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4 축복받은 나라, 저주받은 인간 - 7
유엘은 우리가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조차도 양손을 맞잡고 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시체를 무릎 위에 올려둔 채로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모습은 꼭 돌로 만든 조각상처럼 보였다.
세상 그 무엇도 그녀의 집중을 깰 수 없을 것처럼 보였으나, 역시 세상에 절대란 없는 모양이다. 에이비 대위가 시체를 언급한 순간 그녀는 감정을 되찾고 인간으로 되돌아왔다.
“직접 만나는 건 처음이네. 반가워, 에이비. 정말, 정말 한번쯤은 보고 싶었어.”
흔쾌히 인사를 건넨 유엘은 곧 표정을 싹 바꾸며 에이비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널 저주해.”
웃는 얼굴로 말 정말 무섭게 하네. 에이비 대위는 무덤덤하게 받아낸 것 같지만, 유엘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필 네가, 나와 가장 닮은 통신병이 군국을 배신할 줄은…. 상정했던 최악의 상황이야. 하필이면 가장 위험한 인물을 나의 앞으로 데려오다니.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만전을 기했는데 결국 드러나서 군국을 배신하는구나?”
“부정. 본관은 군국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고 하네, 에이비? 군국의 적을 여기까지 인도한 네가. 무슨 염치로 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말이니?”
“그 점입니다. 본관은 어째서 사령부가 막심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그들을 적이라 칭하며 적대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에이비 대위가 군국을 공격한 전적은 없다. 기껏해야 다른 통신병에게 반기를 들어 설득한 정도. 즉, 에이비 대위의 주장은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며 진심이다.
유엘의 고개가 삐걱 돌아갔다.
“…모르겠다고? 정말?”
“긍정. 본관의 사감을 제쳐두더라도, 본관은 여전히 그것이 합리적이라 판단합니다. 협상의 여지 없이 그이를 비롯한 무리와 적대하는 건 무의미할뿐더러 더 나은 결과를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이?”
에이비 대위가 순간 대답하지 못하고 삐걱거렸다. 대위의 반응을 본 성녀 유엘은 코웃음을 쳤다.
“하, 그이래! 그이! 꺄하하하!”
유엘의 코웃음은 점차 신경질적인 웃음으로 변해가다가, 어느 시점을 넘어서자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소리를 그친 유엘은 달싹이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중얼거렸다.
“…취소할게. 너는 정말 나를 닮았구나, 에이비! 하필, 하필 실없는 남자에게 홀려서는!”
부정할 줄 알았는데 에이비 대위는 아무 말 없었다. 유엘은 한층 아련하게 표정을 흐리며 시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굳이 그런 것까지 닮을 필요는 없었는데.”
에이비 대위에게는 온갖 게 의문이었다. 사령부의 지하에 있는 신전. 그곳 한복판에 앉아 시체를 껴안은 통신병 유엘. 하물며 그녀가 에이메데르의 진정한 정체였다니, 정보의 공백 속에 드러난 비밀은 에이비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도 에이비 대위는 정보를 다루는 통신병다웠다. 혼란에 휩싸인 와중에도 에이비 대위는 차분하게 정보를 정리하며 가장 급한 용건을 처리했다.
“유엘. 귀관이 무슨 의도를 전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귀관이 통신병이자, 육장성 에이메데르라면 현시점 본관의 요구에 응하기를 바랍니다.”
“요구? 어떤?”
“무의미한 적대 행위를 그만두고 합리적으로 판단할 요구입니다.”
“핫!”
유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에이비. 너는 탄탈로스를 지켜보았으면서도 깨닫지 못했어? 의외네. 내가 너를 과대평가한 걸까?”
“목적어가 부재하는 대화방식입니다. 더 명확한 의사전달을 요구합니다.”
“신비에 대해서. 내 너로 하여 신비를 두 눈으로 보도록 그곳에 두었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하구나.”
“재반문. 본관이 무엇을 느끼기를 바랐습니까?”
“무저갱 아래, 바로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으면 나조차 들여다볼 수 없는 심연에서. 신비의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단 말이니?”
에이비 대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어서 티르나 아지, 혹은 회귀자는 강력했지만 두려움을 느낄 법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일부 긍정. 분명 그들의 힘은 두려울 정도로 강합니다. 하나, 본관은 군국이 그들과 회담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엘이 그 말을 비꼬았다.
“그게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니? 어째서, 한 나라가 고작 몇 명의 불온한 무리를 상대로 진지한 ‘회담’을 해야 하는 걸까.”
“그야, 그들에게 그럴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변덕으로 나라를 부술 능력 말이지? 대단한 힘이야. 그렇지 않니? 탈옥범 주제에. 군국을 한 바퀴 돌며 천천히 유람한 다음 사령부에 쳐들어왔는데도 막아내지 못했잖니!”
에이비 대위가 움찔하고 몸을 멈추었다. 흐, 하고 짧게 웃은 유엘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손가락 끝이 다시 시체의 볼에 닿았다.
“나와 그가 만든 결실이야. 서로 믿고, 의지하고, 노력하고, 통해서 만들어낸 나라야. 1억이 살고, 앞으로도 수십억은 더 태어나고 죽어갈. 그의 시체로 만든 보금자리. 그 소중한 꿈이… 누군가의 변덕으로 부서지지 않도록. 나는 이 나라를 신비로부터 지켜야 해.”
“…귀관의 의도는 이해했습니다.”
“아니, 너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어. 신비란 강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야.”
유엘이 설명했다.
“파트락시온, 그는 강력하나 개인이야. 그가 세상에 끼칠 수 있는 해악에는 한계가 있어. 그를 홀로 왕국을 무너뜨렸다며 추켜세우지만… 때맞추어 나선 그이가 없었다면, 결국 파트락시온도 다른 수많은 사람처럼 닳아 저물었겠지. 그에 반해 시조는 어때? 세상에 흡혈귀라는 걸 만들어내고, 홀로 군단을 거느리며, 심지어 안개 공국의 여왕이기까지 해. 그녀는 변덕으로 세상을 바꿔.”
저쪽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지만, 회귀자는 말할 것도 없이 세상의 운명을 손에 쥔 용사다.
내가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고는 있지만, 사실 그들은 세상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이들. 그들의 행동에 세상이 뒤바뀐다.
고작 개인에 불과한데.
“이해했습니다, 유엘. 개인을 상대로는 대국적인 시선을 갖고 합리적으로 접근하여도 결국 변덕 앞에 무력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고 하여도.”
놀랍게도 에이비 대위는 단숨에 핵심을 짚었다. 유엘은 잠깐 놀란 눈을 하다가, 이내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표정을 흐렸다.
“…너는 뛰어났어, 에이비. 정신오염만 아니었어도 너는 분명히 통신병의 중심이 되었겠지. 그렇다면, 그가 만든 이 나라는 내가 없어도 계속되었을 텐데. 이제는 둘 다 없구나.”
마치 에이비 대위와 유엘 둘 다 여기서 죽은 듯한 말투다. 나는 그녀의 생각에서 불온한 기색을 읽어냈으나, 아직 내가 나설 타이밍이 아니었다.
“의문. 아까부터 귀관은 인칭대명사 ‘그’는 중복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귀관이 언급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다시 한번 시체가 언급되었다. 애써 주제를 돌리던 유엘의 손이 우뚝 멈췄다. 에이비 대위의 관심이 몹시 불편한 사람처럼.
자기 품 안에 시체를 껴안고, 틈날 때마다 얼굴을 쓰다듬고 있으면서 관심을 두지 말라는 건 너무 부조리한 요구다. 하지만 인간은 대단히 모순적인 생물이다. 부끄러운 기억을 잊기 위해 필사적으로 외면하면서도, 정작 잊어버리면 그 공백을 아쉬워하곤 한다.
유엘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이제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구나. 그는 군국의 어버이인데도, 너희는 아무것도 몰라.”
“반론. 군국은 생물이 아니며, 따라서 군국에는 어버이라 불릴 존재가 없습니다.”
“비유적인 의미잖니.”
“하나, 군국에서 비유적인 의미로라도 어버이라 불릴 존재는….”
에이비 대위는 말을 하다 말고 시체를 다시 살폈다.
이 나라의 기틀을 세운 군웅은 통신병이라도 사진이나 그림으로 접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에이비 대위도 마찬가지였다. 온갖 정보를 접하는 통신병으로서 군웅의 인상착의 역시 본 적이 있었다.
다만 군국이 우상화 같은 건 관심도 없는 나라라, 죽은 자를 향해 필요 이상의 경의나 애도를 보이지 않기에 금방 잊어버렸을 뿐.
유엘의 말은 에이비 대위의 옛 기억을 끄집어냈다.
“…군웅, 발리오란트? 하나, 그는 군국 건국 후 3년 뒤 잔당의 습격을 받아 살해당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여기에?”
“하! 잔당! 잔당이라고! 하, 하하! 흐, 흐으으….”
유엘은 말하다가 말고는 음침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조울증에 걸린 모양이다. 하긴, 이 어둡고 칙칙한 지하에서 시체를 옆에 끼고 20년 가까이 홀로 지냈으면 그리되겠지.
유엘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잔당이었다면, 차라리 잔당이었다면! 내가 ‘보았’지! 하지만, 잔당이 아니었어. 내가 그걸 어떻게 보겠어! 신비롭고 우아해야 할 이 내가!”
이 이상은 대화가 아니었다. 유엘 혼자의 넋두리에 불과했다. 독심술이 있는 나는 대강 알아들었지만, 에이비 대위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유엘?”
“그의 곁에 있을 자리야. 갖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가슴에 사무치도록 질투가 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월감에 젖었어. 그녀는 절대 나를 대신할 수 없어. 하지만, 나는 그녀를 대신하고도 남아. 그래서.”
유엘의 생각에는 꽤 재미있는 내용이 많았다.
군웅, 발리오란트에게는 가정이 있었다. 왕국 시절, 왕가가 짝지어준 명문가의 영애다.
물론 평민 따위에게 권세가의 딸을 내줄 리 없었고, 이름값만 좀 높지 쇠퇴한 집안이었다. 낡은 감투를 쓰는 느낌으로 군웅은 부인을 하사받았다.
하나 군웅은 가정에도 성실한 남편이었다. 그는 아내를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으며, 본래 인물도 뛰어났던 만큼 부인도 점차 그를 사랑했다. 둘은 나라에서도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다.
군웅은 당연히 나라를 뒤엎고도 그녀의 집안에는 위해가 가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하지만 그래도 기사귀족의 집안이었다. 기사귀족들은 모두 끈끈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고, 친지 대부분이 반란 과정에서 죽었다. 아무리 남편을 사랑했다고 한들 그녀는 불안감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었으리라.
심지어, 성황청에 갔던 그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여자를 말 뒤에 태우고 돌아왔다면…. 성녀가 묘한 호감을 보인다면. 어쩌면, 미친 짓을 저지르기에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흠. 내가 그쪽 생각을 읽지는 못해서 확신하진 못하겠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론이군.
“보았어야 했어. 추잡하고 저열했을지라도, 나는 그녀를 지켜보아야 했어. 어쭙잖은 체면은 갖다 버리고, 우월감을 한편에 미뤄놓고. 사생활을 하나하나 꼼꼼히 감시했어야 했어! 그랬으면, 그는…!”
“유엘. 본관은 귀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군웅은 잔당의 습격을 당해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까?”
“잔당의 습격이지! 그러면, 치정극으로 죽었다고 말할까!”
유엘은 우리의 시선으로부터 가리려는 것처럼 양팔로 군웅을 와락 감싸 안았다. 지저분한 머리카락이 그의 창백한 얼굴을 뒤덮었다. 술에 탄 독을 먹고 명을 마감한 인간의 모습은 꼭 잠든 듯이 보였다.
“그 여자는 나에게서 그를 빼앗아갔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이겼어. 그 여자는 그의 아이를 갖지 못했으나, 나는 그와 함께 결실을 맺었어. 이 축복받은 나라. 앞으로도 수억을 낳아 기를 이 나라를 낳았으니까.”
“유엘….”
“그리고 이 나라는. 내가 아파 낳은 결실인 군국은. 내가 죽더라도 계속될 거야.”
유엘이 비쩍 마른 손을 꽉 쥐었다.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지하 신전이 크게 요동쳤다. 부서진 반석이 후두둑 떨어진다.
이곳은 지하 수십 미터 아래, 군국의 가장 치명적인 비밀을 가진 곳. 비밀을 묻어버리는 데에는 가장 단순한 수단이 좋겠지.
“이런, 안 좋은데. 아무리 봐도 곧 무너져내릴 것 같은데요. 진부한 함정인가요?”
“…설마!”
‘큰일입니다! 대화를 나누다가 그녀가 행동할 여유를 주고 말았습니다! 먼저 제압을 우선해야 했는데!’
에이비 대위는 사색이 되어 유엘에게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나 유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힘으로 버텼다는 게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로 정지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신성력의 일종이다.
“멈추십시오, 유엘!”
“너는 나를 닮았지만… 하나, 크게 다른 게 있어.”
당연히 유엘이 멈출 리 없다. 애초에, 막을 수도 없었다.
천리안은 그저 ‘지켜보는’ 힘이지만, 성녀쯤 되는 고위 성직자는 신성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에이메데르라는 천사를 소환했던 것처럼.
지하 30m 아래 있는 이 방을 지탱하던 기둥이, 모종의 힘에 의해 점차 지지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이 땅 전체가 무너질 게 분명해보였다.
아무리 신성력을 갖고 있다고 한들 매몰된다면 자기도 죽을 텐데. 유엘은 전혀 아쉬워보이지 않았다.
“남자를 고르는 눈은, 내가 훨씬 낫네. 안녕, 에이비. 짧은 만남이지만 즐거웠어. 천국에서 다시 보자.”
어이, 갑자기 왜 나를 갖고 그러는 거야. 내가 어때서.
내가 항변하려는 때, 에이비 대위가 고유마도를 펼치면서 외쳤다.
“부정! 수용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