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00 톱니바퀴로 만들어진 세상 - 마무리
팔을 뿌리쳤다. 미리 꺼내둔 클로버 덱, 아미텐그라드를 탈출할 때 쓴 1과 방금 던진 5를 제외한 8장이 손에 잡혔다. 손가락으로 테두리를 긁으며 조심스레 카드를 골랐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인정하자. 내가 어떤 카드를 쓰든 막시밀리앵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는 없다. 카드 뭉치를 통째로 그의 뱃속에다 집어넣고 터뜨려야 그나마 죽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그 지경까지 간다면 이미 이긴 셈이겠지만.
자. 목표를 바꾸자. 나는 그에게 한순간의 틈이 생기기를 원한다. 아주 실낱같더라도 확실한 틈이.
불? 턱도 없다. 바람? 톱니바퀴로 선풍기를 만들어 쏘면 내가 질 듯. 연금마법과 분해마법? 상대는 나보다 몇 배는 뛰어난 연금술사다. 카드에 담은 마력을 폭발시켜봤자 통하지도 않겠지. 전공자에게는 그 분야로 까부는 거 아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이거 하나뿐이네. 결정.
손가락으로 스윽 밀어 한 장, 또 한 장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어깨에 둘렀던 망토를 풀어헤치고, 손에 둘둘 감아서 카드를 숨겼다. 조금이라도 덜 경계하도록….
‘카드였나? 분명 마법을 담고 있었지. 마법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지만, 어차피 접근을 막아야 하니.’
인간은 학습을 하는 생물. 막시밀리앵은 경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막시밀리앵은 이제 굳이 톱니바퀴를 고집하지 않았다. 조금 조악할지언정 확실한 수단을 택했다.
톱니바퀴 한 움큼을 짓눌러서 얇게 편다. 손바닥으로 이루어지는 약식 연금술. 작은 톱니바퀴들이 날카롭게 연마되어 표창으로 변했다.
반대쪽 의수로는 손가락을 펴서 강철 딱정벌레의 등을 긁었다. 다섯 손가락이 강철 덮개를 대나무처럼 세로로 쪼개버렸다. 막시밀리앵은 그렇게 생겨난 긴 강철 가닥을 창으로 가공했다.
‘지금까지는 자네가 죽어버릴까 봐 의도적으로 날붙이를 피했지만… 이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네.’
군국 무기개발국의 국장은 자기 역량에 닿는 모든 무기를 만들었다. 표창, 칼날, 창, 남은 톱니바퀴 등등. 그리고 온힘을 다해 나에게로 쏘았다.
톱니바퀴로 만든 투창기를 써 창을 던지고, 손가락을 튕겨 표창을 쏘아낸다. 하나하나가 전력을 담았다.
‘인간의 왕이라면 여기서 죽지는 않겠지. 아니, 혹 죽어도 어쩔 수 없다네. 아니면 내가 죽을 테니!’
나를 노리고 날아오는 날붙이들. 날카로운 반짝임이 내 시야를 뒤덮는다. 막거나 피할 수준이 아니다.
히스토리아는 나를 돕기 위해 달려왔다. 망토를 낚아채 아예 던져버릴 속셈이었다. 그나마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렇지만 부족해. 히스토리아의 손가락이 나에게 닿기 직전, 나는 그녀를 향해 지시를 내렸다.
“2번.”
아까도 했던,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위치를 뒤바꾸는 동작.
히스토리아는 반사적으로 행동했다. 생각은 뒤로 미뤄두고, 미리 정해둔 대로 내 등을 향해 뛰었다. 나도 역시 그녀가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비틀어 길을 터주었다. 손바닥을 뒤집은 것처럼 나와 히스토리아의 위치가 뒤집혔다.
한순간 히스토리아와 막시밀리앵 사이에 길이 트였다. 그와 동시에 강철로 된 무기들이 히스토리아에게로 쏟아져 내린다.
뒤늦게 히스토리아의 생각이 이어진다.
‘이대로 위치를 바꾸면, 휴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내가 몸으로 저것들을 다 받아내야겠네. 반탄기공을 쓴다면 어찌저찌 다 막아낼 수야 있겠지만, 그러면….’
달려오던 기세를 잃을뿐더러, 총검총의를 쓸 기력이 소모된다.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승산이 0에 도달한다.
이기기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히스토리아는 총을 쥔 손에 힘을 모았다. 기력이 총에 서린다. 급조한 탄환의 뒤쪽에 폭사경이 소용돌이치며 모였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전신에 퍼진 모든 기력을 모아 총에 담는다. 한껏 응축된 기력이 기이하게 부풀다가… 이치 너머에 닿는다. 총탄의 참격이라는 실현 불가능한 심상이 현실로 끌려온다.
마침 톱니바퀴를 무기로 바꾸어 쏟아낸 다음이라 막시밀리앵의 방어는 그 어느 때보다 엷어져 있다. 타고난 전사인 히스토리아는 그 빈틈을 발견했다.
그리고 내가 2번 동작을 지시한 이유 역시도 알아차렸다.
‘이걸 노린 거야, 휴이? 정말 너무하네.’
기공이 없다면 히스토리아의 몸은 조금 튼튼한 여자의 몸에 불과하다. 빨갛게 달아오른 수리검, 급조되었기에 더욱 위협적으로 보이는 철창, 철판을 갈라 만든 날붙이 등. 맞는다면 멀쩡할 리 없다. 아니, 분명 죽는다.
그렇지만 나는 총검총의를 쓰자고 제안했었다. 나를 미끼로 삼겠다면서.
히스토리아는 생각을 깊게 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바보는 아니다. 히스토리아가 엷게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그래도 해줄게, 휴이. 대신 이번이 마지막이야?”
‘…아마, 다음은 없을 테니까.’
아니. 다음은 있어.
나를 도대체 뭘로 보는 거야.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는 않지만 인간성은 있다. 여기서 너를 죽게 둘 이유가 없잖아.
살려둬야 두고두고 나를 도울 거 아니야.
뽑았던 카드 하나는 클로버 6. 간단한 나침반 마법이다. 군국에서는 군사훈련을 진행하는 시즌이면 아이들을 모아놓고 나침반 마법을 배우게 했다. 지도를 읽으려면 최소한 동서남북이 어딘지는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꽤 잘 알려진 사실인데, 나침반은 사실 자석이다.
덕분에 완성되었다. 마력을 있는 대로 때려 부어서 개조한, 본래 목적과는 많이 어긋난 사도의 마법이.
“컴패스 가우수스!”
담겨있던 마력을 해방했다.
클로버 6에서 솟아난 마력은 소용돌이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와 달랐다. 비유하기 어렵지만, 처음과 끝이 맞물린 형태는 어쨌든 소용돌이와 비슷했다. 맴돌며 퍼져나간 마력이 천의 여왕에 닿아 증폭, 더욱 거세게 퍼져 강철에 닿았다.
‘고작 규모만 키웠을 뿐인 마법이, 정녕 내게 통할 거라 생각했나? 그게 어떤 종류든?’
막시밀리앵은 생각했다.
‘통하지 않는다네. 내가 가진 연금강은 전부 4레벨 이상의 하이코스트 연금물질. 부여마법에 대한 내성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네. 마법은 통하지 않아. 나보다 더 강력한 연금술사이거나, 이치에 닿지 않는 이상!’
안다. 마법은 만능이 아니다.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변화를 가속하는 힘일 뿐이며, 그마저도 처절한 저항에 직면하곤 한다. 이것만으로는 막시밀리앵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한 장을 더 꺼냈지.
스페이드 10.
나는 두 장의 카드를 겹쳤다.
***
태초에 땅과 한 몸이었던 쇠는 오래된 그리움을 떠올렸다. 그건 어릴 적 꾸었던 꿈처럼 불현듯 찾아와야만 기억할 수 있는 향수였으며, 또 잊는다면 다시 찾아올 기약이 없는 허무였다.
쇠는 어렴풋한 그리움을 잡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마치 자신의 반쪽을 세상 어딘가에 놔두고 와 버린듯한, 온전한 하나를 갈구하는 몸부림이었다.
그러던 중, 세상에 ‘그것’이 선물처럼 나타났다.
드디어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그것’을 발견한 모든 쇠는 목표를 바꾸었다. 한 연약한 짐승의 피부를 찢으려고 날아가는 대신, 결코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을 축이기 위해 방향을 비틀었다.
‘그것’과 온전한 하나가 되기 위하여.
***
히스토리아를 향하던 날붙이가 일제히 방향을 바꾸기 시작한다. 속도는 더욱 빨라졌지만 빗나가는 이상 위험하지 않다. 덕분에 히스토리아의 시야가 트였다.
‘…이번이 마지막은 아니겠네. 정말,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내가 어떤 수를 썼는지 히스토리아는 보지 못했다. 봤어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 그리고 이제 히스토리아의 차례라는 것.
‘휴이도 힘을 내줬으니, 나도 힘을 내야 할 텐데. 약간… 모자라.’
히스토리아는 난감해했다. 어찌저찌 될 거라고 말했으나, 생각 이상으로 기력이 모자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극한 상황에서, 심지어 마력초에 취한 상태에서 정확하게 판단하기는 불가능하니. 독심술로 읽었다고 하더라도 히스토리아의 판단능력이 망가지면 소용이 없다.
‘어떻게, 모으면… 다 끌어모아서 어떻게든 집중시키면.’
그렇지만 히스토리아가 새로 깨달은 리離, 총검총의는 보통의 기력으로는 성립되지 않는다.
첫 번째 리, 영점잡이. 네 발째의 총탄이 목표에 필중한다. 총을 주무기로 쓰는 히스토리아가 목표를 맞추기 위해 끝없이 정진한 끝에 닿은 이치다.
거기서 파생된 두 번째 리, 총검총의. ‘필중’의 목표가 점에서 선이 된다. 히스토리아가 회귀자와의 전투에서, 천앵과 총의 차이점을 파고들다가 떠올린 심상이다. 단 그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히스토리아는 총을 검처럼 휘둘러야 했고, 기력도 몇 배는 더 써야 했다.
히스토리아는 여기서 영감을 떠올렸다.
‘굳이 선일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한 점으로 집중하면.’
잠깐. 그렇다면 총탄과 다를 바가 없잖아. 영점잡이랑 다를 게, 아니, 그냥 총 쏘는 거랑 다를 게 뭐야!
사람이 기껏 미끼가 되어 장애물을 다 치워놨는데, 무슨 멍청한 생각을!
‘역시 인간은 죽음의 위기에서 각성하는 걸까? 좋은 생각이네에…. 당장 시험해보자.’
각성은 무슨, 각성제의 효과겠지! 이래서 약 하는 인간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나는 지금 움직일 수 없다. 수많은 날붙이가 내가 쥔 스페이드 10을 향해 방향을 바꾸고 있었으니. 방향이 완전히 틀어지기 전에 스페이드에서 손을 떼면 가이아 에고가 풀리고 히스토리아가 공격받는다.
어쩔 수 없이 지켜만 보고 있는데, 망토로 앞을 가리는 막시밀리앵을 발견했다.
저거 뭐였지. 무한 맞물림 망토라 그랬나? 회귀자의 참격을 막아냈던 망토였는데.
수많은 톱니바퀴가 서로 빈틈없이 맞물린 채 돌며 공격을 능동적으로 방어하는 망토다. 맞물림이 공간을 교란하는 덕분에 공간, 혹은 바람 공격을 막아내는 데 특화되었다. 물론 거기에 특화되었다는 거지, 다른 것도 잘 막긴 할 것이다.
약 빨고 약해진 히스토리아가 저걸 뚫을 수 있을까? 이 역시 독심술로는 알기 어려운 정보다. 마음을 읽어도 일어나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다.
그렇지만.
‘총검총의. 찌르기.’
아무래도 알 것 같단 말이지.
히스토리아는 총을 크게 당긴 뒤, 방아쇠를 당기며 쑤욱 내밀었다. 칼을 밀어넣는, 혹은 창으로 찌르는 듯한 자세.
그와 동시에 총검총의의 특징인 늘어진 총성이 들린다. 흐릿한 잔상이 총구와 망토를 이었다.
맞았다.
그리고 막았다.
막시밀리앵의 망토가 움푹 들어가며, 깨지고 부러진 톱니바퀴 몇 개가 사방으로 튄다. 실탄이 존재해서 그런지, 회귀자와 싸울 때보다는 더 큰 피해를 입힌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망토를 관통하지는 못했다. 히스토리아의 리도 공간에 간섭하는 종류. 실탄이 존재할지언정, 수많은 맞물림으로 공간을 교란하는 망토에는 상성상 불리했다.
그럼 그렇지. 하고 낙담하는데, 나는 묘한 사실을 발견했다.
총격이 끝나지 않는다.
연발, 아니, 연속. 한 발의 총격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총탄이 길어진 것도, 혹은 수십 발을 연사한 것도 아닌데. 망토는 계속 짓눌리고 톱니바퀴는 더 깨질 것이 없어질 때까지 깨졌다. 점에서 시작된 균열이 점차 커진다. 뒤따른 힘은 명중한 초탄에 계속 힘을 보탰다.
이렇게 된 이상 총도, 검도 아니다. 결국 창까지 다다랐다.
총과 창. 둘 중 무엇이 더 뛰어나냐. 절창의 오랜 의문에 대한 답이 여기서 드러났다.
만류귀종이라는, 조금 진부한 대답으로.
이윽고, 망토가 뚫렸다.
콰장창.
막시밀리앵의 몸이 보이지 않는 총격에 꿰여 허공을 날아갔다. 그의 힘이자 생명이었던 톱니바퀴들이 피처럼 흩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