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91 2는 1보다 크다
‘불가능해. 지금까지 제멋대로 군국을 헤집고 엄청난 손해를 입힌 그를, 외교관으로 삼아서 보내겠다고? 자격도 없어. 신뢰할 수도 없어. 언행을 보건대 외교적인 지식이나 정보에도 무지하겠지. 자기 멋대로 행동하며 혼란을 흩뿌리는 부류의 인간. 딱 그가 좋아할 만한 인간군상이네.’
아니, 딱히. 마음에 드는 편이기는 한데,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회귀자는 혼란 이상의 무언가라고.
‘군국의 이념에 반해. 비합리적이지. 하지만…. 그것이 왕. 변덕으로 나라를 움직이는. 그게 맞건 틀리건 관계없이, 왕의 판단은 불안을 초래해. 에이비를 받아들이면, 결국 이 나라는 흔들리게 될 거야….’
그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일어날지는 모르나. 일어날 것만은 분명한 필연.
‘하지만, 이미.’
그러나 당장 현재를 극복할 수 없는 이는 파멸이 약속된 미래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환멸에 휩싸인 유엘에게는 이 상황을 극복해낼 의지가 없다.
다른 예언자와 마찬가지로, 유엘은 다가온 운명의 앞에서 빠르게 체념했다.
“…너를 저주해, 에이비. 네가 최대한 후회에 휩싸여서,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자괴감을 느꼈으면 좋겠어.”
인간은 자기가 어찌할 수 있는 대상을 향해 저주하지 않는다. 저주할 시간에 고치거나 바꾸지, 할 수 있는 행동이 오직 원망을 표현하는 것밖에 없을 때 저주를 하곤 한다.
달리 말해, 유엘의 저주는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좀 구질구질하지만.
“…그래. 기어코 성공했구나. 너희는 군국을 군국이 아니게 만들었어. 시아티. 너는 네 분노를 감당할 수 없을 때 복수할 대상을 찾았고. 그란디오모르 공주는 상냥함을 요구할 상대를 찾았네. 완벽한 결말이야! 머지않은 미래에 파멸하겠지만, 한 치 앞밖에 모르는 너희는 만족하겠지!”
자기 뜻에 맞지 않는다고 한 치 앞밖에 못 본대. 하지만 나는 패배자의 절규는 꼬박꼬박 들어주는 착한 심성의 소유자다. 내 방관 아래 유엘은 계속 말했다.
“에이비, 언젠가 시아티는 제 분노에 못 이겨 네 몸을 갈기갈기 찢으려고 들 거야. 공주는 네 마음을 후벼 파고는 그 핏물로 다른 이들의 목을 축이겠지! 저 둘은 네가 무엇인지, 어디 있는지 알았으니. 원할 때 언제든지 너를 찾아올 거야!”
격렬하게 감정을 토해내는 유엘에 비해, 에이비 대위는 비교적 담담했다. 에이비 대위는 유엘의 의중을 물었다.
“그 말뜻은, 귀관이 본관에게 협조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방해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나는 너에게 협조할 이유도, 그럴 의지도 없어.”
“협조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귀관의 힘은….”
“아, 하나 깜빡했네. 나는 있어서도 안 돼. 나는 너를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니. 왕에게 대체품이 있어서야 되겠니?”
빈정거리던 유엘은 손을 들어 문 바깥을 가리켰다. 비언어적 표현으로 당장 꺼지라는 뜻이다. 에이비를 눈에 담기도 싫다는 얼굴로 유엘이 말했다.
“지켜보겠어, 에이비. 구태여 손을 쓸 필요도 없어. 너를 죽이려는 이들은 군국에 넘쳐날 거니까. 나는 네가 죽을 때 비웃으며 지켜볼 테니, 너는 네 묫자리나 찾아가.”
축객령을 받은 문득 에이비 대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에 만들어진 어두컴컴한 묘실은 묘실답게 엄숙한 분위기를 내고 있다.
이곳이 묘실이라 주장하기 위한 장식품은 많았지만, 정작 시체를 담을 석관은 단 두 개. 둘 다 비어 있지만, 주인은 분명하다. 하나는 군웅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유엘의 것이겠지.
유엘은 이곳에서 나갈 마음이 없다. 죽을 때까지 이곳에 있다가, 그와 함께 묻히려고 했으리라. 그것으로, 군국의 비밀은 영원히 땅 밑에 파묻힌다.
유엘은 순전히 절망하여 그런 판단을 내린 모양이지만… 에이비 대위에게는 무언가 영감을 주었다.
“본관은 나가지 않습니다.”
에이비 대위가 홀린 듯 말했다.
“본관은 ‘특별한’ 통신병이 되어야 합니다. 본관은 그들의 해방자여야 합니다. 그들처럼 해방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령부가 그랬듯이… 본관 역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로 존재해야 합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고? 그래서야 이전과 다른 게 뭐니?”
비밀스러운 장소에 숨은 채 사령부를 가장하고 명령을 내려서야, 에이비 대위가 있기 전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유엘이 빈정거리며 그 점을 지적했으나, 에이비 대위에게는 답이 있었다.
“본관을 제외한 다른 통신병은 더는 갇혀있지 않을 것입니다.”
“…뭐?”
군국의 기밀은 통신병을 창문 없는 방에 가둠으로써 지켜진다. 또한, 통신병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그들의 순수성을 지킨다. 통신병은 자유를 대가로 객관성과 보안성을 얻었다.
에이비 대위의 선언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뜻과 같았다.
에이비 대위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에서 자그만 꽃봉오리가 열렸다. 나팔꽃의 보랏빛 봉오리가 일제히 고개를 쳐들더니, 위를 향해 에이비 대위의 의지를 전하기 시작했다.
에이비 대위는 꽃봉오리에 전할 목소리를 담았다.
『통신병 에이비가 모듈 아이에게 전합니다. 모듈 아이 내부에서 강력한 무력 충돌 발생. 이후로도 상당한 문제가 발생할 확률 다수. 대피하지 않을 시 모듈 아이의 기능 상실이 예상되며, 커다란 통신 공백이 뒤따를 거라 판단.』
“에이비….”
『긴급상황 시 대피 매뉴얼 2단계, 재난 회피 매뉴얼에 따라 전원 안전한 위치로 대피하십시오. 반론은 받지 않습니다. 이상.』
독단적이고 일방적인 명령이 끝났다. 에이비 대위는 숨을 골랐다. 약간의 정적 뒤, 에이비 대위의 나팔꽃이 돌개바람에 파묻힌 듯 팔락거렸다. 에이비 대위를 향한 통신 요청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으나, 에이비 대위는 꿋꿋이 앞서 한 명령을 반복했다.
부드러운 실이 단단한 막대기에 감길 수는 있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통신병이 만들어온 네트워크는 자아가 희박한 통신병들의 지독한 객관성에 기반했던 것. 확고한 주관을 가진 에이비 대위의 의지는 통신병의 객관적인 보고를 전부 삼켜버렸다.
혼란에 빠진 듯한 통신이 이내 잦아들었다. 에이비 대위의 제안에 수긍한 모양이다. 통신병 입장에서는 딱히 반박할 이유도 없었을 거다. 하긴, 육장성 두 명이 격렬한 전투를 벌인 이후인데. 이미 비밀도 밝혀졌겠다, 위태로운 건물에서는 대피하는 게 자연스럽지.
통신이 끝나자, 의견을 전하러 격하게 팔락거리던 나팔꽃이 일제히 가라앉았다. 에이비 대위는 마력을 다스리며 깊게 심호흡했다.
“…이대로. 본관은 군국에 존재하는 모든 통신병을 해방합니다. 자기 발로 바깥에 나가게끔 명령합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그건 계획을 설명하는 것과 동시 동시에 커다란 각오의 표현이었다. 통신을 끝마친 에이비 대위는 이 자리에서 말했다.
“통신병의 정체가 드러났습니다. 모듈 아이의 통신병이 해방된 이상, 통신병은 이제 군국의 기밀이 아닙니다. 이제 기밀은 오직… 본관뿐입니다.”
군국의 통신병이 갖고 있던 의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모든 곳을 감시하면서, 통신으로만 정보와 명령을 전하는 것.
이제 통신병들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책임을 강요받지 않을 거다. 삶과 여유가 생길 거다. 객관적인 부품이 되기 위해서 고독해질 필요 없고, 정체를 숨기기 위해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 거다.
대신, 에이비 대위는 그보다 많은 것을 짊어져야겠지.
의무는 권한이다. 에이비 대위는 다른 통신병으로 하여금 의무를 저버리게 하고는, 그 모든 권한을 스스로 짊어졌다. 보이지는 않지만 무거운 왕관이 에이비 대위의 머리에 얹혔다.
에이비 대위의 머리를 감싼 나팔꽃 덩굴은, 이제 단 한시도 시들지 않을 것이다.
가장 낮고 어두컴컴한 곳에서 칭왕이 이루어졌다.
박수나 축하는 없었다. 대신 유엘의 메마른 기도만이 새로운 왕의 탄생을 반겼다.
“저를 축복하신 처음의 성녀시여…. 이 또한 당신이 점지한 운명이나이까.”
축복보다는 한탄에 가까운 기도였지만, 어쨌든 성녀의 진심이 어린 기도다. 축복받은 왕위계승이구나. 나는 반갑게 새로 태어난 왕을 향해 다가갔다.
“에이비 대위, 축하해요! 아니, 이제는 대위도 아닌가요?”
여차하면 폐하라고 불러줄 생각이었지만, 에이비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본관의 직위나 호칭은 중요치 않습니다. 본관이 무슨 역할을 맡았으며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가가 중요합니다.”
“흠. 실로 맞는 말이에요. 에이비, 그런데 저희는 어쩌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나와 시아티, 그리고 공주를 차례로 가리켰다. 군국에 그다지 애착이 없어, 비밀을 지켜줄 의리가 없는 셋.
“에이비는 호위 대신 비밀로 자신을 지키려고 하죠. 하지만 비밀은 자기 자신마저 고립시키게 되잖아요? 특히 일신의 무력이 없는 에이비에게 비밀 엄수는 무엇보다 중요해요.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할 필요가 있을 텐데요.”
다물게 하는 법이란, 당연히 살인멸구. 죽은 자는 말할 수 없으니까. 지극히 합리적인 방식이다.
당연히 나야 죽을 생각은 없지만,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나의 생사여부는 나 혼자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에이비의 의중을 조금 떠보았다.
“본관은….”
그러자 에이비는 투명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관은 귀하를 믿습니다.”
“저를요?”
에이비는 긍정이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답답하다. 신뢰라니, 사기와 거짓으로 점철된 나의 인생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그거 아닐까. 내가 한 짓이 있는데, 무얼 믿고 저런 말을 하는 거지?
“혹여나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미래에 제가 어떻게 바뀔 줄 알고.”
“그것까지 포함하여, 본관은 귀하를 믿습니다. 귀하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귀하는 본관을 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무책임한 발언이다. 다른 통신병의 정체를 드러낸 이상, 에이비의 목숨은 그녀 혼자의 것이 아니다. 그녀가 사라진다면 유엘이라도 이 나라를 원래대로 돌려놓기 어려울 것이다.
그야말로 모래성이다. 성긴 모래알을 어설프게 쌓아놓은 조잡한 작품. 하지만….
“저야 그렇다고 치고. 공주님이나 시아티는요? 에이비는 저들을 오늘 처음 본 거잖아요? 둘 다 군국을 싫어하는데 믿을 수 있어요?”
“믿겠습니다.”
“그래도 돼요?”
“그들의 행동은 군국이 그들의 믿음에 보답하지 않아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니, 군국이 그들을 믿지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본관이 먼저 믿을 터이니, 그들도 본관을 믿어주었으면 합니다.”
그게 굳이 아름답지 않더라도, 혹은 정교하거나 치밀하지 않더라도.
공들여 지은 모래성, 아슬아슬 쌓아 올린 돌탑, 방금 꽃을 피운 봉오리는 망가뜨리기보다는 지켜보는 게 맞겠지. 내가 그런 걸 짓밟으며 쾌감을 느끼는 인종은 아니거든.
뭐, 그렇다고 안 될 일에 매진하게 두는 것도 가엾으니. 친절하게 조언해주도록 할까.
“힘드실 텐데. 저는 별로 추천드리지 않아요. 포기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포기하세요. 나무랄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러자 에이비는 나를 지그시 쳐다보며 대답했다.
“반론. 본관에게는 귀하가 있습니다.”
“저요? 저는 실망시켜도 되는데요. 어차피 곧 이 나라를 뜰 거니까요.”
나야 이 나라가 어찌 되든 별로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딴 데 가면 그만이야. 나에게 조국이란 신발보다 갈아치우기 쉬운 거라고.
“타당한 결정입니다. 현 군국은 귀하가 거주하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귀하의 선택은 합리적입니다.”
내 국외 도피 선언에도 에이비는 실망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는, 각오를 다지며 말했다.
“본관은 귀하가 있어도 되는 곳을 만들겠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귀하가 이곳에 돌아올 때를 위해 안심하고 머물 장소를 짓겠습니다. 그러니, 언젠가 되돌아올 귀하가 본관을 평가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