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다시 인사드릴게요! ‘저’는 영궤, 지크흐룬드…라 이름 받고, 성녀 보필 임무에 종사하고 있었던!”
허리는 대강 숙인 채로 팔을 비틀어 올려붙인다. 한껏 불량스러운 경례와 함께 힐데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원견의 성검대주(聖劍隊主), 힐데가르드입니다! 에헷, 잘 부탁해요!”
성검대. 성녀의 직속호위부대.
말만 호위지, 사실 성황청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전투부대이자, 첩보부대이자, 암살부대이다. 성녀의 명이 있다면 먼 이국의 장난감을 공수하는 것부터, 한 나라를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일까지 남김없이 행한다.
우는 아이의 울음마저 그치게 한다는 군국의 공공보안부 부장이 사실 성황청의 성스러운 검, 성검대라니.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고백에 히스토리아는 뭐라 말도 못 하고 입만 뻐끔거렸다.
반응을 본 힐데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아버님? 히스토리아, 지금 말도 안 되게 멍청한 얼굴이 되었는데요? 이게 어찌 된 영문일까요?”
“아. 히스토리아는 성녀의 존재를 몰라요.”
“이상하네요. 분명 밝혀도 된다고 성녀님께 언질을 받았는데. 혹시 히스토리아만 따돌림당하고 있나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리아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원래 이런 건 당사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냐가 중요해서. 리아, 혹시 따돌림당하는 중이야?”
“…응. 평소처럼.”
내가 언제 널 따돌렸다고 그래. 요즘은 따돌림당하는 사람이 중앙에서 장군이 되고, 따돌린 사람이 뒷골목에서 소매치기나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 따지고 보면 내가 사회에게 따돌림당한 거지!
어쨌든 간단하게 설명할 필요는 있을 텐데.
“그러면 ‘저’, 군국의 모든 기밀을 다루는 공공안전부장 힐데가 간략하게만 설명해드리죠.”
어느새 안경을 착용한 힐데가 코받침을 밀어 올렸다. 뭐야, 저거? 톱니바퀴를 주워서 이 짧은 시간에 급조했다고? 재주도 좋네.
“군국은 사실 성녀가 만든 나라입니다. 이상!”
정말 간략하다. 얼마나 간략한지, 전혀 설명되지 않았어. 히스토리아의 표정이 더 멍청해졌잖아.
“잠깐만요, 너무 줄였잖아요? 더 설명할 거 없어요?”
“더 설명할 거…? 아! 우리 성녀님은 믿음을 저버리셨어요! 그러니까 성녀와 성검대주라고 해도 완전 끈 떨어진 연이라는 말씀! 오히려 언제 성황청의 예언자가 찾아와서 군국을 망가뜨릴까 걱정해야 할 처지라, 매일매일 두근두근해요!”
“너무 자기 사정이네.”
“정말, 어쩔 수 없잖아요? ‘저’에게는 ‘제’ 사정이 가장 중요하단 말이에요!”
“그건 인정.”
“후후. 인정받았다!”
힐데는 말을 하다 말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 맥락없는 대화에 머리가 어지러운지, 히스토리아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고는 말했다.
“끙. 잠깐, 지크흐룬드….”
“아니아니! 존경과 경의를 담아서 힐데라고 불러줘요! 지크흐룬드는 ‘내’가 아니거든. 자꾸 이상하게 부르면 자아가 뒤틀려 버려!”
귀여운 얼굴로 내뱉지만, 농담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 무서운 말이었다. 히스토리아는 그 요청에 응하려다가, 차마 못 하고는 약간 타협했다.
“…공안부장.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
“저요? 지금은 아버님 편!”
자기 말을 보여주려는 것처럼 팔을 벌리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그건 좀 부담스러워서 막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몸이 가라앉듯이 꺼지더니 내 허리춤을 껴안았다.
…맞다. 이 사람, 육장성이었어.
히스토리아는 내 곁에 찰싹 붙은 힐데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성검대라면 오직 성황청의 명령만 따르는 광신의 부대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휴이에게 달라붙는… 아니, 따르려는 겁니까?”
“으음. 거기에는 알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히스토리아. 성검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줄 알아요?”
“성황청에서 서임하는 것이 아닙니까?”
힐데가 손을 입으로 가리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 딱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 알고 있네요! 조금이라도 숨겨진 부분은 아무것도 몰라! 이래서야 이 험난한 세상을 어찌 살아갈까요, 아버님!”
“그러게요. 사실 리아의 그런 점은 저도 꽤 걱정하고 있었어요.”
“휴이 너는 입 다물고 있어!”
나한테만 뭐라고 해. 날카롭게 쏘아붙인 히스토리아는 힐데를 응시했다.
“…공안부장. 태도가 많이 다르군요. 공안부장으로서 보았을 때는 딱딱하더니.”
“딱딱한 사람이 어떻게 연기를 하겠어요? 말랑말랑한 젤리 같은 사람만이 다른 틀 안에 몸을 구겨 넣을 수 있는 거랍니다! 말랑말랑!”
“잠깐만요, 힐데. 그건 살이 아니고 근육이에요. 제가 말랑말랑한 게 아니라 힐데 손이 억센 거니까 주무르지 마요. 터질 것 같아요.”
신성력을 쓸 거면 손만 대도 되잖아. 왜 굳이 주무르는 거야. 회복하면서 동시에 고통받고 있잖아!
“말 그대로 성검대 하면 번쩍번쩍한 성기사들을 먼저 떠올리겠죠. 다만,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성검대가 되지는 않아요. 오히려 대부분은 ‘저’처럼 선택받았죠.”
대충 웃어넘긴 뒤, 힐데는 멍한 눈동자로 과거를 되새기며 설명을 계속했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심지어 ‘저’ 자신도 내가 누군지 모를 때.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요. 분명 신분을 속이고 얼굴도 바꾼 채 몸을 숨기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히 ‘저’를 가리키죠. 이 길이 너의 길이니, 너는 필시 따라야만 한다면서.”
성녀는 세상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니까. 아무리 정체를 숨기고 모습을 바꾸어봤자, 성녀가 주시하고 있다면 찾아낸다.
그리고 운명에 버림받은 이들은, 누군가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얽매인다.
“그러면 뭐, 홀딱 넘어가는 거예요. 하늘은 ‘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으며, ‘저’에게 새 삶을 살 기회를 주려고 동아줄을 내민다… 없던 믿음도 생겨나겠죠? ‘저’처럼 이미 독실한 신자였다면 더더욱?”
“그게 성검대의 정체입니까?”
“네. 지치고 힘든 ‘저’를 운명이 구원하고, ‘저’의 삶을 긍정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마약과도 같은 광신에 빠져들게 돼. 하물며 성녀가 ‘저’를 직접 불렀어요. 그러면 잘못될 리가 없잖아. 망가진 나의 삶이 되돌려지는 거야. 살아서도, 죽어서도!”
아주 잠깐 광기 어린 눈동자가 빛났다. 보는 사람이 소름 끼치게 맹목적인 시선에 히스토리아가 움찔하는 사이, 이성을 되찾은 힐데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저’는… 조금 특별해서. 음, 이게. ‘저’만의 특징도 있고. ‘저’를 선택하신 원견의 성녀님이 신앙을 워낙 크게 저버리신지라. 비교적 합리적으로 변했단 말이죠.”
그리고 다시 내 몸을 쥐고 흔들며 밝게 웃었다.
“그때 딱! 인간의 왕이 나타나잖아요? 역시 인간의 왕, 제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줬어요! 이제 되돌아갈 수 없어요! 성녀님께는 미안하지만, ‘저’도 성녀님처럼 합리적인 선택을 할게요!”
그러다가 문득 몸을 멈췄다. 힐데는 갑작스럽게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쳐다보았다. 뻐끔거리며 무언가를 '들은' 힐데는 작게 신음을 흘렸다.
“음. 성녀님께서 웃기지도 않은 짓 그만하고 준비하라는데요. 어쩌죠, 아버님?”
분명 내 귀에 들린 소리는 없었는데, 힐데는 무언가를 듣고 반응했다. 난처하다는 듯 나에게 되물어온다.
이게 그 ‘성녀의 부름’인가? 성녀는 아무리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자신을 따르는 신도에게 부름을 전할 수 있다는데.
그런데 ‘부름’ 자체는 내 독심술로도 안 읽히네. 뭐, 무슨 내용인지는 힐데의 생각을 읽어서 알지만.
일단 모르는 척 물었다.
“뭘 준비하는지 말해줘야 어떻게 할지 알죠.”
그러자 힐데는 더욱 짙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평화협정이요!”
***
그 시각, 시조 티르칸쟈카는 어깨에 골렘 하나를 얹은 채로 사령부에 진입하고 있었다.
흡혈귀는 지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일까, 대신 흡혈귀의 이동속도는 그다지 빠르지 않다. 흡혈귀의 성세가 가장 강력했을 때조차도 축복받은 엔버 대평야를 넘지 못했다. 하루에 한 번 찾아오는 햇빛, 흐르는 물, 보관하기 어려운 식량… 흡혈귀의 약점이라 지적된 이런 부분도 그들의 진군이 빨랐다면 이토록 부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셰이는 먼저 바람을 두르고 뛰쳐나갔다. 천앵의 바람으로는 존재감이 큰 티르칸쟈카까지 옮기기 어려웠기에, 대신 티르칸쟈카는 다른 역할을 맡았다. 훨씬 간단하고 깔끔한 일이었다.
정작 본인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내 너의 말을 따라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이더냐?”
티르칸쟈카는 어깨에 있는 골렘에게 물었다. 그녀의 불편한 감정이 반영된 것인지 어둠이 불길하게 넘실거렸으나, 본신이 아닌 골렘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협조하는 것이 본국에게도, 귀하에게도 이득입니다. 현시점,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군국 이너서클 사령부에는 큰 혼란이 발생하였습니다. 현재 이너서클 사령부는 본관과 귀하 사이에 진행된 협약에 대해 전달받지 못한 상태. 이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여야 귀하의 다른 동료들에게 닥칠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너희들이 자랑하는 그 인형을 쓰면 되지 않느냐.”
[막시밀리앵의 능력으로 인하여 사령부 내부에 존재하는 모든 골렘에 기능장애가 일어났습니다. 현재 사령부 내에서 원격 통신이 가능한 기체는 본 기체뿐입니다.]
티르칸쟈카는 막시밀리앵이라는 이름을 떠올리고는 말했다.
“저번에 도로에서 보았던, 쇳녹 냄새를 풀풀 풍기던 그 녀석 말이더냐? 그자는 너희 편일진대 어찌?”
[막시밀리앵은 군국에서 이탈하였습니다. 현재 그는 군국을 위해 일하고 있지 않습니다.]
“흥. 제 권속조차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다니. 제법 구색을 갖춘 것처럼 보였건만, 이 나라도 오래가지는 못하겠구나.”
[일부 긍정. 단, 막시밀리앵은 처음부터 독자적인 노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현 사태는 어느 정도 예견된 바입니다…. 대응이 마땅치 못하였을 뿐. 설마, 그가 설계한 통신용 골렘에 자폭 톱니가 있었을 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티르칸쟈카는 ‘자폭톱니’라는 신기한 단어에 호기심을 느꼈으나, 마침 문득 끼어든 생각이 그 호기심을 가렸다. 티르칸쟈카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그래. 저번에 들었다. 그는 분명, 인간의 왕을 찾고 있노라 말하였지…. 흐음. 인간의 왕이라….”
티르칸쟈카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인간의 왕, 인간이 아직 짐승이던 시절, 모든 인간을 대표했던 고고한 짐승의 왕.
가장 강력한 예언자였던 처음의 성녀가 그를 몰아내고, 이 땅에 문명과 질서를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떠올리기만 해도 증오스러운 성황청이 신처럼 떠받드는 게 바로 처음의 성녀. 성황청을 향한 티르칸쟈카의 분노는 소급적용되기에, 처음의 성녀는 티르칸쟈카의 숙적일 수밖에 없다. 복수하지 못하는 게 애석할 정도로.
“…숙적의 숙적이라. 분명, 그리 불렀겠다. 흐음.”
생각이 길어지려는 차, 골렘이 티르칸쟈카의 느긋한 상념을 끊었다.
[티르칸쟈카. 귀하는 본관의 요구에 응한다고 하였습니다만. 준비는 아직입니까?]
“재촉은. 이래서 수명 짧은 이들이란….”
골렘을 향해 작게 핀잔을 준 티르칸쟈카는 손으로 어둠을 잡았다.
성황청은 빛을 다룬다. 그와 평생을 싸워온 티르칸쟈카는 빛으로부터 몸을 숨기는 법을 배웠다. 어둠으로 몸을 뒤덮으면 성녀조차도 그녀를 ‘보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성황청에 대적해왔던 시조가 얻은 권능이다.
그리고 성황청과의 오랜 싸움을 거치며 티르칸쟈카는 어둠을 이용한 다른 재주를 익혔다.
“…기다리거라. 해가 뜨고 있어서,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듯하구나….”
사각형으로 뻗은 도로 곳곳으로 어둠이 내달린다. 이너서클 사령부는 너무 넓고 내부도 밝은 편이라 어둠이 충분하진 않다.
그래도 목소리를 전하는 정도라면 차고 넘친다. 티르칸쟈카는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되었다. 목소리를 내거라. 어둠이 너의 목소리를 담고 곳곳에 퍼뜨릴 터이니.”
골렘은 곧장 목소리를 냈다. 스피커를 타고 나온 목소리가 어둠을 타고 흘렀다.
[이너서클 사령부에 존재하는 모든 인원에게, 통신병 에이비 대위가 모든 통신병을 대표해 전파합니다.]
곳곳에서 소란이 일었지만 그다지 크진 않았다. 통신병을 이용한 공지는 지금껏 자주 일어났던 일이라, 군인들은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익숙한 듯 귀를 기울였다.
몇몇 군인은 음원이 어둠 그 자체인 것을 알고 경악했지만, 대세에 큰 영향은 없었다.
[현시점, 군국 총사령부는 군국에 공격을 가한 일련의 무리와 회담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 회담에는 군국 공공안전부장, 지크흐룬드 대장님께서 참관할 예정입니다. 사령부에 주둔 중인 병력은 전투를 멈추고 전후복구에 집중하십시오. 이상, 통신병 에이비의 전파였습니다.]
골렘의 명령은 짧고 간략했다. 이야기를 끝마치고, 어둠에서 손을 뗀 티르칸쟈카는 골렘을 흘겨보며 중얼거렸다.
“말본새가 이전보다 건방져졌구나.”
[…? 불명. 의미를 알기 어렵습니다.]
“더는 규정이니 원칙 같은 것을 운운하지 않잖느냐. 무저갱에 있었을 때는 기댈 곳이 필요한 듯했는데. 이제는 그 티가 나지 않는구나.”
골렘도 잠깐 상념에 잠겼다. 티르칸쟈카는 골렘과 달리 서두르지 않았다. 느긋하게 골렘의 반응을 기다리며 걸어갔다.
[일부… 긍정.]
어렵사리 나온 목소리에는 골렘답지 않게 꽤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티르칸쟈카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일렀다.
“좋다. 이제 방향을 알려주거라.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 것이냐?”
[합동본부입니다. 인도하겠으니, 따라주십시오.]
골렘의 인도를 따라, 흡혈귀의 그림자가 발자국처럼 길게 늘어졌다.