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89 축복받은 나라, 저주받은 인간 - 12
“왜요, 에이비 대위?”
에이비 대위에게서 옅은 거부감이 느껴진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까지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나에게 거부감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았던 에이비 대위인데.
“귀하. 만일 귀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면. 다른 통신병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유를 찾겠죠. 에이비 대위처럼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에이비 대위는 대수라도 되는 것처럼 들었다. 그녀가 간절하게 말했다.
“본관이 듣기로, 귀하의 계획은 꼭… 통신병을 내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버린다니요? 누가 누굴 버려요. 통신병은 저보다도 스펙이 좋은데요? 장교 교육도 받았고, 고유마도도 쓸 수 있고. 심지어 군국을 뒤에서 조종하는 실세이기도 하잖아요.”
“그래서입니다. 통신병은 전략적인 가치가 대단히 높습니다. 통신병은 군국의 기밀을 다수 파악하고 있으며, 군국의 다양한 시설에 대한 접근 권한이 있습니다. 귀하가 통신병의 실체를 밝히고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면, 통신병이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겠지. 군국의 적이라면 가장 먼저 통신병을 노릴 거다. 정보를 얻고 군국의 통신망을 망가뜨려야 하니까.
만약 군국의 편이라면? 군국에 충성하는 이들이라면? 그들이라고 통신병을 보호할까? 아마 힘들겠지.
일개 통신병 따위가 지금까지 자기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과연 앞으로도 계속 그럴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거다. 이성적으로든, 감성적으로든. 오히려 통신병들을 제거하려고 들지도 모른다.
나는 에이비 대위의 말에 수긍했다.
“에이비 대위가 하는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그렇다면….”
“하지만 제가 신경 쓸 이유를 찾진 못하겠네요.”
에이비 대위가 숨을 멈췄다. 나는 여전히 유엘을 옭아맨 채로 말했다.
“통신병은 군국이 자기 나라를 위해 만들어낸 면죄부에요. 삶을 다 빼앗아버린 채 도구처럼 쓰이니까 아무도 그녀들에게 책임을 묻지 못해. 아니, 애초에 알지도 못하지. 그 덕분에 군국은 분명 인간이 만든 나라인데, 인간보다 대단한 무언가가 되어가는 중이야. 인간이라는 종(種)을 지배하는 나라가.”
지금껏 왕국은 왕이 다스렸다. 왕과 나라 간의 역할분담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어쨌든 왕은 인간. 지금까지 인간은 인간의 지배를 받은 셈이다.
그렇지만 군국은 누구도 지배하고 있지 않다.
“그중에서도 통신병의 처지가 더욱 도드라지죠. 군국의 각종 시설에 접근할 권한이 있으면서도 정작 자기들은 온수 한 방울 안 나오는 방에서 썩어가잖아요? 통신병이 그러는 바람에 모든 인간이,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군국에 지배받아요! 그렇게 어두컴컴한 방에서 소모되다가 죽을 바에야, 차라리 제 발로 땅을 걷다가 죽는 편이 낫지 않아요?”
“…긍정. 본관 역시, 그편이 더 낫다 여깁니다. 본관도 기쁨이 무엇인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아니까요.”
그래. 에이비 대위는 자기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도 생을 구가하려고 애썼다. 참 보람찼지.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에이비 대위라면, 분명….
“다만, 본관은 더 나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 더 나은 방법?”
왜 의견이 다르지? 평범한 이들의 치열한 삶을 눈앞에서 본 그녀라면 분명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할 텐데.
“본관에게는 귀하가 있었습니다. 귀하와 함께한 덕분에, 본관은 새로이 접한 모든 것들을 즐거이 받아들였습니다. 하나, 다른 통신병에게는 귀하가 없습니다. 본관이 마주쳤던 것처럼, 가혹한 세상에서 새로운 것은 즐거움보다도 위협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통신병은 그것을 극복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본관은 그게….”
말을 하다가 말고 에이비 대위가 말을 골랐다.
딱히 댈 이유가 없다. 지금껏 군국의 눈으로 객관적인 판단만 내려왔던 통신병에게 있어서, 규칙이나 이해득실에 얽매이지 않은 주장은 너무 낯설었다. 에이비 대위는 자기 마음에 걸맞은 간신히 찾아냈다.
“싫습니다. 비록 비합리적이라고 해도.”
싫으면 어쩔 수 없지. 그것만으로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세상은 신이 정한 규칙 속에서 흘러가지만, 인간을 움직이는 건 마음이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요. 하지만 에이비 대위가 싫다고 해서 제 뜻을 바꾼다는 건 아니에요. 에이비 대위와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인류의 적을 무찌를 의무감 정도는 남아있어서요.”
“귀하가 타도하려는 대상. 귀하는 그것이 인간이 아니기에 공격하는 것입니다. 본관의 추측이 맞습니까?”
“네. 인간의 적은 인간이겠지만, 아무리 흉악한 살인마라고 해도 인류의 적이 될 수는 없죠. 같은 인간이잖아요? 배가 아프다고 위장이 내 적이 되지는 않고, 오른손을 움직이다가 어쩌다 내 머리를 쳤다고 싸울 수 없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에이비 대위는 살짝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본관은 귀하의 아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의 흐름을 읽는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런 그림도 없이 새하얀 백지였던 에이비 대위의 마음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그려졌다.
군국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통신병의 소원.
“군국은 통신병을 통해 전해지는 ‘사령부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모든 이들은 어딘가에 존재할 사령부의 존재를 믿고 있습니다.”
“사실 똑같은 의미잖아요? 사령부의 명령이란 그 통신병들이 가공한 정보니까요.”
“다릅니다.”
“네?”
대충 어떻게 흘러갈지 알면서도 눈치 못 챈 척 물었다. 에이비 대위는 결연한 의지와 함께, 통신병으로서는 결코 해서는 안 될 거짓을 고했다.
지금부터는 진실이 될 거짓을.
“본관은 에이비. 통신병 중 첫 번째.”
에이비 대위가 자기 가슴에 손을 대고는 말했다.
“통신병끼리 지위의 고하는 없으나, 그 식별명은 통신병의 능력 순서로 배치됩니다. 본관은 오랜 기간 공석이었던 에이비의 이름을 받은 통신병입니다. 통신병의 원본이라 알려진 에이를 제외하면, 가장 강력한 능력을 갖췄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에이는 통신병이 아니었습니다.”
그야 그렇지. 그건 성녀니까.
고유마도와는 궤를 달리하는 신성력. 처음의 성녀가 아득히 먼 거리에서도 신도의 부름에 답했던 일화.
유엘은 그것으로 통신을 바라는 통신병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른 게 있다면, 그건 동조가 아니라 단순한 대화에 불과하다는 것뿐. 동조하기에는 성녀 유엘과 통신병은 너무나도 다르다.
그래서 군국은 왕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그런데 에이비 대위는 유엘의 행위 자체를 부정했다.
“따라서 본관은 가장 강력한 통신병입니다. 다른 통신병 중에서도 독보적인 힘을 갖추고 있으며, 그들을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통신병의 총의에는 본관의 의지가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아슬아슬하게 거짓을 피해 가는 말. 진실이냐, 거짓이냐. 그건 알 수 없다. 통신병은 모두 유기적인 통신을 감행하고 있으며, 비록 말단이라고 해도 한 통신병이 전한 의지는 전체로 퍼져나가고 섞이고 흐려진다.
인간의 신경이 그러하듯이.
기준에 따라 거짓이 될 수도, 진실이 될 수도 있는. 그렇지만 당사자인 에이비는 확고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군국의 사령부가 전하던 의지는, 전부 본관으로부터 비롯되어 퍼진 것입니다. 본관이 사령부입니다.”
“…한마디로, 에이비 대위가, 군국의 왕이었다고요?”
“긍정.”
에이비 대위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깊게 눌렀다. 나름 근엄하게 말하려고 하는데, 순한 인상이라 그런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전까지는 조종당했던 것 같은데요.”
“보, 본관이 받아들였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뭐, 그렇다고 치죠. 세상에 꼭두각시가 한둘도 아니고.”
인제 와서 군국이, 사실 인간의 지배를 받는 또 다른 형태의 왕국이라고 말할 셈이야?
맞다. 에이비 대위가 누군가의 적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 인류의 적이 될 수는 없다. 에이비 대위도 인간이기에.
“말장난이네요.”
“하나 사실입니다.”
“확실히, 에이비 대위라면 가능하죠. 삶과 욕망을 갖춘 에이비 대위라면, 그 책임과 죄를 떠안을 수 있으니까….”
흘러가듯이 중얼거린 나는 와이어를 잡아당기던 손을 놓았다. 와이어가 힘없이 풀리고, 성녀 유엘이 자유를 되찾았다.
와이어에 눌리 피멍이 든 채로도 냉큼 양손을 모은 유엘은 미심쩍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성녀가 제 힘을 발휘한다면, 이곳에 천사라도 부른다면 나는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수가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유엘. 에이비 대위를 죽여봐요.”
“…뭐?!”
이 공간에 있던 모든 이들이 크게 숨을 삼켰다. 특히 유엘은 의외의 일격에 맞은 것처럼 동요했다.
뭘 그렇게 놀라. 지금까지 자기가 하려고 했던 일이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요. 당신이 할 일이잖아요. 엇나간 통신병을 처리하는 거. 통신병이 정신오염이 된다면, 그러니까 순수성을 잃고 평범한 인간이 된다면… 이렇게 될까 봐 걱정한 거 아니었어요?”
“…내가 누군가를 죽인다면, 저 아이보다 먼저 너를 죽이겠지.”
“아, 그러시든가. 어차피 에이비 대위가 죽기 전에는 군국을 못 건드릴 텐데.”
손가락으로 와이어를 둘둘 말았다. 한 타래를 실뜨기하듯 엮은 뒤 양쪽으로 쭉 잡아당기니, 넓적한 매듭이 한곳으로 모이며 순식간에 카드로 돌아왔다. 나는 바꾼 카드를 덱에 섞어 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은 인류의 적이 될 수 없죠. 에이비 대위는 사령부를 자처했고, 아마 그대로 실현하겠죠. 다른 통신병들은 자기 욕망을 가진 에이비 대위를 막을 수 없어요. 오직 한 명, 이 시스템을 유지하는 당신을 빼고요.”
“…대신 죽여달라는 뜻이 아니었구나. 그 반대지.”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당신 자유고요.”
에이비 대위는 인간이다. 인류의 적이 아니다. 하지만 자기 의지로 저렇게 선언한 덕분에, 그리고 실제로 그럴 능력을 가진 덕분에 자격을 갖추었다.
그래서 에이비 대위가 있으면 군국은 내 적이 되지 않는다. 나로서는 애매한 결말이다.
나는 나 대신 왕이 되고자 하는 이를 막을 수 없다. 기껏해야 시험하는 게 전부.
무언가를 알아챈 유엘의 눈동자가 떨렸다.
“왕을 점지했어? 이 군국에서…?”
에이비 대위가 유엘에게로 다가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유엘과 눈을 맞추며, 에이비 대위는 똑바른 시선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유엘. 본관에게 협조해주십시오.”
분명 힘은 유엘이 더 강할 텐데, 시선을 피하는 쪽은 유엘이었다.
“안…돼. 그럴 수 없어.”
“합리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어떠한 경우도 통신병의 비밀이 드러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귀관의 평가 결과도 동일하지 않습니까?”
“달라! 통신병은 욕망을 가져선 안 돼. 그랬다간 통신병이, 아니, 네가 욕망을 따라 이 나라를 움직일 테니까. 왕이 되니까. 그이의 꿈이… 왕이 없어도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소망이 더럽혀지니까.”
에이비 대위는 시체를 흘긋 보고는 말했다.
“그는 사자(死者)입니다.”
“비록 죽었어도, 꿈은 사라지지 않아!”
애써 부정하듯 유엘은 다시 시체를 확 껴안았다. 차가운 시체를 온몸으로 덮으며, 유엘은 흐느끼듯이 외쳤다.
“군국은 그의 이상이 만들어낸 걸작이야. 나와 그가 합심해서 만든 자식이야! 그런데, 그런데. 이렇게 포기하라고? 안 돼! 차라리 여기서 다 죽어! 모든 비밀을 담은 채 파묻혀! 그러면…!”
“그렇다면 그가 만들어낸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아마 군국도 사라질 겁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유엘이 숨을 들이켰다.
유엘이 계속 묻는다, 묻는다 하면서도 차마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던 이유.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던 까닭. 그건 이곳에 군웅의 시체를 비롯한 그의 흔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남자 하나의 시체를 20년 가까이 부둥켜안고 있을 정도로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사람인데 결단이 단호할 리 없지. 유엘의 고민이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