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지적 1인칭 시점-307화 (307/384)

어이. 반박이라도 해 봐. 왜 고개만 돌리고 가만히 있는 거야.

쳇. 완전히 이쪽을 가시권에 두고 있어. 숨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히스토리아는 완전히 탈진 상태니까, 셰이 씨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하나?

여장교와의 불륜이냐, 기공을 속인 일이냐. 독심술로 파악한 정보 중 어떤 걸 화제로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 중이었다.

쭈뼛거리던 통신병 아이피가 갑자기 무언가에 홀린 듯 장성의 앞을 막아섰다. 아아피는 아연한 얼굴을 한 장성에게 경례를 올리며 보고했다.

“멕시오 중장님. 상급 명령권자의 직권 통신입니다. 본관은 명령권자의 명령을 그대로 전할 것이며, 멕시오 중장님께서는 이를 반드시 청취하셔야 합니다.”

“뭐냐?”

아이피의 고유마도가 발현되었다. 옅은 마력광이 아이피의 전신을 감싸고, 머리카락이 둥실 떠올랐다. 동조를 끝마친 아이피 대위는 자기 입으로 누군가 전한 명령을 그대로 읊었다.

“보고는 받았다네. 천둥벌거숭이처럼 무엇 하는 중인가? 제발 모르면 거기서 닥치고 있게나, 멕시오 중장.”

그 말을 끝으로 머리카락이 훅 가라앉았다. 폭언을 퍼부은 아이피 대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장성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침묵이 깔렸다. 고작 일개 대위가 장성을 보고 천둥벌거숭이라 하며, 닥치라는 말을 면전에서 한 것이다. 멕시오 중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그게 상부의 말을 그대로 전한 것이라는 건 멕시오 중장도 안다. 실제로 해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골렘을 수화기 삼아 할 때와 면전에서 인간에게 들을 때와는 분명히 다르다. 멕시오 중장은 저도 모르게 아이피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감히 이 나에게 그딴 말을 지껄인 대위는 귀관이 처음이다. 각오는 되어있겠….”

그때였다. 날카로운 기세가 두 줄기 흘렀다. 멕시오 중장은 본능적으로 성큼 물러나며 히스토리아쪽을 보았다. 히스토리아는 어느새 꺼낸 권총을 멕시오 중장에게 겨누고 있었다.

총탄을 막기 위해 그의 장성기, 톱날 방패를 꺼내든 멕시오 중장은 방패를 들어올리다 말고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 기세가 두 종류다. 다른 쪽 기세는…?’

“나일세.”

그리고 ‘막시밀리앵’이 등장했다.

‘막시밀리앵’은 독특한 외눈안경을 끼고 큼직한 모자를 썼으며, 톱니바퀴가 잔뜩 매달린 망토를 몸에 두른 채 바닥을 미끄러졌다. ‘막시밀리앵’의 발에는 톱니바퀴 신발이 빙글빙글 돌며 움직이고 있었다.

미적센스라는 범주를 넘어서, 톱니바퀴에 강한 집착이 느껴지는 패션은 누가 봐도 막시밀리앵 그 자체. 멕시오 중장은 의심할 생각조차 못 하고 경례를 붙었다.

“충성. 막시밀리앵 국장님, 무사하셨습니까!”

‘막시밀리앵’은 조금 짜증이 난 얼굴로 말했다.

“자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저쪽에서 일어난 일은 내가 해결할 테니, 끼어들지 말고 외부 방비에 집중하라고. 분명 통신병을 통해 접근 금지 명령을 내렸을 텐데.”

“그것이, 상황이 끝난 게 분명한데도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아서.”

“그래서 내 명령을 전한 통신병을 건드리려고 했나?”

멕시오 중장은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명령이 어디서 왔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막시밀리앵’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멕시오 중장. 자네 정도 되는 이가 왜 그랬나? 통신병은 일개 톱니바퀴라네. 중앙에서의 제어를 그대로 전하는 부품이지. 귀중하진 않지만 매우 중요하다네. 왜냐면 아무런 사견을 담지 않고 ‘내’ 명령을 전하니까. 그 의미를 모르나? 자네는 나름 이성적이라 생각했는데.”

“죄송합니다. 하지만, 국장님의 무기가 완전히 파괴되었기에 혹 무슨 문제가 생겼나 싶어서….”

“뭐?”

자기 걸작이 완파되었다는 말을 들은 ‘막시밀리앵’은 표정을 굳혔다. 싸늘한 분위기가 다시 맴돌았다. 아까보다 훨씬 강하고 험악하게.

장성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군국의 계급이다. 육장성과 장성이 가진 힘의 차이는 상상 이상으로 크다. 심지어 상대가 군국 초창기부터 활약했으며, 군국의 모든 무기를 만들었다고 하는 과병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특히, 막시밀리앵은 자기 작품에 엄청난 자신감과 애착을 갖고 있었기에… 멕시오 중장의 말은 분명한 실책이었다.

“다시 한번 말해보게나. 완파? 자네가 톱니바퀴에 대해 무엇을 알지? 무엇으로 평가하지? 저것이 완파된 것으로 보이나? 톱니바퀴에서 중요한 건 형태가 아니라 구조라네. 제 위치에만 있다면, 어떤 톱니바퀴도 곧장 대체할 수 있으니까!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이 머저리 자식아아아아아아아아!”

화가 나지 않으면 이성적이고 호탕하지만, 선을 넘었다 싶으면 곧장 스위치가 켜진 것처럼 발작하는 막시밀리앵이다. 그 ‘막시밀리앵’의 분노가 중장의 한 마디에 임계점을 넘어섰다. 격분한 ‘막시밀리앵’은 톱니바퀴 하나를 쥐어 으스러뜨리며 외쳤다.

“우리의 적이 누군지, 내가 무엇을 상대했는지 아나! 모르겠지! 감히 예상도 못하겠지! 아무것도 모를 수 있다. 시야가 좁은 멍청이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하지만! 모르는 주제에 당당하지 말라고오오오오! 그게 어렵나아아아아아아!!”

육장성이 격분하면 말로 끝나는 경우가 드물다. 그 예상대로 '막시밀리앵'이 손가락을 들었다. 톱니바퀴가 손가락 위에 살짝 뜬 채로 맹렬하게 회전했다.

건기공의 극의에 달하면 직접 닿지 않고도 물건에 기공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한다. 아주 살짝이지만 톱니바퀴는 분명히 떠있었다. 마찰도 저항도 없는 허공에서 회전하는 톱니바퀴는 폭풍과도 같은 바람을 일으켰다.

멕시오 중장은 본능적으로 톱날 방패를 들어 제 몸을 가렸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막시밀리앵’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그걸 멕시오 중장에게 내던졌으니까.

쿵, 가각, 가각, 가각.

광분하는 톱니바퀴가 톱날 방패와 부딪힌다. 첫 번째 충돌 이후, 톱니가 잇달아 돌아가며 회전력까지 방패 위로 쏟아부었다. 멕시오 중장은 전신이 뒤흔들리는 기분을 느꼈다.

‘이 충격, 이 힘…! 진심이다! 막시밀리앵 대장은 진심이야!’

이를 악문 멕시오 중장이 허리에 힘을 주어 방패를 위로 치켜들었다. 기공으로 불타는 광륜은 방패를 비스듬히 타고 튕겨 나와 저 멀리 날아갔다. 한숨 돌린 멕시오 중장이 간신히 톱니바퀴를 떨쳐내고 일어섰을 때, ‘막시밀리앵’은 이미 양손에 두 개의 톱니바퀴를 더 돌리고 있었다.

이미 눈이 돌아갔다. 도망쳐야 한다.

생존본능이 시키는 대로 멕시오 중장은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다들! 우리는 전후복구에 집중한다! 가자!”

“알겠습니다!!”

분노한 육장성의 근처에 남아있을 바보는 오래 살지 못한다. 여태껏 살아있는 군인들은 적자생존의 귀감이었다.

멕시오 중장의 부대는 일사불란하게 전략적인 후퇴를 감행했다. 인파가 썰물 빠지듯이 물러났다. ‘막시밀리앵’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전까지 톱니바퀴를 회전시켰다.

군국의 군인은 행동이 빨랐다. 채 1분도 지나지 않고 접근했던 병력이 물러갔다.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난 뒤. ‘막시밀리앵’은 들고 있던 톱니바퀴를 땅에 떨어뜨렸다.

“등 뒤로 총을 겨누면 어떻게 하나? 나 원. 신경이 쓰여서 실수할 뻔했잖나.”

그 말대로, 히스토리아는 총구를 ‘막시밀리앵’에게 겨누고 있었다.

사실 히스토리아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다. 그야 조금 전, 히스토리아는 막시밀리앵과 일전을 벌였으니까. 온힘을 다해 간신히 무찔렀는데, 그가 멀쩡히 살아 돌아오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막시밀리앵…? 말도 안 돼. 아까 그는 분명히…! 아니, 저건 분명 기공인데…?”

나는 히스토리아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맞아. 저건 기공이지. 누가 봐도 알잖아.”

“하지만, 막시밀리앵 국장은 고유마도를 썼잖아! 그에 비해 저 막시밀리앵은 기공을 썼어…!”

“기공 맞아. 다만, 주어가 잘못됐어. 저 막시밀리앵은 막시밀리앵이 아니야.”

너도 당해봐서 알잖아. 누가 봐도 히스토리아였지만, 히스토리아가 아니었던 그걸.

“네에. 역시 폐하! 바로 아시네요!”

‘막시밀리앵’이 몸을 빙글 돌렸다. 망토가 멋들어지게 흩날리나, 마감이 살짝 어설펐는지 흔들거리던 톱니바퀴가 우수수 빠졌다. 외눈안경은 붙잡아 옆으로 던지고, 급조한 톱니바퀴 신발은 살짝 흔들어서 벗는다. 온몸에서 톱니바퀴가 사라지니 막시밀리앵 같았던 인상이 훨씬 옅어진다.

그 상태로 ‘막시밀리앵’은 허리를 깊이 숙이고 우아하게 인사를 건넸다. 마치 연극을 끝내고 커튼콜을 하는 것처럼.

‘막시밀리앵’이 입을 열었다.

“어땠나요? ‘저’의 연기는?”

분명 건장한 성인 남성의 모습이건만, 귀에 들리는 건 가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다.

눈앞에서 연기를 본 나는 솔직한 감상을 들려줬다.

“개사기네요.”

“아핫! 개사기라니, 폐하께 그런 말을 들어봤자!”

‘막시밀리앵’, 아니, 이제는 그리 부르기도 애매해졌다. 몸 곳곳에 붙어있던 톱니바퀴는 어느새 다 떨어지고, 그저 두꺼운 망토를 둘렀을 뿐인 남성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람은 실시간으로 소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의수처럼 창백했던 손에 핏기가 돌고, 골격이 줄어든다. 딱 맞았던 옷도 점차 늘어지며 목과 어깨가 드러난다.

변장의 달인 영궤 지크흐룬드… 이제 힐데가 된 소녀는 키득거리며 다가왔다. 나는 재빨리 그녀의 말을 막았다.

“폐하라고 부르지 마요. 제 정체를 다 소문 낼 셈이에요?”

“네에? 새삼스럽게?”

“새삼스럽다니. 이거 나름 비밀이거든요.”

힐데가 가느다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에? 정말요? 뭔가요, 그러면? 셰이나 티르칸자카는 그걸 모르는데도 아버님과 함께하는 건가요? 어쩌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다고요. 그리고 호칭 선택지가 폐하 아니면 아버님밖에 없나요?”

티르는 ‘모른다’기 보다는 ‘신경 쓰지 않는다’ 느낌이지만. 뭐, 대충은 느끼고 있지 않을까 싶다. 심장을 되찾아 준 게 어지간한 일이어야 말이지.

와, 이렇게 보니 내 정체를 진짜 모르는 사람은 회귀자 하나뿐이네. 이래도 되는 거야? 너 회귀자잖아?

…아니지.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회귀자가 바보긴 해도 멍청하진 않다.

모르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다른 정보를 알고 있는 거겠지.

자, 그게 뭘까. 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을 때였다.

힐데는 강철 딱정벌레 앞까지 다가왔다. 히스토리아는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힐데를 향해 적의를 내보였다.

“지크흐룬드….”

“아니에요, 히스토리아. 힐데가르드랍니다. 지크흐룬드는, 음, 허상 비슷한 거라… 에이메데르처럼 군국의 빛과 그림자를 뜻하는 칭호일 뿐. 본질은 아니죠.”

힐데는 가볍게 웃으며 사뿐사뿐 강철 딱정벌레 위로 뛰어올랐다. 히스토리아가 노려보고 있었지만, 경계하든 말든 냅다 몸부터 들이밀었다.

히스토리아는 힐데에게 적의는 보여도, 그녀에게 적의가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멕시오 중장의 경우만 봐도 분명하다. 공격하지 못하고 잠깐 멈칫한 사이, 힐데는 자연스럽게 히스토리아의 팔을 잡고는 부드럽게 넘어뜨렸다. 히스토리아는 탈진한 상태라 저항도 하지 못했다.

“‘저’는 당신이 부러워요, 히스토리아. 당신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기연을 만난 건지 알지 못하겠죠. 아아, 아쉬워라. 나도 이렇게 되기 전에 아버님을 만났다면 좋았을걸.”

“윽… 당신은, 어떻게 휴이가 인간의 왕이라는 걸….”

“‘저’도 확신은 없지만, 다른 이에 비해서 비교적 나은 편이죠. 확인할 방법이 있거든. 거기다 아버님이 직접 말씀해주셨잖아요?”

힐데의 손길은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 히스토리아의 팔을 가볍게 주무르며 손가락으로 혈에 기공을 흘려넣었다. 기공으로 상처를 다스리는 타혈법이었다.

그리고… 기공뿐만이 아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 지나가던 선비. 떠돌이 용병. 은둔 현자. 탁발승. 길손.”

타혈법에 더해, 펼친 손바닥에 불가해한 힘이 깃든다. 따뜻하며 편안한… 그러나 다소 강압적인 힘.

“그건 다, 한때 인간의 왕이 가졌던 직업이자, 불렸던 호칭이거든요. 이번에는 피리 부는 사나이죠, 아버님? 갈수록 호칭이 멋있어지네요!”

딱히 바라고 한 건 아닌데 말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고, 힐데는 눈웃음을 지으며 히스토리아의 위로 엎드렸다. 두 몸이 나란히 포개졌다. 히스토리아의 등에 밀착한 힐데는 귓가에 대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후훗. 너무 속상해할 필요 없어요, 히스토리아. 모르는 게 당연해. 예전의 그들도, 당신처럼 만난 사람이 있어서 알게 된 거니까.”

그리 말한 힐데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말과 말 사이의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명상에 든다. 어둡고 컴컴한 정신세계 속에서 힐데는 스스로 암시를 걸었다.

‘나는 수도승. 몸도 마음도 성치 않지만, 믿음만은 그 누구보다 독실한 자.’

-그리고, 믿음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에 발을 디뎠다.

닿은 손에 흰빛이 어린다. 힐데는 히스토리아의 손을 맞잡고, 생체 단말에 그 힘을 불어넣었다.

한 인간을 이전으로 돌려놓는 힘. 치료를 넘어선 복원의 권능. ‘신’이 존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히스토리아는 몸 속을 파고드는 기운을 느끼고는 중얼거렸다.

“신성…력.”

톱니바퀴에 묶여 꺾이고 비틀렸던 몸이 변형되기 전 원형을 떠올린다. 신체는 고무줄과 마찬가지라서, 한 번 벗어나면 원형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러한 외상 한정으로 신성력은 절대적인 치유력을 발휘한다.

히스토리아의 몸은 '돌아왔다'. 힐데는 싱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치유 완료! 고맙다는 인사는 됐어요. 이건 앞으로 잘 지내자는 뜻이니까!”

마력초가 간신히 숨기고 있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기력이 돌아오지도 않고, 피로가 가시지는 않지만… 그래도 히스토리아는 회복되었다. 기적을 눈앞에서 본 히스토리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크흐룬드… 당신은, 누구입니까…?”

힐데가 더욱 잔망스럽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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