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298화 (298/384)

EP.298 톱니바퀴로 만들어진 세상 - 5

깊게 연기를 뿜어낸 히스토리아는 잠깐 몽롱해진 얼굴로 말했다.

“이거, 좋네에…. 팔이 아프지도 않고, 머리가 시원해. 기력이 다시 들어차는 느낌이야….”

“냐아-. 좋다냐아-.”

그녀에게 호응하듯 나비의 만족스러운 울음소리가 들렸다. 막시밀리앵은 뒤쪽 좁은 곳에서 마력초를 쌓아두고 뒹굴거리는 나비를 발견하고는 미간을 좁혔다.

약을 통하지 않게 하는 법. 미리 약을 한다. 성공하긴 했다.

히스토리아가 좀 많이 피웠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얼마나 피웠길래 눈에 초점이 흐려졌어?

“그거 착각이야. 팔이 안 아픈 건 그냥 고통이 안 느껴질 뿐이고, 머리가 시원한 건 그냥 네가 마력초 중독이어서 그래.”

내 지적에도 히스토리아는 실실 웃으며 마력초를 흔들었다.

“정말이라니까. 처음 피웠을 때보다 훨씬 좋아. 왤까?”

“마력초는 그저 가장 좋았던 순간을 떠올리게 해주는 소녀의 성냥이라고. 불을 붙였을 때 행복하다면 그건 지금 네 상태가 그만큼 처참하다는 뜻이니까 마음 놓지 마.”

“너 때문이잖아. 내가 마력초를 피우는 것도, 지금 내 꼴이 처참한 것도. 전부 너한테 휘말려서 생긴 일인데.”

“어?”

이상하네. 내가 지금 생각을 읽고 있나. 지금까지 마음으로밖에 하지 않았던 말이 입 밖으로 나오고 있는데.

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제법 마음에 든 모양이다. 히스토리아는 피식 웃으며 마력초를 입에 가져다 댔다. 배덕적인 연기를 몸 안에 들였다가 깊게 내뱉고는 달콤한 한숨을 흘렸다.

“하아… 너도 한 대 피울래?”

“내가 준 거로 네가 선심 쓰지 마라. 남은 거 빨리 돌려줘.”

“푸. 너무하네. 마력초에 내 거 네 거가 어디 있어? 같이 피우는 거지.”

샐쭉 웃는 모습이 대단히 위화감이 든다. 마음의 빗장이 몇 개가 날아간 거야? 약이 사람을 얼마나 바꾸는지 무서울 정도다.

내가 말을 잃은 사이, 막시밀리앵은 히스토리아가 가진 마력초를 유심히 살펴보고는 경악했다.

“…그건 세계수 잎? 그걸 어떻게 갖고 있는가? 아니, 누가 그걸 건넸지?”

히스토리아는 바보처럼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몰라요…. 피우는 사람이 왜 신경 써. 그냥 피우는 거지.”

“그럴 리가! 풀과 나무의 왕 중에 만물의 영장이 가지지 않은 것은 없다네! 그럴진대 어떤 경로로 세계수의 잎이 빠져나간 거지? 불가능해!”

“그럼 만물의 영장이 건넸나 봐요. 어라, 휴이가 준 거잖아? 킥. 휴이, 너 만물의 영장이야?”

여전히 머리에 나사 하나쯤 빠진 것은 대답이다. 막시밀리앵조차도 대답을 듣길 포기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결국, 그 대답마저도 인간의 왕에게 달렸다는 뜻이군. 그를 확보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어.”

“그건 안 돼요.”

즐겁게 마력초를 피우던 히스토리아가 갑자기 입가에서 미소를 거뒀다. 히스토리아가 단지 표정을 바꾸었을 뿐인데 공기의 온도가 몇 도는 내려간 것 같았다.

그녀가 웅얼거릴 때마다 입에 문 마력초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저 망할 자식은, 일은 멋대로 벌여놓고 무책임하게 도망친 빌어먹을 녀석이지만…. 그래도 그때가 나한테는 가장 좋은 시간이었어.”

그리 말한 직후 히스토리아는 곧장 땅을 박찼다. 도움닫기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높이 6m가 넘는 강철 딱정벌레 위로 가볍게 착지한 히스토리아는 숨을 깊게 빨아들이며 일어섰다.

막시밀리앵이 말했다.

“보답받지 못할 감정이로군. 그는 인간의 왕이라네. 일개 개체에게 구애되지 않아.”

“인간의 왕이니 뭐니, 그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내 추억이니까. 국장이 멋대로 망가뜨리게 두진 않아!”

…이래서 사람은 언제든지 좋은 모습을 보여야 해. 봐봐. 충실히 살아오니까 지금처럼 과거의 인연이 나를 도와주잖아.

해준 것에 비해 좀 과하게 도움받는 느낌도 있으니. 나도 거기에 부응해야겠지? 인간적으로.

하던 일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다시 강철 딱정벌레 위로 올라갔다. 천천히 걸어간 나는 히스토리아의 뒤를 받쳐주듯 섰다. 톱니바퀴를 쫓아다니던 아지는 내 모습을 보고는 잠깐 고민하다가 어깨에 힘을 가득 주고선 내 곁에 앉았다.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상황. 새로이 바뀐 구도에서 막시밀리앵은 난감해하며 손가락을 접었다.

“그쪽은 셋. 이쪽은 하나…. 개의 왕을 빼더라도 쉽지 않겠군.”

아직 히스토리아의 상태는 온전치 않고, 나 역시 반쪽짜리 전력에 불과하다. 둘이 합쳐서 간신히 하나 정도 될까 말까 한 수준.

그렇지만 지금까지 있던 그 어떤 순간보다도 승산이 높다. 나는 빳빳이 고개를 들고는 말했다.

“잘 아시는군요. 마지막 기회에요. 도망치면 봐줄게요.”

막시밀리앵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는 톱니바퀴를 닮아 논리와 이성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위험한 싸움을 하는 것과 안전하게 물러나는 것 중에 무얼 선택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인간의 왕은 손만 대도 내 몸을 부술 수 있다. 절대 접근하게 두어서는 안 되지만, 문제는 격투전에 능한 총사. 강철 딱정벌레가 없는 지금 우위를 점하기 힘들어. 변수가 너무 많다. 지금은 물러나는 게 합리적, 이나….’

판단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마지막, 하나의 미련이 그를 붙잡았다. 막시밀리앵이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가 평범하다고 했지.”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그를 위로하기 위해 한마디 덧붙였다.

“낙담하진 마세요. 당신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은 평범해요. 아주아주 극소수를 제외한다면 말이죠.”

“안다네. 애초에 인간 자체도 평범한 짐승 중 하나였으니. 그들이 스스로 특별해지기 전까지는….”

막시밀리앵은 자기 의수를 내려다보며 손가락을 오므렸다 폈다. 겉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의수 속에 들어있는 톱니바퀴가 복잡하게 맞물리며 인간의 움직임을 흉내냈다.

저토록 자연스럽게 움직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까. 분명 그 발견은 뛰어난 재능이 적합한 환경 속에서 수많은 노력을 거듭한 끝에 개화한 결과물일 것이다. 단언컨대 대단히 뛰어난 기술이다.

그렇지만 ‘특별’하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이미 존재하는 것을 톱니바퀴로 구현했을 뿐이기에.

잘 쳐봐야 대체품이다. 톱니바퀴가 아무리 정교한들 세상의 이치를 극히 간략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막시밀리앵은 세상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다.

“어쩌면 나 역시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네. 나는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이고, 범인과는 차원이 다른 경지에 이르렀으나… 마신에 닿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해. 그 부족함을 메우려고 인간의 왕을 찾았다네.”

“잘 찾아왔어요. 제가 인간의 왕이라는 걸 용케도 알아차리셨군요. 이제 알현에 만족하고 돌아가세요. 고향 사람들과 맥주 한 잔 하면서 곁들일 안줏거리로 삼기엔 부족함이 없을 거예요.”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단념한다면, 나는 거기서 끝이지 않은가?”

막시밀리앵이 중얼거리며 양손을 강철 딱정벌레 등에 짚었다. 그가 잔뜩 마력을 밀어넣은 순간 의수로 된 손이 연금강과 공명하여 하얗게 빛났다. 마력이 집중된 손가락 끝이 용암처럼 녹아내렸다.

그는 녹아내린 손가락을 움직여서 그림을 그렸다. 원과 세모, 그리고 하나의 직선. 저울을 형상화한 듯한 기호.

연금술의 시작, 연성진이다.

막시밀리앵은 그 안으로 마력을 더욱 불어넣으며 중얼거렸다.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네. 그게 어떤 미친 짓이든.”

그리고 잠시 뒤, 그의 양손이 강철 속으로 스며들었다. 파문이 인다. 수면에 손을 집어넣고 장난 치는 것만 같은 모습이다.

연금술. 물질을 다루며 가능한 범위 안에서 변환시키는 인간의 기술. 수많은 한계와 제약을 갖고 있고, 연금술사의 경지와는 관계없이 불가능한 건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어 신비로 취급되지 않는다. 복잡하고 신비로운 고유마도에 비하면 수수한 수준이다.

하지만 연금술의 본질은 힘이 아니다. 연금술은 재산이다. 몇 년간 푼돈을 모으고 모아서 평소라면 꿈도 못 꿀 무언가를 구매하는 것처럼, 연금술로 모은 힘을 단 한순간 쏟아부어 평소라면 불가능했을 위업을 달성할 수 있다.

당장 나만 해도, 연금술을 통해 내 능력 이상의 퍼포먼스를 내고 있다.

그걸 막시밀리앵이 한다면?

나는 즉각 아지에게 외쳤다.

“아지야, 뛰어!”

“멍? 뛰어? 뛰어!”

아지는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일단 내 말대로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말 잘 듣는 건 참 고마운데, 문제는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니, 제자리 뛰기 말고!”

“멍? 다른 뛰기?”

아지가 의문을 표시하는 동안, 막시밀리앵은 양손으로 어마어마한 마력을 쏟아부었다.

강철 딱정벌레는 그가 직접 제련한 연금강을 한 땀 한 땀 조립하여 만든 결과물. 그 자체로 무기이지만, 동시에 연금술의 재료이기도 하다. 내 카드처럼!

“전투연금. 머큐리 디알케.”

막시밀리앵의 손이 강철 딱정벌레를 ‘찢어버렸다’.

고유마도가 아니다. 그냥, 자기 마력으로 강철 딱정벌레 전체를 연금. 구성요소를 분해하고 갈라버린 것이다.

연금술. 보편적인 기술이라서 나도 마음껏 쓸 수 있는, 그래서 뺏어 쓸 수는 없는 인간의 능력.

땅이 흔들린다. 강철 딱정벌레가 탈피라도 하듯 쩍 갈라졌다. 몸이 둥실 떠오른다. 미끄러질 뻔한 나를, 히스토리아가 재빨리 멱살을 잡아서 멈춘다. 숨이 턱 막혔다.

히스토리아의 대처 덕분에 무사했지만 애초에 막시밀리앵은 나를 노린 게 아니었다.

“멍! 멍멍멍멍멍멍!”

공중으로 뛰어올랐던 아지는 그대로 균열 틈에 빠져버렸다. 강철 딱정벌레의 안쪽에 떨어진 아지는 발톱을 세우고는 빠져나오려 발버둥을 쳤다.

“우리는 만물의 영장….”

중얼거린 막시밀리앵이 힘차게 양손을 다시 모았다. 손바닥끼리 맞닿으며 깡, 하고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의 손짓에 따라 갈라졌던 강철이 파도치며 몰려든다. 아지가 미처 빠져나올 새도 없이 강철 딱정벌레의 균열이 메워졌다. 아지 짖는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리는 것처럼 멀어진다.

단숨에 아지를 격리한 막시밀리앵은 팔을 들었다. 그의 의수에 눌어붙은 강철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이제는 기능미나 정교함 따윈 찾아볼 수가 없다. 거기 있는 건 광기와 공격성이다. 흉측한 모양을 한 쇠붙이를 우리에게 겨누며 막시밀리앵이 외쳤다.

“제 손으로 왕을 죽여 특별해진 짐승! 할 수 없는 일 따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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