내 생각보다 훨씬 거물이었을지도.
에이비 대위는 모든 감정을 배제한 채로 아는 정보를 나열했다.
“부정. 통신병은 식별명을 부여받은 뒤, 누구에게도 근무지를 알리지 않은 채로 배속됩니다. 같은 통신병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본관은 통신병 유엘과 통신만 나눴을 뿐, 그 이외에는 어떤 상호작용을 한 바가 없습니다.”
“그 통신병과 통신을 나눴다고요. 그리고 그 통신병은 여기에 천사를 강림시켰고.”
여기부터는 나도 모르는 영역이다. 하지만, 대강 추측은 할 수 있다.
유엘이라고 불리는 존재는 통신병의 능력을 가졌다. 그리고 에이비 대위와 통신했으면서 여기에 천사를 강림시켰다.
유엘이라고 불리는 미지의 존재는 군국 전역에 능력을 펼치고 있다. 한마디로, 어떤 측량법을 써도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추측은 할 수 있다.
“군국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어요. 누군가 목적을 가지고 만든 나라죠.”
왕국이 멸망하고 군국이 들어섰을 때, 기존에 있던 아미텐그라드라는 큰 도시를 마다하고 군국은 이 위치에 사령부를 지었다.
초창기에는 메타컨베이어 벨트의 설치를 감독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군인들은 말이 뛰놀던 평야에 노역자들의 숙소로 만들어놓고는, 메타컨베이어 벨트를 만들기 위한 인력과 자원을 관리했다.
“만일 저 천사가 군국의 탄생에 관여한 역사적인 존재라면, 분명 군국의 손을 오래 탄 장소에 있을 거예요.”
그렇게 메타컨베이어 벨트가 완성되고 군국이 중흥기에 들어서기 직전, 이곳은 사령부가 되었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본래 목초지로나 쓰이는 평야였으나 메타켄버이어 벨트라는 혁명이 이뤄진 뒤에는 교통의 요지가 된 이곳. 맨땅이라면 모를까, 이미 시설을 다 지은 이곳을 버릴 이유 없으니까.
“예를 들어, 이 사령부처럼요.”
“하나, 사령부는 광대하며 수많은 군인들이 무장을 마치고 대기하는 중입니다. 이곳에서 어떻게 그녀를 수색한다는 말입니까?”
보통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 우연을 제외한 모든 창조는 모방에서 비롯된다. 통신병 역시, 무언가를 본 따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군국은 신. 통신병은 신관.
에이와 가장 가까운.
“에이비 대위. 나 믿어요?”
꽤나 뜬금없는 말이었을 텐데도 에이비 대위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
흠.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 여차하면 설명하려고 했는데. 굳이 더 설명할 필요 없겠네.
“저쪽이 통신병을 찾을 수 있다면, 통신병의 눈으로 이곳을 볼 수 있다면…. 저는 못하겠지만, 에이비 대위는 그녀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찾아봐요, 에이비 대위.”
의심하지 않는다. 어떻게 할지 되묻지도 않는다.
에이비 대위는 잘 훈련된 군인이고, 전력으로 주어진 임무를 시행할 것이다. 믿음만 굳건하다면.
“확인했습니다. 통신병 에이비. 현 시간부로, 통신병 유엘을 찾아내는 임무에 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